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로당의 창설 :
한반도 공산주의 권력의 중심 탄생
기광서(현대사분과)
1946년 5월 미소공동위원회의 결렬로 인해 조선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모스크바 결정의 이행이 불투명해 지고 한반도 정세는 한 치의 앞날을 내다보기 어려운 상황에 빠져들었다. 당분간 미소공위의 재개는 어려워 보였으며, 이에 따라 미국과 소련은 자신들의 관할 영역인 남과 북에서 독자적인 정책 집행과 행보를 강화해 갔다. 북한에서는 1946년 8월 28일 북한의 두 좌파정당인 북조선공산당과 조선신민당이 북조선로동당 창당대회를 열고 합당을 선언하였다. 북로당의 탄생은 한반도 공산주의운동의 새 지도부 출범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1. 합당의 배경
북조선공산당과 신민당의 합당 배경은 우선 김일성과 박헌영의 소련 방문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1946년 7월 초 두 공산당 지도자는 스탈린의 초청을 받아 모스크바에 당도하였다. 그들은 한반도 정세에 관한 다양한 주제에 관해 논의하였다. 조선측은 북한의 산업 국유화 문제를 비롯하여 간부양성과 신문, 잡지, 출판 및 의료 부문 등에 대한 소련측의 원조를 요청하였고 스탈린은 이에 대해 대체로 긍정적인 답변을 주었다.
스탈린-김일성ㆍ박헌영 대담의 핵심 주제는 새로운 당의 창당에 관한 것이었다. 물론 이 문제는 양측이 사전에 조율한 안건은 아니었다. 스탈린은 공산당이 스스로 사회민주당이나 노동당으로 선언하고 당면 과업을 내놓을 수 없는지 물었다. 그의 언급은 북한뿐 아니라 남한 내 좌파정당을 아우르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조선의 대표들은 그것이 가능하지만 인민들과 상의해야 할 것이라고 답하였다. 당시 대담에서 스탈린이 북한지도자들에게 ‘내정 간섭’이라는 모양새를 취하지 않기 위해 좌파정당 합당을 우회적으로 언급했을지라도 이 말을 수용하는 입장에서는 사정이 달랐다. ‘사회주의 조국’의 지도자가 내놓은 제의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사안이었다. 공개된 러시아 문서보관소 자료에 따르면, 얼마 후 스탈린은 슈티코프에게 북조선 공산당과 신민당의 합당을 성사시키라는 지시를 내렸다.
두 정당의 합당에는 당시 독일의 상황과도 관련이 있었다. 1946년 4월 독일 공산당과 사회민주당이 합당하여 독일사회주의통일당이 창당된 바 있었다. 비록 루마니아, 헝가리, 불가리아 같은 다른 동유럽 국가들의 좌파 정당들은 이보다 훨씬 뒤인 1948년에 합당하였지만 동독을 직접 통치했던 소련군의 의중이 크게 작용하였을 독일 좌파 정당의 합당은 북로당 결성에 영향을 미친 것은 분명하였다.
그렇다면 북조선 공산당과 신민당의 합당에 대한 내부적인 동기는 없었을까. 단순히 소련지도부의 지시에 의해 내부 상황의 고려 없이 합당 추진이 가능하였을까. 그런데 당시 한반도 정세를 살펴보면, 좌파정당의 합당을 이끌 요인들이 실재했음이 드러난다.
먼저 미소공위의 결렬로 인해 좌․우세력간 대립이 심화되었고, 이에 따른 좌파 세력의 단결에 대한 필요성과 요구가 증대되었다. 공산측으로서는 조선임시정부 수립이라는 전략적 목표의 달성을 위해서도 좌파의 헤게모니 장악은 필수적인 것이었다. 좌파 정당들의 분산은 이 목표를 향한 도정에 장애가 될 뿐이었다. 게다가 좌파 내부의 동인으로서 당시 공산당과 신민당의 지방조직들 간에는 권력을 놓고 적지 않은 분규와 갈등이 내재하였다. 이는 좌파 단결이 매우 필요한 시점에 소모적인 힘의 낭비를 이끌었다.<출처 : 국가기록원 소장 사진>2. 북로당의 탄생과 그 의미김일성ㆍ박헌영의 귀국 후 북한과 남한 내에서는 좌파정당들의 합당이 당면 과제로 떠올랐고 이를 위한 활발한 논의와 준비가 진행되었다. 이 계획은 슈티코프의 소련군 지도부와 남북한 공산당의 긴밀한 공조하에 추진되었다. 원래 조선공산당, 남조선인민당, 남조선 신민당 등 남쪽 3개 좌파정당들의 합당도 북쪽과 동시에 추진할 계획이었으나 일부 좌파세력의 반대와 미군정의 공산당 탄압으로 말미암아 남조선로동당으로의 합당은 11월에 이르러서 성사되었다. <출처 : 한겨례신문사()> 북조선공산당과 합당의 대상이 된 정당은 해방 후 중국에서 들어온 연안계 인사들이 주도하여 결성한 북조선신민당이었다. 이 정당은 좌파정당이었지만 노동자, 농민이 주축이 된 공산당과는 달리 지식인, 중간계층들을 주요 기반으로 삼고 있었다. 북한에서 북조선 공산당과 신민당의 합당은 양당의 지방하부조직들의 토론과 추인과정을 거쳤다. 그러나 이는 표면적인 절차일 뿐 대부분의 원칙적인 문제들은 양당 수뇌부, 특히 공산당 지도부에 의해 결정된 상태에서 하부에 통보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하지만 합당 과정에는 일부 비판의 목소리도 적지 않았다. 공산당 일각에서는 신민당의 ‘소부르주아적’ 성향으로 인한 당의 ‘신민당화’에 대해, 신민당 측에서는 공산당의 우월한 당세에 흡수되는 상황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였다. 하지만 일부의 반대만으로 합당의 명분과 당위성을 뛰어넘지는 못했다.
1946년 7월 말 양당 중앙위원회는 확대연석회의를 열어 합당 선언서를 발표하였다. 한 달 동안 하부단위에서부터 합당사업이 끝나고 8월 28일부터 30일까지 북조선로동당창립대회가 열렸다. 27만 6,000여명의 공산당원과 9만 명의 신민당원을 망라하는 대중적인 좌파정당이 탄생한 순간이었다. 당 위원장으로는 소수 정당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신민당 출신의 김두봉이 선출되었으며, 김일성은 부위원장 직위에 머물렀다.
그러나 이 시기 김일성이 북한의 실질적인 지도자임에 이의를 제기하는 이는 없었다. 당 지도부는 양당 지도자들로 고루 포진되었다. 당의 최고 권력 기관인 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는 김일성(공), 김두봉(신), 주영하(공), 최창익(신), 허가이(공)로 구성되었고, 상무위원회는 공산당측에서 김일성, 주영하, 허가이, 박정애, 김책, 태성수, 오기섭 등 7명이, 신민당측에서는 김두봉, 최창익, 김창만, 박효삼, 박일우, 김교영 등 6명이 선출되었다.
권력이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게 배분된 것은 무엇보다도 단결의 필요성이 우선되어야 하는 상황을 반영하였다. 특히 당세로 보아 다수를 장악할 수도 있었던 공산당측의 양보가 두드러졌다.
북조선노동당은 창당 후 북한 정치세력 내에서 ‘독점적’ 지배력을 확대‧강화시키는 방향을 취하기 시작하였다. 이를 통해 북한의 ‘민주기지’ 노선을 지속적으로 견지하면서 통일전선을 강화하고 반대세력을 억압하는 방침과 궤를 같이 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북로당은 ‘민주개혁’ 등 전환적 조치를 통해 대중을 체제 내로 끌어들이고 ‘반소반공세력’들에 대해서는 물리력과 각종 수단을 동원하여 격리 내지는 제재를 가하는 양면적 방식을 더욱 체계화하였다.
그런데 이전보다 강화된 공산주의자들의 입지는 천도교청우당, 민주당 등 우당 내 일부세력의 반발을 초래하였다. 더욱이 인민위원회 등 권력 기관 내에서 북로당과 우당들은 여러 사안을 놓고 종종 갈등을 드러냈다. 이 모순은 이후 한국전쟁 시기에 더욱 극적인 모습을 띠게 되었다.
북한체제의 기본 ‘축’은 바로 북로당의 창설에 의해 세워졌으며, 사실상 현 북한 체제의 근간이 형성되었다. 북로당의 창설은 또한 1946년 이후부터 형식적으로 존재해 오던 서울의 조선공산당에 대한 상하관계를 공식적으로 청산하는 계기가 되었다. 더욱이 북로당은 스스로를 전체 한반도의 근로대중의 대표이자 옹호자로 규정하면서 전한반도 혁명의 ‘참모부’로 자임하였다. 비록 남한 내 운동의 지도는 박헌영의 조선공산당이 이끌었지만 조직과 활동에서 비할 바 없는 유리한 입지를 갖춘 북한 내 공산주의자들에게 힘의 균형추가 옮겨 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