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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京城)을 말한다: 신문 연재물로 본 일제시기의 ‘경성’⑧] 신록의 대경성 부감기_염복규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BoardLang.text_date 2022.05.08 BoardLang.text_hits 21,765
웹진 '역사랑' 2022년 5월(통권 29호)

[경성(京城)을 말한다: 신문 연재물로 본 일제시기의 ‘경성’] 

 

신록의 대경성 부감기


<新綠의 大京城 俯瞰記>, <<동아일보>>, 1933.6.5.~26.


 

염복규(서울시립대학교)


* 지난 연재 보기


 

1933년 6월 <<동아일보>>가 12회 연재한 <신록의 대경성 부감기>라는 연재물은 경성 상공을 비행하며 둘러본 이 곳 저 곳을 스케치한 기사이다. 비슷한 류의 다른 기사와 크게 다르지는 않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하늘에서 내려다 본 경성’을 표현한 점에서 특징적이다.

1921년 안창남을 필두로 일본에서 자격을 취득한 조선인 비행사가 하나, 둘 탄생하기 시작했다. 당시 항공 분야를 관장하던 일본 육군성 항공국은 비행사 자격을 1, 2, 3등으로 구분했다. 이 중 100시간 이상 비행 연습을 해야 시험 응시 자격이 있는 1등 비행사 자격을 획득하는 것이 중요했다. 1등 비행사가 되어야 자가용이 아닌 여객용, 영업용 비행기를 조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 자격 등급에 따라 비행할 수 있는 거리가 제한되어 있어 조선인 비행사의 경우 이른바 ‘고국 방문 비행’을 하기 위해서는 1등 자격이 반드시 필요했다. 조선인 최초로 1등 비행사가 된 안창남이 동아일보사의 후원으로 고국 방문 비행을 한 것은 1922년 12월이다.

그런데 당시 항공 분야의 수준상 비행사가 되어서 할 수 있는 일의 범위는 그렇게 넓지 않았다. 비행기로 선전물을 배포하는 일을 하거나 부자들을 위한 ‘유람 비행’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가운데 비행이라는 새로운 분야에 주목한 것은 언론사였다. 언론사로서는 비행기에서 찍은 사진 등을 통해 다른 언론사에 비해 경쟁력 있는 보도사진을 확보할 수 있었으며, 또 신문의 배포망을 확장하는데도 비행기를 이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연재물은 조선에서는 거의 최초로 비행기에서 찍은 사진을 이용한 기사이다. 항공 촬영의 수준은 그렇게 높지 않다고 하나 당시인들에게 새로운 시각적 경험을 하게 해주는 것이었고, 그를 통해 동아일보라는 언론을 다시 한 번 각인시켜주는 기사였다고 할 수 있다. 먼저 각 회차의 부제와 사진의 장소를 대략 보면 다음과 같다.

여의도비행장을 출발하여 한강 위를 비행하는 모습을 묘사한 1회에서는 보이는 풍경보다 이번 비행의 배경 등을 주로 설명하고 있다.

[caption id="attachment_9586" align="aligncenter" width="362"]그림 1. 비행기에서 내려다 보이는 한강 인도교와 한강 철교 (<新綠의 大京城 俯瞰記①>, <<동아일보>>, 1933.6.5.)[/caption]

기자 李吉用, 사진반 文致暲, 조종 일등비행사 愼鏞頊
기체에 올른 비행사와 육상의 근무원 사이에 주고받은 신호는 만단의 준비를 고하고 이어서 비행사의 손은 높이 들리워 “오케-”를 알리우며 굉굉한 프로페라의 폭음과 함께 여의도의 지평선을 뜨기 시작하니 때는 여름도 성해가는 6월 초사흘날 오후 한점 35분. 40만의 생령이 삶을 부치고 있는 서울 장안의 이따를 해치려는 비행기가 폭탄, 독까스 등 온갖 독해물을 잔득 실고서 사방으로 트인 한양의 하늘을 어둔 밤의 도적 같이 습격하여 날러온다! 그 때가 낮이랴 밤이랴, 하물며 어느날이랴! 이것을 가상하고 행하려는 방공연습. 그 예행연습의 오늘(3일), 속으로는 어찌되었든 겉으론 평화하던 대경성의 장안은 극도로 긴장과 공포에 싸였으니 이 날을 앞질러 정복하려는 기자 탑승의 정찰기 삶손2A2형 “하느님은 사랑이시라”호(김동업군 고국방문의 애기, 230마력)는 조선비행학교 교장 1등 비행사 신용욱씨 조종으로 키를 북으로 西江에 향하고 날개를 200미터의 상공으로 올리키었다. (중략) 방공연습을 앞지른 정찰(이 비행기가 지금도 육군성의 정찰기로 등록되어 있다.)의 기분이언만 장안 40만 부민의 건강과 행복을 어이 먼저 빌지 않으랴. 이런줄 모르는 장안의 사람들은 예행연습의 날이라 “적기 습래!”의 공포에 싸였으리라. 이것이 이른바 비상시의 방공연습 기분! (1회)


비행에 나선 사람은 동아일보 체육부 기자 이길용(수년 후 일장기 말소 사건의 주역), 사진 기자 문치장이며, 조종은 ‘1등 비행사’ 신용욱이다. 신용욱(1901~61)은 전북 고창의 대지주 가문 출신으로 일본 오구리(小栗)비행학교, 동아비행전문학교 등을 졸업했으며 1933년에는 미국 힐라헬리콥터학교까지 마쳤다. 안창남과는 오구리비행학교 동창이다. 1929년 조선비행학교를 설립하여 비행사 양성과 항공 관련 사업을 시작했다. 1936년에는 조선비행학교를 신항공사업사(→조선항공사업사)로 개편했다. 이런 일련의 과정에서 조선총독부 및 조선군과 협력하여 다양한 친일 활동을 했다. 광복후에도 대한국민항공사(KNA)를 설립하여 항공사업을 계속했으며 제2대, 3대 국회의원(자유당)을 지냈다. 4.19 이후 부정축재 혐의로 수사를 받는 와중에 1961년 8월 회사가 경영난에 빠지자 비관 자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caption id="attachment_9587" align="aligncenter" width="403"]그림 2. 연재물의 5회 기사 옆에 며칠 후 시작되는 방공훈련의 등화관제요령을 알리는 기사가 보인다. (<<동아일보>>, 1933.6.12.)[/caption]

신용욱의 이력에서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지만 이 비행은 단지 동아일보사와 신용욱 사이의 비지니스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1933년 6월 총독부는 조선에서 처음으로 경성 부근의 대규모 방공 훈련을 실시했다. 위 기사에 따르면 비행일인 6월 3일은 훈련을 앞두고 그 예행 연습이 있는 날이었다. 그리고 기자를 태운 비행기도 그 예행 연습에 동원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위에 썼듯이 신용욱은 총독부․조선군과 여러 차원에서 협조를 하고 있었다. 1936년 11월의 방공 훈련 때는 고장난 육군기를 대신하여 신항공사업사의 비행기가 전남 광주 부근 훈련에 단독 참가하기도 했다. (<광주 중심 방공연습 愼기가 단독 참가>, <<매일신보>>, 1936.11.21.)

[caption id="attachment_9588" align="aligncenter" width="548"]그림 3. Salmson2A2 정찰기, 여류 비행사 박경원의 생애를 다룬 2005년 영화 <청연>에서 박경원이 조종하는 비행기도 이 기종이다.[/caption]

한편 신용욱이 조종한 비행기는 “정찰기 삶손2A2형”으로서 “김동업군의 고국 방문의 애기”인 “하느님은 사랑이시라”호이다. ‘Salmson2A2’는 1차 대전 당시 프랑스에서 개발한 복엽 정찰기로서 이 무렵 군용 정찰기나 민간의 경비행기로 많이 이용된 듯 하다. 김동업은 다치가와(立川)비행학교를 졸업한 초창기 비행사 중 한 사람으로 1933년 조선으로 돌아와 신용욱의 조선비행학교 교관으로 있었다. 비행기의 이름이 진짜 저러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독실한 크리스찬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김동업은 1935년경에는 조선비행학교를 떠나 조선중앙일보사 항공부 소속으로 ‘백두산 탐승 비행’에 나서기도 했다. 동아, 조선에 비해 ‘후발주자’로서 조선중앙일보가 기획한 일종의 ‘민족주의 이벤트’였다고 여겨진다.

[caption id="attachment_9589" align="aligncenter" width="540"]그림 4. 조선중앙일보사가 주관한 ‘백두산 탐승 비행’의 성공을 보도한 기사, 원 안이 비행사 김동업 (<<조선중앙일보>>, 1935.10.1.)[/caption]

다시 연재물로 돌아와보자. 기사의 부제를 보면 여의도를 출발한 비행기는 경성의 동쪽을 돌아 시내를 거쳐 서쪽으로 나아간다. 2회에서는 장충단공원 상공을 지나갔다. 여기에서 박문사의 정문으로 이축된 경희궁 興和門이 등장한다.

장충단공원의 기슭 한뿌리에는 새문안 서궐을 지키고 있던 흥화문이 허다한 풍상을 겪고서 마침내 새로 앉은 박문사의 수직이처럼 옮기어 있으니 이 또한 먼지 이는 새문안 거리를 피해서 바람 맑은 송림을 찾아온겔가. (2회)




[caption id="attachment_9590" align="aligncenter" width="567"]그림 5. 흥화문의 박문사로 이축을 알리는 기사 (<<매일신보>>, 1932.10.14.), 박문사의 정문 ‘경춘문’이 된 흥화문[/caption]

博文寺는 명칭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이토오 히로부미를 추모하는 사찰로서 대한제국기 조성한 장충단의 일부 영역에 1931년 건립되었다. 박문사를 건립하면서 그 정문으로 경희궁의 흥화문을 이축했다. 광복후 박문사를 철거한 자리에는 외국 귀빈을 접대하는 영빈관이 건립되었는데, 흥화문은 여전히 영빈관의 정문으로 사용되었다. 1973년 영빈관은 민간에 불하되어 서울신라호텔이 되었다. 흥화문은 계속 신라호텔 영빈관의 정문으로 사용되다가 1988년 경희궁 복원 사업을 시작하면서 현재의 자리로 비로소 돌아왔다. 기사에서는 흥화문이 박문사의 정문이 된 상황을 “먼지 이는 새문안 거리를 피해서 바람 맑은 송림을 찾아온” 정도로 범박하게 언급하고 넘어간다. 오늘날의 감각과 달리 그렇게 큰 일로 생각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는 느낌이 든다. 3, 4회는 본격적으로 경성 동(북)부 상공에서 바라본 풍경이다.

성벽을 끼고 도는줄 알았던 비행기는 키를 다시 동으로 왕십리, 청량리 쪽으로 궤도를 어긋난 것처럼 나른다. 하늘에 궤도가 있으랴마는 그도 그럴법. 성벽이 보이지 않으니 성벽을 찾느라고 그럼인가. 까닭은 이른바 궁민구제공사인 시구문밖 왕십리길을 보려는 때문. 곧아지는 길폭도 꽤 넓어보인다. (중략) 경성제대 예과, 농업학교, 그러고 새로 밭 가운데 실낫 같이 흐르는 청계천가의 경성상업, 거진 다 지어가는 동덕여자고보 등등- 거기다가 경마장 둘레로 멍석테만큼 보인다. 먹줄 친듯이 곧아지는 왕십리길에 곡선진 청량리길, 두 길가에 납짝납짝 게딱지 같은 집들, 그 뒤로 드문드문 보이는 공장들, 동쪽으로! 동쪽으로! 서울의 걸음은 뻗어나오기에 아직도 넓고 또 넓다. (중략) 안과 밖은 마음에 있으니 이왕이면 한도를 넓히자. 이것이 이른바 요새말로 대경성이랄가. (3회)


눈 아래 동소문, 반넘어 헐리어 우르로 구멍이 뚫어져 있고 문안으로는 모진 궤짝을 큼직큼직하게 벌려놓은듯 대학의 위관은 공중에서도 그럴듯하게 보이며 (중략) 지금의 저꼴일 동소문이었을진 차라리 없었더라면 더 넓은 곳을 찾아서 학교의 거리는 뻗어있었을걸…… 할만큼 동소문 밖은 넓기만 하다. (4회)


몇 가지 포인트가 보인다. 기사의 필자는 성곽을 끼고 돈다고 생각했지만 성곽은 이미 다 무너져 육안으로 식별이 되지 않는다. 무너진 성곽을 대신하는 것은 궁민구제공사로 부설한 왕십리 쪽으로 뻗은 도로이다. 이 도로의 연변으로는 많은 학교가 보인다. 집들도, 공장도 보인다. 부지불식 간에 경성은 동쪽으로 시가화가 전개되어 이미 그 곳은 도시가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안과 밖은 마음에 있으니 이왕이면 한도를 넓히자” 이른바 “요새말로 대경성”이다.

‘대경성 계획’, 즉 경성의 행정구역 확장 논의는 1920년대부터 여러 갈래의 방향을 보이며 전개되었다. 그러나 그 실현의 계기를 잡지 못했다. 그러던 중 1931년 총독부의 ‘궁민구제공사’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경기도는 궁민구제공사로 경성에서 외곽으로 향하는 4대 간선도로 공사(한강 인도교-영등포, 죽첨정-마포, 광희문-왕십리, 동대문-청량리)를 개시했다. 위 기사에서 묘사된 새로운 도로의 모습이 이 것이다.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듯이 경성 동부 내지는 동북부는 1920년대부터 이미 많은 ‘확장 지향적’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에 따라 영향을 받은 것은 한양도성의 동소문, 즉 혜화문이다. 혜화문은 1920년대 후반부터 부근의 여러 공사에 따라 많이 훼손되었다. 4회 기사는 “지금의 저꼴일 동소문이었을진 차라리 없었더라면”이라고 언급한다. 실제 혜화문은 1938년 경성시가지계획에 의해 돈암동 일대가 개발되고 창경원에서 돈암정을 연결하는 도로를 부설하면서 최종적으로 완전히 철거되었다. 1940년대 초에는 이 도로를 따라 전차 돈암정선도 연장되었다. 이 기사를 보면 1933년에도 수년후 있을 이런 변화는 예상되고 있었던 듯 하다.

[caption id="attachment_9591" align="aligncenter" width="540"]그림 6. 1937년 <경성시가지계획가로망도> 속의 경성 동북부, 여러 학교들이 들어서 있으며 창경원에서 돈암정까지 도로가 계획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caption]

6회 기사에 이르면 비행기는 시내로 들어선다. 북촌과 남촌의 대비가 뚜렷하게 눈에 들어온다. “까믓게 다닥다닥 땅에 붙어있”는 북촌의 집들과 “터전도 널직널직하게 자리잡은” 남촌의 문화주택, 말 그대로 “땅에 붙어 기는 집들과 하늘로 솟는 집들……”이다. 오늘날 서울 상공에서 아래를 내려다본다면 어디에서 이런 차이가 느껴지는 곳이 적지 않을 것이다.

한줄기 샛길로 토막이 끊어진 종묘의 위를 날러 비행기의 키는 장안으로 향한다. 과연 저것들이 사람 사는 집들인가 할만큼 까믓게 다닥다닥 땅에 붙어있다. 검은 기왓장을 깔아놓은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장안에서 큰촌이라고 일컫는 동관 일대의 집들. 마치도 개미집 같이 보일 뿐이요 아무런 조화라고 보잘 것이 없으며 (중략) 남산 밑으로 다시 날아든다. 예서부터는 집들이 북촌 일대보다 하늘로 솓아져간다. 명동 고개의 뾰죽집은 바로 송곳 세운 것처럼 보인다. 터전도 널직널직하게 자리잡은 남산 일대의 이른바 문화주택들은 황금정통의 길을 한도로 금을 그어 기상의 안게에서 보이도 딴판이다. 땅에 붙어 기는 집들과 하늘로 솟는 집들…… (6회)


이런 정서는 시내를 비행하는 7회에도 계속된다. 7회의 제목에는 “허울 좋은 지상낙원”이라는 언급이 나오는데, 그 지상낙원은 낙원동이다. “500년 옛도읍을 그대로 지키고 있는 듯한 인사동과 낙원동, 이름이 낙원이니 제가 지상의 파라다이스런가.”라는 자문은 그런 시대는 이미 끝났다는 웅변이다. 비행기는 북촌 일대(8회), 경복궁과 광화문통(9회), 정동에서 경성역(10회)을 돌아 서쪽으로 나아간다. 여기에서는 또 하나의 대조적 풍경이 보인다.

비행기는 서쪽으로 경성역 부근의 상공을 휙 돌아 다시 북으로 향하니 눈 아래 보이는 것이 잿빛투성이다. (중략) 애고개 길공사가 큰 개천 파듯 벌어졌고 고개 이쪽으로 슬쩍 넘으니 기운찬 레일의 토막진 언덕 위에는 울긋붉긋 제멋대로 가진 모양을 꾸민 집들이 장안 남대문 쪽을 향하고 앉았다. 이야말로 金華莊 문화주택. 또 다시 이쪽 산비탈에 대진을 치고 있는 잿빛, 생철빛투성이의 토막굴. (11회)


기사에 등장하는 금화장 주택지는 죽첨정 3정목, 현재의 충정로 3가 3번지 부근으로서 확장 이전에는 경성부 행정구역의 서쪽 끝, 연희면과 경계를 이루는 지역에 해당한다. 이 곳은 1916년 도쿠가와 가문의 후작 도쿠가와 요리사다(德川賴貞)이라는 자가 훗날의 시세 차익을 노리고 매입한 토지였는데, 1920년대 마스다(增田大吉)라는 자가 다시 매입하여 문화주택지로 개발했다. 마스다는 1907년 도한하여 나남의 군기지 건설에 관여, 군수용달업․토목청부업 등으로 치부한 전형적인 1세대 재조일본인이다.

마스다는 자신이 개발한 문화주택지를 부근 금화산, 화초를 길러파는 금화원 등의 이름을 따서 금화장 주택지라고 명명했다. 금화장 주택지는 1928, 30, 34년 세 차례 개발되었는데 매우 인기가 있었다고 한다. 산을 끼고 있어 주변 자연환경이 좋으면서도 경의선 서소문역과 아현리역, 전차 마포선의 죽첨정 2정목역에 가깝고 버스 노선도 개통되어 있는 등 교통이 편리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도심부와 일정하게 분리되면서도 연결성이 좋은 이른바 ‘이상적 교외주택지’였던 셈이다. 분양된 주택지에는 속속 회사 중역, 교수, 의사 등 (주로 일본인) 상류층의 문화주택이 지어졌다. 그 일부는 최신 스타일의 주택이라고 하여 건축 전문지에 소개되었다. 금화장 주택지는 1920년대에는 아직 드물었던 개인이 개발한 문화주택지의 사례이기도 했다.

[caption id="attachment_9592" align="aligncenter" width="542"]그림 7. 잡지 <<朝鮮と建築>>에 소개된 금화장 주택지의 문화주택들 (이경아, <<경성의 주택지>>, 집, 2019, 309쪽.)[/caption]

그런데 이 곳은 경성의 외곽 고지대이면서 시내와 교통 연결이 비교적 원활한 지역이라는 점에서 당시 토막민이라고 불린 경성 도시빈민의 주거지이기도 했다. 따라서 이 곳에 개발의 손길이 미치면서 예상할 수 있듯이 토막민 주거의 철거 문제가 발생할 수 밖에 없었다. 위 기사의 “울긋붉긋 제멋대로 가진 모양을 꾸민 집”과 “이쪽 산비탈에 대진을 치고 있는 잿빛, 생철빛투성이의 토막굴”의 대비가 이런 점을 잘 보여준다. 이는 비단 금화장 만의 문제가 아니었으며 비슷한 조건에서 어디서나 벌어질 수 있는 문제였다고 하겠다.

마지막으로 비행기는 홍제동, 독립문 부근을 돌아 다시 여의도비행장으로 돌아간다. 여의도에서 출발하여 동쪽에서 서쪽으로 대략 시계 반대 방향으로 경성 상공을 한바퀴 돈 셈이다. 여기에서 내려다 본 여러 풍경의 묘사는 물론 피상적이다. 그러나 지상에서는 볼 수 없는,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쉽게 접할 수 없는 새로운 각도의 경성 풍경을 전해준다. 그리고 그 풍경의 이면에서는 총독부 주관의 방공훈련의 개시, 그와 관련한 신용욱의 자신의 항공사업 선전, 1930년대 이래 고조되는 언론사 간의 경쟁 등의 여러 맥락이 작동하고 있었다.

 

참고문헌

길윤형, <<안창남, 서른 해의 불꽃 같은 삶>>, 서해문집, 2019.
김주야․石田潤一郞, <1920-1930년대에 개발된 金華莊주택지의 형성과 근대주택에 관한 연구>, <<서울학연구>> 32, 2008.
염복규, <일제하 여의도비행장의 조성과 항공사업의 양상>, <<서울과 역사>> 104, 2020.
이경아, <<경성의 주택지>>, 집, 2019.
정안기, <대한민국 民間航空의 개척자, 愼鏞頊의 연구>, <<한국전문경영인학회 2015 춘계정기학술대회 발표논문집>>,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