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무력의 태동 기광서(현대사분과) 김일성은 귀국 전인 1945년 8월 20일 자신의 동료들에게 해방된 조국에서 현대적인 정규무력을 창설할 방침을 언급했다고 한다. 무력은 “정치권력의 가장 중요한 도구 중 하나”로 간주될 만큼 정치적 헤게모니를 추구하는 공산주의자들에게 있어서 절대적인 의미를 지닌 수단이었다. 해방 후 한반도 국가 수립에 관한 미소간의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남북의 어느 쪽도 군대를 공식적으로 조직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았다. 그러나 남북 양쪽은 드러나지 않게 무력 건설에 집중하였는데, 특히 북한의 무력 건설 과정은 정권기관 조직과는 달리 상당히 은밀하고도 집중적인 모습을 지녔다. 1. 초기 무력의 형성 북한 무력 형성은 소련군 진주 후 치안질서 유지 및 친일세력과 ‘반동분자’ 색출 등의 필요성에 의해 그 기초가 마련되었다. 해방 직후 북한에서는 자위대, 치안대, 적위대 등과 같이 좌우세력들의 무장 조직이 활동하였다. 북한에 주둔한 소련군은 이러한 난립 형태를 해소하고 군당국의 통제를 받아 주어진 임무를 수행할 통일적인 조직에 착수하였다. 10월 12일 제25군 사령관 I. M. 치스차코프 상장은 「명령서 제7호」를 통해 “북조선 영토에서 일체의 무장대를 해산하고 모든 무기, 탄약, 군용물자를 소련군사령부에 넘길 것”을 명하였고, 동시에 사회질서 유지를 위해 “도 인민위원회에게 소련군 사령부의 동의에 따라 정해진 수의 보안대 창설을 허가”하였다. 11월 19일 북한 최초의 중앙행정기관으로서 결성된 북조선행정10국 가운데 보안국은 초기의 무력을 담당하였다. 그 하부 부서로 도, 시, 군, 면 단위에서 보안서가 조직되어 소련군 방첩기관과 함께 전쟁범과 정치범 색출에 나섰고, 질서 유지와 범죄와의 투쟁, 기타 형사사건을 담당하였다. 북한 무력 형성과정에서 소련측의 체계적인 지도와 감독, 그리고 지원 역할은 소련 민정기관 보안ㆍ검열지도부가 책임을 맡았다. 처음 북조선 보안국은 소련군 사령부의 지시를 따랐다. 하지만 1946년 2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설립되고 난 후에는 점차 북한측의 권한이 증대되었다. 북조선 보안국은 그 설립 취지에서 보듯이 사회질서의 안정을 우선으로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해방 후 북한 무력을 형성ㆍ발전시키는 기관으로서 기능하였다. 김일성 지도부는 군대 조직에 관한 사업을 서두르지는 않았지만 벌써 이에 대한 구상과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김일성은 1945년 11월 스티코프 상장과의 면담에서 남한에서 미군이 군사영어학교를 설립하자 이에 대한 대응으로 군단위별로 다수의 관련 학교를 설치할 것을 요구하였다. 소련은 미국을 자극할 수도 있는 이 요구에 당장 긍정적인 답변을 주지 않았다. 하지만 정규무력에 필요한 정치군사간부들을 육성하려는 목적에 따라 우선 군사정치학교의 설립을 허용하였다. 그리하여 군사 간부 양성을 주요 목적으로 하는 평양학원이 이듬해 1월 3일 문을 열었다. 교과과정은 정치, 국제정세, 조선문제, 당ㆍ정ㆍ민 공작, 체조 등으로 이루어졌다. 개원 당시 학생수는 4개반에 575명이었다. 공군과 해군의 창설에 대한 북한측의 기대도 비교적 빨랐다. 해방 직후 비행장이 소재한 평양, 신의주, 함흥, 청진, 회령 등지에는 항공협회 지부가 결성되었다. 1945년 11월에는 김일성을 회장으로 하는 조선항공협회가 결성됨으로써 장차 공군 양성의 기초가 만들어졌다. 해방 전 일본군에 복무했던 조선인 비행사 40명가량이 교관도 확보되어 있었다. 다만 공군의 기반은 육군에 비해 상당히 뒤떨어질 수밖에 없었던 까닭에 체계적인 비행사와 기술자 양성은 1946년 6월 평양학원에 항공과를 설치하면서 착수되었다. 해군의 경우도 1946년 4월 수상보안대가 조직되어 해안경비를 맡음으로써 그 기반이 구축되었다. 6월과 7월에는 기존 수상보안대를 토대로 하여 동해수상보안대와 서해수상보안대로 분리되었다. 북한 무력 형성에는 빨치산 출신을 비롯하여 연안파와 소련파 인사들이 중추적으로 참여하였다. 이 가운데 빨치산파 구성원들은 대부분 무력 관련 업무에 투입될 정도로 군사적 역할의 비중을 중요시하였다. (자료출처 : 국가기록원) 2. 무력조직의 체계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설립 이후 북한 무력 건설의 진행 과정은 김일성이 위원장의 자격으로 소련군 사령부에 필요한 사항을 요청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김일성은 일반적으로 주둔군 사령관에게 서한을 통해 정책적 지원 요청을 하였는데, 이는 제25군 사령관이 실권을 쥐고 있어서라기보다는 절차상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사실 북한 무력 건설의 추진 주체가 김일성측과 소련군당국 중 누구인지를 특정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양자는 상호 긴밀한 협의 속에서 사안에 따라 이니셔티브를 행사하였기 때문이다. 1946년 5월 제1차 미소 공위 결렬 직후 소련은 북한을 정치, 경제적으로 강화하는 조치에 힘을 실어주었다. 그 가운데는 조선인 군대 편성도 포함되었다.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철도 경비대와 국경 경비사단(민주 국경선 보호) 편성, 군관학교 설립을 허가하였고 이들을 무장시키기 위해 소련제 무기를 북조선 인민위원회에 판매하도록 하였다. 1946년 5월 김일성은 평양학원의 정치적, 군사적 혼재 기능을 뛰어넘어 순수하게 군사간부 양성을 추진하고자 ‘북조선 중앙간부학교’의 조직과 소련군 군관 그룹의 배치를 허가해줄 것을 소련군 지도부에 제기하였다. 이에 따라 동년 7월 군대 간부의 체계적인 양성을 위해 장차 조선인민군 군관학교들의 모체가 되는 중앙보안간부학교가 문을 열었다. 동시에 각 도에 설치된 철도보안대를 통합하여 13개 철도경비중대로 재편성된 북조선 철도경비대가 창설되었다. 1946년 8월 북한의 첫 정규군 부대로서 보안간부훈련소가 조직되었다. 훈련소는 평양을 비롯하여 개천, 신의주, 정주, 나남, 청진 등 전국적 단위에 걸쳐 설치되었고, 기존의 보안대, 국경경비대, 철도경비대 등을 근간으로 하였다. 이 조직은 총참모부, 문화부, 포병부, 후방부 등의 기관을 두었으며, 3.3제 원칙하에서 제1소(개천), 제2소(나남), 제3소(원산) 등으로 조직되었다. 한편 철도경비대의 약 20%의 병력이 중앙보안간부학교로 흡수되자 사실상 군대조직이 경찰조직에서 독립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9월에는 최용건과 김책을 각각 사령관과 부사령관으로 하는 보안간부훈련대대부(保安幹部大隊部)가 창설되어 군의 지휘부를 담당하였다. 북한측은 무력의 조직과 무장, 훈련 등에 대해 소련의 지원에 많은 부분 의존하였다. 무력 형성 시기 일본군이 남긴 병영, 연병장, 사격장 등 소련군이 관리하던 시설물들과 일본군 군수기재들이 북한측에 양도되면서 무장을 위한 기본 요건들이 갖추어졌다. 소련군 군사고문관들과 군 교관들은 소련군의 풍부한 군사 경험을 토대로 군대 지휘관 및 정치일꾼들의 전투 및 정치 훈련 조직을 지원하였다. 북한 군대의 구성과 편제는 다른 부문과 마찬가지로 자연스럽게 소비에트 유형에 밀착되었다. 그러나 편성 초기 군대의 여건은 전반적으로 좋지 못했다. 우선 피복과 군화 등 보급 상태가 매우 열악했고, 이로 인한 위생상태도 불량했다. 소련군 당국은 북한군대가 사기가 양호하며, 대다수 부대원들이 큰 열정을 가지고 군사 학습에 매진하고 성실하게 군무를 이행하고 있다고 본 반면에 탈영을 가장 심각한 문제로 인식하였다. 탈영의 주된 원인으로는 군내에 규율이 약하고 문화선전사업이 조직되지 않은 것과 함께 군화나 의복, 식량과 같은 기초적인 물품 부족 등이었다. 북한 군 부대 편성에 소요되는 무기 및 각종장비와 개인 군장품은 주로 소련군이 일본군에게서 전리품으로 획득한 것들로 충당되었다. 다만 이들 군수품의 양도와 획득은 소련군측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간에 쌀과 같은 물품 거래를 통해 이루어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