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의 제도화, 도시군 인민위원회 선거와 북조선인민위원회 기광서(현대사분과) 1946년 11월 3일에 실시된 북조선 도시군 인민위원회 선거와 이듬 해 2월 북조선인민위원회(이하 북인위)의 조직은 북한 체제 수립과정에서 커다란 전환기를 이룬 사건들이다. 이 정치적 흐름은 표면적으로는 같은 시기에 남한에서 치러진 남조선 과도입법위원 선거에 대응한 측면이 있었다. 그러나 그 과정은 ‘임시적’ 권력에 적법성을 부여하려는 목적 이외에 다른 정치적 의미들을 내포하였다. 1946년 2월 설립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이하 북임위)는 실질적인 정부기관으로서 기능하였지만 ‘밑으로부터’ 공식적인 위임을 받지는 못했다. 이에 따라 대표성의 한계를 인식한 공산측은 동년 9월 권력기관의 임시적 성격을 탈피하고 정치체제에 합법적인 기반을 갖추고자 도시군 인민위원회 선거 실시를 결정했다. 인민위원회 선거의 성공적인 실시에 커다란 의의를 부여한 북한지도부는 전 역량을 투여하여 북한 전역에서 대대적인 선거 캠페인을 전개하였다. 온 거리에는 선거 입후보자들의 사진과 약력이 붙은 포스터와 선거를 알리는 현수막과 구호 등이 뒤덮었다. 심지어 평양의 대중교통 수단인 전차는 선거 일자를 알리는 홍보 장식으로 치장된 채 운행할 정도였다. 선거일이 임박하여 북한 지도부는 주민들의 정치적 열의를 고조시키기 위해 평양에서는 11월 1일에, 그리고 다른 지역에서는 2일에 선거를 경축하는 군중대회를 대대적으로 개최하였다. 거리 곳곳에서 선거를 자축하는 축제가 벌어졌다. 북로당지도부가 심혈을 기울인 선거 과정이 아무런 ‘저항’ 없이 무사히 진행된 것은 아니었다. 주된 반발은 기독교계에서 나왔다. 북조선 ‘장로교 5도연합회의’는 11월 3일 선거일이 일요일이기 때문에 교인들은 선거에 참가할 수 없다는 결정을 채택하였다. 일요일 선거가 채택된 것은 전통적으로 소련에서의 선거가 일요일에 치러진 것과 관련이 있었다. 10월 26일 개신교회 대표 8명은 김일성을 방문하여 기독교 신자들은 일요일을 마땅히 하나님께 바쳐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김일성은 종교는 민주개혁 사업에 방해가 되어서는 결코 안 되며 그들이 투표에 신자들의 참여를 보장할 것을 촉구하였다. 그는 목사 강양욱을 필두로 한 친공계 목사 10명을 불러 ‘장로교 5도연합회의’와는 다른 조직을 내세우도록 하였는데, 여기서 북한 기독교계는 조직적으로 친공과 반공으로 분리되었다. 반공적인 목사들의 반선거 캠페인은 지속되었고, 남쪽에서 파견된 인사들도 여기에 합류하였다. 그럼에도 이들의 선거 방해는 대세에 영향을 줄 정도는 되지 못했다. 선거 절차는 몇 가지 점에서 통념을 깨기에 충분했다. 우선 선거 방식은 북조선 각 정당 및 사회단체를 망라한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 명의로 사실상 각 선거구별로 단일 후보를 내세우는 것으로 진행되었다. 서구식의 자유 출마와 후보간의 경쟁이 이루어지지 않은 소비에트식 선거 방식이 도입된 것이다. 일반 주민들로서는 난생 처음 경험한 선거이기에 자유경선이라는 개념이 파고들 여지가 거의 없었다. 다만 54개 선거구에서는 조선민주당과 천도교청우당 등 우익계 정당과의 후보 조정이 실패하여 후보자 두 명씩이 입후보하였다. 북한노동당 지도부는 단일 후보의 출마 방식에 대해 통일전선의 유지와 북조선 권력 기반의 강화를 위한 것으로 설명하였다. 투표 방법은 흑백투표제가 도입되었다. 즉, 병풍 등으로 가려진 곳에 흑백투표함을 각기 설치하여 찬성투표는 백색함에, 반대투표는 흑색함에 투표지를 넣도록 하였다. 병풍이 쳐진 투표장의 모습은 비밀투표를 유지하는데 조금씩 차이가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비밀이 보장되었더라도 유권자들에게 흑백함 투표 행위가 선택의 부담을 주는 것은 분명한 것이었다. 이같은 투표방식에 대해 공산측은 높은 문맹률을 고려한 조치로 강변하기도 했으나 실질적인 속내는 찬성투표율을 높여 내부의 결속력을 강화시키려는 의도였다. 선거에는 북한 지역 유권자 4,501,813명(총유권자 대비 99.6%)이 참여하였다. 선거 결과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에서 추천한 후보자들에 찬성 투표한 비율은 도 - 97%, 시 - 95.4%, 군 - 96.9%에 달했다. 이로 보건대, 100명 중 3-4명의 반대투표가 있었던 셈이다. 선출된 위원들은 총 3,459명에 달하였는데, 그 중 도 인민위원은 452명, 시 인민위원 287명, 군 인민위원 2,720명으로 각각 분류되었다. 삼등지구에서 입후보한 김일성은 전체 후보자 중 유일하게 유권자 100% 참가에 100% 찬성투표를 기록하였다. 선출된 위원들의 사회성분을 보면, 노동자 510명(14.7%), 농민 1,256(36.4%)명, 사무원 1,056명(30.5%)으로 세 계층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였다. 유산계층이라 할 수 있는 기업가가 73명(2.1%)이 선출되었고, 기독교계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종교인이 94명(2.7%)이나 뽑혔다. 비율로 보면 미약하지만 분명 인민위원회의 대표성을 갖추기 위해 애쓴 흔적이 역력하였다. 흥미로운 점은 기업가 출신들이 진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지주 계층은 선출 대상이 되지 않았다. 이미 1946년 3월 토지 개혁을 통해 이 계층이 사라진 상황을 반영한 것이었다. 아마 이 가운데 극소수가 농민 구성 내에 포함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당적별로 보면, 북로당이 1,102명(31.8%)이었고, 조선민주당과 청우당은 각각 351명(10%)과 253명(8.1%)이었으며, 무소속은 가장 많은 1,753명(50.1%)에 달했다. 이같은 수치는 통상 인구의 정당 소속별 비율을 맞춘 것이었다. 여성위원은 13.1%에 해당되는 453명이 선출되었다. 선거 이후 북한지도부는 ‘임시적인’ 권력에 적법성을 갖추는 조치에 돌입하였다. 1947년 2월 선출된 각급 위원들로 도, 시, 군 인민위원회 대회가 열렸으며, 이를 통해 최고주권기관으로서 북조선인민회의가 탄생하였다. 도, 시, 군 인민위원회대회는 이전 북임위가 발포한 모든 법령들을 법적으로 승인함으로써 그간 민주개혁 조치들에 합법성을 부여하였다. 북조선인민회의는 제1차 회의를 열고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의 ‘임시’를 뺀 북조선인민위원회를 조직하였다. 북인위의 탄생은 이전 북임위의 임시적 성격을 탈피하고 모든 국가적 사업을 책임지는 명실상부한 합법적인 최고 권력기관이 등장한 것을 의미하였다. 북인위 위원장은 북한의 지도자로 이미 확고한 위치를 굳힌 김일성이 맡았으며, 두 명의 부위원장으로는 북로당의 김책과 조선민주당의 홍기주가 선임되었다. 북인위의 각 부문별 부서로서는 기획국, 산업국, 내무국, 외무국, 농림국, 재정국, 교통국, 체신국, 상업국, 보건국, 교육국, 노동국, 사법국, 인민검열국 등 14개의 국과 양정부, 선전부, 간부부, 총무부 등 4개 부가 설치되었다. 사실상의 상(相: 장관)에 해당하는 국장단 14명 가운데 10명이 공산계열 소속일 정도로 북로당의 독점적 지위는 훨씬 높아졌다. 북인위의 위상은 미래 ‘통일 인민공화국’의 창설을 위한 기반이자 모태로 간주되었다. 또한 전국적인 임시정부가 수립되기 전까지 자신의 존속기간을 한정함으로써 스스로 분단을 지향하지 않고 있음을 애써 강조하였다. 아직까지 전한반도 차원의 임시정부 수립을 중요한 목표로 내세웠던 북로당지도부는 왜 ‘분단의 획책’으로 오인 받을 수 있는 독자적인 선거와 권력의 합법화에 몰두했을까. 그간의 전통주의적 주장들이 제기한대로 ‘확보된 지역에서 사회주의 굳히기’ 시도를 보여주려 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러나 우리는 이 과정을 1946년 초 이래 주장해온 ‘북조선 민주근거지론’의 연장선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북한 지역을 정치경제적으로 강화시켜 전한반도 차원의 혁명 전략을 수행하겠다는 의도가 바로 그것이다. 북한지도부는 북조선의 개혁과 변화의 모델이 남측의 변혁세력에 의해 남한에도 그대로 실현되기를 기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북로당 지도부의 그같은 시도는 오히려 미군정과 남측의 우익세력의 반공적이고 분단 지향적인 태도를 강화시키는데 일조했음은 틀림없다. 북측이 희망한 남측 기층 민중들의 운동과 궐기만으로 남측의 세력판도를 바꿀 수는 없었다. 역설적으로 1946년 11월 선거와 그 후 정치 과정은 북로당 지도부의 의도와는 반대로 남북분단을 획정하는데 도움을 준 모양새가 되고 말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