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적에게 가한 모진 고문, 주리 틀기 심재우(중세사 2분과) 1. 주리 틀기의 기원, ‘찰지(拶指)’와 ‘협곤(夾棍)’ 최근 들어 부쩍 TV 드라마 가운데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하는 사극이 인기다. 사극이 사랑을 받는 가장 큰 이유 가운데 하나는 시청자들에게 지난 과거의 발자취를 더듬어 볼 수 있는 기회를 주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과거로의 여행! 이는 오늘의 우리들에게 풍부한 삶의 교훈과 여유를 제공해주는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사극에 자주 등장하는 장면 가운데는 고증이 잘못된 것이 적지 않은데, 죄인을 고문하거나 형벌을 가하는 장면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요즘 만들어지는 사극은 많이 개선되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그 시대에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고문 방법이 종종 등장하곤 한다. 오늘은 조선후기에 도적을 다스릴 때 가한 모진 고문 가운데 하나인 ‘주리 틀기’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알아보기로 한다. <그림 1> 사극 ‘천추태후’의 세트장 : 고려 7대 목종의 어머니 천추태후의 시대를 다룬 사극이다. 최근에는 다양한 시대를 배경으로 한 사극이 유행하고 있다. 주리를 트는 고문은 사극에서 대역 죄인을 잡아서 문초할 때 자주 등장하는 광경이 아닐까 싶다. 즉, 죄인의 양 발목과 무릎을 꽁꽁 묶은 후 두 개의 몽둥이를 정강이 사이에 끼워 양끝을 가위를 벌리듯이 엇갈리게 틀어서 죄인에게 심한 고통을 안겨주는 고문 방법이 주리 틀기이다. 그런데 주리 틀기가 사실은 조선후기, 대략 17세기경에 출현한 것임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그래서 그런지 최근 방영된 고려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사극 <천추태후>에서는 물론, 그 이전 삼국시대 이야기를 소재로 몇해 전에 방영되어 비교적 큰 인기를 얻은 사극 <서동요>에서도 죄인을 형틀에 묶어 주리를 틀어 고문하는 장면을 볼 수 있는데, 모두 고증이 잘못된 사례이다. 주리는 한자로는 ‘주뢰(周牢)’라고 썼는데, 그럼 주리 틀기는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 주리의 직접적인 기원은 중국에서 사용한 고문인 협곤(夾棍)에서 유래하였다. 중국의 원, 명, 청나라 때의 희곡 소설에는 고문 도구 가운데 찰자(拶子)와 각곤(脚棍)이 등장하는데, 당시 이같은 도구를 이용한 고문이 자주 있었던 것으로 전한다. <그림 2> 『삼재도회(三才圖會)』의 형구 그림 : 『삼재도회』는 중국 명나라 때 간행된 일종의 백과사전이다. 중국에서 사용된 여러 형구가 소개되어 있는데, 우측 상단에 ‘찰자’와 ‘각곤’이 보인다. 먼저 고문도구 중 하나인 찰자는 양쪽 끝을 새끼줄로 묶은 다섯 개의 가는 나무를 말하는데, 각각의 사이에 손가락을 끼워 넣은 후 두 사람의 관리가 새끼줄의 끝을 잡아당겨 손가락을 조이는 찰지(拶指)의 고문에 사용하였다. 찰지를 통해 심한 경우 손가락뼈가 부러지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림 3> ‘찰지’ 고문하는 광경 : 가운데 무릎을 굻고 있는 자의 양손에 찰자(拶子)를 끼워 고문하는 모습. 명나라의 『옥결기(玉玦記)』 수록. <그림 4> 법정의 광경 : 명나라 때 간행된 『이각박안경기(二刻拍案驚奇)』에 나오는 모습. 하단에 여자 죄수가 손에 수갑을 찬 채 끌려 나가고 있으며, 자세히 보면 화면 중간에 손가락에 끼우는 고문 도구인 ‘찰자’ 등이 떨어져 있다. 찰지가 주로 여자에 대한 고문인 반면, 남자들에게는 각곤을 이용한 고문, 즉협곤이 가해졌다. 협곤은 각곤이라 불리는 길이가 같은 3개의 막대기를 짜 맞추어 만들어서 사용하였다. 즉 각곤을 죄인의 다리에 끼워서 고통을 가하는 방법은 찰지와 원리가 같다. 즉, 죄인의 두 다리를 줄로 엮은 3개의 막대기 사이에 넣고, 양쪽에서 새끼줄을 잡아당기면 참기 힘든 고통이 가해지고, 심하면 죽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그림 5> 협곤을 가하는 모습 : 하단에 누워있는 자의 두 다리에 각곤(脚棍)을 끼워 협곤 고문을 가하는 모습이다. 명나라의 소설 『율조공안(律條公案)』 수록. 숙종 10년(1684)의 『조선왕조실록』 기사에 도둑을 다스리는 혹독한 극형으로 ‘주리’가 시행되었다는 기사에도 보듯이, 조선에서 중국의 찰지, 협곤 고문을 응용해서 주리 틀기가 행해진 시기는 대략 17세기경으로 보인다. 2. 가새주리, 줄주리, 팔주리 조선후기에 등장한 주리는 생각보다 혹독한 고문방법이었기 때문에 당시 일반적인 사건에서는 사용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다. 즉 도둑 체포 및 수사를 맡은 서울의 포도청(捕盜廳), 지방의 진영(鎭營)에서 도적을 취조할 때에만 사용할 수 있었다. 그리고 주리를 트는 방법도 여러 가지가 있었다. 그런데 도적을 취조할 때 쓰는 가혹한 고문으로 주리 외에도 난장(亂杖)이 있었으며, 이에 대해서도 간단히 소개하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이익의 『성호사설』에 난장 치는 방법이 나오는데, 난장은 도적의 두 엄지발가락을 묶은 다음 나무를 두 정강이 사이에 세워 발을 위로 매달아 놓고 발바닥을 때리는 고문을 말한다. 그런데 발바닥을 치다보니 매를 맞다가 잘못 맞아 발가락이 떨어져 나가는 경우가 종종 있었던 모양이다. 『목민심서』를 비롯한 문헌에서 난장은 발가락을 뽑는 형벌이라고 말한 것은 그같은 상황을 말한다. 아무튼 조선후기에는 도적을 다스릴 때 주리와 함께 난장 고문이 단골 메뉴로 등장하였다. <그림 6> 의금부에서 시행한 난장 : 의금부에서 죄인을 여러 사람이 난타하는 난장 집행 장면. 그러나 도적에게 가한 난장 고문은 발바닥을 때리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김윤보의 『형정도첩』 수록. 그럼 다시 본론인 주리로 돌아와 주리를 트는 방법에 대해서 알아보자. 후대의 기록이긴 하지만 프랑스 신부 샤를르 달레가 1874년에 쓴 『조선천주교회사』에 보면 조선에서 시행된 세 가지 주리 틀기의 방법이 소개되어 있다. 달레에 따르면 주리에는 먼저 가새주리가 있었다. 가새는 한자로 ‘전도(剪刀)’이니까, 가새주리는 ‘전도주뢰(剪刀周牢)’를 말한다. 우리가 가장 흔히 알고 있는 주리 트는 방법이 바로 이 가새주리이다. 가새주리 사용법은 두 무릎과 두 엄지발가락을 꽉 잡아매고, 그 사이에 두 개의 몽둥이를 끼워서 뼈가 활등처럼 휠 때까지 서로 반대 방향으로 당기는 것이다. <그림 7> 가새주리 집행 장면 : 김준근의 한말 풍속도첩에 실려 있다. 『프랑스 국립기메동양박물관 소장 한국문화재』(국립문화재연구소, 1999) 114쪽. 그에 따르면 가새주리 외에도 줄주리와 팔주리가 있었다고 한다. 줄주리는 두 발을 묶어 다리 사이에 몽둥이를 끼워넣는 것은 가새주리와 동일하나, 양쪽 무릎에 맨 줄을 두 사람이 반대 방향으로 당겨서 두 무릎이 맞닿게 하여 고통을 주는 방법이다. 다음, 팔주리는 양팔을 등 뒤에서 서로 엇갈리게 팔꿈치 위까지 잡아 맨 후 두 개의 몽둥이를 지레처럼 사용하여 양어깨에 접근시킨다. 그 다음에 죄인의 팔을 풀고 발로 가슴팍을 짓누르며 양 팔을 끌어 당겨 뼈가 제 자리에 돌아오게 하는 고문 방법이라고 하는데, 직접 보지 않고 글로만 봐서는 정확한 팔주리 트는 방법을 알기 힘들다. 아무튼 주리를 틀다보면 뼈가 부러지는 경우도 있었으며, 그래서 주리트는 것도 기술이 필요했던 것 같다. 달레에 따르면 경험 많은 집행자들은 죄인의 뼈가 휠 정도에서 주리 틀기를 그치지만, 경험이 없는 풋내기가 팔주리를 틀 경우에는 죄인의 뼈가 대번에 부러지고 피와 함께 골수가 튀어나오기 예사였다고 한다. <그림 8> ‘노주리’ 트는 모습 : 김준근의 풍속도첩에 실린 그림. ‘노주리’는 샤를르 달레가 이야기한 ‘톱질’을 말한다. 톱질은 말총으로 꼰 밧줄을 넓적다리에 감고 두 사람이 밧줄의 한 끝씩을 쥐고 줄이 살을 파고 들어가 뼈에 닿을 때까지 서로 당겼다 늦추었다 하며 고문하는 것이다. 한편 ‘노주리’는 위에서 언급한 ‘줄주리’와도 큰 차이가 없는데, 다만 노주리에는 정강이를 끼우는 막대기가 없는 것이 줄주리와 차이가 있다. 한편, 중국의 협곤, 조선에서의 주리와 유사한 고문이 동 시기 일본에서도 있었던 듯한데, 영조 40년(1764)에 일본에 통신사로 파견되어 이듬해 돌아온 조엄(趙曮)이 여행 과정을 일기 형식으로 남긴 『해사일기(海槎日記)』에서 이 점을 엿볼 수 있다. 당시 파견된 통신사 일행 가운데 조엄을 모시던 도훈도(都訓導) 최천종(崔天宗)이란 장교가 돌아오는 길에 오사카에서 일본인의 칼에 살해당하는 보기 드문 사건이 발생하였다. 일본인들은 최천종 살해 혐의자를 심문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고문을 가했는데, 조엄이 전해들은 잔혹한 고문으로 다음과 같은 무지막지한 것들이 있었다. 찬물을 먹여 목까지 차게 한 뒤 둥근 나무로 가슴과 배를 문질러 일곱 구멍으로 물이 나오도록 하는 고문. 칼날 같은 나무말 위에 걸터앉히고 두 발에 돌을 달아매는 고문. 이와 함께 조엄은 조선의 주리와 비슷한 고문으로 목 뒤에 돌을 달고 두 팔을 묶고 결박한 두 무릎 사이에 나무를 끼워 누르는 고문도 언급하고 있다. <그림 9> 오사카의 치쿠린지(竹林寺) : 영조 때 통신사를 수행하다 일본인의 칼에 살해된 장교 최천종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치쿠린지 전경. 2009년 7월 규장각 양안팀 답사 과정에서 필자가 방문하여 찍은 사진이다. 지난 역사를 돌아보면 자유로운 이성의 발전 못지않게 동서양 전통사회에서 고문 방법도 진화하며 발전해왔다. 이 가운데 주리와 같은 고문 방법은 동 시기 한, 중, 일 삼국에서 이와 유사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로 보아 아마도 당시 주리 틀기는 죄인에게 가혹한 고통을 안겨줌으로써 자백을 받아내는, 적어도 권력자의 입장에서는 효율적인 고문 방법 중의 하나였음에 분명하다. 3. 주리 틀기 한 번에 부모 제사는 이제 끝! 앞서 언급했듯이 주리 틀기는 조선후기에 새로 생겨난 고문 방법으로, 서울과 지방의 도적 떼들을 체포하고 취조, 고문할 때에만 쓰고 일반 사건에서는 함부로 쓰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같은 원칙이 잘 지켜지기 어려웠다. 실제로 숙종 37년(1711) 1월 15일에 강, 절도에게만 사용할 수 있는 주리를 추국죄인에게 사용했다고 해당 관리가 탄핵을 받은 사례는 주리 틀기가 관청에서 남용되었을 가능성을 암시한다. 이후 영조 4년(1728)에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자 난에 연루된 대역 죄인들을 포도청으로 이송하여 가쇄주리를 가한 적이 있었다. 이 일이 있고 몇 년 후인 영조 8년(1732) 6월 20일에 판중추부사 이태좌(李台佐)는 당시 혹독한 주리 틀기의 고통 때문에 거짓으로 자백하는 자도 많았다고 전제하고, 주리 트는 고문을 영구히 없앨 것을 영조에게 건의하였다. 그러나 조문명(趙文命), 김재로(金在魯) 등의 반대로 포도청 가새주리만 없애고 다른 주리는 놔두는 것으로 최종 결론이 났다. <그림 10> 청나라 말기 『점석재화보(点石齋畵報)』에 실린 그림 : 상해(上海)의 아문에서 서양인에게 중국식 형구 사용법을 설명하고 있는 모습이다. 그림에서 보듯이 찰자(拶子) 등이 여전히 쓰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영조 때 금지령이 내려졌다고 해서 가새주리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이후에도 조정의 감시가 느슨한 틈을 타서 관리들이 가새주리를 사용해서 종종 문제가 되곤 했으며, 강, 절도 외의 다른 사건에서 주리가 남용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같은 주리 남용 사례는 정약용이 『목민심서』에서 지방 수령들이 화가 치밀면 제한된 범위에서 사용할 주리 틀기를 아전들에게까지 함부로 사용한다고 개탄하고 있는 데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정약용은 이에 덧붙여서 주리 틀기의 심각한 후유증을 언급하였다. 즉 일반 백성들이 한번 주리 틀기를 당하면 다리가 망가져서 평생 부모 제사도 지내지 못할 정도로 거동이 어렵다고까지 말하고 있다. 실제 지방관의 주리 남용 사례를 하나 열거하면 순조 때 평안감사 조득영(趙得永)을 들 수 있다. 그는 매번 화가 치밀면 일반 백성들과 양반들에게까지 함부로 주리를 틀곤 했는데, 그같은 정황이 순조 8년(1808) 암행어사 서능보(徐能輔)의 염탐에 드러났다. 한편, 주리 남용은 관리들만의 문제는 아니었던 듯하다. 정조 임금이 심리, 판결한 중죄수 사건기록을 모은 책자인 『심리록(審理錄)』을 보면 조득영보다 앞서 지방 고을의 토호나 일반사람들도 간혹 주리를 틀곤 했음을 알 수 있다. 예컨대 1789년 보고된 경상도 창녕 사건의 경우 고을 토호 성응택은 단지 솥을 훔쳐갔다는 이유로 원풍악이란 자를 붙잡아 정강이 살이 터질 정도의 심한 주리를 가해 17일 만에 죽게 한 일이 있었으며, 심지어 이보다 2년 앞선 1787년 보고된 평안도 영유 사건의 경우 박재숙이란 자는 간통을 이유로 자신의 처를 묶어 놓고 주리를 틀어 4일 만에 죽게 한 터무니없는 일도 발생하였다. <그림 11> 주리트는 광경 : 한말에 찍은 두 장의 사진으로 주리트는 생생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사진으로 보는 조선시대(속)-생활과 풍속』(서문당) 수록. <그림 12> 구한말 미국 선교사의 시골 체험기 : 제이콥 로버트 무스가 한말 조선에서 수년간 생활하면서 체험한 내용을 담은 책자인 『1900, 조선에 살다』(푸른역사, 2008). 이 책에도 ‘주리’를 당시 시행된 무시무시한 고문으로 언급하고 있다. 이렇게 해서 악명을 떨치던 주리가 끈질기게 명맥을 유지하며 한말에까지 계속되었음은 이 무렵 주리 트는 장면을 찍은 사진이나, 조선을 다녀간 선교사들의 조선 방문 기록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굳이 다른 예를 살필 필요도 없이 우리가 잘 아는 한국 현대사에 큰 족적을 남긴 백범 김구(金九) 선생도 한말에 주리의 고통을 경험하였다. 즉 백범은 을미사변으로 죽은 명성황후의 원수를 갚기 위해 1896년 3월 9일 황해도 안악 치하포에서 일본군 중위 쓰치다를 살해하였다가 두 달 만에 집에서 체포되어 해주감옥에 수감되었는데, 5월 11일에 이곳에서 정강이뼈가 허옇게 드러날 정도로 모진 주리 고문을 당했음은 그의 『백범일지』에 나온다. 이 때 생긴 왼쪽 다리 정강이 마루의 큰 흉터는 죽을 때까지 지워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림 13> 백범 김구 : 노동자 복장을 한 백범 김구 사진. 『올바르게 풀어쓴 백범일지』(너머북스, 2008) 488쪽 그런데 일제 때 만주에서 조직된 항일 무력독립운동 단체인 의열단의 행동강령으로 1923년 신채호(申采浩)가 작성한 <조선혁명선언>에도 주리가 등장한다. 선언에서 신채호는 일제의 압제를 지적하면서 일제가 독립운동가에게 가한 고문으로 담금질, 채찍질, 전기질과 함께 주리 틀기도 언급하고 있다. 이처럼 조선후기 사용되던 주리 틀기와 같은 혹독한 고문이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에게까지도 답습되어 독립운동가들을 괴롭히고 있었다는 사실은 우리들을 씁쓸하게 만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