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박,역동,화려의 고려사] 고려, 후삼국 통일의 교두보, 낙동강을 장악하라 (2)

BoardLang.text_date 2007.11.20 작성자 홍영의

고려, 후삼국 통일의 교두보, 낙동강을 장악하라 (2)


홍영의(중세사 1분과)


  왕건의 굴욕, 견훤의 경주침공과 공산전투

  낙동강 유역은 고려측에서도 통일의 거점으로 중시되었다. 918년 고려를 세운 왕건은 지방 세력을 포섭하면서 후백제의 견훤과 친선관계를 유지하며 내실을 다졌다. 건국이 늦은 고려가 후백제와 처음부터 맞설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동안 왕건은 친신라정책을 추진하여 신라 판도 내의 지방세력들을 포섭하는 한편 신라왕실과 돈독한 우호관계를 유지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924년(태조 7)과 925년 두차례에 걸쳐 후백제가 고려와 신라의 교통로를 막기 위해 조물군(曹物郡: 구미의 금오산성 부근)을 공격하자, 고려는 후백제를 견제하기 위한 전장에 돌입하였다.  그러나 이 전투는 팽팽한 힘의 균형을 이루며 좀처럼 승부가 나지 않았다.  조물군 전투를 경험한 왕건은 견훤의 군사력을 감당하기가 어렵다고 판단하고, 싸움을 중지하자는 글을 써 자신의 조카를 인질로 삼아 보내는 등 화친책을 취하였다.

견훤도 이에 호응하여 인질을 보냈으나, 926년 고려에 볼모로 보낸 진호(眞虎)가 병사(病死)하자, 사인(死因)이 문제가 되어 두 나라 관계는 교전상태로 들어갔다. 이로부터 신라의 세력권인 안동(安東)으로 부터 상주(尙州)를 거쳐 합천(陜川)·진주(晋州)에 이르는 낙동강 서부일대에서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되었다. 신라와 백제가 경합을 벌였던 낙동강이 다시 고려의 남진정책과 후백제의 동진정책이 충돌하는 격전장으로 떠오른 것이다. 이들 지역은 신라의 세력권이었지만, 고려는 상주·합천·진주로 연결되는 경상도 서변을 확보함으로써 신라를 고려의 영향권으로 끌여 들이려는 것이었고, 후백제는 고려의 남진을 막고 신라를 후백제의 영향하에 두고자 한 때문이었다.

고려는 적극 공세를 펼쳐 927년부터 용주(龍州: 용궁), 운주(運州: 홍성) 등을 함락하고, 해군을 동원하여 강주(康州: 진주)와 그 근해의 섬들을 경략했다. 이어 후백제의 군사거점인 합천의 대야성을 신라와 연합하여 함락시켰다. 후백제 역시, 927년 9월에 근품성(近品城, 경북 문경군 산양면 일대)을 공격하여 불태우고, 신라 영울부(永鬱府: 영천)을 거쳐 신라 수도 교외에까지 진격했다. 견훤의 공격에 당황한 신라의 경애왕은 고려 측에 구원을 요청하자, 태조는 군사 1만을 보내 신라를 돕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해 11월에 경주를 침입한 견훤은 경애왕을 자살케 하고 김부를 왕으로 내세웠다.

견훤의 경주 만행을 소식을 뒤늦게 접한 왕건은 신라에 사신을 보내 위로하고, 정예의 기병 5천 명을 거느리고 직접 구원에 나섰다. 왕건이 공산동수(公山桐藪: 대구 팔공산 서쪽부근) 인근에 이르자, 견훤은 여러차례 접전을 치루며 재빨리 군사를 후퇴시키면서 길목인 팔공산으로 왕건을 유인하였다. 이때 신숭겸(申崇謙)은 견훤의 매복계(埋伏計)에 빠진 왕건을 구하기 위해, 자신이 왕건의 옷으로 바꿔 입고 나가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왕건은 이 전투에서 신숭겸·김락(金樂)과 같은 측근 장수와 대부분의 군사를 잃고 말았다. 견훤은 이를 기세로 대목군(칠곡군 약목면)을 빼앗았다. 이로부터 고려는 후백제의 군사적 열세에 놓이게 되고, 경상도 서부 일대가 완전히 견훤의 영향권 아래 들어갔다.

한편 겨우 몸만 빠져 나와 위기를 모면한 왕건은 신숭겸의 죽음을 슬퍼하여 시호를 장절(壯節)이라 하고, 그의 동생 능길(能吉)과 철(鐵) 및 그의 아들 보락(甫樂)을 모두 원윤(元尹)으로 삼았다. 그리고 지묘사(智妙寺)를 창건하여 그의 명복을 빌게 하였다. 예종이 지은 ‘도이장가(悼二將歌)’는 신숭겸과 김락을 애도하는 노래이며, 현재 대구시 저묘동에 있는 표충사는 신숭겸을 추모하는 사당이다.

e1fda6b375490e85b281262d2d8d0a2c_1698397
표충사 전경 - 1607년(선조 40) 경상도관찰사 유영순이 지묘사터에 표충사를 지어 신숭겸을 추모하였다. [국가문화유산종합정보서비스 사진 자료]


두 장군의 죽음을 애도한 도이장가

主乙 完乎白乎           임을 완전하게 하신


心聞 際天乙 及昆        마음은 하늘 끝까지 미치고

魂是 去賜矣中           넋은 갔지만

三烏賜敎 職麻 又欲      내려 주신 벼슬이야 또 대단했구나

望彌 阿里刺             바라다 보면 알 것이다

及彼可 二功臣良         그 때의 두 功臣이여

久乃 直隱               이미 오래 되었으나

跡烏隱 現乎賜丁         그 자취는 지금까지 나타나는구나

신숭겸과 김락은 왕건을 대신해 죽은 사람들이었다. 통일후 태조가 팔관회를 열고 뭇 신하들과 함께 즐기다가 두 공신이 그 자리에 없는 것을 애석하게 여겨, 두 공신의 허수아비를 만들어 복식을 갖추고 자리에 앉게 했다고 한다. 그랬더니 두 공신은 술을 받아 마시기도 하고, 생시와 같이 일어나서 춤을 추기도 했다고 한다. 누가 두 공신의 가면을 쓰고 허수아비 춤을 추는 놀이를 했던 것이다. 죽은 사람을 그런 것으로 추모하는 것은 신라 때 이래로 오랜 유래가 있었는데, 두 공신의 일을 연유로 해서 팔관회의 절차에 편입되어 예종 때에도 되풀이되고 그것을 예종이 보고 <도이장가>를 지었을 것이다.

〈도이장가〉는 예종(1079~1122)이 1120년 10월에 서경에 행행(行幸)하였을 때에, 팔관회(八關會)에서 가상(假像)이 둘이 있으니 그 모양이 비녀를 끼고 붉은 옷을 입었으며 [대잠자복(戴簪紫服)] 홀(笏)을 잡고 금(金)으로 얽어 있었는데 [집홀우금(執笏紆金)] 말을 타고 용약(踊躍)하며 뜰을 두루 돌았다. 왕이 이상히 여겨 좌우에 물으니 이 곧 신숭겸, 김낙이라고 말하며 그 전말을 아뢰니, 예종이 듣고 감탄하여 〈어제사운일절(御題四韻一絶)〉의 한시를 지어 공신의 죽음의 의미를 노래했다. 그러고도 만족스럽지 않아 다시 <단가이장(短歌二章)>을 지었는데, 그 단가가 〈도이장가〉이다.

예종이 서경을 순시하고, 여기에서 태조를 도와 고려 건국에 공을 세우고 순국한 두 장수를 기리는 행사를 가진 것은 왕건으로부터 이룩된 이러한 전통을 확인하는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가상희를 본 뒤, 예종이 두 공신의 후예를 불러 작위와 포상을 수여하였다는 사실은 군주의 충절을 선양하려는 의도와 후손의 요구가 부합되어 드러난 고도의 통치술로 이해된다.

예종(1079~1122)은 부왕 숙종의 여진정벌의 뜻을 간직하고 즉위하여, 군법의 정비, 여진 정벌, 관학의 진흥, 혜민국의 설치 등 많은 업적을 남겼고, 특히 시를 잘 지어 《고려사》에는 20여 편의 작품이 전한다. 그러나 예종은 고려의 융성기의 마지막 군주라고 할 수 있다. 북벌정책의 실패와 주변 국가와의 국제정세가 불안하였지만, 선정(善政)을 베풀려는 의욕은 강한 왕이었다. 예종 자신의 허물과 시정(時政)의 득실(得失)을 듣고자 언로(言路)를 널리 열어 놓았으나 신하들이 말하지 않을까 하여 〈벌곡조(伐谷鳥)〉를 노래한 것 역시 백성에게 선정을 베풀기 위한 것이다.

아무튼 예종이 지은 〈도이장가〉는 유신(維新)을 목표로 신하들의 위국충성의 결의를 굳게 하기 위한 노력으로 이해될 수 있다. 예종이 공신을 추모하고, 그 후손을 포상하며, 이를 작품화한 것으로 <도이장가> 이외에도 거란에 끌려가 죽은 하공진(河拱辰 (?~1011)을 추념하여 지은 시가 있었다. 〈도이장가〉는 <평산신씨고려태사장절공유사(平山申氏高麗太師壯節公遺事)>와 『고려사』권14에 기록이 전한다.

0ac621fe601c154af4b321b456b385a9_1698397
강원도 춘천시 서면에 위치한 신숭겸 묘 [국가문화유산종합정보서비스 사진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