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이 내려주는 약, 사약
1. 죄인은 사약을 받아라! 최근 TV 드라마에서는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을 배경으로 한 사극이 인기를 얻고 있다. 그런데 다른 분들도 경험했겠지만 사극을 보면 늘 익숙한 장면이 하나 있다. 바로 죄인이 임금이 내려주는 사약(賜藥)을 마시고 죽는 장면이다. 몇 년 전에 SBS에서 방영된 사극 ‘왕과 나’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왕과 나’는 조선 성종, 연산군 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자신의 남성(男性)을 잘라버린 조선시대 환관 김처선의 삶을 그리고 있다. 극 중에 성종의 계비이자 연산군의 어머니인 윤씨가 폐비되어 사약을 받게 되는데, 그 이유는 왕의 얼굴을 할퀴는 등 투기를 일삼고 왕실을 저주했기 때문이다. 폐비 윤씨로 분한 탤런트는 현재 인기가 높은 구혜선인데, 드라마 속의 폐비 윤씨가 사약받는 광경을 보면 이렇다. <그림 1> 사극 ‘왕과 나’의 한 장면 : 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씨가 사약을 받고 죽는 장면이다. 성종 임금이 좌승지를 통해 내린 사약을 받은 그녀는 비장한 표정으로 자신이 죽거든 태조의 능인 건원릉(健元陵) 가는 길에 묻어 달라는 마지막 유언을 남긴다. 이는 자신의 아들인 원자(훗날의 연산군)가 장차 보위에 올라 능행가시는 모습을 먼발치에서나마 지켜보고 싶다는 뜻이다. 그리고는 이내 사약을 마시고 피를 토하며 죽는다. 폐비 윤씨가 실제 사약을 받으며 남긴 말이 무엇인지는 현재 알 길이 없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조선에서 사약을 받고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 인물이 비단 폐비 윤씨 뿐만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여기서 궁금한 사실 하나. 사약은 누구에게 내려졌을까? 조선시대에 중죄인을 처단하기 위한 사형 집행 방법으로는 교형, 참형, 능지처사 등이 있었다. 교형이 죄인의 목을 매서 죽게 하는 형벌이라면, 이보다 무거운 형벌인 참형은 목을 베는 형벌이었다. 대역죄인이나 패륜죄인의 경우에는 수레에 팔다리와 목을 매달아 찢어 죽이는 능지처사의 방법을 쓰기도 했다. 어떻게 죽어도 죽는 것은 마찬가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당대인들의 관념에서는 죄의 경중에 따라 이 또한 구분하여 집행하였다. 그런데 조선시대의 사형 집행 방법 중 사약을 받는 것은 신체를 훼손당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죽는 사람이 상당한 사회적 지위를 가졌을 때 가능한 일이었다. 즉정부 고위 관료나 왕실 가족들의 경우 반란 등 대역죄를 저지르지 않은 이상 일반백성들처럼 감옥이나 저자 거리에서 교형, 참형, 능지처사로 처단되는 것을 면해주었다. <그림2> 사약을 받는 광경을 그린 그림 : 한말의 화가 김윤보가 그린 『형정도첩』 가운데 하나이다. 왼쪽의 무릎을 꿇고 앉은 자가 사약을 마시는 찰나이며, 주변의 관리와 아전들이 이를 지켜보고 있다. 그럼 임금이 중죄인에게 교형, 참형이 아닌 사약으로 죄를 다스리는 근거는 무엇이었을까? 『예기(禮記)』에 보면 ‘사가살(士可殺) 불가욕(不可辱)’이라는 말이 나온다. 즉 선비는 죽일 수는 있어도 욕보여서는 안된다는 말로서, 그만큼 이들의 염치와 의리를 존중해주라는 뜻이다. 따라서 양반 관리나 왕실 가족들은 죽더라도 임금이 내리신 사약을 받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방식으로 그나마 명예롭게 죽을 수 있었다. 한마디로 죽는 것도 등급이 있었다고나 할까..... 2. 사약의 재료 사극에서 사약을 마시는 장면을 보면서 시청자들이 느끼는 가장 큰 궁금증은 사약을 어떻게 만들었을까 하는 점일 것이다. 그런데 관련 기록이나 문헌이 남아 있지 않아 안타깝게도 사약의 성분이 무엇이라고 확정적으로 이야기하기는 어렵다. 다만 사약의 재료에 대한 추정은 가능하다. 먼저 중국의 예부터 들어보자. 고대 중국에서는 독약으로 짐새의 독, 즉 짐독(鴆毒)을 썼다고 전한다. 짐새는 검은 자색의 깃털, 긴 목, 붉은 부리 등을 가진 새의 일종으로 수리나 독수리와 비슷하였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짐새는 독사만 먹고 살았다고 하는데, 이 때문에 독사의 독이 짐새의 온 몸에 퍼져 있었다. 이 짐새의 깃털을 술에 담가서 독주를 만들어 독약으로 사용하면 그 맹렬한 독성이 빠른 속도로 온 몸에 퍼져 치사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러나 진나라 이후에는 짐독이 아닌 비소(砒素)를 사용한 독살 방법이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 비소는 금속광택이 나는 비금속 원소로서, 그 화합물은 독성이 있어 현재에도 농약 및 의약의 원료로 쓰이는 물질이다. <그림 3> 비소 덩어리 : 사약의 주재료인 비상을 만들 때 쓰는 비소. 독성을 지니고 있다. 조선에서 사용한 사약의 경우 중국에서와 마찬가지로 비소를 가공해서 만든 비상(砒霜)이 주재료였던 것 같다. 혹은 뿌리에 독성이 있는 식물인 부자(附子)를 비상과 합하여 조제하였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아무튼 사약의 핵심은 비상이었다고 여겨진다. 그럼 도대체 비상의 독성이 얼마나 강했을까? 19세기 학자 이규경(李圭景)이 집필한 과학기술서적인 『오주서종박물고변(五洲書種博物考辨)』에 보면 비상을 제조하는 방법을 적고 있다. 즉, 비소 덩어리(砒石)를 흙 가마에 올려놓고 다시 그 위에 솥을 거꾸로 엎어놓은 상태로 태우면 비소 증기가 위로 올라가 솥 안쪽 벽에 붙게 되는데 이것을 떼어내면 비상이 된다는 것이다. 중국에서는 이 비상을 논밭의 농약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당시 비상 제조가 매우 활발했다고 전한다. 또한 이규경은 비상의 강한 독성에 대해서도 경고하고 있다. 비소 덩어리를 태워서 비상을 만드는 동안에 연기에 노출된 초목은 모두 죽어버릴 정도로 독이 강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연기를 흡입하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이 일을 하는 사람은 2년 안에 전업(轉業)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독에 노출되어 수염이나 머리카락이 다 빠져버린다고도 하였다. <그림 4> 이규경이 지은 『오주서종박물고변』 : 해당 면은 비소 덩어리를 이용하여 비상을 만드는 과정을 기록한 부분이다. 한편, 조선시대에 죽은 사람의 사망원인을 밝히는데 참고가 된 법의학서인 『무원록(無寃錄)』에 비상을 먹고 자살한 자들의 모습을 묘사한 대목이 있다. 해당 내용을 소개하면 비상에 중독되어 죽은 자는 만 하루가 지나면 온몸에 작은 포진이 발생하고 몸의 색깔도 청흑색으로 변한다. 게다가 눈동자와 혀가 터져 나오고, 입술이 파열되고, 두 귀가 부어서 커질 뿐만 아니라 복부가 팽창하고 항문이 부어 벌여진다고 하였다. 한마디로 맹독으로 인해 온몸이 상한 처참한 모습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이같은 묘사로 볼 때 사약을 마신 자들이 사극에서처럼 우아한 모습으로 죽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3. 사약에 얽힌 이야기들 조선에서 죄인에게 사약을 내리는 일이 임금의 마지막 배려였다면, 일본에서도 이와 유사한 것으로 ‘할복자살’이 있었다. 사약에 얽힌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잠시 할복에 대해 알아보기로 한다. 에도시대에 장군이 중죄를 지은 무사(武士)의 정상을 참작할 경우 그를 참수에 처하는 대신 스스로 할복케 하였는데, 할복자살은 무사가 그나마 자신의 체면을 지킬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라고 한다. <그림 5> 할복 장면 : 일본에서 할복하는 광경을 그린 그림이다. 가운데 앉아 있는 이의 앞에는 할복에 쓰일 단도가 놓여져 있으며, 오른쪽의 집행인은 할복 중에 목을 베기 위해 칼을 들고 있다. 『사법제도연혁도보』에 실려 있다. 할복 장소에는 대개 사방으로 목면을 둘러쳐서 다름 사람이 구경할 수 없도록 하였으며, 할복할 당사자 외에 여러 집행인들이 입회하였다. 할복자는 이들과 인사를 한 후 앉아서 겉옷을 벗어 할복할 복부를 드러낸다. 이후 미리 준비된 단도를 오른손에 거꾸로 쥐고 할복을 감행한다. 할복은 왼쪽 배에 칼끝을 꽂아 오른쪽 배에 걸쳐 한 일 자로 가르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이 때 사형 집행인의 한 사람이 할복자의 등 뒤에 있다가 할복이 이루어지는 동안에 할복인의 머리에 칼을 내리쳐서 목을 베면 할복 의식은 끝이 난다. 이상이 할복 광경이었다. 말이 할복자살이지 사실상 명령에 의한 할복, 처형으로서의 할복인 셈이다. 그럼 이제 다시 조선의 사약 장면으로 돌아가 보자. 조선시대 정쟁의 와중에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사약을 마시고 죽었음은 다 아는 사실이다. 이 가운데는 정치적 지위와 학문적 업적이 뛰어난 관료들도 있었고, 왕비와 후궁을 비롯하여 왕실의 종친, 외척들도 있었다. <그림 6> 장희빈의 묘소 : 서오릉(西五陵)에 위치한 장희빈의 묘소이다. 궁녀 출신으로써 한 때나마 왕비의 자리까지 오른 장희빈의 경우도 숙종에 의해 결국 사사되고 만다. 그럼 사약 집행 방법을 좀더 알아보자. 임금의 사사 명령을 집행하는 방식에 대해서는 광해군 즉위년인 1608년 의금부의 보고에 나와 있다. 즉 왕명을 집행하기 위해 사약을 가지고 파견되는 관리는 의금부의 낭청(郎廳), 대개 도사(都事)가 맡았다. 예컨대 인조반정 이후 강화에 유배된 강화군의 폐세자(廢世子)에게 사약을 내릴 때 의금부 도사 이유형(李惟馨)이 파견된 것이 그 한 예이다. 왕명을 받은 도사는 죄인이 있는 곳에 직접 찾아갔는데 사약을 내리기에 앞서 먼저 죄인에게 왕명(王命)을 유시하였다. 이 때 도사는 의녀(醫女)를 대동하였으며, 약물은 왕실의 의료기관인 전의감(典醫監)에서 가져왔다. 간혹 사약을 받을 죄수가 한양에 있는 경우 의금부 도사 대신에 승정원 승지가 직접 파견되기도 하였는데, 성종 때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전한 인물은 형방승지 이세좌(李世佐)였으며, 광해군 때 인목대비의 아버지로서 계축옥사에 연루된 김제남(金悌男)을 사사할 때도 담당 승지인 권진(權縉)이 맡았다. 이 중 이세좌는 운이 아주 나쁜 경우이다. 폐비 윤씨가 사사되고 난 후 즉위한 연산군이 윤씨의 폐비와 사사에 관련된 인물들을 제거하고자 갑자사화를 일으켰는데, 윤씨에 사약을 전한 이세좌는 선왕의 심부름을 한 죄로 이같은 화를 피할 방법이 없었다. 결국 경상도 곤양에서 자진(自盡)하라는 왕명을 받고 목매어 죽고 말았다. 한편, 고위 관리라고 해서 모두 사약을 받은 것은 아니다. 노론 4대신의 하나로 정승의 자리까지 오른 이건명(李健命)의 경우 경종 때 신임사화로 노론이 실각하면서 유배지인 전라도 흥양의 섬 나로도에서 죽게 되었는데, 경종은 그에게 사약을 내리는 대신에 참형에 처하도록 하였다. <그림 7> 이건명 초상 : 경종 때 소론이 득세하면서 불행한 최후를 맞이한 이건명(李健命)의 초상이다. (과천시 소장.) <그림 8> 송시열(宋時烈) 초상 : 조선후기 서인, 특히 노론을 이끈 대표적인 정치가인 송시열의 초상. 숙종대 정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도 사사되는 운명을 피할 수 없었다. (국보 239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선시대 사약을 받은 인물들 가운데에는 흥미로운 이야기도 전한다. 그 중 하나가 조선후기 숙종 때 서인의 영수 격인 송시열(宋時烈)에 관한 것이다. 그는 장희빈의 소생인 훗날의 경종을 세자로 책봉하는 일을 반대하다가 제주도로 유배되었고, 다시 서울로 압송되던 중에 전라도 정읍에서 사약을 받았는데, 얼마나 신빙성 있는 말인지는 모르겠으나 사약 한 사발로 죽지 않아 두 사발을 마셨다는 말이 전한다. 그만큼 사약에 잘 견뎠다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송시열의 사례는 명종 때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사약을 받은 임형수(林亨秀)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는 제주목사 등을 역임하다가 뒤에 관직에서 쫓겨나 고향인 전라도 나주에 거쳐하던 도중 을사사화로 사사되는 운명에 처했다. 이긍익의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 따르면 임형수의 주량(酒量)에 한정이 없었던 것 같다. 그는 사약을 내렸을 때 독주를 열 여섯 사발이나 마셨는데도 까딱도 하지 않았고, 다시 두 사발을 더 마시게 했는데도 아무렇지도 않자 마침내 파견된 관리들이 할 수 없이 목을 졸라 죽게 했다는 믿기 어려운 이야기가 전해진다. 아무튼 조선시대 사약은 그나마 임금의 배려가 담긴 명예롭게 죽을 수 있는 하나의 방편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결국 목숨을 빼앗는 일인 한 권력에 의해 집행되는 사형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역사의 흔적을 쫓다 보면 그 가운데 적지 않은 인물들이 때론 억울하게, 때론 불행하게 사약과 함께 사라졌음을 알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