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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언 디아스포라 역사학자 인터뷰]<일본 조선대학교 강성은 님①> 유도 선수 꿈을 버리고 조선대학교에서 역사를 공부하다_홍종욱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BoardLang.text_date 2020.06.05 BoardLang.text_hits 3,0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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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역사랑' 2020년 6월(통권 6호) [코리언 디아스포라 역사학자 인터뷰] <일본 조선대학교 강성은 님①>유도 선수 꿈을 버리고 조선대학교에서 역사를 공부하다홍종욱(근대사분과)
구술자: 강성은(康成銀, 조선대학교 조선문제연구센터 연구고문) 면담자: 홍종욱(서울대 인문학연구원), 장문석(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면담일: 2020.1.6. / 면담장소: 히토쓰바시대학 한국학연구센터 녹취: 류기현(서울대 국사학과), 이상현(히토쓰바시대학 언어사회연구과) / 정리: 홍종욱 <인생의 전환점이 된 ‘우리학교’ 입학>면담자: 오늘 여쭙고 싶은 건 주로 선생님 이제까지 연구해 오신 내용, 그리고 북한에서, 그냥 북한이라고 부르겠습니다만, 북한에서의 역사학 이런 건데요. 다만 정리된 글만 읽는 사람은 선생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런 배경을 모르면 잘 이해가 안 될 테니, 도입으로서 선생님께서 재일조선인으로서 낳고 자라신 이야기를 먼저 좀 들려 주셨으면 합니다. 제가 알기로는 오사카가 고향이신 걸로 들었는데 실례지만 생년이 어떻게 되십니까? 교토대학 미즈노(水野) 선생님과 비슷하시다고 들었습니다만. 구술자: 미즈노와 동기지요. 조선사연구회에서 1950년생은 미즈노 나오키(水野直樹) 선생, 쓰루조노 유타카(鶴園裕) 선생, 그리고 기무라 겐지(木村健二) 선생 등 많습니다. 서로 20대부터 잘 아는 사이죠. 면담자: 재미있네요. 선생님은 재일조선인 2세시겠군요. 구술자: 네, 2세입니다. 저는 1950년 4월 달에 일본 오사카시에서 출생했습니다. 부모님은 1926년 그러니까 쇼와(昭和) 원년에 제주도에서 일본에 건너왔습니다. 면담자: 오사카에 많이 계신 제주도 출신 분이셨군요. 구술자: 우리 부모님은 당시 재일동포의 전형적인 생활을 한 사람입니다. 가난하고 학교 문전에도 가보지 못했고. 일본에서 차별, 민족적인 차별 받고, 게다가 우리 아버지가 일본에 온 직후에 일본 공장에서 일하다가 기계에 걸려 오른팔을 잃었어요. 면담자: 아, 그러셨군요. 구술자: 20대로서 육체장애자가 되신 거죠. 그래도 그 후 여덟 명 아이 낳았습니다. 그런데 여덟 명 중 네 명은 어릴 적에 다 죽었고, 지금 현재 형제는 네 명인데 제가 막내입니다. 나는 일본 학교 다녔습니다. 우리 형들은 조선학교 다니다가 1948년에 조선학교 강제 폐쇄령 때문에 학교가 없어지고 그러니까, 우리 형제들도 일본 학교에 편입하지 아니 할 수 없었고. 그 형하고 한 열두 살 나이가 좀 차이가 있기 때문에, 저는 뭐 그대로 일본 학교 갔죠. 뭐랄까 제가 민족적인 자각을 한 것은 일본 학교 가서 어떤 마이너스부터 시작했어요. 그러니까 민족적인 차별에 의해서 조선 사람 전체에 대해서 부정적인 이미지를 내가 가지게 됐죠. 조선 사람으로 태어난 데에 대해서 한탄스럽게 느꼈고, 조선 사람이라는 걸 일본학교에서 숨겼죠. 면담자: 통명 그러니까 일본식 이름을 쓰셨겠네요. 구술자: 네, 그런데 조선 사람이라는 거 곧 알지요, 그래서 차별받고. 일본 학교에서 싸움 많이 했어요. 차별하기 때문에 거기에 대해서 싸움질 좀 벌어지죠. 그렇게 쭉 있다가 6학년이 되어서 아버지가 내하고 같이 나가자 해서 같이 걸어 오사카에 조호쿠(城北, 시로기타) 초급학교에 갔습니다. 거기에 내가 입학식에 갔습니다. 면담자: 조선학교인가요? 구술자: 조선 초급학교. 뭐 모르죠, 아버지 설명도 안 하고. 아마 내가 일본학교에서 차별받고 싸움만 하고 고통스럽게 생활하고 있는 걸 아신 게지요. 그래서 조호쿠 초급학교가 생겨서 2년째일 때인데, 아버지가 조선학교에 넣자고 판단해서 갔습니다. 지금도 생각나는 게, 학교 문 안에 들어가니까 ‘성은’이라고 부르고 여러 명 학생들 달려와요. 그 때까지 내 본명 잘 몰랐죠. 성은이라는 게 누구냐 하니까 내 이름이라고. 오늘부터 같이 공부하자 하니까, 내가 놀랐지요. 굉장히 따뜻한 분위기였어요. 면담자: 감동적이랄까, 조금 슬프기도 하고 그런 이야기네요. 구술자: 따뜻한 분위기였습니다. 그 후 우리학교 다니고 민족, 조선 사람을 표현하는 것을, 그 학교 교육을 통해서 조선 사람으로 태어난 것을 당연하게 느끼고 자랑으로 생각하게 됐죠. 그 때까지 아버지 어머니하고 같이 다니지 못했어요. 좀 부끄러워서 같이 걷지 못 했어요. 어머니는 가르마를 하고 조선 사람 모습 그대로니까. 헌데, 우리 학교 다닌 후는 아버지, 어머니하고 같이 걸어 다니는 게 상당히 자랑으로 되고 정말 좋았습니다. 민족적인 자각이 마이너스로부터 플러스로 된 것인데, 내 경험으로서는 민족적인 해방 자체가 인간적인 해방하고 직결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민족적인 자각이라는 걸 뭐 어떤 사람들은 민족주의를 매우 비좁은 생각이라고 하는데,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억압당하는 민족에 있어서 민족의 해방이라는 것은 인간적인 해방하고 직결된다. 그걸 초급 6학년 때부터 그 때 말로서는 못 했지만 그런 걸 생각하게 되었죠. 그러니까 어딜 다녀도 부끄럽지 않고 당당하게. 그 때 우리학교에서는 소년단이라는 조직이 있습니다. 소년단 단원들은 다 붉은 넥타이를 해요. 지금은 넥타이를 해서 다니지는 않지만 그 때는 붉은 넥타이를 해서 학교 다녔습니다. 일본 사람들은 기이한 눈으로 보지요. 그런데 그것이 우리의 자랑이었어요. 나도 붉은 넥타이 해서 학교 다니니까 그게 상당히 기뻐서 그런 게 있습니다. 지금도 자기의 원점을 생각하면 초급 6학년 우리학교 들어간 것이 나의 인생에 있어서의 가장 큰 전환입니다. 그게 없었으면 자기 인생 어떻게 돼 있었을까, 저의 경우는 그런 겁니다. 면담자: 선생님 말씀 듣다보니까, 저는 그런 전환점이 아직 안 온 것 같습니다(웃음). 붉은 넥타이를 매고 학교를 다니셨군요. 댁에서 초급학교까지 걸어 다닐 수 있는 거리였나요? 구술자: 버스 타고 다녀야지요. 조선 학교는 더 멀기 때문에 버스 타고 한 시간 정도 걸립니다. 다 그래요. 면담자: 그렇겠네요. 아무래도 동네마다 조선학교가 있긴 어렵겠죠. 거기에 중학교도 같이 있었나요? 구술자: 중학교는 중대판(中大阪), 나카오사카 초중급학교 중급부에 다녔고, 고등학교는 오사카 조선고급학교. 면담자: 유명한 오사카 조고 출신이시군요. 구술자: 그리고 조선대학교에. 면담자: 아 네. 중학교, 고등학교 다니신 건 60년대네요. 구술자: 그렇죠. 제가 입학한 게 62년이었던가? 면담자: 중학교요? 구술자: 아니 초급 6학년. 면담자: 그렇군요. 아까 붉은 넥타이 매고 다녔다고 하셨는데, 그게 다른 시민들 눈으로 볼 때 조선이라는 게 더 중요한 겁니까, 아니면 사회주의라는 게 더 중요한 겁니까? 구술자: 초급부니까 사회주의라는 걸 설명도 못 했고, 중학교 고등학교 되면 지식이 동반되니까 알게 되지요. 붉은 넥타이가 조선뿐만 아니라 새 조선이지요. 공화국은 해방 전하고 달라서 해방 후는 공화국이라는 조국이 있다. 그러니까 붉은 넥타이 자체가 공화국의 상징과 같은 느낌이 아닌가. 그러니까 공화국이 자랑스러웠습니다. 면담자: 사회주의랑 조국이 하나가 된 거네요. 그게 북한 그러니까 공화국이라는 실체가 있으니까. 구술자: 나에게도 나라가 있다는 그런 생각이, 면담자: 아니 그런데 일본 사람들이 볼 때 어땠을까 궁금해서요. 쟤는 조선 사람이다, 이렇게 봤을까, 아니면 저거는 사회주의구나, 이럴까. 어쩌면 일본 사람 머릿속에서도 사회주의와 조선이 하나로 합쳐져 있었겠네요. 구술자: 그 때는 붉은 넥타이 하고 저고리 입고 있으니까 박해를 당한다는 그런 사회적인 분위기는 없었습니다. 차별이야 있지만, 저고리 입고 있으면, 넥타이 매고 있으니까 좀 박해를 하는 건 없었습니다. 그런 것은 최근이지요. [caption id="attachment_8008" align="aligncenter" width="287"]<사진 1> 일본의 조선학교를 다룬 영화 ‘우리학교’(2006) 포스터. [/caption] <유도로 ‘공화국’ 국가대표를 꿈꾸다>면담자: 중고등학교 때는 어떤 학생이셨습니까? 공부 잘 하고 반장하고 그러셨을 거 같은데요. 구술자: 중급부, 고급부 그저 체육만 했습니다. 면담자: 체육이요? 무언가 운동을 하셨나요? 구술자: 유술 했습니다. 유도. 면담자: 유도를 북한에서는 유술이라고 그러나요? 구술자: 예. 중학교 3학년부터 유술 했습니다. 오사카 조고는 유도 강한 학교입니다. 오사카 고등학교 내에서 다섯 개 손가락에 들어갈 정도로 셌습니다. 면담자: 듣기로는 조선학교가 정식 고등학교는 아니니까 축구 같은 것도 지역 대회에는 나가도 오사카 대표로 전국대회는 못 나가고 뭐 그런 게 있는 거죠? 구술자: 예. 일체 공식시합에는 못 나갔고, 총련에서 하는 중앙체육대회, 그 때 고등학교는 아홉 개 있었기 때문에 그 내에서 겨루었죠. 그건 오사카가 연속 우승했고, 일본 고등학교하고는 연습 시합을 자주 했어요. 연습 시합에서 오사카 조고는 지지 않았어요. 나도 뭐 그저 중학교, 고등학교 유술, 유도만 했죠(웃음). 면담자: 고등학생이면 소년단 말고 청년단 같은 거는 없나요? 구술자: 조청. 그러니까 소년단은 중학교까지 있고, 고등학생 되면 재일본조선청년동맹, 약칭 조청에 가입합니다. 면담자: 그거는 전원 가입인가요? 구술자: 전원 가입입니다. 소년단은 4학년부터. 면담자: 그렇군요. 유도하고 그러시면 조청에서 무슨 무서운 임무 하시고 그런 거 아닙니까(웃음). 구술자: 그런 거 없고(웃음), 소조라고 하는데 일본 학교랑 똑같이 방과 후에 크라부(クラブ, 클럽) 활동 열심히 했습니다. 조청 사업을 열심히 한 거 아니고, 공부를 열심히 한 것도 아니고, 그저 아침부터 밤까지 유도만 했습니다. 면담자: 조선대학교를 가셨는데요, 조고 졸업하면 보통은 취직하거나 가게하거나 하는 분이 많지 않나요? 오사카 조고 동기가 몇 명이셨어요? 구술자: 학생 수가 상당히 많았죠. 오사카 조고만 하더라도 1학년에 열네 개 반이 있었어요. 면담자: 굉장히 많네요. 한 반에 서른 명? 구술자: 한 반에 한 사십 몇 명 있었죠. 면담자: 그러면 한 오륙백 명 되는 거네요. 남녀는 어떻게 됩니까? 남자가 많나요? 구술자: 남자가 절반 정도입니다. 반반 정도라고 생각합니다. 그 때는 일본 대학에 입학 자격이 없어 간단히 못 들어갔으니까, 대체로 절반은 취직을 하고, 취직이라는 게 뭐 자기 집 일을 돕는다든지, 일본 기업에 못 들어가기 때문에. 그래서 나머지 절반은 전문학교에 가거나 조선대학교 진학하는 등등이죠. 총체적으로 하면 조선대학교 진학이 한 3분지 1 아니면 4분지 1 정도. 면담자: 그래도 조대를 많이 가네요. 한 학년에서 한 백 명 정도 가는 거네요. 구술자: 그렇죠. 그 정도까지 갔죠. 면담자: 그럼 전국에 조고가 아홉 개 있다고 하셨으니까 조대 입학생은 어느 정도 되는 거죠? 구술자: 조대 입학생은 한 사백 명부터 오백 명. 면담자: 그럼 오사카 조고 출신이 많은 거군요. 구술자: 도쿄가 역시 가장 많죠. 그러니까 조대 가게 된 것은 우연한 건데, 저의 그 때 꿈이라는 게 유도를 해서, 그래서 귀국을 해서 공화국 대표로서 국제시합에 나가고 싶다는 거였습니다. 면담자: 영화 ‘박치기’에 나오는 이야기네요. 주인공이 축구로 국가대표 하겠다고 북한으로 귀국하죠. 구술자: 꿈이 있었어요. 그래서 목표가 있으니까 열심히 했는데. 그런데 고등학교 2학년 때 귀국선 길이 막혔어요. 면담자: 아, 그게 몇 년쯤이죠? 구술자: 68년부터 72년까지. 면담자: 그 때는 귀국선이 안 다녔습니까? 구술자: 네. 그러니까 내가 졸업이 69년이죠. 귀국을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할까, 일본 대학에서 몇 개 대학이 유도로서 스카우트 추천이 있었는데, 그래서 일본 대학에서 할거냐, 어떻게 할거냐 본격적으로 고민을 했죠. 면담자: 뭔가 아키야마, 추성훈의 고민을 보는 것 같습니다(웃음). 구술자: 뭔지 모르지만, 일본 대학 가는 것은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지금은 조고 졸업해서 일본 대학 간다, 일본 대학원에 진학한다, 많죠. 그때는 가지 못 했습니다. 우선 시험 자격이 없었기 때문에. 고민을 하다가 공화국 귀국을 못하기 때문에 유술 자체를 단념했죠. 그래서 전혀 공부 안 했기 때문에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해서, 조대에 가서 공부하자고 생각해서 진학한, 그저 그 정도입니다. <사상 사업이 강조된 조선대학교 학부 시절>면담자: 조선대학교에서는 역사를 전공하셨겠죠, 역사를 택한 이유가 있으신가요? 구술자: 제가 역사는 좋아했고, 역사에 관련된 책은 비교적 많이 읽고 있었어요. 중학교, 고등학교 때, 예를 들면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의 소설은 대체로 거의 읽었고. 뭡니까 《닌겐노조켄(人間の条件)》, 그런 거랄까, 김산의 《아리랑의 노래》도. 면담자: 《아리랑의 노래》는 어디서 읽으셨어요? 구술자: 우리 형이 일본 대학 리츠메이칸(立命館) 다녔는데, 그 때 유학동(유학생동맹-면담자) 사업을 했어요. 유학동 하다가 조선신보사(조선총련 계통 신문사-면담자)로 취직을 했어요. 그러니까 내용이 그런 책이 비교적 집에 많이 있었습니다. 자연히 제가 그걸 중학교, 고등학교 때 읽게 되었어요. 그러니까 공산당 선언을 아마 조고 때부터 읽었고, 《홍암》이라는 소설이 있죠, 중국의 혁명소설. 면담자: 저는 잘 모르는데, 한자로 어떻게 씁니까? 붉은 바위인가요? 구술자: 네, 붉은 바위. 그런 거 등등. 그래서 자연히 그런 사회과학, 역사 계통을 좋아하게 되고. 중학교 때, 고등학교 때 공부 안했지만, 성적은 나쁘지 않았습니다, 특히 역사 과목은. 그러니까 간다면 그 정도 밖에 없는 거 아닌가 하고 조대 역사지리학부에 진학을 했습니다. 1학년 때 이진희 선생 수업을 들었습니다. 이진희 선생 수업이 참 재밌었습니다. 재미나게 말을 잘 하십니다. 조선사 통사를 배웠죠. 면담자: 이진희 선생님이면 광개토대왕비 조작설을 주장하셔서 많이 알려진 분이죠. 구술자: 네. 그 분이 71년에 대학을 그만두셨는데, 제가 조선대학에 입학한 게 69년입니다. 박경식 선생은 68년에 그만두셨고, 그래서 수업은 받지 못했습니다. 이진희 선생은 아직 계셨기 때문에 수업이 참 재미있어서, 그래서 역사를 전공하자고 그렇게 생각했어요. 면담자: 역사지리학부면 전공이 역사냐, 지리냐 이렇게 되는 건가요? 구술자: 네. 그게 복잡한데. 전공 필요 없었어요. 뭐냐 하면 아직 교육 체제 자체가 정리가 안 된 시기이기 때문에. 게다가 67년에 이북에서 유일사상체계의 확립의 문제가 강조가 되고, 그 후 그를 위한 사상 사업이 강조가 되지요. 응당 그러면 총련에서도 관련이 되고. 제가 생각하기에는 좀 좌경적으로 사상 사업이 되었습니다. 면담자: 아, 그러니까 제도에 따라 수업을 꼬박꼬박 듣고 이런 분위기가 아니고, 어떤 사상적 내용이 강조되다 보니까 뭐 그런 식인가요? 구술자: 그렇죠. 정치학습, 정치 강습이 많았죠. 역사지리학부에서 역사과, 지리과라고 특별히 나누지는 않았어요. 졸업 논문 자체는 있었지만, 내는 사람도 있고 안 내는 사람도 있었고. 제가 공부를 잘 안했기 때문에 대학가서 공부하자고, 공화국의 문헌을 많이 읽으려고 생각했는데, 67년 이전의 문헌은 도서관에서 빌리기 힘들었습니다. 67년이면 겨우 2년 전의 문헌인데. 67년 이후 공화국에서 《력사과학》, 《경제연구》 다 중단되었죠. 공화국의 문헌을 읽지 못했어요. 그걸 읽을 수 있던 건 졸업한 후였습니다. 그러한 시대였죠. 공화국 관련되어서 총련 전반에서도 사상사업, 정치 사상교육을 중시했습니다. 사상교육을 통해서, 사상사업을 통해서 모두 단련되었고. 간단히 말하면 자기 사업에 대해서 옳게 총괄해서 거기서 결함을 찾고, 그래서 결함을 극복하기 위해서 더 투쟁을 하고. 그걸 되풀이 하는 건 사업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좌경적으로 되면 안 되죠. 일반적으로 우경을 하면 사람이 모질게 되는데, 좌경을 하면 사람이 죽어버려요. 그건 뭐 사회주의운동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측면들이지요. 소련도 그렇고, 중국도 그렇고, 베트남도 그렇고. 공화국도 예외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크게 보면 당시에 사회주의 이론이랄까, 스탈린주의의 영향을 받고 있었고, 총련에서도 그것이 관련되어서 조금 좌경적으로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면담자: 선생님 말씀을 듣고 보니까 그 시기가 어떻게 보면 가장 민감한 시기였겠네요. 북한에서 67년부터 《력사과학》 이런 게 잠깐 끊기는 데, 바로 그런 시절에 대학 생활을 보내신 거니까요. 구술자: 4년 동안 즐거웠고 많이 배웠고 친구도 생기고 그렇긴 하지만, 역시 그 때 전반적으로 사상 사업이 너무 세게 되어서, 그러니까 학습이 경시가 되고 공부하는 게 경시가 되었습니다. 정치적인 언사 하는 게 하나의 평가 기준이 되고, 그런 면에서는 교훈을 잘 잡아야 하는 시기입니다. 그걸 공표는 안했지만, 상당히 총련 전반에서 어려운 시기였다고 생각됩니다. 면담자: 중국 문화혁명이랑 관련지어서 생각하고 그러지는 않았습니까? 중국에서도 문화혁명이 막 시작되어 68년, 69년 되면 하방(下放)하고 이럴 때인데. 동시대적으로는 그런 느낌은 없었습니까? 구술자: 그 때 중국의 문화혁명은 공화국에 대해서 비방, 중상 많이 했죠. 그러니까 중국의 문화혁명에 대해서 우리는 상당히 비판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우리의 사상 교육, 사상교양사업에 문화혁명과 공통점이 있다고까지는 생각 못 했죠. 면담자: 결과적으로 보면 조금 비슷한 걸 수도 있는데, 하여튼 당시로서는 북한도 문화혁명을 좌경이라고 비판을 했죠. 구술자: 그렇죠. 지금 보면 문화혁명은 권력투쟁이었죠. 그러니까 사회주의, 스탈린주의랄까 사회주의 이론에서, 사회주의 혁명과 제도가 성립된 이후도 새로운 계급투쟁이 나선다, 내부에 적이 있다는 생각은 대체로 공통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사회주의 혁명, 계급투쟁 논리의 일환이지요. 사회주의 혁명 승리했다 해서 투쟁이 마치는 것이 아니라 계속 내부에 제국주의의 와해 책동에 순응하는 적이 있다. 억지로 내부의 적을 찾죠. 그러니까 그 때 맑스주의 이론보다도 당시의 사회주의 나라들의 일반적인 해석이 그런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국제공산주의운동 전반이 역시 조금 과격했습니다. <조선대학교를 떠나신 박경식 선생님>면담자: 박경식 선생님이나 이진희 선생님이 조선대학교를 나가신 것도 아무래도 그런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진 일이라고 생각하면 되겠습니까? 구술자: 그렇다고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총련 내적인 특성도 있죠. 면담자: 이런 얘기도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박경식 선생님의 《조선인 강제연행의 기록》, 이게 아주 고전적인 연구 성과로 남아 있지만, 막상 총련에서는 별로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고. 구술자: 나도 가슴이 아픕니다. 박경식 선생은 대학에 재직하고 계실 때 역사지리학부 학부장을 하셨어요. 자기 스스로 물러서신 것이 아니라 해직되신 겁니다. 박경식 선생은 계속 교원을 하고 싶어 하셨는데, 이제 안 나와도 좋다 이렇게 된 거죠. 박경식 선생 재직하실 때 제가 대학에 없었기 때문에 전혀 모릅니다. 그 후에 박경식 선생한테 직접 들은 이야기죠. 지금 이야기한 조선인 강제연행 그 책 자체는 그 《아타라시이 세다이(新しい世代)》라는 총련의 잡지에 연재를 해서 한 권의 책을 묶은 게지요. 상당히 가치가 있는 책이고, 뭐 일본에서 조선인 강제연행, 강제노동의 연구는 박경식 선생이 개척을 하시고 그걸 힘입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도 강제연행 그 책은 고등학교 때 읽었죠. 그래서 박경식 선생 이름은 알고 있었고, 대학에 계실 줄 알았는데, 내가 대학 가니까 안 계셨고. 그런데 그 책에 대해서는 비판이 몇 개 있었죠. 그 책 자체가 잘못이라기보다도 박경식 선생에 대한 개인적인 비판, 개인 공격이 있었던 겁니다. 뭐 연구는 잘 하지만 사상적으로는 문제가 있다, 이런 식으로 하는 게지요. 가령 내가 학생 시기에 역사지리학부 교원이 학생들 앞에서 박경식 선생, 이진희 선생에 대해서 비판을 해요. 박경식 선생이 학부장을 하고 계실 때, 대학 사업을 전혀 안 하고 바깥에서 책을 찾거나 그런 것만 했다고. 결코 그런 분이 아닌데, 일부러 그렇게 해서 적으로 만든 게지요. 박경식 선생, 이진희 선생, 또 여러 선생들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사상 사업을 합니다. 그런 사례가 있죠. 면담자: 그게 여러 가지가 겹쳐 있을 텐데, 1969년 3·1운동 50주년을 즈음해서 민족 대표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를 놓고 박경식-강덕상 논쟁이 있지 않습니까? 박경식 선생님은 그래도 민족대표를 평가해야 된다고 하시니까 어쨌든 연구의 방향도 북한 학계와는 조금 다른 거죠. 구술자: 박경식 선생은 재직하고 계실 때나 퇴직하신 후도 일관하게 자기 주장을 하신 분이라고 생각해요. 3·1운동에 관한 논문은 처음부터 민족대표에 대한 평가가 너무 과격하다고, 재직하고 계실 때부터 그렇게 생각하신 거 같습니다. 그래서 좀 더 역사주의적으로 해야겠다고 보신 거죠. 박경식 선생님 말씀은 좀 이해는 되는데, 아무리 역사주의로 본다고 하더라도 민족대표에 대한 평가는... 면담자: 그 문제로 선생님 논문 쓰신 거 있던데요. ※康成銀, 「3·1運動における「民族代表」の活動に関する一考察」, 『朝鮮学報』 130, 1989.1. (면담자) 구술자: 예. 민족대표는 너무 과대평가가 아니겠는가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공화국에서처럼 민족대표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도 너무 지나친 이야기고, 민족대표가 논 역할에 대해서 긍정적인 측면도 있고 그렇지 못한 면도 있는 게 뭐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면담자: 예. 한국 그러니까 남한에서도 민족대표를 둘러싸고 학자들 사이에서 계속 논쟁이 있는 거니까요. 구술자: 박경식 선생은 그럴 때 뭐 누구와 가까운 소리를 해야겠다라는 타입이 아니니까. 일관해서 자기 주장을, 학문적인 주장을 하셨죠. 면담자: 일반적으로 조선총련은 과격하고 일본 사회를 공격할 것 같은 이미지가 있지만, 오히려 조직의 입장은 일본 사회에 대해 내정 불간섭이랄까 평화공존이라는 측면을 강조해서 일선의 활동가나 연구자와 갈등이 있었다는 이야기도 들은 적이 있는데요, 박경식 선생님의 강제연행 연구 평가에도 그런 측면도 있을까요? 구술자: 그건 초기에 노선 전환 방침하고 관련되는 거 아닌가요? 일본공산당과의 관계 속에서 논쟁이 아닌가요? 노선 전환 방침이라는 것은 일본 내정에 간섭하면 안 된다. 그래서 공화국의 해외 공민 단체다. 그게 기본입니다. 조련이 강제 해산된 것도(1949년에 GHQ에 의해 해산된 조선인연맹-면담자) 일본 공산당과의 관계도 있고, 일본 정치에 너무 관여하는 바람에 그것이 탄압의 구실로 됐죠. 그런 교훈으로서 일본 내정에 간섭하지 말아야겠다, 물론 우리 총련 탄압 책동, 그리고 공화국에 대한 적대시 정책에 대해서는 우리 당당하게 비판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본 정부하고 적대적인 관계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건 조직 보위상 매우 중요한 거 아닌가, 그러니까 그런 면에서는 자꾸 삼가하고 있는 면이 있죠. 가령 천황제 문제에 대해서는 우리가 이렇다 저렇다 말할 수가 없어요. 일본 헌법에 대해서 이렇다 저렇다 말할 수도 없고. 그런 것은 삼가하고 있죠. 연구 레벨에서는 천황의 전쟁 범죄에 대해서 비판하거나 그런 건 당연히 해야 하지만, 조직적으로 정치적으로 그걸 전면에 내세우는 것은 안 하지요. 면담자: 지금 조선대학교에서는 박경식 선생님에 대한 평가는 어떻습니까. 구술자: 우리 총련, 재일동포들 속에서 박경식 선생이나 이진희 선생이나 그런 퇴직하신 분들을 소위 지난 시기에는 종파분자라고 그랬어요. 반역자로서. 그런데 지금도 그러한 소리를 하는 사람은 아직 있어요. 나는 그러한 거에 대해서는 인식을 고치도록 하려면 총련이 자기 견해를 바꿔야겠다는 겁니다. 그때 총련의 견해는 조금 너무했어요.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자기가 너무했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말 못하지요, 조직이니까. 그렇게 할 수 있으면 가장 좋은데. 면담자: 그런데 북한도 예전에 잘못된 분들에 대해 많이 복권을 하지 않았습니까? 구술자: 복권은 하지만 그때 자기들 잘못했다고는 안 하지요. 면담자: 박경식 선생님 같은 분은 사실 북한이랑 직접 관련은 없는 거죠. 북한에서 비판받은 건 아니잖아요. 구술자: 공화국에서 김석형 선생 이름으로서 박경식 선생 논문에 대한 비판이 있었죠. 공화국이 조선대학교 교원의 연구에 대해서 평가는 하지만 공개적으로 비판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에요. 비판은 총련의 조선문제연구소의 연구잡지 ≪조선문제연구≫(제2권 제1호, 1958년 4월)에 게재되었는데, 그건 내가 생각하기에는 아마 연구소의 책임적인 지위에 있는 사람이 공화국에 비판 글을 의뢰한 거 아닌가라고 생각합니다. 면담자: 그렇다면 정말 정치적인 사건이었네요. (계속) [caption id="attachment_8009" align="aligncenter" width="458"]<사진 2> 金錫亨, 「朴慶植 姜在彦著 「朝鮮の歴史」について」, 『朝鮮問題研究』 2-1, 1958.4.[/captio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