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도의 벽파진과 용장산성
-고대~고려시대 서남해지역 해상도시와 산성의 일례-
강봉룡(목포대 역사문화학부)
1. 고대~고려시대의 바닷길과 벽파진
진도는 제주도와 거제도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세 번째로 큰 섬이며, 서남해지방의 최대 섬이다. 예부터 비옥한 섬이라는 의미의 ‘옥주(沃州)’라 불렸으며, 서해와 남해를 연결해 주는 위치에 있어 항로의 요충지로 통했다.
진도를 통해 서해와 남해를 연결해주는 바닷길은 크게 두 길이 있었다. 하나는 진도와 장산도-상하태도-가사도-조도 사이의 흔히 조도해협이라 불리는 바닷길이며, 하나는 진도와 화원반도 사이의 흔히 명량해협이라 불리는 바닷길이다. 이중 전자의 바닷길에는 金甲浦(鎭), 南桃浦(鎭) 등의 포구 혹은 진이 진도의 연안부에 배치되어 있으며, 특히 남도포에는 남도석성이 축조되어 있어, 바닷길을 관방(關防)하는 기능을 담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후자의 바닷길에는 진도 연안에 녹진(綠津)과 벽파진(碧波津)이 있어, 그 대안(對岸)의 육지부에 위치한 우수영(右水營)과 삼지원(三支院)과 각각 통하는 나룻터의 기능을 담당해왔다.
이중 특히 벽파진은 오랫동안 진도에서 육지부로 통하는 관문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그 상대 항구인 삼지원 역시 교통의 요지로 중시되었다. 또한 벽파진은 고려말 삼별초세력이 웅거한 용장산성으로 통하는 관문으로서도 저명하다. 벽파진의 이러한 관문 역할은, 진도대교가 개설되기 직전까지는 의연히 유지되었던 것으로 벽파마을 주민들은 회고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바닷길이 거의 끊긴 가운데, 최근 「목포-벽파항-추자도-제주도」로 취항하는 카페리호의 경유 항구로서만 그 명맥을 겨우 잇고 있는 실정이다.
형편없이 퇴락해 버려 쓸쓸함마저 감도는 오늘날 벽파마을의 실정을 답사하면서 영고성쇠(榮枯盛衰)의 무상함을 절로 느끼는 바이다. 이 글은 이러한 감상 속에서 고대~고려시대에 잘나가던 벽파진과 용장산성의 옛 영광을 다시 한번 떠올려 보고, 오늘에 이르러 이를 계승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 보는데 소요될 만한 역사 소재를 찾아보려는 목적에서 작성한 것이다.
2. 벽파진의 역사지리적 환경
벽파진이 소재한 벽파마을은 에는 해발 60m 내외의 작은 동산(이하 ‘벽파동산’이라 칭하기로 한다)이 있다. 벽파동산은 바다를 향해 돌출되어 있는데, 이는 동북향 바다 건너편으로 해남의 삼지원(三支院)을 향하고 있다. ‘벽파동산’의 남쪽 지점에는 앞 바다를 조망하기에 적합한 바위산이 형성되어 있는데, 이를 흔히 ‘망금산’이라 부르고, 그 바위를 ‘망금바위’라 부른다. 이들은 ‘망보는 산’ 혹은 ‘망보는 바위’란 의미로 풀이될 수 있듯이, 군사적 주요 거점으로 활용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벽파마을에서 바다를 따라 남동향 4~5km 정도 떨어진 지점에는 연동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그런데 이 마을에도 해발 60m 내외의 작은 동산(이하 ‘연동동산’이라 칭하기로 한다)이 있으며, 그 산에는 바닷가를 따라 용장산성의 일부로 여겨지는 산성이 축조되어 있어, 이곳 역시 중요한 군사시설로 활용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벽파동산’과 ‘연동동산’ 사이에는 현재 벽파방조제가 축조되어 그 내부에 벽파염전이 조성되어 있고, 염전 안쪽에는 상당히 넓은 들(한개들)이 펼쳐져 있다. 그렇지만 벽파방조제가 축조되기 이전에는 벽파염전은 물론이고 한개들에도 바닷물이 채워져서 하나의 만을 이루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이하 ‘벽파만’이라 칭하기로 한다). 그렇다면 ‘벽파만’에는 고려시대까지 큰 항구(‘大津’)였던 벽파항의 선박 접안시설이 조성되어 있을 가능성이 크다. 이는 최근에 벽파방조제 안쪽에서 13~14세기로 편년되는 고려후기의 통나무배가 출토된 것에서도 확인되는 바이다.
벽파만을 안쪽에서 에워싸고 있는 산줄기의 중앙 정상부에 망바위라 부르는 큰 바위가 드러나 있는데, 이 망바위는 앞으로 벽파만을 굽어보면서 반대편의 용장마을과도 수신호로 연락을 취할 수 있는 위치에 있어, 거대한 용장산성의 각 부위를 효과적으로 소통시키는데 핵심적 기능을 수행했음직하다. 뿐만 아니라 주민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망바위 아래의 산기슭에서 최근 ‘고려장’으로 추정되는 고분시설이 여러 기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고려장’이라 함은 십중팔구 石室(돌방) 시설을 갖춘 백제 횡혈식석실분을 의미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바, 그렇다면 벽파만은 이미 백제시대부터 주요 해양거점으로 활용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겠다.
그렇다면 벽파진의 범위는 오늘날의 벽파마을에만 한정되는 것으로 볼 수는 없겠고 적어도 ‘벽파동산’과 ‘연동동산’ 사이로 만입하여 형성된 ‘벽파만’을 포괄하는 규모의 것으로 파악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벽파진은 백제시대부터 주요 항구로 활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에 이르러 더욱 중시되었을 것으로 볼 것이다.
‘벽파만’을 에워싼 산줄기(성테난골) 너머에 용장마을이 있는데, ꡔ옥주지ꡕ에서 고려시대 진도군의 읍치가 옮겨간 곳으로 지정한 용장평이 이곳이다. 용장평은 고려말 삼별초가 건설한 또 하나의 고려왕조의 왕궁시설과 거대한 용장산성의 중심 석축시설이 확인되는 곳이기도 하다.
용장마을에서 남서쪽으로 챙재를 넘어가기 직전 우측에 세등리가 있는데, 이곳에서 城址(세등리성지)가 확인된 바 있다 한다. 그리고 챙재를 넘으면 석현리와 고성리에 이르게 되는데, 고성리는 ꡔ신증동국여지승람ꡕ에서 조선 초까지 진도군(현)의 읍치가 있었다고 전하는 외이리(外耳里), 바로 그곳이다. 오늘날에도 고성리에는 오랜 읍치의 터전답게 일부나마 석축 성곽의 흔적이 잘 남아 있다.
고성리의 북쪽엔 해발 200여m의 성황산(城隍山)이 있으며, 남쪽엔 해발 480여m의 첨찰산(尖察山)이 있는데, 두 산의 정상부에 테뫼식 성곽의 흔적이 남아 있어, 외이리(고성리) 읍치의 입보산성(入保山城)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그리고 고성리의 동쪽은, 지금은 내산리의 마산마을과 황조마을을 잇는 방조제로 가로막혀 농지로 되어 있지만, 원래는 오산리를 통해서 바다로 연결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최근에 오산리의 지표면에서 4세기 전후 시기의 주거지와 옹관고분 등의 흔적들이 확인된 바 있는데, 아직 정밀 발굴조사가 진행되지 않아 확언하기는 어렵겠지만, 아마도 이들은 이곳 토착의 해상세력의 존재를 반영하는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이처럼 벽파진과 그 주위의 용장리, 세등리, 고성리 등지에 고대 이래의 역사문화의 흔적들이 비교적 풍부하게 확인되고 있는 것은, 이 일대가 고대~고려시대에 진도의 중심지였음을 여실히 반영하는 바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모든 역사문화의 흔적을 하나로 묶어내는 것으로는 용장산성만한 것이 없다.
3. 용장산성의 위상
용장산성은 총 연장길이가 12.85km에 달하고, 성 내부의 면적은 258만평으로 유례를 찾기 어려운 방대한 규모를 자랑한다. 즉 용장산성은, 토성의 흔적이 있는 성황산과 망바위가 있는 ‘성테난골’을 포함하면서 주위의 산줄기 정상부를 이어 석축과 토축을 반복하여 축조되었다. 용장리에서 두 갈레로 뻗은 용장산성의 성 줄기는 각각 바다에 맞닿고 있다. 이 중 북쪽의 성 줄기는 세등리와 외접(外接)하는 산줄기를 지나고 유교마을과 오류마을을 감싸안은 산줄기를 연결하며 축조되다가 유교마을의 앞바다에 맞닿는다. 남쪽의 성 줄기는 용장리과 벽파리를 감싸는 산줄기를 따라 축조되다가 연동마을 뒷산(‘연동동산’)에서 바다에 맞닿는다.
전라남도 진도군 내면 용장리에 있는 용장산성
이처럼 용장산성의 성 줄기는 완전히 이어진 것이 아니고 다음과 같이 크게 세 군데에서 끊겨있다. ① 북쪽 성 줄기가 바다에 맞닿은 오류마을 뒷산과 남쪽 성 줄기가 바다에 맞닿은 연동마을 뒷산 사이의 바닷가 공간이다. 이 바닷가 공간은 ‘벽파동산’에서 ‘연동동산’까지의 벽파방조제와 벽파동산에서 오류마을 뒷산까지의 오류방조제를 포함하고 있어 성곽의 끊김이 가장 긴 곳으로, 바로 이곳에 벽파진이 위치한다. ② 북쪽 성 줄기가 세등리와 오류리 사이의 둔전리 일대로 깊숙이 만입해 있는 만(이하 ‘둔전만’이라 칭함)을 건너뛰어 축조된 관계로, 축성의 연결이 끊겨 있다. ‘둔전만’은 원래 오류마을과 북쪽 건너편의 신동마을 사이로 바닷물이 깊이 만입하여 형성된 것인데, 근래에 둔전방조제를 축조하여 농지(둔전들)와 저수지(둔전저수지)로 개간된 곳이다. ③ 남쪽 성 줄기가 연동마을 직전에까지 뻗어오다가 ‘연동동산’에 이르기 직전에 좁다랗게 만입되어 있는 만(이하 ‘연동만’이라 칭함)을 건너뛰어 축조된 관계로, 축성의 연결이 끊겼다. ‘연동만’은 근래에 연동방조제가 축조되어 역시 농지로 화한 상태이다.
이처럼 용장산성의 끊김은 바다의 만입부를 건너뛰어 축성하는 과정에서 생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지형상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도 하겠지만, 한편으로는 바다로 왕래할 수 있는 통로를 확보하려는 의도도 작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①의 지점은 벽파진의 중심 항구시설이 있었던 곳이고, ②와 ③은 이를 보완하는 보조 항구로 활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럴 경우, 벽파마을 ‘벽파동산’의 망금산과 망금바위는 ①의 벽파진 중심 항구의 앞 바다를 조망하는 기능을 수행했을 것으로 여겨지며, ‘성테난골’의 망바위는 ①․②․③의 지점 모두를 조망하는 기능을 수행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망금바위와 망바위는 벽파진의 중심 및 보조 항구와 용장산성 사이를 소통시키는 군사통신시설의 의미를 가졌을 것으로 판단할 수 있겠다.
이렇게 본다면 벽파진은 거대한 용장산성의 주요 출입구이자 관문으로 기능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용장산성의 거대성에 비추어 볼 때, 그 축성은 고려말 삼별초가 머문 9개월이라는 단기간에 완성되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고, 그 이전부터 장기간에 걸친 점진적인 축성과정을 거쳤을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런 맥락에서 성태난골 망바위 아래의 기슭 사면에서 횡혈식석실분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곧 용장산성의 축성 시점(始點)이 백제시대까지 올라갈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용장산성의 축성은 통일신라 및 고려시대에도 계속되었을 가능성이 크며, 이 점에서 고려시대에 진도군의 읍치를 용장평으로 옮겼다는 ꡔ옥주지ꡕ의 기사를 마냥 배제만 하기는 어렵게 된다. 그렇다면 ‘벽파만’ 일대에는 고대~고려시대에 상당한 규모의 해양도시가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하겠으며, 앞으로 이런 맥락에서의 정밀 조사가 요망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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