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남해지역에서 벌인 왕건과 견훤의 쟁패 강봉룡(목포대 역사문화학부 교수) 견훤과 서남해지역의 관계 견훤과 서남해지역의 관계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별로 없다. 다만 견훤이 889년에 ‘서남해 방수군(防戍軍)’으로 파견되었다는 기사를 근거로 하여, 서남해지역이 9세기 말부터 견훤의 지배 하에 있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실상은 이와 다를 거라 생각된다. 몇 가지 근거를 제시해 보자. 첫째, 견훤의 주요 진군로는 ‘진주→순천→광주’로 이어졌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어, 서남해지역은 그의 진군로에서 비켜나 있다는 점이다. 둘째, 견훤이 892년에 광주에 입성한 이후 곧바로 전주로 중심지를 옮겨가 백제의 건국을 선언하려 했던 애초의 야심찬 계획을 세웠으나, 이 계획이 무려 9년 간이나 지체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아마도 서남해지역에 대한 공략이 예상과는 달리 지지부진했음을 반영한다. 그리고 셋째, 견훤은 뒤늦게 900년에 이르러서야 전주로 옮겨가 백제의 건국을 선언한 그 이듬해에 대야성을 공격하고 돌아오는 길에 나주 인근의 부락을 약탈하였다는 점이다. 자신에게 끝까지 저항한 서남해지역에 대한 일종의 화풀이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런 일련의 맥락에서 볼 때, 견훤의 서남해지역에 대한 공략 의지는 매우 집요했었고, 이에 대한 서남해지역 사람들의 저항 역시 만만치 않았을 것임을 알 수 있다. 장기간에 걸친 쌍방 간의 공방은 더욱 처절한 국면으로 치달았을 것이며, 그만큼 서남해지역 사람들의 위기감은 더욱 증폭되어 갔을 것임에 틀림없다. 바로 이 틈새를 당시 궁예의 장수로 복무하고 있던 왕건이 파고들었던 것이다. 서남해지역 해양세력과 왕건과의 관계 서남해지역은 9세기에 장보고가 국제 해양무역을 주도하던 청해진체제의 중심지였을 뿐 아니라, 그 이전부터 고대 동아시아 문물교류의 중심지였다. 따라서 이 지역은 일찍부터 해양세력이 크게 성장했던 곳이다. 장보고가 암살당하고 청해진체제가 해체된 이후에도 서남해지역 일대에는 해양을 무대로 활동하는 해양세력이 위세를 떨치고 있었다. 서남해지역의 해양세력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섬 지역을 무대로 한 ‘도서 해양세력’과 해안 육지부를 무대로 한 ‘연안 해양세력’이 그것이다. 이들은 견훤의 침략 위협에 처하자 혼연일체가 되어 이에 저항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견훤의 침략이 장기화하고 그 강도도 거세어지자, 이에 대한 대응 방식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도서 해양세력’은 끝까지 비타협적 저항의 노선을 견지해 가려 했던데 반해, ‘연안 해양세력’은 점차 실리적 타협의 대상을 모색해 갔던 것이다. 전자의 중심에 압해도의 능창(能昌)이 있었다고 한다면, 후자의 중심에는 나주의 호족 오씨[오다련(吳多憐)]가 있었다. 오다련은 오랫동안 처절한 전투를 벌여왔던 견훤과는 도저히 타협할 수 없었던지, 새로운 타협의 파트너로서 왕건을 선택했다. 왕건 역시 오다련세력을 서남해지역으로 침투해 들어가기 위한 유용한 발판으로 생각하였으며, 쌍방은 왕건 자신과 오씨의 딸과의 혼인을 결행함으로써 타협의 증표로 삼았다. 반면 ‘도서 해양세력’의 우두머리격인 능창은 견훤에게 그랬듯이 왕건에게도 마지막까지 적대적 무력 대결을 포기하지 않았다. 따라서 왕건의 서남해지역으로의 침투는 ‘연안 해양세력’을 최대한 활용하면서, 견훤과 ‘도서 해양세력’을 무력으로 굴복시키는 방향에서 추진되지 않으면 안되었다. 왕건의 첫 침투 시도는 903년에 이루어졌으니, 이해 3월 그는 주사(舟師=해군)를 이끌고 광주 경계의 해안으로 상륙하여 금성군(錦城郡=오늘날의 나주)을 접수하고 10여 개의 군현을 점령하고서 군대를 주둔시키고 돌아갔다. 견훤의 집요한 공략에도 요지부동이던 나주의 세력이 멀리서 서해 연안을 따라 내려온 왕건의 단 1회의 공격에 무력하게 무너졌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고, 앞에서 살폈듯이 ‘연안 해양세력’과의 우호적 교감 속에서 이루어진 ‘평화적 점령’으로 보는 것이 온당하지 않을까 한다. 왕건과 견훤의 쟁패전 왕건의 전격적인 나주 점령은 견훤에게 엄청난 충격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그리고 이에 못지 않게 큰 타격을 받은 세력은 능창을 중심으로 한 ‘도서 해양세력’이었다. 왕건에게는 이들의 도전을 꺾는 일이야말로 피해갈 수 없는 어려운 과업으로 다가왔다. 왕건과 견훤의 첫 격돌은 909년에 이루어졌다. 왕건이 해군을 이끌고 남하하던 중 염해현(鹽海縣=오늘날의 무안군 해제면 임수리)에 상륙하여 견훤이 중국 오월(吳越)에 파견한 후백제의 사신선을 나포한 것이 그것이다. 불의의 일격을 가함으로써 후백제의 기선을 성공적으로 제압했던 것이다. 왕건이 다음 공략의 타켓으로 삼은 것은 ‘도서 해양세력’이었다. 먼저 서남해지역의 중심 도서 중의 하나인 진도군을 함락시키고, 영산강하구의 압해도 인근에 있는 작은 섬인 고이도를 위복시켰다. 이로써 왕건의 서남해지역에 대한 장악력은 더욱 강화되었으며, 그럴수록 견훤과 능창의 저항은 더욱 거세어 갔다. 912년경에 왕건이 다시 서남해 공략에 나섰을 때, 견훤은 후백제의 해군력을 총동원하여 이를 저지하려 하였다. 견훤은 직접 진두지휘하여 전함을 목포에서 덕진포에 이르는 영산강 하구에 배치함으로써 견훤이 나주세력과 연결하는 것을 차단하고자 했던 것이다. 난관에 봉착한 왕건은 바람을 이용한 화공책을 써서 견훤의 전함을 거의 전소시키고 후백제군 500여급을 목베는 완승을 거두었다. 견훤은 작은 배에 갈아타고 겨우 목숨을 건져 달아났다고 하니, 제갈공명의 저 유명한 적벽대전을 연상케 하는 해전사에 길이 남을 이 전투야말로 ‘덕진포대전’이라 불려 마땅할 듯하다. ꡔ고려사ꡕ에서는 이 해전의 의의에 대하여 “이로써 삼한 땅의 태반을 궁예가 차지하게 되었다”고 평하고 있다. 덕진포대전의 대승으로 나주세력과 합류한 왕건의 해군은 다시 돌아가는 도중에 능창의 도전에 직면하게 되는데, 여기에서 능창을 생포함으로써 예상과는 달리 싱겁게 마무리되고 만다. 파군천(破軍川)의 전설 ꡔ고려사ꡕ의 기사에 의거하여 기술한 왕건과 견훤의 쟁패전 이야기는 왕건의 일방적이고도 싱거운 승리로 일관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영산강 하구의 무안군 몽탄면에 전해오는 파군교의 전설은 이와는 사뭇 다른 뉘앙스를 포함한다. 그 전설의 내용은 대개 이러하다. ꡔ왕건이 군사를 거느리고 영산강변에 진을 쳤는데, 견훤군이 사방을 에워싸고 공격을 가해왔다. 왕건은 포위망을 뚫으려 했지만 마침 바다의 밀물이 밀려들어 강물이 범람하는지라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마침 밤이 되어 전투가 소강상태에 접어들어 왕건이 잠시 조는 사이에 백발노인이 꿈에 나타나 다음과 같이 일러주었다. “지금 강물이 빠졌으니 군사를 이끌고 강을 건너 몽탄의 청룡리에 진을 치고 매복해 있으라. 그러면 견훤군이 뒤쫓아 올 것이니 그를 치면 장군이 크게 승리하고 삼국을 통일하는데 성공할 것이다” 잠에서 깬 왕건은 그 노인의 말대로 하여 과연 대승리를 거두었다. ‘꿈의 여울’이란 의미의 몽탄(夢灘)이란 지명과 ‘군대를 격파한 천’이라는 의미의 파군천(破軍川)이라는 이름은 이로부터 연원한다.ꡕ 이 전설은 아마도 ‘덕진포대전’의 사실(史實)에 부회되어 지어진 것이 아닐까 한다. 우리는 여기에서 한 때 왕건이 견훤군에 포위되어 몰살의 위기에 쳐하기도 했다는 숨은 이야기와 함께 그 의미를 찾아낼 수 있다. 이 전설을 지은이는 아마도 서남해지역의 민중들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이전에 자신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왕건의 통일 대업도 불가능하였으리라는 점을 자부하는 한편, 왕건을 향해 그것을 잊지 말 것을 경고하기 위해서 이 전설을 만들어낸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꿈속의 백발노인이란 그들의 염원을 담보하는 ‘서남해 그리고 영산강의 신령’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