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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삼일운동 ⑥] 3월 3일 수안의 황천왕동이 홍석정, 한낮에 비로소 쉬다_정병욱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BoardLang.text_date 2020.12.18 BoardLang.text_hits 3,841
 

웹진 '역사랑' 2020년 12월(통권 12호)

[낯선 삼일운동] 


3월 3일 수안의 황천왕동이 홍석정, 한낮에 비로소 쉬다


 

정병욱(근대사분과)


 

1919년 3월 3일 정오 무렵 한병익(23세, 양조업)이 황해도 수안면 만세시위에 참여한 뒤 오후 4시경 출발, 밤새 걸어 다음 날 오전 5시쯤 곡산면에 도착, 오전 10시 그곳 시위에 참가했다. 두 곳의 직선거리는 약 27Km, 69리이지만 산길로 족히 90리는 된다. 1925년 차상찬과 박달성이 쓴 「황해도 답사기」를 보면 수안읍은 ‘산골짜기에 기어들어 가 있어, 좌우 산이 무너질까 봐 숨 한번 크게 못 쉬는’ 고을이고, 곡산(谷山)은 이름대로 ‘산이 높고 골짜기가 깊어 교통 불편한’ 고장이다. 그런데 한병익보다 앞서 그의 아비뻘 되는 홍석정(54세, 전 수안교구장)이 3월 2일 새벽 수안면을 출발하여 곡산면에 독립선언서를 전달하고 돌아와, 3월 3일 오전 6시 수안면 만세시위에 앞장섰다. 해주지방법원 서흥지청 검사는 그 시간에 90리를 왕복할 수 없다며 다른 사람이 간 건 아닌지 의심했다.

곡산군 천도교인 이경섭(44세, 농업)이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수안읍에 도착한 것은 3월 1일 오후 8시 무렵이었다. 전날 경성[서울]에서 천도교 중앙총부 월보과장 이종일에게 독립선언서 1,000매를 받아 밤에 경의선 타고 북상. <<무정>>에서 형식이 영채를 찾으러 평양 갈 때 타고 갔던 그 밤 기차다. 다음 날 새벽 3시 신막역에 내려 걷기 시작하여 오전 10시경 서흥읍에 도착, 서흥교구 간부 박동주에게 이종일의 전언과 함께 독립선언서 750매를 건네며 해주와 사리원에 배포를 부탁했다. 정오에 서흥을 출발하여 해가 지고 나서 수안읍에 도착했다. 길에서 홍순걸(55세, 전 수안교구장)을 만나 함께 이종숙(39세, 강도원)의 집으로 가 마침 교구실에서 회의하던 수안교구 간부들을 불렀다. 교구장 안봉하(65세), 전도사 김영만(57세), 금융원 나찬홍(48세), 전교사 한청일(나이 미상), 그리고 홍석정이 왔다. 이경섭은 서울 소식과 이종일의 지시를 전하며 남은 독립선언서를 반으로 나누어 수안교구에 건네고 나머지 반은 곡산교구에 전해 달라 부탁했다. 발병이 났던 것이다. 직선거리로 신막역에서 서흥읍까지 7Km, 서흥읍에서 수안읍까지 33Km다. 신막역이 아니라 서흥역에 내렸어야 했나? 독립선언서 1,000매면 적지 않은 무게다. 이종일은 서흥교구에 700매 전달을 부탁했지만 그는 50장을 더 얹었다. 황해도는 경의선을 경계로 서쪽은 대체로 완만하지만 동쪽은 가파르다. 서흥에서 박동주에게 독립선언서를 받아 서남쪽 해주에 전달했던 김명려는 자전거를 탔다. 이경섭은 동북쪽 수안까지 산길을 걸어야 했다. 수안읍에 이르렀을 땐 더 걸을 수 없었다. 수안교구실까지 가지도 못하고 교인 집에서 다리를 쉬이며 교역자들을 불렀다. 누군가 곡산읍에 다녀와야 한다. 중앙에서 보낸 문서를 아무 편에 보낼 수 없다. 책임감 있으며 곡산 쪽 신도와 안면이 있는 사람이 좋다. 무엇보다 잘 걸어야 한다.

3월 2일 새벽 3시 홍석정이 석교리 집을 나섰다. 곡산읍에 오후 늦게 도착, 읍내 연하리 원형도에게 독립선언서를 전했다. 곡산 천도교인 김인갑(29세, 농업)에 따르면, 원형도의 집에서 홍석정이 독립선언서 3매를 주고 만세를 부르며 시위하라 했다. 홍석정은 돌아가는 길에 곡산면 송하리 전교실에도 들러 만세 시위를 촉구했다. 예전부터 홍석정을 알았던 김희룡(53세, 농업)은 이렇게 진술했다. “저녁 수안의 홍석정이 독립선언서를 곡산에 가지고 왔다가 돌아가는 길에 내가 사는 마을 송항리 전교실(傳敎室)에 들렀으므로 (…) 동네 천도교도 10가구가 모두 모였다. 홍석정이 독립선언서를 일동에게 보이면서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면 독립이 되니 그렇게 하라” 했다. “자기는 수안으로 돌아가서 만세를 부를 것이라”며 “곧 떠나 버렸다.”

급해 보인다. 좀 쉬었다 가지. 우리라도 숨을 돌려 보자. 그런데...사료에 나타난 곡산교구의 모습이 좀 이상하다. 곡산면 적성리의 곡산교구실이 나오지 않는다. 홍석정도 다리가 아파 교구실까지 가지 못했던가? 아니다, 그는 이후로도 밤새 걷는다. 아니면 이런 식의 전달이 이 지역 천도교 조직의 보안 방식인가? 독립선언서를 건네받은 사람도 수안교구나 서흥교구처럼 알려진 간부가 아니다. 교구장 이정석도 보이지 않는다. 물론 그는 3월 2일 서울에서 천도교 대도주 박인호의 지시를 받았다는 사료도 있으니 아직 곡산에 도착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래도 그는 이경섭과 함께 경성에 동행했고 대도주 박인호의 시위 지침도 받았으니 곧 곡산교구에서 만세 시위가 일어난다는 것은 알았을 거다. 그러나 이후 시위에서 보이지 않는다. 교구장만이 아니다. 당시 곡산교구의 간부진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교구장부터 소사까지 전부 나오는 수안교구와 큰 차이다. 그러고 보니 홍석정은 수안교구 사람인데, 곡산교구에 독립선언서를 전달만 한 게 아니라 그곳 교인들에게 독립선언서를 나눠주며 시위를 촉구했다는 점도 조금 이상하다. 곡산교구 교역자가 할 일을 그가 하고 있다. 왜 자료에 곡산교구 간부는 보이지 않을까? 홍석정이 곡산면으로 떠난 사이, 2일 오후 3시경 수안교구실에 수안헌병분대장 노로(野呂匡) 일행이 들이닥쳐 수색했다. 독립선언서를 압수하고 교구장, 전도사, 금융원 등 13인을 연행했다. 황해도 경무부장이 ‘경성에서 지방으로 독립선언서를 보낸 형적(形跡)이 있으니 천도교 교구실을 수색하라’는 지시를 보냈기 때문이다. <<도장관보고>>를 보면 황해도에선 3월 1일 오후부터 배포된 독립선언서가 발견되었다. 도 경무부장의 지시가 곡산헌병분대에는 전달되지 않았을까? 곡산헌병분대도 비슷한 시간에 곡산교구실을 수색했을 거다. 다행히 홍석정이 오기 전. 수안교구실과 달리 압수할 선언서도 없고 따라서 간부들도 연행되지 않았다. 그러나 경계해야 한다. 그래서 곡산교구는 홍석정을 교구실에 들이지 않고 원형도의 집에서 독립선언서를 받은 것이 아닐까? 이후 그 집을 거점으로 군내 배포가 시작되었다. 그렇다면 홍석정은 수안교구실에서 벌어진 압수와 연행을 알았을까? 적어도 곡산교구의 상황을 보고 수안교구실에도 헌병대가 들이닥쳤을 것이라 짐작했을 거다. 독립선언서는 무사한가, 교구실은 별일 없을까? 그의 부인 전정화(田貞嬅)도 전교사였다. 아들 두익이도 있었을 텐데. 급할 수밖에. 다시 그를 따라가 보자.

홍석정을 길에서 만난 사람이 있다. 수안면 소촌리 김희덕(43세, 농업)은 대천면 남정리로 나무 팔러 갔다 돌아오는 도중에 그를 만났다. “독립을 꾀하는 일이니 읍내로 가라”는 그의 말을 듣고 다음 날 3일 정오 무렵 3차 시위에 참여했다. 오동면 상구리의 김하경(25세, 농업)도 3월 2일 남정리로 나무를 팔러 갔다 오는 길에 그를 만났다. “만세를 부르겠으니 수안 읍내로 나와 가세해달라”는 그의 말에 3일 3차 시위에 참여했다. 그가 이들을 언제 만났는지, 곡산읍에 가는 길인지 수안읍으로 돌아오는 길인지 모르겠다. 남정리는 당시 한성광업회사의 금광 채굴로 성황을 이뤄 읍보다 번화한 곳이었다, 나중에 수안면 만세시위 부상자들이 치료받았던 곳도 이곳 광산회사 병원이었다. 홍석정은 돌아오는 길에 직접 남정리에 들렸다. 곡산군에서 수안군 천곡면을 거쳐 오동면 상구리를 지나면 하조양리 명당모루가 나오는데 대천면과 수안면 방면으로 갈라지는 삼거리다. 그는 대천면 쪽으로 올라갔다. 대천면 남정리의 이종섭(61세, 한문교사), 김병령(42세, 농업)은 그가 시위가 있기 전날 밤 자기 마을에 와서 신도를 모아 놓고 “읍으로 나오라’ 했다 한다. 같은 리 강몽락(48, 연초상)에 따르면 그가 자기 집으로 찾아와서 ”독립만세를 부르면 조선이 독립된다” “경성뿐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도 만세를 부른다”고 했다. 아마 강몽락의 집에 남정리의 천도교인이 모였던 것 같다. 이들은 다음날 모두 3차 시위에 참여했다. 3월 2일 새벽 그가 길을 떠나기 전에 시위 날짜와 시각, 장소가 대강 정해졌던 것 같다. 3월 3일 정오 무렵, 읍내. 그는 남정리 신도에 대한 연락은 돌아오는 길에 자기가 하겠다고 했을 것이다.

홍석정은 남정리를 지나 수안면으로 내려가는 길에 대천면 사창리 교인에게도 들렸다. 같은 곳 오병선(20세, 농업)은 그가 3월 2일 저녁 자기 집에 찾아와 “조선이 독립될 것이니 내일 만세를 부르러 읍으로 오라” 해서, 다음날 오전 9시 집을 나서 정오 무렵 읍내로 들어가 3차 시위대에 합류했다. 홍석정이 저녁에 곡산읍에 있었으니 오병선 집에 간 시간은 저녁 훨씬 지나서가 아닐까. 한편 사창리 차제남(71세, 마부)에게 교구실에서 오병노를 통해 다른 통지가 왔다. 그는 “교구장 안봉하가 3월 2일 저녁에 사람을 시켜, 내일 새벽에 모이라” 통지해서 3월 3일 오전 6시경 1차 시위에 참가했다. 여기 사람들의 저녁은 참 길다. 교구장은 이미 헌병대에 잡혀가지 않았을까? 홍석정이 전했던 시위 시간과 다르다. 원로만 부른 것일 수도 있다.

젊은 오병선이 사창리에서 수안읍까지 오전에 3시간을 걸었다. 이로 볼 때 홍석정은 3월 2일과 3일 사이 밤 또는 3일 새벽에 석교리 교구실에 도착했을 거다. 그는 하루 꼬박 180리 넘게 산길을 걸으며 독립선언서를 전달하고 배포했다. 가는 곳마다 만세시위 참가를 역설했다. 위의 사람들 외에도 판결문에 홍석정의 연락을 받고 시위에 참여했다는 사람이 많다. 판결문에 나오는 1~3차 시위 참가자 58인 중 22인이 홍석정의 연락을 받고 시위에 나섰다. 개중에는 수안면 서편은 물론이고, 도소면 흥동리, 공포면 기내리 사람도 있다. 사창리에서 공포면 기내리까지 직선거리 20Km가 넘는다. 홍석정이 홍길동도 아니고……누구의 연락을 받았다는 것은 그에게서 직접 들었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통해 전달받았다는 뜻일 수도 있다. 예를 들면 곡산군의 천도교 전교사 조병하는 실제 원형도로부터 독립선언서를 받았지만 이경섭에게서 받았다고 진술했다. 홍석정이 2일 새벽 석교리를 출발하여 3일 새벽 돌아오기까지 여정에 있던 지역 외의 다른 곳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서 전해 들은 것일 가능성이 크다. 그들은 홍석정이라면 믿고 따르는, 그와 가까운 연원(淵源) 관계일지도 모른다. 다른 해석도 가능하다. 판결문에 다수를 만세 시위에 참여시킨 것으로 나오는 홍석정, 오관옥(21인), 한청일(11인)은 판결 당시 자기를 변호할 수 없다는 공통점이 있다. 시위자들은 마지막까지 그들을 보호막으로 썼으며, 판검사는 끝까지 헌병대의 행위를 합리화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어떤 측면에서 보든지 수안군 천도교계에서 홍석정이 갖는 영향력이 컸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홍석정이 돌아와 보니 수안교구실은 발칵 뒤집혔다. 독립선언서는 압수되었고 간부들은 연행되었다. 아들 홍두익(22세, 농업)도 포함되었다. 또 분주했다. 연행을 피한 이영철(36세, 수안교구실 소사)이 누구에게 달려갔을까? 이경섭이 수안에 들어와 선언서를 전할 때, 같이 있었던 사람 중에 연행되지 않은 사람은 곡산에 간 홍석정을 빼면 한청일과 홍순걸이다. 홍순걸은 전 교구장으로 홍석정보다 나이가 한 살 위다. 시위 중 부상으로 기소 중지되었기 때문에 판결문에 거의 나오지 않지만, 교구 지도부가 다 연행되었고 홍석정도 없는 사이 이 사람이 중심이 되어 대응책이 논의되었을 거다. 이후 전개 상황을 보면 3일 새벽 6시에 사전 시위를 하기로 했던 것 같다. 본격적인 만세시위를 하기 전에 헌병대에 가서 압박하며 항의를 해보자. 이 1차 시위의 특징은 참가자가 2차 시위에 비해 나이가 많고 주로 교구실 주변 사람이라는 점이다. 판결문에 나오는 1차 시위자 13인의 평균 연령은 50세로 2차 시위자 평균 41세에 비해 9세가 많다. 13인 중 7인이 석교리 거주자이고 3인도 인근 창후리, 나머지 3인은 대천면의 남정리(1인)와 사창리(2인) 거주자이다. 또 하나 특징은 전·현직 간부가 많다는 점이다. 전 교구장 김응하(63, 농업)를 비롯해서 4인이다. 참가자 중에는 홍석정의 연락을 받았다는 사람도 있다. 석교리 바로 옆인 창후리, 수안면 중심지에 거주하는 박태수(54세, 농업)는 “3월 2일 밤, 홍석정이 찾아와 내일 아침 교구실로 오라 하여, 무슨 일인가 하고 물으니 어떻든 오라 하기에” 이튿날 아침 교구실로 나갔다. 같은 창후리에 거주하는 전교사 김응도(54세, 농업)도 “3월 3일 아침, 홍석정이 와서 교구실로 나오라”기에 나갔다. 그들은 나이도 비슷하고 나눈 말로 볼 때 홍석정과 친한 사이였던 것 같다.

홍석정은 석교리 수안교구실로 돌아와서도 다시 주변에 새벽 시위 참여를 권하러 다녔다. 잠시 눈은 붙였을까. 오전 6시 1차 시위에 앞장서서 교구장, 그리고 자식이 붙잡힌 헌병대로 향했다. 대천면 사창리에 사는 최양봉(39세, 노동)은 연락을 받지 못했지만 3월 3일 새벽 수안면에 일하러 나갔다가 홍석정을 만났다. “만세를 부르며 교구실에서 나오는 홍석정 등을 보고 그에게 ‘무슨 일이냐’ 물었다. 그가 ‘조선독립을 위해 만세를 부르는 것이니 함께 가자’ 했다. ‘수안에서만 하는 것인가’ 물으니 ‘조선 각도가 모두 하는 것이다’ 해서 참가했다.” 1차 시위대가 헌병대에서 ‘공화정치는 세계 대세이다’ ‘헌병분대를 인도하라’는 구호를 외쳤다. 그랬다고 판결문에 적혀있다. 이런 구호보다 한청일이 말한 “죄 없는 교구장 등을 잡아 가뒀으니 속히 석방하라”, 이영철이 말한 “유치자를 석방하라”가 왠지 더 절실하다. 누군가 헌병분대장에게 했다는 다음 말은 1차 시위의 목적을 잘 드러내 준다. “일단 교구실로 돌아가겠지만, 이 지방에서 [천도교인이] 계속 교구실로 모여들고 있다. 이들의 수는 계속 불어나 배가 되고 수천 배, 수만 배가 되어 분대의 인도를 요구할 것이니 속히 인도함이 좋을 것이다.” 세를 과시하며 헌병대를 압박하여 요구를 관철하려는 것. 그런데 군 단위에서 헌병대를 인도받아 어떻게 하지? 속뜻은 구속자를 인도하라는 것이 아닐까? 헌병분대장은 꾀를 내어 조선이 독립되었는지 상부에 문의해보겠다며 시위대를 돌려보냈다. 시위대는 전도사 강국보(49세, 농업) 등 2인을 대표로 남겨두고 일단 교구실로 돌아갔다.

정황상 1차 시위를 일제 검경의 문서나 판결문에서 보듯이 ‘습격’ ‘내습’이라 하기는 어렵다. ‘대표’를 남겨두고 돌아가는 ‘습격’이 있을까? 그런데 헌병분대장 노로(野呂匡)을 비롯한 헌병대원들이 이를 ‘습격’으로 받아들여 공포를 느꼈을 수는 있다. 그들은 수안헌병분대에 전설처럼 내려오는 사건이 떠올랐을 거다. 이곳은 ‘마지막 의병장’ 채응언의 활동 무대였다. 그의 의병진은 1908년 수안헌병파견소를 습격했다. 1910년엔 이웃 곡산 선암헌병분견소를 기습하여 일본인 헌병 등 2인을 사살하고 무기를 빼앗아 갔다. 몰려온 천도교인들에게 무기는 없어 보인다. 조선인의 총기 소지를 금지한 ‘총포화약류취체령’(제령 제3호, 1912.8.21.)이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그래도 수가 많다. 헌병분대만으론 부족하다. 면내 일본인 상인과 사냥꾼 중에 총기 소지자를 불러 모았다. 단단히 무장한 뒤 수안교구실로 헌병대원이 가서 말했다. “1시간 이내에 집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모두 쏴버리겠다.”

교구실에선 다시 대책 회의. 어떻게 해야 하나? 이제 곧 교인들이 군내 각지에서 모여들 텐데...11시 반 경 헌병대 쪽에서 총소리가 들려왔다. 곧 오관옥과 전교사 이동욱(31세, 농업)이 뛰어왔다. 그들이 이끌고 온 시위대가 헌병대 앞에서 만세를 외치다 총격을 받아, 앞장섰던 여러 명이 사살되었다는 것이다. 이 2차 시위에 참여했다 붙잡혀 기소된 30명의 거주지를 보면 다수는 수안면(15인), 대천면(13인)이다. 2차 시위에 참여한 수안면 사람은 대부분 옛 서부면 거주자(수촌리 6명, 자의리 5명)로 1차 시위에 참여한 수안면 사람이 모두 옛 동부면 거주자였던 것과 대비된다. 대천면도 대부분 서쪽 편 사람(창곡리 4인, 시리원리 3인, 수치리 3인, 상대리, 하대리 각 1인)이었다. 이들이 서쪽에 모여서 수안면 석교리의 교구실로 가려면 용담리의 헌병분대 앞을 지난다. 이때쯤이면 시위대도 알았을 것이다. 그곳에 죄 없는 교구 간부들이 붙잡혀 있다는 것을. 만세 소리를 드높여 기세를 올린다. 그런데 헌병대는 이미 교구실에 해산을 명령했는데도 불응하고 다시 시위하러 온 것으로 판단한다. 부상자들은 이렇게 전했다. ‘만세’를 외쳤을 뿐이다. 헌병대가 해산을 명하며 총을 쐈다. 아마 공포였던 것 같다. 자의리의 김창순(26세)이 앞으로 나와 가슴을 풀어 헤치며 다시 한번 쏴보라며 항의한다. 그러자 헌병분대장이 검으로 그의 목을 쳤다. 그가 쓰러지고 총격이 시작되어 3명이 죽고 8~9명이 부상당했다. 시위대 중에는 김창순의 부친 김문상(44세, 농업)도 있었다.

[caption id="attachment_8338" align="aligncenter" width="764"]<그림> 수안면 만세시위의 참가자의 거주 지역 및 홍석정 루트(자료: 黃海道 遂安郡 1930 <<郡勢一斑>>; 사건 관련 판결문. 1차 시위자는 녹색 박스, 2차 시위자는 노란 박스, 3차 시위자는 빨간 박스로 표시했다. 박스 안의 노란색 이름은 2차 시위도 참여한 사람, 빨간색 이름은 3차 시위도 참여한 사람이다. 검은색 실선은 홍석정이 곡산에 갔다올 때 걸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길이다) [/caption]

총소리와 교인의 사망 소식을 들은 교구실에서 간부와 그때까지 모인 교인들이 다시 나섰다. 정오 무렵 3차 시위. 수안면 남쪽 대평면의 최명백(45세, 농업)은 교구장 등이 연행되었다기에 동정을 살피고자 읍에 나왔다. 교구실로 가보니 이미 아무도 없었고, 먼발치로 홍석정 등 여러 사람이 가고 있었다. 쫓아가 그에게 어디로 가느냐 물으니, ‘만세를 부르러 간다’기에 자기도 따라갔다.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홍석정의 마지막 모습이다. 3차 시위 때 헌병대 등의 총에 맞아 홍석정, 한청일, 오관옥 등이 죽었다. 홍순걸도 팔을 절단해야 될 정도로 크게 다쳤다는데, 아마 3차 시위 때였을 거다. 3월 당시 일제 검경은 2~3차 시위 사망 9명, 부상 18명으로 보고했다. 4월 말 집계에선 부상자는 같으나 사망자가 13명으로 늘었다. 김병조의 <<한국독립운동사략>> 상편에는 사망자로 나의집, 이인식이 나온다. 선교사 측 기록 「수안골 총격」에 따르면 구경하던 12살 소녀 송봉예(Song Bong Yea)도 총에 맞아 사망했으며, 13살의 한 소녀는 네 군데 총상을 입었다. 화약 냄새, 신음 소리……홍석정은 동료와 함께 누워 비로소 다리를 쉬인다.

 

이제 한병익이 걸을 차례다. 그는 집에 있다가 한낮에 집 앞을 지나가는 시위대를 따라 헌병대까지 갔다. 3차 시위. 시위대 후미에 있었는데, 총소리가 나자 엎드렸다. 곡산의 김희룡이 들은 바에 의하면, 한병익은 “총에 맞은 것처럼 쓰러져 있다가 총성이 멎은 틈”에 도망쳤다. 「수안골 총격」을 보면 “헌병들은 쓰러진 자들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기 위해서 그들 사이를 거닐면서 그들의 몸을 소총 끝이나 신발 끝으로 툭툭 쳤다.” 한병익은 다행히 그전에 도망친 것 같다. 그의 아버지 한청일만이 아니라 외할아버지 나의집도 사망했다. 그는 김희룡에게 외삼촌, 외사촌도 총살당했다고 했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그날 오후 4시경 수안의 참상을 전하기 위해 곡산으로 향한다. 나중에 서흥지청 검사가 누가 명령했냐고 묻자 그는 명령받은 일이 없다고 했다. 이것이 본인의 결정이었을까, 집안의 결정이었을까? 수안교구 차원에서 권하지 않았을까? 그는 홍석정이 걸었던 길을 다시 걸어 4일 오전 5시 곡산면 송항리 천도교인 이재경의 집에 도착했다. 그보다 약간 앞서 이경섭이 송항리에 도착했다. 그는 2일 아침 석교리를 출발했으나 발병 때문에 40리밖에 걷지 못하고 수안군 천곡면에서 하루 더 묶었다. 홍석정이 얼마나 날랬는지 알 수 있다.

검사들은 한때 한병익이 곡산에 독립선언서를 전달한 것으로 헛다리 짚었다. 또 한병익과 곡산의 시위자들에게 ‘원수를 갚아달라 했냐’고 물었다. 한병익은 누차 수안면 만세시위에서 사상자가 나왔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갔다고 했다. 김희룡은 그가 “수안에선 그런 일이 있었으니 곡산에서도 발포할지 모르니까 [만세시위를] 중지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한다. 한병익이 ‘중지’까지 말했는지 의문이지만 곡산의 천도교인이 수안면 사태를 얼마나 위중하게 받아들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곡산면 천도교인의 시위를 보면 조심한 흔적이 역력했다. 우선 교구장을 비롯해 교구 간부들이 보이지 않았다. 이경섭이 책임지기로 했던 것 같다. 시위도 일제 측을 자극하지 않았다. 서초면, 화초면 등에서 출발했지만 헌병에게 제지당했다. 읍내에 도달한 것은 송항리 전교실에서 출발한 시위대 50~70명이었다. 이들도 행정기관이나 헌병대 앞으로 가지 않았다. 장안에서 만세를 부르다 헌병대로 연행되었다. 곡산헌병분대는 시위대가 읍내 입구에 다다르자 막아서서 해산 명령을 내렸는데, 시위대가 따르지 않자 그들을 분대 구내로 유도했다. 위험한 순간이다. 「수안골 총격」을 보면 시위대를 헌병분대 구내에 가두어 놓고 총격을 벌인 형적이 있다. 헌병분대장이 대표만 남고 해산하라 했다. 한병익은 해산하지 말자고 했지만. 수안 사람인 그가 좌우할 상황이 아니다. 대표로 이경섭 등 곡산의 6인과 한병익 총 7인이 남고 시위대는 해산했다. 미즈노 나오키는 이 대목을 조선민중이 말단권력기관과 ‘대치’하는 한 양상, ‘담판’의 예로 들었다. 이만큼은 아니지만 나도 이들이 대표자로 나선 의미가 크다고 생각한다. 대표로 나서서 모든 책임을 짊어짐으로써 시위대의 목숨을 지켰고, 곡산교구의 조직을 지켰다. 한 가지 의문은, 이경섭은 왜 수안의 한병익을 돌려보내지 않고 굳이 곡산면 만세시위의 대표에 포함하였을까? 한병익은 수안의 참사를 곡산만이 아니라 세상에 알려서 수안 천도교인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싶어 했다. 수안 천도교인의 바람이다. 그 방법은 경성에서 독립선언서를 가져온 이경섭에게 있지 않을까 해서 밤새 걸어온 것이다. 곡산교구를 지키기도 벅찬 이경섭에게 뚜렷한 방안이 있을까? ‘어쨌든 같이 가보자’ 였을까? 의도하진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일부 유효했다. 이후 둘은 곡산 만세시위 사건에서 분리, ‘손병희 등 47인’에 포함되어 내란죄 혐의로 경성의 법정에 서게 된다. 경성복심법원 공판에서 한병익은 판사가 “헌병대에게 폭동을 하였는가?” 묻자 “헌병이 우리의 만세 부르는 것을 나와서 총을 놓고 칼로 찍어서 이십여 명이나 살인을 당한 것이지 우리가 폭동한 것이 아니오”라 했다. “피고인의 부친도 부상하였는가?” 묻자 “부상한 것이 아니라 총에 맞아 돌아가셨소”라 답했다. 신문에 보도되었다.

3월 3일 만세시위에 참가한 수안 천도교인 중에 부상자는 헌병대에 구금되었다가 7일에 풀려나, 대부분 남정리의 병원으로 갔다. 구금 중에 1명이 죽고 병원에서 또 1명이 죽었다. 구금 중에 물을 주지 않아 오병노는 자신의 오줌을 마셔야 했다. 또 시위에 참가한 70여 명이 수안헌병분대에서 조사를 받고 3월 중순 해주지방법원 서흥지청 검사국으로 송치되었다. 옥바라지가 필요하다. <<도장관보고>>를 보면 석교리 김상윤(전교구장)과 홍길재는 밭을 팔아 각각 600원을 마련했고, 나찬홍 집은 가구 전부를 팔았다. 대천면, 도소면 등지의 천도교인이 이번 시위로 검거된 자의 가족을 돕기 위해 모금했다. 조선헌병대사령부가 작성한 <<조선소요사건상황>>에는 황해도의 천도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천도교는 그 근거를 교주에 두고 있으므로 행동이 계통적이고 결속이 매우 견고하여 죽음으로써 이에 맞부딪치는 기개가 있다. 현재 표면상 약간 교가 쇠퇴하는 기색이 있으나, 대소 성미금 갹출 같은 것에 조금도 불평을 말하는 자가 없을뿐더러 모금이 신속히 되는 점은 칭찬할 만하다.” 그런데 1919년 하반기 수안면 만세시위 사건은 해주지방법원 서흥지청에서 경성의 고등법원으로 이관되었다. ‘내란죄’로 다루기 위해서다. 이후 긴 공판 끝에 1920년 11월 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안봉하 등 68인에게 징역 2년~금고 6개월 형이 확정되었다. 기나긴 옥바라지도 힘들었겠지만, 감옥생활도 견디기 어려워 3명이 옥사했다. 1920년 8월 4일 최석구(당 53세), 동월 10일 하운택(45세), 동월 22일 이균형(26세)이 사망했다. 홍석정의 아들 홍두익도 몸이 아파 같은 해 8월 경성지방법원 판결, 1920년 11월 경성복심법원 판결 때 궐석했다. 아들 김창순을 잃고 옥살이 중인 김문상은 아픈 홍두익을 보며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김여진과 김하경, 김응하와 김태혁은 부자지간으로 같이 투옥되었다. 홍두익, 김문상, 그리고 간혹 한병익을 보며 위안을 삼았을까. 또 바깥 식구들은 얼마나 고생이었을까.

만세 이후, 출옥 이후 수안의 천도교인은 또 다른 시련을 맞이했다. 천도교의 분열. <<조선의 유사종교>>에 나오는 1930년대 초반 황해도 포교상황을 보면 신파 1,138명(29%), 구파 1,191명(31%), 사리원파 1,461명(38%), 연합회파 103명(3%)이었다. 황해도는 신파도 구파도 아니고 오영창의 사리원파가 많았다. 당시 수안과 곡산은 특히 신파와 사리원파의 교역이 겹치는 지역이었다. 분열 이전 1909년 <<천민보록>>을 보면 수안의 천도교인은 오영창 연원이 57%로 가장 많았고, 다음이 나용환 연원(20%), 나인협 연원(15%)이었다. 삼일운동 때도 오영창 연원의 교인이 주도했다. 안봉하, 홍순걸, 홍석정, 김응하 등이 오영창계이고 김영만은 나인협계였다. 1920, 30년대 분열의 와중에 홍순걸은 연원을 나인협계로 바꿨다. 그래서 신파의 유지자 명부인 <<천도교창건록>>에 이름을 남겼다. 이 자료에 수안군 교인이 적게 나오는 것은 다른 파가 많았기 때문이리라. 홍석정이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좀 젊은 층은 이런 천도교의 분열이, 산골이 답답했을 거다. 연합회파에 가입, 만주로 가 고려혁명당원으로 활동한 사람이 적지 않다. 홍석정의 말을 듣고 수안면 만세시위에 참여했던 대천면 사창리의 오병선은 징역 1년을 선고받은 뒤 출옥 후, 1926년 연합회파에 들어가 고려혁명당에 가입했다. 하얼빈 지역 송화강 철도공사장에서 일하면서 당원으로 활동했다. 이동욱, 이영철도 비슷한 길을 걸었다.

언젠가 한번 홍석정 루트를 걸어보고 싶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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