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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삼일운동 ③] 3월 22일 서울 봉래정 만세시위, 누가 주역인가?_정병욱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BoardLang.text_date 2020.06.05 BoardLang.text_hits 4,26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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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역사랑' 2020년 6월(통권 6호) [낯선 삼일운동] 3월 22일 서울 봉래정 만세시위, 누가 주역인가?정병욱(근대사분과) 피고 김공우(金公瑀, 18세 조선약학교 생도)는 1919년 3월 17일경 지인 경성 휘문고등보통학교 생도 정지현(鄭志鉉)에게서 ‘이번 경성에서 학생이 주동하여 조선 독립운동을 개시하였으나 힘이 미약하다. 이때 노동자 계급의 원조를 받지 않으면 당초의 목적을 달성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이 노동회보(勞動會報)란 인쇄물을 여러 곳의 노동자에게 배부하여 이들도 독립운동자가 되도록 권유해달라’는 취지의 의뢰를 받았고, 이를 지인 피고 배희두(裵熙斗, 17세 잡화상)에게 털어놓았다. 이에 두 피고는 공모하여 ‘노동자는 조선독립운동에 종사하기 바란다’는 뜻이 기재된 앞의 노동회보 11매를 3월 20일경 경성부 화천정(和泉町) 부근 노상에서 통행인에게 분배하였다. 아울러 이튿날 21일 정지현에게서 ‘오는 22일 경성부 봉래정 공터에서 노동자대회가 개최된다’는 것을 듣고 이틀에 걸쳐 경성부내 중림동 및 화천정 부근의 노동자를 모아 위 대회에 참석하여 그곳에 모인 수백의 군중과 함께 의주통(義州通)에서 아현(阿峴)으로 행진하며 시위운동을 했다(경성지방법원 1919.5.6 「판결(김공우 등 10인)」). 보통 서울의 삼일운동은 3월 초 타올랐다가 3월 하순 민중에 의해 다시 점화되었으며, 그 계기는 3월 22일 봉래정(현 봉래동, 만리동) ‘노동자대회’였다고 알려졌다. 작년에 출간된 박찬승의 『1919: 대한민국의 첫 번째 봄』에도 이 대목이 ‘노동자대회, 서울의 시위를 다시 점화하다’란 소제목으로 다뤄졌다. 저자는 재점화의 계기였던 ‘노동자대회’를 당시 휘문고보 학생 정지현, 즉 훗날 공산주의자 정백이 개최한 것으로 보았다(232~233쪽). 이는 1970년대부터 계속되어온 주장이며 그 증거는 위에 인용한 판결문이다(『독립운동사 2』, 116쪽). 그렇다면 결국 3월 하순의 ‘민중 시위’도 학생, 엘리트가 지도하고 촉발한 셈이다. 경성지방법원 판검사가 파악한 이 사건의 중심축은 ‘정지현 → 김공우·배희두 → 노동자대회’였다. 그런데 아리송한 점이 많다. 우선 정지현(1899-1950). 이 판결문 외에 어떤 기록에도 관련 내용이 없으며, 판결문에도 그는 피고인으로 나오지 않는다. 여러 연구자가 체포되었지만 곧 석방되었다고 보나, 주동자는 풀려나고 추종자만 기소되다니 이상하다. 정지현은 당시 서울 삼일운동을 이끌었던 학생단에도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그가 1920년대 사회주의 활동을 하면서부터 체포 기소된 여러 사건 자료를 보면 그의 ‘전과’는 1930년(또는 1928년) 경성지방법원에서 선고 받은 치안유지법위반 징역 2년부터 시작된다. 물론 일제의 기록에 없다고 활동이 없었다고 단정할 수 없다. 삼일운동 시기 그의 이력을 가장 자세하게 전하는 1934년 전주지방법원의 판결문에 따르면 그는 1919년 휘문고보를 졸업한 뒤 약 1년간 사직동 기독교회 서기로 근무하고 이후 언문잡지 기자가 되었다. 고보 재학 중 민족주의에 공명하였고 1924년경부터 공산주의에 경도되었다. 그의 잡지 경력은 특히 문학사에서 소중하다. 『曙光』(1919.11 창간), 『文友』(1920.5 창간)의 창간 멤버였으며 『新生活(1922.3 창간)』의 기자로 활동했다. 이에 앞서 1918년 고보 재학 중에 『피는꽃』이라는 등사판 회람잡지를 만들었고 1919년 6월에는 동창생 홍사용(洪思容)과 함께 친필 합동수필집 『靑山白雲』을 만들었다. 그런데 잠깐. 삼일운동 때 그의 부탁을 실행한 김공우는 1919년 5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을 선고 받았다. 6월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 6개월로 형량이 줄었지만 결국 9월 고등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되어 적어도 1920년 6월까지 복역했다(주1). 당시 형사소송법 상 5년 이하 징역형 ‘죄’의 공소시효는 3년이었다. 추종자는 징역형을 선고 받아 감옥살이를 하는데 주동자는 감옥 바깥에서 잡지를 만들고 글을 썼다…… [caption id="attachment_8020" align="aligncenter" width="655"]<그림 1> 정지현의 ‘전과’ 기록 (자료: 좌_경성지방법원검사국, 『刑事第一審訴訟記錄: 1931刑3465/1931刑公916, 保安法/出版法違反, 金聖男 등 4인』, 우_철원경찰서 사법경찰관 松岡薰 1934.7.20 「意見書」 경성지방법원철원지청 『刑事第一審訴訟記錄: 1934刑1516, 治安維持法違反, 金順萬 등 9인』 첫 번째 ‘전과’가 각각 1930년(좌)과 1928년(우)으로 일치하지 않는다)[/caption] 노동자와 연결도 모호하다. 정지현도 김공우도 학생이므로 노동자와 연결 고리가 필요해 보인다. 판결문을 보면 배희두가 그 역할을 했다. 나이 17세, 주소는 시위 장소와 가까운 의주통 2정목, 직업은 판결문에 잡화상,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에 조선양복상으로 나온다. 학생보다는 노동자와 접촉이 많았을 거다. 경성지방법원 판결문에 따르면 첫째, 20일경 정지현의 의뢰로 김공우는 지인 배희두와 공모하여 거리에서 사람들에게 「노동회보」를 나눠주었다. 둘째, 21일 두 사람은 정지현에게서 ‘노동자대회’ 개최 계획을 듣고 이틀에 걸쳐 노동자를 모아 22일 대회에 참석하여 시위했다. 그런데 경성복심법원 판결문을 보면 첫째의 김공우가 배희두와 공모하여 「노동회보」를 배부했다는 부분은 증거 불충분으로 인정되지 않았다. 둘째도 배희두는 정지현에게서 계획을 듣고 그 취지에 찬동한 뒤 ‘집회로 분주’하였다고만 기술되었다. 양자의 관계를 말해주는 ‘지인’이라는 표현도 사라졌다. 각자 정지현에게서 듣고 각자 활동했다. 결국 지방법원 판결문에 적시된 두 사람의 행위는 모두 김공우가 한 것이며, 배희두는 집회와 관련하여 ‘분주’했을 뿐이다. 그래서인지 배희두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8개월을 선고받았으나 경성복심법원에선 징역 1년으로 형량이 줄었다. 경성복심법원의 판결에 따르면 학생과 노동자의 연결고리도 명확하지 않다. 김공우와 노동자의 연결 고리를 찾는다면 적임자가 있었다. 김공로(金公璐), 당시 21세 재봉직공으로 주소가 ‘중림동 52번지’로 김공우와 같다. 김공우의 형. 그는 22일 봉래정 공터에서 노동자들과 함께 모여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의주통 방면으로 행진했다. 5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6개월을 선고받았다. 그런데 그는 9월말 ‘가출옥’ 됐다. 당시 형사법 상 ‘가출옥’은 형기의 1/3을 경과한 자에게 처분될 수 있다. 9월말이면 동생의 상고가 마무리된 뒤였다. 정지현이 김공우에게 주어 노동자에게 배포하게 했다는 「노동회보」를 보면 모든 의문점이 풀릴지 모르겠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노동회보」는 학생과 노동자의 연결보다는 우리가 지나쳤던 노동세계로 인도한다. 3월 22일 경찰은 죽첨정 3정목(현 충정로 3가) 철교부근에서 한글 격문 3월 20일 발행 「노동회보」 제1호를 발견했다(『사찰휘보』 제28회). 그러나 현재 실물이 남아 있지 않다. 3월 21일 발행 제2호는 1919년 5월 조선헌병대사령부·조선총독부경무총감부에서 펴낸 「소요사건의 개황」에 일본어로 번역되어 실렸다(82-83쪽). 물론 이 「노동회보」가 정지현 김공우 등이 배포한 「노동회보」인지 같은 계통인지 확증할 수 없지만, 현재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동명의 인쇄물이다. 다시 한국어로 번역해보면 다음과 같다. 노동회보 제2호 조선건국 4252년 3월 21일 △ 군산노동회(群山勞働會)의 행동 지난번 우리 노동회 ○○호 군산 지부에서는 장렬한 시위운동을 하였는데 당시 모 동포가 휴대한 기(旗)의 글자가 작고 서툴렀기 때문에 일본인 발행 ≪군산일보≫가 이를 웃음거리로 비웃은 적이 있다. ○○호는 그 경박함에 분개하여 더욱더 장쾌한 활동을 일으킬 수 있다고 한다. (군산 일기자) △ 여학생의 애통한 죽음[생략] △ 북경 영자신문의 기재[생략] △ 반(反) 독립파의 행동 총독부의 명령을 받고 어느 일부 패거리는 이번 독립운동에 반동하려 했으나 그들도 역시 4천 년 이래의 신성한 혈족으로 우리 동포라 이에 응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아직도 스스로 그 잘못을 뉘우치지 못하는 자 있어 날인을 청구하며 돌아다니는 자가 있다고 한다. 우리 신성한 형제자매는 결코 그런 수단에 동조해서는 안 될 것이다. △ 우리 노동회 형제의 동맹파업설 우리 노동 형제는 곤란한 생활 돌보지 않고 일제히 동맹파업을 한다고 한다. 관리측(官吏側)에서도 이와 같은 기획이 있을 것이라 관측한다. ◎ 우리 노동회 형제의 ○○○해야 할 사항. 형제여, 우리는 정의와 인도에 따라 우리의 자유와 독립을 찾는 것이므로 단연코 어떠한 일에도 난폭한 행동은 일체 해선 안 된다. 특히 이 점 잊지 말지어다. 내용으로 보건대 「노동회보」는 지역 지부까지 있는 ‘노동회’라는 조직에서 펴내는 일종의 삼일운동 소식지였다. 「노동회보」 작성에 정지현이 얼마나 관여했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노동회보」의 주어는 학생이 아니었다. 또 경성복심법원 판결문에서 말하듯이 ‘노동자계급에서도 차제에 조선독립운동에 힘써” 달라는 취지의 내용이 담겨있는 것이라 보기도 힘들다. 노동자들은 이미 힘쓰고 있었으며 참여 형제에게 주의 사항을 전하는 상황이었다. 물론 현존하지 않는 제1호에 정지현의 독립운동 권유가 실렸을 수도 있다. 그런데 그런 독립운동 권유라면 이미 3월 초에 노동계 내부에서 노동자 스스로 논의하였다. 경기도 경무부 작성 3월 7일자 『사찰휘보』 제11회를 보면 이미 “근일 노동사회를 권유하여, 금일 독립운동에 대하여 학생계만 이와 같이 하는 것은 옳지 않다, 외국에서는 노동사회가 유력하므로 우리 노동사회도 학생과 협력함이 옳다”며 연초회사 직공이 노동사회를 순회하며 권유하고 있고, 또 전기회사의 차장 운전수에 대하여 자주 운동한 형적이 있다 했다. 3월 9일자 『사찰휘보』 제13회에도 3월 8일 이래 동아연초회사직공 등에 갑자기 소요의 바람이 불어 “학생 등이 운동하는데 평연히 방관할 수 없으니 동맹파업하든 어떤 방법으로든 학생단에 호응하자고 협의하였다.” “용산철도공장에서 (…) 직공 중에 인쇄공장은 소수이나 이미 일어섰다, 방관은 참을 수 없다고 협의 중”이라는 정보를 적었다. 물론 사찰 정보라 모두 실제 일어난 것으로 보기 어렵겠지만 이런 노동계의 논의 결과로 3월 8일 밤 용산 총독관방 인쇄공의 만세시위, 3월 8일부터 10일까지 경성전기회사의 차장 운전수 동맹파업이 일어났다. 이미 3월 초에 노동계는 ‘독립운동’에 종사하고 있었다. 이제 3월 22일 ‘노동자대회’의 실상에 접근해보자. 우선 진압했던 일본 군경의 보고. 경기도 경무부, 1919.3.22 「사찰휘보査察彙報」 제26회(1919년 京高秘제3410호) 본일 오전 10시 봉래정 방면에서 약 3백명의 군중이 구한국기를 선두에 세우고 죽첨정으로 향하는 것을 고양군청내 수비병, 본정本町과 종로 두 경찰서 출동 순사, 그리고 기마순사의 위중한 경계로 인하여 일부는 독립문 방면으로 도주, 사방으로 흩어지고 일부는 공덕리 방면으로 향하였다. 경성분대는 기마하사 이하 6명, 용산분대는 기마하사 이하 20명이 전방면에 출동하여 검거한 인원은 본정서 13명, 종로서 4명이다. 군중의 종류는 전차 차장, 직공 및 보통 노동자 혼합으로서 별도의 근거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 봉래정의 밥집에 모여 소수가 선동하고 다른 자는 그에 부화附和한 것 같다. 공덕리 방면으로 향한 일단도 오전 11시 20분경 봉래정 방면으로 향하다 해산하였다. 동 지방 게시장에 격문 2,3매 첨부된 것을 발견한 외에 평온하다. 조선총독부 경무총감부 고등경찰과 1919.3.22 「독립운동에 관한 건」 제23보 22일 오전 9시반경 노동자 3,4백명에 군중이 부화하여 그 수 약 700명이 부내府內 봉래정에서 신의주통으로 진출하므로 바로 해산을 명하였다. 본건은 아침 식사를 위해 노동자가 봉래정의 밥집에 모여있는 것을 선동한 것으로서 미리 기획된 것이 있지 않은 것 같다(주2). 조선군사령부, 1919.3.22 「소요사건에 관한 속보続報」제46호 京城에서 군중 약 800명(그중 2,300명은 노동자)이 南大門 부근에 집합하여 ‘勞働者大會’, ‘韓國獨立萬歲’라 적힌 깃발을 휴대하고 행동하였지만, 경비에 임한 보병이 경관과 협력하여 해산시켰다. 경기도 경무부, 1919.3.23 「사찰휘보」 제27회(1919년 京高秘제3483호) 3월 22일 오전 10시 경성부 봉래정 철도건널목지점에서 4,5명이 종이 한국기를 교차하여 이를 앞세우고 독립만세를 고창함에 부근에서 모여드는 자가 갑자기 3,40명이 되었다. 세를 얻어 그곳에서 의주통 방면으로 진행할 때는 약 3백명이 군집하였다. 그 때 본정 종로 양 경찰서원 및 고양군수비병, 아울러 기마순사 경계로 인하여 일부는 독립문 방면으로 향하여 사산(四散)하고 나머지는 죽첨정에서 공덕리방면으로 향하였으나 용산 경성 양분대의 경계로 인하여 다시 봉래정 방면으로 향하여 사산하였다. 본정 종로 양서에서 중한 자 17명을 체포 취조 중이며 군집의 종류는 전차 차장 직공 및 보통 노동자의 혼합으로 구성되었다. 조선총독부 경찰은 시위자를 전차 차장, 직공, 보통 노동자로 보았으며, ‘별도의 근거’가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았다. 특별한 배후가 있어 보이지 않았다는 소리다. 학생 배후설을 주장하는 검판사와 다르다. 물론 경찰의 보고는 시위를 대수롭지 않게 보는 투이다. 사전 기획도 부정하고 있다. 그러나 ‘구한국기’와 ‘노동자대회’라는 깃발, 밥집이나 철도건널목과 같은 회집 장소로 볼 때 노동자 간의 사전 모의나 준비, 요령이 있었던 것 같다. [caption id="attachment_8021" align="aligncenter" width="567"]<그림 2> 봉래정 만세시위의 주요 행진로와 ‘피고인’ 주거지 (자료: 경기도 경무부, 1919.3.23 「사찰휘보」 제27회(1919년 京高秘제3483호); 大阪十字屋 編, 朝鮮總督府土地調査局 校閱 1915 「京城市街全圖」; 경성지방법원 1919.5.6 「判決(金公瑀 등 10인)」. 주거지는 1936년 「(지번구획입)대경성정밀도」에 의거하면서 박현의 글(2019) 227쪽 그림 7을 참조했다. ① 김공우, 김공로 ② 배희두 ③ 신형균 ④ 엄창근 ⑤ 박효석 ⑥ 염수완 ⑦ 신화순 ⑧ 설규성)[/caption] 다음으로 독립운동 측과 동조자의 기록을 보자. 1919년 3월 24일 발행 「독립신문」 제13호가 같은 날 고양군 숭인면 청량리에서 발견되었는데, 3월 22일의 시위 모습을 전한다. 또 당시 정동에 거주했던 선교사 노블(Mattie Wilcox Noble)의 일지에도 시위 모습이 나온다. [caption id="attachment_8022" align="aligncenter" width="804"]<도표 1> 「독립신문」제13호와 『노블 일지』의 3월 22일자가 전하는 봉래정 만세 시위 모습 (자료: 국사편찬위원회, ‘삼일운동 데이터베이스’http://db.history.go.kr/samil의 ‘격문 선언서’;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3 『(자료총서 제17집)The journals of Mattie Wilcox Noble 1892-1934』 한국기독교사연구소. ‘[ ]’는 필자 주.)[/caption] 조선총독부 경찰의 보고와 달리 당당하고 큰 규모의 시위였음을 알 수 있다. 노블의 일지는 노동자가 그들의 계급적 요구와 민족의 독립을 어떻게 연결지었는지 잘 보여준다. 이 시위를 학생이 계획한 것이 아니라면 누가 주도했던가? 이는 「독립신문」 제13호에 나와 있듯이 ‘노동회’이며 앞서 본 「노동회보」의 발행 주체이기도 하다. 이와 관련해서 깃발에 주목해보면 조선군사령부가 깃발에 쓰인 것을 ‘노동자대회’로 보았던 반면 독립운동 측은 ‘노동대회’로 보도했다. 혹시 ‘노동대회’가 조직명이 아닐까. 깃발에는 집회명보다는 조직명이 어울린다. 삼일운동 이후 조선총독부가 ‘문화정치’를 표방하며 집회·결사에 대한 단속을 완화하자 각종 결사 단체가 족출했는데, 그중 하나가 1920년 2월 발기되어 5월 2일 창립된 ‘노동대회勞働大會’로 같은 해 4월 창립된 ‘조선노동공제회’와 함께 당시 양대 노동단체였다(주3). 창립된 ‘노동대회’의 활동 중 부산정거장 노동자, 서울 지게꾼 등의 권익 옹호가 눈에 띈다(주4). 김경일에 의하면 ‘노동회’ 또는 ‘노동대회’라는 명칭의 조직은 주로 운송이나 운반에 종사하는 일용노동 중심의 비공장노동자들에 의해 조직되었으며, 일거리를 중개하고 임금의 일정액을 받아 조직 운영비에 충당하는 노무공급기구적 성격이 강하였다(『일제하 노동운동사』, 261-305쪽). 창립되기 이전에도 ‘노동대회’가 조직명으로 쓰였을 가능성이 있다. 평양의 ‘노동대회’는 1917년 설립되었다(주5). 이런 조직은 한때 ‘개량’이니 ‘어용’이니 하며 경시됐지만 그 역사는 오래됐다. 개항 이래 부두노동의 수요가 증가하면서 각 항구에 조직되었던 도중(都中)도 그 뿌리의 하나이다. 노동대회가 1920년 창립 이후 일찍 전국 주요 지역에 지부를 둔 것으로 볼 때(주6) 기성 조직이 ‘문화정치’를 계기로 등록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노동회보」에 나오는 발행 주체 ‘노동회’, 「독립신문」에서 언급된 시위 주체 ‘노동회’와 깃발에 쓰인 ‘노동대회’, 시위 장소가 공장이나 사업장이 아니라 봉래정, 당시 남대문역이 위치하여 주로 운반노동자가 모이는 곳이었다는 점이 모두 연결된다. 마부 박미선이 말을 잃고 낙심하여 막걸리를 들이키던 곳이 봉래정 주막이었다(『대지를 보라』, 140-142쪽). 1919년 3월 22일 봉래정의 소위 ‘노동자대회’는 운수 일용노동자와 그 단체인 노동회가 중심이 되어 일으킨 ‘만세시위’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노동회보」에서 다른 단체 일처럼 전한 ‘동맹파업’설도 문맥이 요해된다. ‘우리’ 운수 일용노동자와 다르지만 같은 노동자 ‘형제’인 공장·직장노동자의 파업설을 전한 것으로 보인다. [caption id="attachment_8023" align="aligncenter" width="638"]<그림 3> 봉래정 만세시위의 시작지점(추정) (자료: 상단 및 중간_조선총독부내무국경성토목출장소 1930 『京城市區改正事業: 回顧20年』; 하단_필자 촬영(2020.5.11.) 상단의 좌측은 1919년 남대문 쪽에서 중림동 약현성당을 바로 보며 찍은 사진이다. 앞의 철로가 당시 남대문정거장에서 서대문역(종착역)으로 가는 철로이다. 사진 중간에 전선주가 세워져 있고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사선으로 난 길이 옛 의주로이다. 옛 의주로와 철도선을 사진 왼편(바깥)으로 이어보면 만나는 지점이 철도건널목이자 봉래정 1정목(현 세종대로5길)과 이어지는 교차점이다. 이곳이 봉래정 만세시위 시작지점으로 추정된다. 판결문의 ‘봉래정 공터’도 이 부근일 것이다. 상단 좌측은 1922년 개수된 모습으로 1930년 촬영 사진이다. 약현성당 쪽으로 봉래교(지금의 염천교 자리)가 놓였다. 중간 좌측은 의주로 개수 전(1919년 촬영), 우측은 개수 후 모습(1930년 촬영)이다. 좌측의 중앙 낮은 길이 옛 의주로이다. 우측이 새 의주로이고 멀리 봉래교가 보인다. 두 사진을 찍은 지점이 ‘교차점’ 부근이다. 하단은 필자가 현 염천교 위에서 서울역 방면을 향하여 찍은 것으로, 빨간 화살표 지점이 1919년 당시 철도건널목이 있었던 지점, 교차점, 봉래정 만세시위가 시작되었던 지점으로 추정된다)[/caption] 일본 군경은 ‘엄중한 경계’로 시위대가 해산되었다 했지만, 실상은 ‘폭력 진압’이었다. 노블 일지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경찰과 헌병들이 총검으로 [시위대를] 베고, 체포했다. 우리 집 요리사가 돌아와서 그의 친구도 칼에 찔려 경찰서로 끌려갔다고 얘기했다. 헌병들이 경사가 급한 제방으로 사람들을 밀어 떨어뜨리는 것을 몇몇 외국인이 목격하였다. 해럴드[Harold, 노블의 아들]가 살펴보려고 내려갔지만 이미 일이 끝났고, 그가 본 것은 피를 흘리며 경찰서로 끌려가거나 의식을 잃은 채 인력거에 실려 가는 사람들이었다.”(290쪽) [caption id="attachment_8024" align="aligncenter" width="862"]<도표 2> 봉래정 만세시위로 기소된 사람들 (자료: 경성지방법원 1919.5.6 「判決(金公瑀 등 10인)」; 경성복심법원형사부 1919.6.23 「1919刑控 判決(金公瑀 등 4인)」;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일제감시대상카드http://db.history.go.kr/item/level.do?itemId=ia. 형량은 경성지방법원 판결이며 ‘*’만 경성복심법원 판결이다. 하단 3인은 인물카드가 없다. 지방법원 해당 판결문의 피기소자는 총 10인이나 이중 임춘식은 3월 26일 서계동 시위에만 참가했다) [/caption] 경찰은 당일 17명을 검거했다. 이 시위로 경성지방법원에 기소된 피고인은 총 9인이지만 전부 현장 검거인지는 모르겠다. 기소 내용을 보면 박효석은 26일 중림동 만세시위에도 참여했다. 피고인 9인의 직업은 노동 2인(노동, 馬車夫), 직공 2인(靴修繕工, 裁縫職), 상인 4인 (잡화상, 곡물상, 미곡상, 과자상), 학생 1인이었다. 상인의 비중이 높다. 과자상은 자본이 많이 들지 않아 엿장수가 그러하듯이 노동하다 일이 없으면 임시로 하는 직군으로 ‘노동’과 그 처지가 비슷했다. “길가에서”(박효석), “길에서 군중을 만나”(신화순), “자신의 가게 앞에서”(염수완) “의주통 방면으로 행진할 때 그 집단에 참가하여”(신형균)와 같이 시위대가 행진하는 중에 합류한 자가 있는 반면, 엄창근 설규성 배희두 김공로 김공우 5인은 ‘봉래정 공터’ 즉 만세시위 시작지점에서 참여했다. 사례가 많지 않아 확정하기 어렵지만, 시위가 시작될 때는 노동자가 많았다(5인 중 3인). 노동회의 노동자가 중심이 되어 시작된 뒤 점차 시민이 합세했던 만세시위라 할 수 있다. 피고인 중에 중심인물을 꼽자면 선두에서 기를 들고 선 노동자 엄창근이다. 시위에서 깃발은 아무나 맡지 않는다. 그는 항소하지 않았다. 엄창근은 조선의 독립을 쉽게 하려고 기를 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행진했다고 밝혔다. 그들이 바란 독립은 어떤 세상일까? 아마 노블의 일지에 나오듯이 동일한 임금과 권리를 누리는 평등한 세상일 것이다. 또 그것은 일본인과 평등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듯하다. 이 시위에 참여한 곡물상 신형균은 프랑스영사관 앞에서 군중의 사기를 고무하기 위해 ‘조선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거는 것은 당연하다’고 연설했다. 그는 이 혐의를 부인하며 상고하였는데, 상고취지의 대강은 이러했다. ‘자신은 상민으로 전 한국시대 양반의 압박 아래서 고통을 맛본 자이다. 합병으로 반상의 계급 구분이 사라졌는데 왜 반정(反正) 행위를 하겠는가.’(주7) 연설에도 상고취지에도 일정한 진실이 담겨있을 것이다. 민족 차별도 계급 차별도 싫다. 이러한 민중의 높아진 평등 의식, 차별에 대한 감수성 위에 ‘대한민국임시헌장(1919.4.11)’ 제3조도 나오고 1920년대 사회주의의 바람도 불었다. 후기: 3월 22일 봉래정 만세시위의 중심에 정지현 김공우와 같은 학생을 세우는 판검사의 판단에는 노동자를 폄하하고 그 자발성을 부정하는 시각이 깔려있다. 약간 다른 맥락이지만 차금봉(제4차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중심설도 있다(김인덕, 176-180쪽). 그 주요 근거는 해방 이후 1949년에 나온 『사회과학대사전』의 ‘차금봉’ 항목이다(672쪽). 더러 월북 배우 박제행의 회고가 인용되기도 한다. 그런데 『사회과학대사전』에 그 날짜를 3월 27일이라 한 점, 차금봉이 용산 기관차화부 견습공, 기관수로 일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 ‘노동자시위’는 3월 27일 용산 만철(滿鐵)경성관리국 직공 800명의 파업일 가능성이 높다. 사전의 필자는 3월 22일과 3월 27일 사건을 혼동하여 하나로 기술한 것 같다. 차금봉은 공장노동자 출신으로, 조선노동공제회에서 조선공산당으로 이어지는 그의 활동은 봉래정 만세시위의 ‘노동회’나 ‘노동대회’와 다른 결이다. 노동자는 스스로 나설 수 있으며 다양하다. 주1) ‘일제감시대상카드’에 김공우는 1921년 3월 3일 만기 출소한 것으로 나와 있다. 하지만 경성복심법원 판결문에 찍힌 날인을 보면 1920년 4월 28일자로 칙령 120호(1920.1.28.)에 의해 형기가 9개월로 반감되었으며, 다시 1920년 6월 22일자로 칙령 120호 5조에 기초한 특전에 의해 형의 언도 효력이 상실되었다. <참고문헌> 大阪十字屋 編, 朝鮮總督府土地調査局 校閱 1915 「京城市街全圖」 京畿道警務部 1919 『査察彙報 제5회(1919.3.2.).~제35회(1919.3.31.). * 『사찰휘보』는 1919년 3월~7월분이 현재 국사편찬위원회에 필사본으로 보관되어 있다. 내용으로 보건대 조선총독부 경무총감부 고등경찰과가 작성한 일일보고 「독립운동에 관한 건獨立運動ニ關スル件」의 기초자료 중 하나인 것 같다. 조선총독부 경무총감부 고등경찰과 1919.3.22 「독립운동에 관한 건」 제23보. 조선군사령부, 1919.3.22 「소요사건에 관한 속보続報」제46호. 1919.3.24 「독립신문」제13호(국사편찬위원회, ‘삼일운동 데이터베이스’의 ‘격문·선언서’에 수록) 朝鮮憲兵隊司令部·朝鮮總督府 警務總監部, 「騷擾事件ノ槪況」, 1919.5(일본 외무성, 『不逞團關係雜件 朝鮮人ノ部 在內地 七』에 수록 ). * 번역은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17 『독립운동사자료집 6: 3.1운동사자료집』, 독립유공자사업기금운용위원회, 921-922쪽을 참조함. 경성지방법원 1919.5.6 「判決(金公瑀 등 10인)」 경성복심법원형사부 1919.6.23 「1919刑控 判決(金公瑀 등 4인)」 고등법원형사부 1919.9.4 「1919刑上554/555 判決原本(金公瑀 등 4인)」 조선총독부내무국경성토목출장소 1930 『京城市區改正事業: 回顧20年』 경성지방법원(검사국) 『刑事第一審訴訟記錄: 1931刑3465/1931刑公916, 保安法/出版法違反, 金聖男 등 4인)』 전주지방법원형사부 1934.12.24 「1934刑公1200 判決(金聖男 등 13인)」 경성지방법원철원지청 『刑事第一審訴訟記錄: 1934刑1516, 治安維持法違反, 金順萬 등 9인)』 경성부 1936 「(지번구획입)대경성정밀도」 조선총독부 편찬 1938 『朝鮮法令輯覽』下卷, 제국지방행정학회조선본부. 일제감시대상카드(한국사데이터베이스 ) 『每日申報』 『東亞日報』 李錫台 編 1949 『社會科學大辭典』 文友印書館. 박제행 1957.3 「3·1운동 당시를 회상하면서」 『조선예술』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1971 『독립운동사 2: 3.1운동사(상)』 독립유공자사업기금운용위원회. 楊尙弦 1986 「韓末 부두노동자의 존재양태와 노동운동-木浦港을 중심으로」 『韓國史論』 14. 김경일 1992 『일제하 노동운동사』 창작과비평사.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3 『(자료총서 제17집)The journals of Mattie Wilcox Noble 1892-1934』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 번역은 매티 윌콕스 노블 지음. 강선미 이양준 옮김 2010 『노블일지 1892-1934: 미 여선교사가 목격한 한국근대사 42년간의 기록』 이마고 243쪽을 참조함. 이원규 2000 『백조(白潮)가 흐르던 시대』 새물터, 60-68쪽. 김인덕 2002 「민족해방운동가 차금봉 연구」 『일제시대 민족해방운동가 연구』 국학진흥원. 정우택 2009.12 「『문우』에서 『백조』까지-매체와 인적 네트워크를 중심으로-」 『국제어문』 47. 아카마 기후 지음, 서호철 옮김 2016 『대지를 보라:1920년대 경성 밑바닥 탐방』 아모르문디( 赤間騎風 1924 『大地を見ろ:變裝探訪記』 大陸共同出版會) 송충기 지수걸 등, 2017 『1910년대 일제의 비밀사찰기 酒幕談䕺: 공주를 주막에서 엿듣다』 공주대학교 공주학연구원. 박찬승 2019 『1919: 대한민국의 첫 번째 봄』 다산북스. 박현 2019 「도시 시위의 계보와 3·1운동」 한국역사연구회 3·1운동100주년기획위원회 엮음 『3·1운동100주년 4 공간과 사회』 휴머니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