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곽 안의 포장도로, 용강대묘 벽화
전호태(고대사 분과) 안압지, 월성로 등 경주 반월성 주변의 유적발굴에서 여러 차례 발견된 유물 가운데 하나가 전돌이다.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판단된 보상화문 전돌은 정교하고 아름다운 무늬로 내외에 널리 알려졌고 왕궁이나 사원의 건물 벽과 바닥을 장식하는 데에 주로 쓰였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이런 추정을 바탕으로 근래에 새로 지어진 일부 사원이나 전통주택에서는 건물의 안벽 등에 안압지 출토 보상화문 전돌을 모델로 만든 장식전돌 붙이기도 한다.
의문이 가는 것은 요즘 사용되는 정방형 보도블록 형태의 이런 전돌이 건물 내부를 장식하는 데에만 쓰였을까 하는 것이다. 이런 이들은 이런 전돌을 길에 깔았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으려 한다. 사람들이 이런 전돌을 깐 길을 걸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고구려에서는 성곽으로 볼 수 있는 대형 건축물 내부에 전돌과 같은 것을 깔아 놓은 길이 만들어져 있었음을 고분벽화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남포시 용강군 용강읍(南浦市 龍岡郡 龍岡邑, 옛 지명: 평안남도 용강군 지운면 진지동)에 자리 잡고 있는 용강대묘 벽화가 그것이다.
용강대묘는 진지동 서북 1.5km 지점의 안성동 부락 뒤편 구릉 위에 자리 잡은 흙무지돌방무덤으로 발견 당시에는 안성동대총(安城洞大塚), 진지동2호분(眞池洞2號墳) 등으로 불렸다. 무덤방향은 남향이며, 널길, 천장이 셋으로 나뉜 장방형 앞방, 양 옆에 벽 구멍이 있는 이음길, 널방으로 이루어진 두방무덤이다.
천장은 셋으로 나뉘었으나 방은 동서로 긴 장방형이다. 앞방의 천장은 세 칸으로 나뉘었으며 앞방과 널방의 천장구조는 평행삼각고임이다. 무덤 안에 회를 바르고 그 위에 벽화를 그렸으며, 벽화의 주제는 생활풍속이다.
벽화는 주로 묵선(墨線)으로 대상의 윤곽을 그려낸 다음 채색하였다. 앞방과 널방 벽 모서리와 벽 상부에 기둥과 두공, 도리, 보 등을 그려 무덤 내부가 목조건물처럼 보이게 하였다. 앞방 남벽에 약수리벽화분의 성곽도와 유사한 구조의 건축물과 커다란 연봉오리를 묘사했다.
건축물의 건물과 담은 먹선을 사용하여 자로 잰 듯이 정확히 그렸다. 기와지붕 담으로 둘러싸인 이 대저택 안에 전돌이 깔린 길이 표현되었다. 널방 벽에는 사냥, 구름, 봉황, 천장고임에 연꽃무늬 그림이 남아 있다.
(그림1) 용강대묘 벽화: 전돌길 2층 전각과 문루들을 지닌 이 성곽 형태 건축물의 담과 지붕은 모두 기와로 덮였다. 한가운데 그려진 우진각 지붕의 2층 건물은 문루인 듯하며 그 좌우의 보다 낮은 2층 건물들도 문루와 유사한 형태로 표현되었다. 담과 이런 건물들 앞으로 색깔이 다른 전돌들을 두 줄로 엇갈리게 놓아 미관상으로도 좋은 느낌을 주는 길이 좌우로 곧게 뻗어 있다. 2층 건물들의 크기와 담의 길이와 대비해볼 때, 이 전돌 깔린 길도 상당한 폭을 지녔음을 짐작할 수 있다.
용강대묘 벽화에서 볼 수 있는 이 전돌 깔린 길과 유사한 표현은 고구려의 다른 고분벽화에서 비교적 자주 찾아볼 수 있다. 5세기 후반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수산리벽화분에는 널방 벽의 화면을 위아래로 나누는 경계선이 두 줄 전돌 깔린 길처럼 묘사되었다.
특히 널방 동벽 북쪽에 그려진 것은 용강대묘 벽화의 전돌길과 형태와 구성이 동일하다. 삼실총 벽화에서도 전돌 깔린 길이 찾아진다. 제1널방 동남벽의 주인공부부는 남녀시종들과 함께 나란히 두 줄 전돌길을 걷고 있다. 이 전돌길 역시 화면을 위아래로 나누는 구분선으로 쓰이고 있다.
사신이 벽화 주제인 고산리1호분 벽화에는 세줄 전돌길이 등장한다. 색이 다른 두 종류의 전돌들을 엇갈리게 배치한 널방 벽의 전돌길은 좌우에 갓길 띠도 한 줄씩 마련되어 있다. 고산리1호분 벽화의 전돌길도 화면을 위아래로 나누는 역할을 하는데, 다른 고분벽화와 달리 전돌길 아래쪽 화면에는 벽화가 그려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벽화의 전돌길은 순전히 사신을 위한 길이었던 셈이다.
고산리9호분에도 고산리1호분 벽화에서와 같은 넓은 가로띠가 표현되었는데, 전돌길로 볼 만한 뚜렷한 특징을 지니고 있지는 않다. 덕화리1호분과 덕화리2호분의 널방 벽화에도 두 줄 전돌길이 보인다. 두 무덤의 널방 북벽에는 화면 위쪽에 인물행렬, 아래쪽에 현무를 나타냈는데, 두 종류의 제재를 구분하기 위한 화면 구분선으로 이 두 줄 전돌길이 표현되었다. 역시 색이 다른 두 종류의 전돌이 엇갈리게 놓여 반듯한 길을 이루고 있다.
(그림2) 덕화리1호분 벽화: 전돌길
폭만 150m에 달했다는 당의 수도 장안의 주작대가도 비가 오면 진흙탕이 되었으므로 길 좌우에 마련해 두었던 모래를 뿌려 말과 수레의 통행이 가능하게 했다고 한다. 주위보다 높게 돋우고 단단하게 흙을 다져 만든 대로도 흙이 젖으면 통행에 지장을 주었을 뿐 아니라 길을 오가는 사람의 옷이나 말발굽, 수레바퀴를 더럽게 만들었던 것이다. 통행이 잦은 길 위에 자갈이나 모래를 덮고 도기 조각을 깐 것도 이런 까닭이다.
고분벽화 속 전돌길도 오늘날의 보도블럭이나 박석길, 포장도로의 기능을 담당하게 하려고 만들어졌을 것이다. 왕실사람들이나 귀족들이 주로 사용하기 위해 만든 길이었다면 단단하게 구워낸 무늬전돌이나 색전돌을 그 위에 까는 것도 그리 어렵지는 않았을 것이다. 용강대묘 벽화 속의 전돌길도 그런 목적과 용도로 만들어진 길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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