웹진기사

웹진기사 미디어 비평

[미디어 비평] 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2021): 성덕임의 ‘거절’과 조선 의빈성씨의 ‘거절’은 달랐다_김미성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BoardLang.text_date 2022.06.06 BoardLang.text_hits 24,169
웹진 '역사랑' 2022년 6월(통권 30호)

[미디어 비평] 

 

성덕임의 ‘거절’과 조선 의빈성씨의 ‘거절’은 달랐다


- MBC 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The Red Sleeve, 2021)>


 

김미성(중세2분과)


 

1. ‘궁녀의 주체적인 의지’를 그린 드라마?

[caption id="attachment_9607" align="aligncenter" width="1000"]그림 1. 출처 : MBC 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 공식 홈페이지[/caption]

“전하 정녕 신첩을 아끼셨습니까? 그럼 부디 다음 생에서는 신첩을 보시더라도 모르는 척 옷깃만 스치고 지나가 주시옵소서.”


올해 1월 최고 시청률 17.4%를 찍고 인기리에 종영한 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의 마지막 회에 나오는 대사이다. 여주인공 성덕임이 죽음을 앞두고 남주인공 정조 이산에게 남긴 말이다. 역사 연구자로서의 굴레에서 벗어나 그저 로맨스드라마 자체의 세계관 속에 빠져서 두 주인공의 사랑에 감정이입을 해서 볼 때, 이 대사는 가장 잔인한 대사로 느껴졌다. 며칠 동안 곁에서 간호하고 국사를 돌보다가도 덕임이 깨어났다는 소식에 다급히 달려온 왕 앞에서 자신의 동무 궁녀들만 찾는 덕임의 모습도 야속할 수밖에 없었다.

왕 혼자만의 짝사랑이었다면 모를까 덕임 역시도 왕을 사랑하였으면서도, 그렇게 자신만을 평생 사랑하였다고 고백하는 연인에게 이생에서도 다음 생에서도 분명한 ‘거절’을 반복하는 것이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물론 오늘날의 부부들에게도 ‘다음 생에서도 지금의 배우자와 다시 결혼할 건가요?’라고 묻는다면 많이들 농담인 듯 진담인 듯 ‘아니요’라거나 답을 피하고 웃어넘기기 십상이지만, 드라마 속 이 둘의 애틋한 관계는 그런 예능적 분위기도 아니었다.

드라마의 서사에서 성덕임이 그렇게 끊임없이 왕의 사랑을 거절하는 이유는 ‘궁녀로서의 주체적인 삶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드라마 속 성덕임은 왕의 후궁이 되기보다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 수 있는(?)’ 궁녀로서 동무들과 함께 하길 원했다. 드라마 속에는 후궁이 되려는 야심을 품은 궁녀들, 자신의 목숨보다 사랑을 더 우선시한 궁녀도 나오지만, 성덕임은 후궁의 자리보다도 사랑하는 연인보다도 궁녀의 삶을 더 가치 있다고 여기는 캐릭터로 나온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과연 조선시기 후궁의 삶보다 궁녀의 삶이 더 ‘주체적’이었을까? 과연 궁녀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 수 있었던 것일까? 연인의 임종에 슬퍼하며 “내가 잘못했다”를 되뇌던 드라마 속 정조도 비슷한 질문을 던진다.

“네가 여전히 궁녀였다면, 후궁이 되라 강요하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까?”


그 답을 생각해보기 이전에 왜 이 드라마에서는 성덕임을 ‘거절의 아이콘’으로 그려냈을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이 드라마가 높은 인기를 끌고 ‘궁녀의 삶’을 조명했다는 참신한 관점을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궁녀의 당찬 ‘거절’과 언행 덕분이었으니, 그러한 모습을 실제 역사 사료 속 주인공에게서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2. 사실과 허구의 혼재

정조가 의빈의 삶을 기리며 직접 쓴 어제의빈묘표지명(御製宜嬪墓表誌銘)에도 의빈 성씨가 자신이 내린 ‘승은’을 두 차례 거절한 것으로 나온다. 조선에서 배우자를 위해 묘표와 묘지명을 짓는 일은 사가에서도 왕실에서도 매우 드문 일이었고 특히 왕이 손수 나서서 그것도 이렇게 장문의 글을 쓰는 일은 더더욱 희귀한 일이었으므로, 이것은 의빈에 대한 정조의 각별한 사랑을 보여주는 자료로 꼽힌다. 또 그 특별한 사랑의 대상이 감히 왕을 두 번이나 ‘거절’하였던 이력이 있다니, 그 사실만으로 특이하다고 할 것이며 그 이야기가 소설과 드라마의 소재가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해 보인다.

[caption id="attachment_9608" align="aligncenter" width="346"]그림 2. 어제의빈묘표지명(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표지. 출처 : 디지털 장서각(http://jsg.aks.ac.kr/)[/caption]

하지만 정조가 직접 기록한 의빈 성씨의 ‘거절’은 드라마의 그것과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승은을 처음 내렸을 때 내전(內殿, 훗날의 효의왕후)이 아직 귀한 아이를 낳아 기르지 못했다고 하며 눈물을 흘리고 울면서 사양하고 감히 명을 따를 수 없다며 죽음을 맹세했다. 나는 그 마음을 느끼고 다시 다그치지 않았다. 15년 뒤에 널리 빈을 뽑으며 내가 다시 명하였는데 빈이 또다시 한사코 사양하였다. 그 사속(私屬)을 벌한 연후에야 이내 명을 따랐다.”


여기서 ‘거절’의 이유는 효의왕후(당시 세손빈)에 대한 충심이었다. 정실이 아들을 낳지 못한 상황에서 후궁이 될 수 없다는 뜻이었다. 15년 후에도 효의왕후는 자식을 얻지 못하였고 성씨는 또다시 같은 이유로 정조의 명을 거부하였다. 물론 겉으로 내놓은 핑계가 그것이었을 뿐 성씨에게 다른 속내가 있었을 지도 모른다. 사도세자의 생모였던 영빈 이씨를 비롯하여 당시 비극적인 삶을 살았던 후궁의 사례가 워낙 많기도 했으므로, 후궁이 되는 것을 두려워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적어도 정조가 받아들이고 있는 거절 사유는 ‘충심’이었다.

정조는 성씨가 의빈이 된 후의 품행들을 이야기 할 때에도 효의왕후에 대한 충성스러운 태도를 줄곧 칭찬하고 있다. 왕의 첫 아들을 낳아 빈이 되고 세자의 어머니가 된 이후에도 오히려 더 절제하고 두려워하며 효의왕후를 섬기고 잠자리[侍寢]도 번번이 사양하였다고 한다. 친아들 문효세자도 철저히 왕후의 아들로 키우며 극진히 존중하였고 자신은 천한 일을 몸소 맡았으며, 세자가 죽었을 때에도 임신 중이라는 이유로 또 나라의 후사 걱정에 슬픈 기색도 감추며 절제했다고 한다. 이러한 정조의 칭찬은 의빈에게만 그치지 않고 의빈과 세자를 진실된 마음으로 대했던 효의왕후에게도 향했다. 즉 정조가 사랑했던 의빈은 모습은 효의왕후와 쌍방 간에 조화롭게 어울리며 자신의 직분에 맞게 끊임없이 절제하는 모습이었다. 그것은 정조가 의빈에게 직접 ‘요구’했던 모습이기도 했다.

정조의 글을 보면 ‘내가 얼마나 이 사람을 사랑하였는지’보다는 ‘이 사람이 얼마나 훌륭한 품행을 보였는지’를 알리고 싶어 했다는 인상이 든다. 묘지명이라는 글의 속성 때문일 수도 있고, 개인적으로 감성이 메말라 행간에 숨겨진 감정들을 충분히 인지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정조가 묘사한 의빈 성씨의 모습은 ‘충성스럽고 총명하면서도 겸손하고 검소한’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후궁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모습은 드라마 속 성덕임의 성격과 확연히 달랐다. 드라마 속 성덕임은 장난끼 많고 왕 앞에서도 거침없이 자기주장을 펼치며 정조의 목숨도 여러 번 구할 만큼 적극적이고 활동적인 대신 요리 등과 같은 일에는 서툴렀다. 반면 정조가 묘사한 성씨는 항상 몸가짐을 조심하고 자기주장을 억눌렀으며 자신에게 엄격하고 길쌈과 요리도 잘 하는 사람이었다.

드라마와 역사 속 두 인물의 공통된 특징은 똑똑하고 글씨를 잘 쓴다는 것 쯤이다. 정조도 묘지명에서 의빈의 ‘범상함을 넘어선 글씨’를 칭찬하였으며, 드라마에서도 영조가 성덕임의 글씨를 칭찬하였다. 드라마에는 성덕임이 청연·청선군주 및 동무 궁녀들과 『곽장양문록』이라는 소설을 필사하는 장면도 나온다. 이것도 역사적 사실에서 모티브를 딴 내용이라 할 수 있다. 필사자의 이름이 적힌 『곽장양문록』 필사본이 실제로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드라마에서 성덕임의 동무로 나오는 경희, 복연, 영희라는 궁녀 이름들도 현전 필사본에 실제로 등장하는 이름을 딴 것이다.

[caption id="attachment_9609" align="aligncenter" width="346"]그림 3. 공평도시유적전시관에서 2022년 5월 3일부터 7월 10일까지 <성덕임 그리고 의빈 성씨 이야기> 전시를 진행 중이다. 『곽장양문록』의 필사본이 전시되고 있다. 출처: 공평도시유적전시관 인스타그램[/caption]

이렇듯 드라마 속에는 사실과 허구가 혼재해 있다. 이것을 탓하려는 것은 아니다. 드라마도 매 회 시작 때마다 “본 드라마는 역사적 인물을 모티브로 한 상상력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세부사항과 등장인물의 심리묘사는 픽션입니다.”라는 문구를 띄웠다.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 사실관계를 따지느니 그 세계관에 빠져서 함께 울고 웃는 게 제격이다.

하지만 문제는 몰입도이다. 이 드라마는 배우들의 연기력과 케미, 영상미, 진지함과 코믹의 적절한 배합, 섬세한 심리 묘사 등이 돋보이는 질 좋은 드라마였다. 또 ‘픽션’을 내세웠지만 실제 역사 속 인물과 사건들을 적절히 섞어 넣어 몰입도를 높였다. 대중 드라마에서 높은 몰입도는 당연히 좋은 요건이다. 역사 연구자의 입장에서도 학계와 대중의 소통과 전달력을 생각하면 역사콘텐츠의 인기는 고마운 일일 수 있다. 막연히 책만으로는 쉽게 떠올릴 수 없는 과거의 모습을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니까 말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렇게 ‘몰입도 높은 픽션’의 부작용을 오히려 걱정하게 된다. 어쩔 수 없이 끼어들어가는 ‘허구’가 사실성과 몰입도에 묻혀 대중들에게 사실인 듯 전달될까 걱정하는 것이다. 드라마를 같이 본 우리 집 어린이들에게는 이미 정조와 의빈성씨의 이미지가 드라마 배역의 모습으로 각인되어 있다. 마치 앞 세대 어린이들이 고려를 세운 인물을 묻는 문제에 ‘최수종’을 쉽게 떠올렸듯 말이다. ‘디지털 문화유산 콘텐츠’와 ‘몰입형 디스플레이’의 개발이 고도화되면서 박물관과 대중의 소통이 더욱 활성화되는 이점을 체감하는 한편, 오히려 지나친 ‘포토리얼리즘’을 경계하고 ‘불확실성’이라는 역사학의 기본 속성을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를 고민하게 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3. ‘주체적인 여성상’은 현대의 잣대로 정해져야 할까?

다시 ‘성덕임’이라는 여성상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드라마에서 그려진 성덕임의 ‘주체적 의지’는 조선 궁녀의 것이라기보다는 현대적 시선에서 만들어진 모습에 가깝다. 자신의 꿈을 향해 나아가며 사랑이 걸림돌이 될 때에는 당당히 거절도 하고 결혼은 선택사항으로 여기는 모습, ‘여성성’으로 강요 받아왔던 ‘요리’ 같은 일은 못하더라도 다른 재능으로 인정받는 모습, 이러한 현대의 ‘주체적 여성상’이 성덕임이라는 캐릭터에 투영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정조의 묘지명 속 의빈 성씨의 모습은 달랐다. 그의 거절은 자신의 삶을 지키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주어진 내명부의 질서에 순응하기 위함이었다. 정조가 사랑했던 그녀의 품행도 당돌하기보다는 늘 스스로를 제약하는 것이었다. 현대적 시선에서 볼 때에는 ‘주체적 의지’와 거리가 먼 모습들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역사 속 의빈 성씨가 ‘주체적이지 못했다’고 단정할 수 있을까? 역사 속 인물의 모습 그대로는 ‘궁녀의 주체적 의지’를 애초부터 그려낼 수 없었던 걸까? 현대적인 잣대로 ‘주체적인 여인상’이 설정되어야만 할까?

현대의 관점에서 보면 ‘이름도 없이 성씨로만 불리는 것’은 비하의 의미로 다가온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천한 신분의 여성만 이름을 ‘함부로’ 불렀고, 높은 신분의 여성은 이름을 부르지 않음으로써 ‘존중’하였다. 당대의 맥락에서 본다면 그것은 ‘차별’일 수도 ‘존중’일 수도 있었다. ‘성가 덕임’에서 ‘의빈 성씨’가 된 우리의 주인공도 어느 쪽을 더 좋아했을지 모를 일이다.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주체적 여인상’도 미래의 어느 순간에는 더 이상 주체적이지 않은 모습으로 비칠 수 있을 것이다. 조선을 살았던 의빈 성씨도 당대의 세계관 속에서 나름의 가치 판단을 근거로 스스로 ‘거절’을 선택했던 인물로, 오늘날과는 다른 ‘주체성’의 한 모습으로, 다시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드라마는 기본적으로 현대 대중의 공감을 이끌어내는 캐릭터를 만들어 몰입시켜야 하겠지만, 이 세상에 실재하지 않는 ‘판타지’의 세계관으로도 공감을 이끌어낼 수 있듯이, 오늘날과 전혀 다른 과거의 캐릭터로도 공감과 몰입을 이끌어낼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