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을 움직인 사건과 인물] 서인 권력의 갈등, 이괄의 난(1624년)

BoardLang.text_date 2008.10.17 작성자 신병주

서인 권력의 갈등, 이괄의 난(1624년)


신병주(중세사 2분과)


1623년 인조반정을 성공시킨 서인 세력은 축제에 빠져 있었다. 절치부심 끝에 되찾은 권력, 이제 이 권력은 반정 주체세력이 서로 고르는 일만 남아 있었다. 하지만 권력의 마력은 인간을 흔들리게 하는 법. 이제 서인 내부에서 더 세고 더 많은 권력을 누가 차지하느냐가 쟁점이 되었다. 권력 다툼은 예상외로 심각한 상황을 초래하였다. 반정 후 1년 남짓한 무렵에 일어난 이괄의 난은 반정 초기 서인 권력 주체간의 내분을 여실히 보여 주었다.   

1. 논공행상의 불만, 거듭되는 감시와 의심

1623년 인조반정은 성공하였지만 집권 서인들이 북인들과 하등 다를 바 없다는 조롱 섞인 노래들이 민간에 유행하였고, 명분 없는 반정에 대한 모역과 고변 사건이 인조 초반에 줄을 이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반정 주체세력 간의 권력 다툼에서 빚어진 이괄의 난이었다.


1624년(인조 2) 1월 22일 인조반정의 공신 이괄(李适)이 그의 아들 이전(李栴)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인조반정 때 김류가 늦게 도착하는 관계로 임시로 대장에 추대될 만큼 반정군의 핵심이었던 그였지만, 반정 후 그는 1등 공신에 책봉되지 못하였다. 한마디로 반정 주체들 간의 파워 게임에서 밀린 것이다.

  반정 다음날 이귀는 인조에게 이괄의 활약상을 말하며 병조판서에 제수하도록 요청했다. 그런데 이괄은 이 자리에서 형세를 관망하다가 뒤늦게 도착한 김류를 노골적으로 비판하였다.

‘신에게 무슨 공적이 있겠습니까? 다만 일을 당하여 회피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어제 대장인 김류가 약속 시간에 오지 않아서 이귀가 신에게 그를 대신하게 했는데, 김류가 늦게 왔으므로 그를 베고자 했으나 이귀가 적극 말려서 시행하지 못하였습니다.’ (『연려실기술』 권24, 「인조조고사본말」, 이괄의 변)

  김류를 겨냥한 이 발언은 조정에 커다란 파문을 불러 일으켰고 김류를 비롯한 반정 주체세력들에게는 이괄을 부담스럽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이괄은 반정의 논공을 정하는 과정에서 2등 공신으로 내려 앉았다.

  김류, 이귀, 김자점, 심기원, 이흥립 등 반정의 주모자들이 모두 1등공신에 책봉되어 판서의 자리에 앉은 것과는 달리 이괄은 단지 반정에 늦게 참여했다는 이유로 2등공신이 되어 한성판윤의 자리밖에 오르지 못했다. 거사 일에 임시로 대장이 되었던 그의 활약상에 비하면 충분히 불만을 가질 수 있는 처사였다.

1623년 5월 이괄은 여진족이 준동할 기미를 보이자 부원수겸 평안병사로 임명되어 북방을 경비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이괄은 손꼽히는 일류 무장이었다. 그는 선조 때 무과에 급제한 후 선전관ㆍ형조 좌랑ㆍ태안 군수ㆍ제주 목사 등 중앙과 지방의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광해군 시대에 이항복은 이괄이 장수의 재질이 있다고 칭찬을 하였으며, 무신으로는 특이하게 글씨를 잘쓰고 문장에 능하다는 명성까지 얻었다. 이괄은 문무를 겸비한 장수감으로 널리 인정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인조반정 이후 후금의 위협이 더해지는 가운데 그가 부원수에 임명된 데에는 반정 참여자라는 점도 작용했지만, 무엇보다도 병사(兵事)에 능하다는 점이 고려된 것이었다.

  그러나 반정의 주체세력들은 논공행상(論功行賞)에 불만을 품고 있는 이괄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그의 아들 이전 또한 아버지와 함께 상당한 무재(武才)를 가지고 있는 인물로서 반정의 주체세력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던 만큼 반정 세력에게 요시찰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조정에서는 반정의 동지였던 이괄 부자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감시에 나서게 되었고, 이것은 이들 부자를 더욱 자극하게 되었다.

1624년 인조에게 이괄과 그의 아들 및 한명련, 기자헌 등이 군사를 일으켜 변란을 일으킬 준비를 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즉시 추국청(推鞫廳)이 소집되어 고변당한 기자헌 등에 대한 문초가 이루어졌지만 아무런 단서도 찾아낼 수 없었다. 그러나 이귀 등은 즉시 이괄을 잡아들일 것을 건의하였다.

  ‘이괄의 반역 음모는 확실하지 않지만 아들 이전이 반역 음모를 꾀하고 있는 만큼 이괄이 충분히 반역에 참여할 것이다’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 인조는 일단 이괄을 제외하고 그의 아들 이전 및 기자헌 등을 서울로 압송해 오도록 했다. 조정의 압박에 이괄은 분노했다. 권력에서 소외되고 아들까지 체포되는 상황에서 이괄은 반역밖에 그 선택이 없다고 믿었다. 『연려실기술』의 다음 기록은 이러한 심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나에게 자식은 하나뿐인데 이제 그 자식이 잡혀가 죽게 되었다. 이렇게 된 마당에 어찌 그 아비인들 무사하겠는가. 잡혀 죽의나 반역하다 죽으나 죽기는 매한가지이다. 사내가 어찌 머리를 숙이고 죽음을 받겠는가. 이제 반역을 결심한 이상 내 명을 어길 시에는 죽음이 있을 뿐이다.’

 그동안 논공행상에 대한 불만으로 가득 차 있는 상태에서 또 다시 자신과 아들에 대한 조정의 감시와 의심의 눈초리가 가해지자 궁지에 몰린 이괄은 반란의 길을 택한 것이다.

   1624년 1월 21일 이괄은 급히 휘하 군관들을 소집하였다. 그의 휘하에는 평안도 토병(土兵)과 전라도에서 올라온 부방군(赴防軍) 1만 2천 명, 그리고 항왜(降倭: 임진왜란 때 조선에 항복했던 일본 군인) 130여 명이 있었다. 이 정도 병력이면 군사를 일으켜도 승산이 있을 듯싶었다. 특히 항왜는 칼을 잘 쓰기 때문에 기습 작전에 능한 존재였다. 어느덧 하나 둘 군관들이 막사 안으로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

  서울로부터 자신의 아들 이전(李栴)을 잡으려고 의금부 도사와 선전관이 내려오고 있다는 첩보는 반란의 의지를 더욱 불태우게 했다. 1월 22일 이괄은 반란군을 이끌고 본거지인 영변을 출발하였다. 이괄의 군대는 빠른 기동력을 발판으로 황주 부근, 임진강 전투 등지에서 연이어 관군을 격파하고 서울 진격을 서둘렀다.

  도원수 장만은 ‘적이 교활하게도 샛길로 출몰하여 위치를 종잡을 수 없다’는 첩보까지 올릴 정도로 이괄 부대의 기동력과 전투력은 뛰어났다. 그리고 2월 9일 마침내 서울에 입성하였다. 지방에서 반란을 일으킨 군대가 서울을 점령한 것은 역사상으로도 유례가 없는 대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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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이괄이 이끄는 반란군의 진격로(ⓒ 신병주)

2. 반란군에 의해 점령당한 서울

  반란군이 서울 근방에 이르렀다는 첩보를 접한 인조 정권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이에 긴급히 피난 대책을 강구하였다. 인조가 종실과 신하들을 이끌고 먼저 남쪽으로 피난길에 오르고 인목대비 일행이 뒤따라 내려오도록 하였다. 남으로 피난가면서 인조 일행은 가도에 머물고 있던 명나라 장수 모문룡에게 구원병을 요청하고 또 부산의 왜관(倭館)에 머물던 왜인을 동원할 계획까지 세웠다. 당시 인조 정권의 다급함을 여실히 보여주는 정황들이다.

  인조 일행이 남으로 피난하는 사이 이괄의 반란군은 2월 9일 서울로 무혈입성 하였다. 반란군은 서울을 점령한 후 선조의 아들인 흥안군을 왕으로 추대하고 곳곳에 방을 붙여 민심을 수습해 나갔다. 많은 백성들이 이괄의 군대를 환영했다. 공주로 피난을 가는 인조를 따른 백성들이 거의 없었던 것과도 대조되는 상황이었다.

  이괄은 선봉대로 기병 30명을 파견하여 ‘도성 사람들은 동요하지 말고 평상시대로 생업에 종사하도록’ 알린 다음 한명련과 더불어 서울로 들어왔다. 이때 모집된 군사 수천 명이 앞을 인도하고 관청의 서리와 하인들이 의관을 갖추고 나와서 이들을 영접하였으며 도성민들은 황토를 깔고 이들을 맞이했다고 한다. 피난 차 한강을 건널 때 배조차 없었던 초라한 인조 일행과는 대비되는 모습이었다.

이괄은 흥안군을 왕으로 옹립한 뒤 서울에 남아 있던 사대부를 불러 들여 새로운 조정을 구성하였다. 그리하여 조선 내에 두 명의 국왕과 두 개의 조정이 생기는 전대미문의 사태가 발생하였다. 아직 인조가 명나라로부터 국왕 책봉을 받지 않은 상태였으므로 이괄이나 인조 어느 쪽이든 공식적으로 조선을 대표한다고 주장할 수 있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3. 반란군의 내분과 이괄의 최후

패전을 거듭하면서도 반란군을 뒤쫓아 오던 정부군은 인조의 피난과 반란군의 서울 점령 소식을 듣고 마지막 승부수를 띄우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정부의 지휘관들은 도원수 장만을 중심으로 대책 회의를 한 끝에 서울의 인심이 이괄 쪽으로 굳어지기 전에 일전을 벌이는 것이 최선의 대책이라 판단하였다. 그리고 도성이 내려다 보이는 안현(安峴)을 기습 점령하고 병력을 전후좌우로 배치하여 반란군과의 일전을 준비하였다.


  정부군이 안현에 주둔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이괄 역시 군대를 정비하여 정부군과의 대결에 나섰다. 그러나 그 동안의 승리와 서울 점령으로 인해 지나친 자신감을 갖게 된 반군들은 정부군에 대한 경계를 소홀히 하였고, 결국 수 시간에 걸친 치열한 전투 끝에 이괄의 군대는 패배하고 말았다.

  이괄은 남은 군대를 이끌고 숭례문, 광희문(光熙門)을 거쳐 광주 방향으로 향했다. 남으로 피난을 간 인조 일행을 추격하여 최후의 일전을 벌일 생각이었다.

인조 일행은 정부군이 안현 전투에서 승리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아직 이괄이 살아 있기 때문에 반란군의 남진을 우려하여 좀 더 안전한 공주로 피난 장소를 옮겼다. 한편 최후의 일전을 벌이고자 부하 장수와 핵심 기병 수십 명을 이끌고 남쪽으로 진격하던 이괄은 광주 경안역에서 하룻밤을 머물렀다.

  그런데 여기에서 반란군은 내분이 발생하였다. 더 이상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이괄의 부하들이 이천에서 이괄 등 핵심 주동자의 머리를 벤 뒤 투항하고자 한 것이다. 이괄의 부장 이수백과 기익헌은 이괄 부자와 한명련 등의 머리를 베어 인조의 행재소인 공주로 달려가 항복하였다. 도성을 버리고 공주로 피난 온 인조에게는 뜻밖의 횡재였다.

  화려한 승전보를 올리면서 출발하여 서울을 점령하고 국왕까지 피난시킨 반란군의 초기의 위세에 비하면 너무나 초라한 결말이었다. 이로써 20여 일에 걸쳐 진행되었던 이괄의 난은 종결되었다.

이괄의 난은 조선시대 일어났던 반란 가운데 유일하게 수도 서울을 점령한 반란으로서 무엇보다 반정 이후 인조정권이 인심을 확고히 얻지 못한 데 근본 원인이 있었다. 인조반정을 성공시킨 서인 정권은 정적인 북인의 숙청에만 주력하였지, 일반 백성들에게 근본적인 혜택이 돌아갈 수 있는 사회 경제적 정책은 취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괄의 반란군이 서울에 들어왔을 때 백성들이 환영하는 모습을 보였던 역시 백성들의 눈에는 반정 후에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고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괄의 난이라는 내전은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인조 정권의 강경한 대외 정책은 신흥 강국 후금과의 피할 수 없는 대결을 예고하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반란군의 주역 한명련의 아들 한윤은 후금으로 들어가 인조 정권의 친명배금 정책을 낱낱이 알리면서 후금을 더욱 자극시켰다. 한윤은 1627년 정묘호란 때 후금의 앞잡이가 되어 돌아왔으니, 이괄의 난의 후폭풍은 그만큼 거세었다고 할 수 있다.

이괄의 난은 현대의 정치사에도 흔히 있는 반혁명 사건을 연상시키기도 한다.1961년 5.16군사 쿠테타 이후에도 군부 내에서는 쿠테타의 주역 박정희에 반발하는 반혁명 사건이 수차례 있었다. 이러한 반혁명 사건은 한편으로 박정희 권력을 더욱 굳히게 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괄의 난과 연이어 전개된 호란은 인조와 서인 정권을 분명 힘들게 하였지만, 이들 사건으로 말미암아 서인 정권은 보다 강고해졌다. 내우외환이 오히려 권력을 강화하는 계기가 됨은 역사의 또 다른 아이러니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