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역사 이야기] 대한정책의 집행자 슈티코프

BoardLang.text_date 2006.08.28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대한정책의 집행자 슈티코프 (1)

기광서(조선대)


  해방 이후 전쟁에 이르는 5년간 북소관계의 역사에서 테렌티 포미치 슈티코프(Terenti Fomitch Stykov)만큼 족적을 남긴 인물을 찾기란 쉽지 않다. 남한에서 하지가 미국의 대한 정책 집행에 대해 책임을 졌던 반면, 슈티코프는 북한에서 그와 같은 역할을 수행하였다. 스탈린의 전폭적인 신뢰를 받은 그는 대한 정책의 핵심으로 활동하면서 북한 체제 수립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정치인이었다.


 북한 통치 질서의 기틀 형성


대일(對日) 전쟁과 더불어 소련군이 북한을 진주하면서 슈티코프는 연해주 군관구의 군사회의 위원으로서 북한과 만주의 통치 책임을 맡았다. 그는 현지 주둔 25군사령부측과 긴밀한 연계를 가지면서 북한의 질서와 통제를 위한 조직적 체계의 구축 준비를 실행에 나갔다. 해방 후 나온 스탈린의 대북 통치 지침은 “북조선 영토에 소비에트 질서를 도입하지 말 것과 북조선에 부르주아 민주주의 권력 수립을 방조할 것”을 기본으로 하였으며, 슈티코프를 비롯한 현지 군부는 이 지침에 따른 정책을 구축해나갔다. 이러한 방침은 초기에 소련지도부가 조선에서 사회주의 체제 수립을 시기상조로 간주하였으며, 친소 기반의 구축을 공산당의 강화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보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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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민족주의자들과의 제휴는 소련측의 주된 관심사의 하나였는데, 슈티코프는 해방 직후에 이미 현지 군사령부에 북한의 대표적인 민족주의자 조만식의 협력을 끌어낼 것을 지시하였다. 초기 소련군 당국은 조만식을 친일분자로 보기도 했지만 북한 내 그의 위상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물론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공산당과의 연대였다. 특히 슈티코프와 김일성의 관계는 해방 직전에 시작되어 한국전쟁이 한창인 1950년 11월까지 지속되었다. 슈티코프는 김일성을 “미래 조선 정부 내에서 알맞은 후보”로 생각했고, 처음부터 그의 활동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다. 한편으로 남한에서 활동한 박헌영에 대해서도 “조선 혁명의 부르주아민주주의 성격에 대한 목표를 가지고 유일하게 올바른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 슈티코프는 김일성과 박헌영을 각각 북한과 남한의 실질적인 대표로 간주하였던 것이다.


해방 이후 시기 슈티코프는 김일성을 비롯한 공산당 지도자들에게 ‘지시’를 내리는 등 ‘상급자’로서 위치를 자임하였다. 그러나 그는 일방적인 ‘주종관계’를 유지하려는 의도를 가지지는 않았다. 가령, 북한 내 주요 정책 입안은 북한의 지도그룹과의 협의를 통해 이루어졌고 때로 북한 지도그룹과의 이견은 그의 선택을 어렵게 하기도 하였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 결정은 소련이 대북정책의 기본 방침을 상당 부분 수정하는 계기가 되는데, 조만식의 탈락은 그것의 직접적인 반영이었다. 조선임시정부 수립과 신탁통치 실시를 내용으로 하는 모스크바 결정에 대한 조만식의 완강한 반대는 임시정부 수립을 통해 자국의 이익을 지키고자 했던 소련 지도부를 자극했다. 소련군과 북한 공산당 지도부는 조만식을 설득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고, 마지막에는 슈티코프가 나서 조만식을 설득하였다. 그러나 양자의 만남은 아무런 결실을 거두지 못하고 결국 조만식은 정치 전면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모스크바 결정으로 인한 정세의 급변은 김일성이 이끄는 북한 최초의 중앙권력 기구인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이하 ‘북임위’)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슈티코프는 북임위의 설치를 ‘상향식’ 조직 원칙의 결과로 보았는데, 말하자면, 먼저 도·시·군 단위의 권력기관을 세우고 이를 토대로 북한 차원의 중앙권력기관으로 형성한 다음 마지막으로 전국적인 중앙정부를 세운다는 구상이었다. 북임위의 결성으로 소련군 사령부가 가지고 있던 입법 및 행정 권한의 상당 부분은 조선인에게 이양되었고 조선인의 자치적 권한은 급격히 향상되었다. 다만 주요 문제에 대한 최종 권한은 여전히 슈티코프로부터 이어지는 소련 지도부가 보유하였다.

미소공동위원회와 소련


모스크바 결정에 따른 조선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협의는 1946년 3월에 개최된 미소공동위원회(이하 ‘미소공위’)의 주된 임무였다. 미소공위 회의가 개막되기 전인 3월 16일 모스크바 지도부는 슈티코프가 이끄는 대표단에게 “조선에 관한 모스크바 회담 결정에 반대하는 정당, 사회단체와는 공동위원회가 협의하지 말아야 한다”는 훈령을 보냈다. 이것은 이승만과 김구가 주도한 반탁세력들을 장차 수립될 임시정부에서 배제하겠다는 의미였다. 이와 같은 소련의 입장은 슈티코프가 김일성, 박헌영과 협의하여 작성한 임시정부 내각 후보 명단에 반영되었다. 그는 우선 이승만과 김구, 그리고 반탁인사들을 포함시키지 않았고, 대신에 남조선인민당 당수이자 저명한 중도좌파 지도자인 여운형을 수상에, 김규식과 박헌영을 부수상 후보로 올려놓았다. 김일성은 무력을 책임지는 국방상 후보로 올랐다.


미소공위는 초기부터 모스크바 결정에 반대하는 정당․사회단체의 참여 여부로 난항을 겪었다. 슈티코프는 미소공위가 모스크바 결정의 실행을 위해 설립되었는데, 이 결정의 실행이 바로 미소공위 사업의 주요 내용이 되어야한다고 강조하였다. 이는 모스크바 결정의 실행에 반대하는 세력이 그것을 위해 설립된 미소공위와 어떻게 협의할 수 있는가라는 논리의 표현이었다. 이러한 주장은 민주주의와 언론의 자유를 내세우며 반박을 시도한 미국 대표단의 입장과 대립하였다.


공전을 거듭한 양측의 주장은 모스크바 결정에 대한 지지 성명에 서명하는 정당․사회단체와 협의할 것으로 타협되었지만 반탁세력들의 반탁활동이 지속되면서 결실을 맺지 못했다. 소련측이 반탁세력들을 거부한 배경에는, 슈티코프의 표현대로 “만일 그들이 정권을 잡는다면 조선 정부는 소련에 충실하지 않을 것이며, 조선인민은 소련에 적대적인 행위를 조직적으로 전개함에 있어서 도구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위와 같은 슈티코프의 상황 판단은 이후 자신이 미국과 남한의 반탁우익세력에 대해 보다 강경한 입장을 취하고, 북한에서 좌파의 주도로 광범위한 계층을 끌어들이는 ‘통일전선’ 확대에 더욱 매달리게 하였다. 즉 반소ㆍ반공적인 세력과의 타협이나 협상보다는 대중으로부터 고립시키는 것을 일차적인 목적으로 하고 북한의 ‘민주기지’를 더욱 확고하게 다지는 방향으로 이끌어 갔다.


북한을 정치·경제적으로 강화하려는 슈티코프의 입장은 1946년 7월 소련 정부의 결정으로 나타났는데, 지방권력기관 선거 실시, 산업국유화 실시, 조선군대 창설 등이 그것이었다. 북한의 정세에 큰 변화를 가져온 이들 조치는 소련의 입장에서는 주민의 신뢰를 획득하여 북한 내 자신의 영향력을 강화시키고 이를 통해 한반도 차원에서 친소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발판을 마련하고자 함이었다. 소련으로서는 한반도 전체에 자국에 ‘우호적인’ 정부가 들어선다면 더욱 바람직하겠지만 그것이 여의치 않을 경우 북한만이라도 ‘확보’하고자 하는 생각도 가지고 있었다.


1947년 5월 미소공위가 재개되면서 슈티코프가 이끄는 소련 대표단은 조선임시정부 수립시도에 재차 매달렸다. 슈티코프는 “미국이 아마도 그들(이승만과 김구)의 정부 참여를 주장할 것이기 때문에 그들을 배제한다면 정부는 창설되지 않을 것”이라고하면서 자신의 견해로는 “그들을 정부에 참여시키기 전에 그들이 새로운 정부가 북조선에 존재하는 민주적 강령과 동일한 강령을 갖는 것에 동의하는가를 물을 필요가 있다”는 견해를 제기하였다. 이는 반탁세력들이 미소공위의 협의 대상이 되기 위해서는 반탁 입장을 포기하는 것 뿐 만 아니라 북한에서 실시된 ‘민주개혁’에 대한 태도 여부를 살펴보겠다는 의사표시였다. 그러면서 그는 그들이 소수에 지나지 않고, 미소공위는 성공적으로 사업을 마칠 것이기에 그들의 정책은 실패할 것이라는 낙관적인 확신을 표명하였다. 그러나 미소공위의 진전 상황은 슈티코프의 예측대로 되지 않았다.

소련측은 사실상 미 대표단이 제기한 좌파 대 우파 3:2 비율의 정부 수립 구상에 대해 남북한이 1:1로 되는 정부 수립 구상을 드러내 보였다. 겉으로는 합리적으로 보이는 이 구상은 남한 내 좌익 세력의 참여를 고려한다면 전체적으로 좌파 우위가 실현되는 내용이었다. 슈티코프는 미국이 자체 구상에 따른 정부 수립이 여의치 않게 되자 미소공위를 결렬시키는 방향으로 선회하였다고 보았다. 하지만 미국측이 전국적인 선거를 통해 임시정부를 수립할 의도를 드러내자 슈티코프는 개인적으로 이를 하나의 대안으로 간주하였다. 그는 남북한 헌법제정회의 구성을 위한 선거 실시안을 검토하라고 지시하였으나 이는 내부의 거센 반대 의견으로 성사되지 못했다.


약소 민족에 대한 시각


해방 후 소련은 한반도가 자국의 안보에 위협이 되는 다른 열강의 영향권에 들지 않도록 자국에 ‘우호적인’ 정부를 수립하는 것을 대한반도 정책의 기본 목표로 삼았다. 그리고 그 최전선에는 슈티코프가 있었다. 그렇다면 슈티코프가 소련과 북조선의 이해관계가 충돌했을 때 어떠한 태도를 취했을까? 다음의 한 가지 실례는 이에 대한 그의 태도를 어느 정도 가늠해볼 수 있게 해준다.


연해주 군관구 사령부는 주 북조선 소련군 유지를 위한 비용이 기본적으로 소련의 부담이 되도록 하는 제의를 당신의 결정으로 내놓았습니다. 그 이유는 첫째, 북조선이 부담 지는 소련군의 부양은 정치적으로 유리하지 못한데, 왜냐하면 남조선 주둔 미군은 자국의 부담으로 유지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주 남조선 미군은 돈을 주고 조선 식품들을 이용하지조차 않고 있고, 자국 군의 유지를 위해 필요한 모든 것들은 미국에서 들여옵니다. 북조선 예산 부담으로 우리 군대의 유지는 조선 사회에 부정적인 분위기를 불러일으킬 것이며, 미국인들과 조선 반동들에게 반소선동을 위한 더한 명분을 줄 것입니다. 둘째, 북조선이 자신의 군대를 유지해야 한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북조선의 예산은 소련군 유지를 위한 비용을 견딜 수 없습니다.(슈티코프의 보고문. 러시아 국방성문서보관소 문서에서 인용)


 소련 정부는 기본적으로 북한 주둔 군대의 유지비용을 북한 당국에 부담지어 왔는데, 슈티코프는 이에 ‘정면으로’ 반기를 든 것이다. 그의 입장에서는 소련 정부의 방침이 결과적으로 소련의 국익에 저해되거니와 북한의 경제적 부담에 대한 우려를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가 대한정책의 입안과 집행 과정에서 본국 지도부와 다소간 다른 의견을 가졌다할지라도 자신의 입장을 전적으로 실행할 수 있는 수단을 보유하지는 않았다. 다시 말해서, 그는 소련의 국가이익을 보다 더 준수해야하는 소비에트 공민의 일원이었다. 그럼에도 그가 드물지 않게 북한측의 이익을 반영하려는 의지를 보였던 것은 약소민족에 대한 자신의 철학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