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을 움직인 사건과 인물] 1627년 1월 정묘호란! 조선과 후금이 형제의 나라가 되다.

BoardLang.text_date 2008.11.18 작성자 신병주

1627년 1월 정묘호란!
조선과 후금이 형제의 나라가 되다.


신병주(중세사 2분과)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인조가 즉위하면서 북인 정권이 완전히 무너지고 서인들이 정권의 실질적인 담당자가 되었다. 정권을 잡은 서인들은 광해군 정권의 정책 대부분을 부정해 나갔다. 그 중에서도 반정의 주요 명분이었던 ‘폐모살제(廢母殺弟)’와 ‘중립외교’는 철저하게 이와 반대되는 방향으로 국정을 운영해가는 근거이기도 했다.

  이제 중립외교 대신에 친명배금정책이 외교의 기본으로 떠올랐다. 신흥 강국 후금은 광해군 시대에 맺어진 우호와 협력이 하루 아침에 바뀌는 현실에 적잖이 놀랐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더 이상 예전의 허약한 여진족이 아니었다. 군사력만 놓고 보면 조선을 쉽게 무너뜨릴 수 있는 신흥 강국이었다. 후금은 조선의 적대적 외교에 대응하여 그들의 힘을 보이기로 했다. 1627년의 정묘호란은 ‘조선의 오만 바로 잡기’ 차원에서 강행한 전쟁이었다.

 1. 후금의 선발대, 압록강을 넘다.

1623년 3월 광해군 정권을 무너뜨린 인조반정은 조선의 외교정책에도 큰 전환점이 되었다. 신흥강국 후금과 전통의 맹방 명나라와의 사이에서 실리외교를 취했던 광해군의 외교정책은 인조반정을 성공시킨 서인들에 의해 신랄한 비판을 받았다.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준 명나라의 은혜를 무시하고, ‘오랑캐국’ 후금과 외교관계를 맺은 사실은 반정의 주요한 명분 중의 하나였다.

  인조반정 이후 정권은 완전히 서인들에게 넘어가고 북인은 완전히 몰락하였다. 반정 후 남인 이원익이 영의정으로 등용되기도 했지만 남인은 관제 야당에 불과하였고, 모든 정책은 서인들에 의해 추진되었다.

  외교정책도 마찬가지였다. 서인들은 전통적인 외교노선인 친명배금(親明排金: 명나라와 친교를 맺고 후금을 물리침) 정책을 고수했다. 이것은 반정의 명분이기도 했다. 그러나 후금은 이제 오랑캐로 멸시받는 작은 나라가 결코 아니었다.

1626년 후금에서는 태조 누르하치가 사망하고 여덟째 아들 홍타이지(洪泰時: 후의 청 태종)가 후계자가 되었다. 아버지를 따라 다니며 젊은 시절부터 전공을 쌓은 홍타이지는 조선에 대한 강경한 입장을 지니고 있는 인물이었다. 여전히 후금을 무시하고 명에 기울어져 있는 인조와 서인 정권에 대해 본 때를 보여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굳혀갈 무렵, 또 다른 호재가 있었다.

  바로 이괄의 난에 선봉장으로 참여했던 한명인의 아들 한윤이 국경을 넘어 심양으로 들어간 것이다. 한윤은 태종에게 광해군이 폐위되고 새 임금이 즉위하여 명나라를 따른다고 하고, 후금에 투항한 강홍립과 박난영의 가족을 처형했다고 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조선에 좋지 않은 감정을 갖고 있던 후금의 태종을 더욱 자극한 것이다.

후금은 1627년 1월 명의 배후인 조선 침공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기병과 보병을 합한 후금의 3만 5천여명의 병력이 1월 13일 압록강을 넘었다. 선봉에는 강홍립, 박난영 등 조선 출신 장수들과 통역관도 함께 하였다. 밀고자 한윤도 침략의 대열에 가담했다. 후금은 뒷날 보낸 국서에서 출병의 이유로 크게 네 가지를 들었다.

첫째, 명나라를 도와 후금을 공격했다는 것. 둘째, 명나라 장군 모문룡에 대한 지원을 계속 한다는 것, 셋째 여진족과 한조의 도망민이 후금의 차지한 지역을 노략질을 했으나 조선측은 방관했다는 것, 넷째 후금의 황제(태조)가 사망했을 때 조선에서 조문 사절을 한 명도 보내지 않았다는 것 등이 주요한 이유였다.

후금군은 3만 5천여 병력으로, 순식간에 평안도 의주를 점령하고, 일주일 후에는 얼음을 타고 청천강을 건너 안주로 내려왔다. 후금군은 진격 도중 “옛 임금(광해군)을 위해 복수하려는 것이다. 우리가 승리하면 10년간의 세금을 면제해 줄 것이다”고 호언했고, 이 발언은 민심을 충동하는데 일부 도움이 되었다. 후금군은 산성 중심의 방어책을 세운 조선의 방어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파죽지세의 진격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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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9세기 전반에 제작된 『동국여도』 중 「관서도」 부분

후금의 군대는 압록강을 넘어 의주로, 청천강을 넘어 안주를 점령한 후 평양으로 들어왔다.(그림에 안주는 병영으로 표시되어 있다)

 2. 분조(分朝)와 파천(播遷)

후금의 전격적인 침략에 조선 조정은 당황했다. 장만을 도원수로 삼고,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의 근왕병을 모집하면서 황해도의 황주와 평산을 1차 방어선으로, 임진강을 최후의 방어선으로 삼았다.

소현세자는 분조(分朝)를 맡아 전주로 내려갔다. 임진왜란 때 조정을 둘로 나누어 선조와 광해군이 각각의 지휘 본부를 차린 것과 유사한 방식이었다. 소현세자의 참전 활동은 훗날 그의 대청인식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의 『소현세자일기』에는 전시 중임에도 경연을 거르지 않고 정상적으로 정치 활동을 했던 세자의 모습이 나타난다.

후금의 군대는 8일만에 안주성을 점령하고, 여세를 몰아 평양에 무혈입성했다. 그런데 주목되는 것은 후금에 투항한 조선인 장수가 실질적으로 길잡이 역할을 한 점이다. 광해군의 총신 강홍립도 조국에 칼을 겨누는 지경이었다.

「평안 감사 윤훤이 치계하였다. “방금 도망쳐 온 사람이 와서 고하기를 ‘노병(奴兵)이 어젯밤에 의주를 공격하여 함락시켰는데 전 창성 부사 박성인, 선사포 첨사 오성인 및 한윤이 다 적진에 있었으며 강홍립ㆍ이영방은 대장이 되었고 적장은 8인인데 그 기세가 매우 거세다.’ 하였습니다. 안주는 형세가 지탱하기 어려울 듯하여 해서의 별승군(別勝軍) 1천 7백 명을 이미 김완으로 하여금 이끌고 가 구원하도록 하였습니다. 평양은 아병(牙兵) 2천 8백 명과 삼수병ㆍ정초병 3천여 명이 있어 이들로 군대를 나누어 성첩(城堞)을 수비하도록 하였고 또 주변에 있는 고을의 수령들로 하여금 각각 민병을 인솔하고 입성토록 하였습니다.”」
 (『인조실록』, 인조 5년 1월 17일(을유))

당시 평양에는 8천여명의 병력이 있었으나 후금의 기세에 놀라 대부분 성을 버리고 도망을 쳤다. 1월 24일 평양성이 함락되었다. 후금의 빠른 진격에 조정은 황급히 강화도로 피난길을 서둘렀다. 1월 27일 인조는 파천을 결정했다. 백성들의 동요는 컸지만 다행히 임진왜란 때처럼 궁궐과 관아 건물을 불태우지 않았다. 인조 일행은 강화부 관아에 차린 행재소에서 영의정 윤방 이하, 최명길, 장유, 이정귀 등의 대신들과 대책 회의를 거듭 하였다.

이 때 후금측의 화의 제의가 들어왔다. 명나라와의 관계를 끊고 후금과 형제관계를 맺자는 것이 핵심이었다. 격론 끝에 명나라와의 관계 단절은 거부하고 후금과 형제 관계는 맺자는 제안에는 따르기로 했다.

  이후에도 유해를 단장으로 하고 조선 출신인 강홍립과 박난영이 사절단에 포함된 후금측의 사절단과의 몇 차례 입장이 오고 갔다. 마침내, 두 나라라는 형제가 될 것을 맹세할 것, 임금의 동생을 인질로 보낼 것, 명나라나 대금의 연호를 쓰지 말 것, 요구한 물품(사향, 수은, 벗, 먹 등 특산물)을 보내줄 것 등 4개항의 합의가 이루어지고 강화가 성립되었다.

  당시 후금은 중원의 명나라 정복에 주력을 하고 있던 터라 조선측의 도발을 방지하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따라서 쉽게 화의 조건을 보낸 것이다. 조선 역시 형세가 불리했고, 후금과 형제국 정도로 관계를 정리하는 것은 크게 자존심을 상하는 것이 아닌 조처라 판단하여 타협한 것이었다.

 3. 후금과 형제관계를 맺다.

명나라와 후금의 연호를 모두 쓰지 않는 것에는 타협을 보았으나, 당시 협상을 지휘한 후금의 둘째 왕자 아민이 화친을 서약하는 의식을 제안하였다. 후금의 힘에 굴복하여 1627년 3월 3일 인조는 검은 옷을 입고 대청으로 나갔다. 『인조실록』에는 그 날의 서약식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날 밤 상이 대청에 나가 향을 피우고 하늘에 고하는 예를 몸소 행하였다. 대신과 훈신은 동쪽 계단 위에 서고 호차(胡差) 등은 서쪽 계단 위에 섰으며, 승지 3명, 사관, 여러 장관들은 전상(殿上)에서 시위하였다. 도승지 홍서봉은 상을 인도하여 나오고 장예충은 유해 등을 데리고 들어왔다. 상이 익선관(翼善冠), 흑포(黑袍), 오대(烏帶) 차림으로 탁자 앞에 섰다. 도승지가 상에게 향을 피우라고 고하자, 상이 향을 피웠다. 좌부승지 이명한이 맹세문을 읽었다.
그 글에 이르기를, “조선 국왕은 지금 정묘년 모월 모일에 금국(金國)과 더불어 맹약을 한다. 우리 두 나라가 이미 화친을 결정하였으니 이후로는 서로 맹약을 준수하여 각각 자기 나라를 지키도록 하고 작은 일로 다투거나 도리에 어긋나는 일을 요구하지 않기로 한다. 만약 우리나라가 금국을 적대시하여 화친을 위배하고 군사를 일으켜 침범한다면 하늘이 재앙을 내릴 것이며, 만약 금국이 불량한 마음을 품고서 화친을 위배하고 군사를 일으켜 침범한다면 역시 하늘이 앙화를 내릴 것이니, 두 나라 군신은 각각 신의를 지켜 함께 태평을 누리도록 할 것이다. 천지 산천의 신명은 이 맹약을 살펴 들으소서.”하였다. 다 읽고 나서 서쪽 계단의 탁자 위에서 불태웠다. 예를 마치고 상은 환궁하고 유해는 나갔다. ...
호인(胡人)들이 소와 말을 잡아 혈골(血骨)을 그릇에 담았다. 이행원이 맹세문을 낭독하였다. 그 글에 이르기를, “조선국의 3국로(三國老)와 6상서(六尙書) 아무개 등은 지금 대금국의 8대신 남목태(南木太) 등과 함께 흰 말과 검은 소를 잡아서 맹약을 한다. 지금 이후로는 마음과 뜻을 함께할 것이니, 만약 금국을 적대시하여 조금이라도 불선한 마음을 갖는다면 이와 같이 피와 골이 나오게 될 것이고, 만약 금국 대신이 불선한 마음을 갖는다면 역시 피와 골이 나와 하늘 아래서 죽게 될 것이다. 두 나라의 대신들은 각각 공도를 행하여 조금도 속임이 없어야 할 것이다. 기꺼이 이 술을 마시고 즐겁게 이 고기를 먹을지니, 하늘이 보호하여 많은 복을 받을 것이다” 하였다.」
(『인조실록』, 인조 5년 3월 3일(경오))


  후금 침략 이후 50일 만에 정식 화의가 성립되었고, 후금의 군대는 철수하였다. 포로 2천 여명이 돌아왔으나, 마지막 후금군의 철수길은 순탄하지 않았다. 황해도에서 올라온 다음의 보고는 어지러운 저간의 사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산골과 해안 지대에서 아들 딸과 재물을 마음대로 쓸어갔습니다. 지금의 화친은 백성을 살리려는 계책에서 나온 것인데 백성들이 어육으로 돌아가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인조실록』, 인조 5년 3월 10일(정축))

4. 고개 드는 강경론

  광해군의 중립외교로 후금과의 충돌을 면한 조선 정부의 외교 노선은 인조 즉위 후 급격하게 강경론으로 선회하면서 정묘호란을 맞았고 결국 형제관계를 맺고 전쟁은 종식되었다. 그러나 정묘호란 이후에도 후금에 대한 강경책은 여전히 고개를 들었다. 이제껏 오랑캐라고 무시했던 후금을 명나라와 동등하게 대우하여야 한다는 조처는 인조와 서인 정권의 생리에 절대 맞지가 않았다.

  특히 후금이 통상적인 조건의 10배가 넘는 무역을 요구해 오자 인조의 분노는 폭발하였다. 전쟁의 여운이 어느 정도 사라진 1634년 인조가 내린 다음의 하교는 전쟁을 결코 피하지 않을 것임을 선언한 것이었다. 조선의 전국은 또 다시 전시 체제에 돌입했다.

「상이 비국에 하교하기를, “이기고 짐은 병가의 상사이다. 금(金)나라 사람이 강하긴 하지만 싸울 때마다 반드시 이기지는 못할 것이며, 아군이 약하지만 싸울 때마다 반드시 패하지도 않을 것이다. 옛말에 ‘의지가 있는 용사는 목이 떨어질 각오를 한다’고 하였고, 또 ‘군사가 교만하면 패한다’고 하였다. 오늘날 무사들이 만약 자신을 잊고 순국한다면 이 교만한 오랑캐를 무찌르기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아! 세상 사람이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자는 없다. 그러니 치욕을 참고 구차히 사는 것이 정의를 향해 앞장서서 대장부의 뜻을 이룩하는 것만 하겠는가. 저들의 침욕이 비록 한없는 욕심에서 나온 것이지만, 이처럼 따르기 어려운 요청을 한 것은 모두가 과인의 부덕한 소치이다. 말이 이에 이르고 보니 마음이 좋지 않다. 오랑캐가 만약 침략해 오면 과인이 앞 길에 진주하여 장사(將士)를 격려함과 아울러 서로의 군민을 위로할 것이다.”하고, 이어 미리 진주의 의식을 강론하게 하였으나, 실행하지 못하였다.」
(『인조실록』 인조 11년 2월 14일(병자))


  신흥강국 후금에 대한 현실적인 힘을 무시하고 의리와 명분을 고집한 집권층의 닫힌 의식은 내부의 국방력에 대한 철저한 점검이 없이 맞불 작전으로 후금에 맞서는 길을 택했다. 그러나 이 길은 돌이킬 수 없는 최악의 상황을 예고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