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후삼국 통일의 교두보, 홍영의(중세사 1분과) 왜 낙동강이어야 하나 백 겹으로 두른 푸른 산 속에/ 百轉靑山裏 한가로이 낙동강을 지나네/ 閑行過洛東 풀은 우거졌어도 오히려 길이 있고/ 草深猶有路 소나무가 고요하니 저절로 바람이 없네/ 松靜自無風 가을 물은 오리 머리처럼 푸르고/ 秋水鴨頭綠 새벽 노을은 성성이 피처럼 붉도다/ 曉霞猩血紅 누가 알랴 게으르게 노니는 손이/ 誰知倦遊客 사해에 시짓는 한 늙은이인 줄을/ 四海一詩翁 (이규보의 “낙동강을 지나다”에서) 낙동강은 원래 이름은 ‘황산강(黃山江)’ 또는 ‘가야진(伽倻津)’, ‘황산진(黃山津)’이었는데, 고려·조선시대를 거치면서 ‘낙수(洛水)’, ‘낙동강’이라 하였다. ‘낙동(洛東)’이라는 이름은 가락의 동쪽이란 뜻으로, 가락'은 삼국시대에 가락국이었던 지금의 경상도 상주 땅을 가리킨다. 즉, 상주(가락) 동쪽으로 흐르는 강이란 뜻으로 '낙동'이란 이름이 나왔는데, 이긍익(李肯翊 1736~1806)이 지은 《연려실기술》의 ‘지리전고(地理典故)’'에는 “낙동은 상주의 동쪽을 말함이다”라고 하였다. 낙동강은 백두대간 태백산의 황지에서 흘러나와 안동, 상주, 구미, 대구, 합천, 창녕, 밀양, 김해를 흘러 부산 앞 바다와 만나는 곳에 겨울 철새들의 낙원인 을숙도를 휘돌아 1300리 긴 물을 남해로 풀어낸다. 그 강변길 구석구석에는 낙동강 제일절경이라는 경천대(擎天臺)와 반달 모양의 안동 하회마을, 보름달 모양의 예천의 회룡포(의성포)가 똬리를 틀고 앉아 있다. 이렇게 경상도를 적시며 휘돌아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 낙동강에 대해 이익(李瀷 1629~1690)은 《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 “백두산의 정간이 태백`소백산과 이어져 내려와 경상도를 동`서의 좌`우간으로 삼아 도내의 중수(衆水)를 받은 물이 낙동강의 수구에 닿으니 영남은 산형수세가 일대 결국(結局)을 형성함으로서 물산이 풍부하고 무한의 인재를 배출했으며 국가 유사시에는 최후의 보루”라고 평가하고, "영남의 큰 물은 낙동강인데 사방의 크고 작은 하천이 일제히 모여들어 물 한방울도 밖으로 새어 나가는 법이 없다. 이것이 바로 여러 인심이 한데 뭉치어 반드시 화합하고 일을 당하면 힘을 합치는 이치"라고 낙동강의 효용을 높이 평가하였다. 양산 원동의 가야진 : 신라와 가야의 교역로이자 눌지왕이 가야를 정벌하면서 왕래한 곳이다. 인근에 가야진사가 있다. 예천 회룡대에서 바라본 회룡포 : 내성천이 태극무늬 모양으로 휘돌아 나가면서 만든 모래사장에 마을이 들어서 있는 곳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완벽한 물도리동이다. 안동 풍산 부용대에서 바라본 하회마을 : 말 그대로 물이 돌아간다는 뜻으로 낙동강이 마을을 휘감고 S자로 흐르며, 산들이 병풍처럼 마을을 둘러싸고 있다. 후백제의 신라침공 거점, 합천 대야성 전투의 승전보 낙동강은 강물의 굴곡이 적고 폭이 넓으며, 물의 흐름이 빠르지 않아 남해안에서 하류를 거슬러 상류 지역 내륙 깊숙한 곳까지 뱃길이 발달하였다. 때문에 고대부터 대외 교류 및 진출이 활발하였다. 철을 기반으로 농업생산력의 증대 뿐만 아니라, 대외교역을 촉진시키며, 이 지역의 고대문화를 꽃피우는 기반이 되었다. 특히 낙동강을 중심으로 건국한 가야와 신라는 고구려·백제와 맞서면서 고대사회를 이끌어왔다. 그러나 신라 말 중앙정부의 약화를 틈타 낙동강 유역에는 다양한 지방세력이 존재하였다. 그 중에는 친신라계, 친고려계, 친후백제계로 나뉘면서 향방을 가름하였다. 낙동강 동안 유역은 신라의 영향권에 있었지만, 낙동강 서안 유역은 비교적 신라, 후백제와 고려로부터 자유로웠다. 그러한 이유로 낙동강 서안은 후백제와 고려에게 매우 중요한 지역으로, 이곳을 장악해야 신라를 압박하면서 쟁패를 다툴 수 있었다. 때문에 전국을 통일할 수 있는 요충지였던 셈이다. 후고구려의 남진과 후백제의 동진정책이 충돌한 지역은 낙동강 중유지역의 합천의 대야성과 대구의 달구벌이었다. 이 지역은 삼국시대부터 신라와 백제의 치열한 각축장이었던 곳이다. 후백제의 견훤은 남쪽으로 진주, 북쪽으로 옥천과 합천을 잇는 전초기지를 만들어 신라를 압박하는 한편, 후고구려의 남하를 막으려 하였다. 반면 궁예의 후고구려는 충주·제천 등 소맥산맥 이북지역을 장악하고 이남으로 진출을 꾀하는 한편, 영산강을 깐 나주 지역을 점령하여 후백제의 배후를 교란하고, 남해안 일대의 여러 지역을 압박한다는 전략을 짜고 있었다. 자연히 낙동강 중상류 지역과 남해안 지역은 이들의 각축장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이들 지역으로 먼저 진출한 것은 후백제였다. 후백제가 낙동강 동쪽으로 진출하기 위해서 주목한 지역은 합천의 대야성이었다. 신라를 병합하기 위해서는 대야성을 거점으로 이용할 필요성 때문이었다. 901년 궁예가 후고구려를 세우자, 견훤은 신라의 대야성을 공격해 신라를 압박하는 한편, 이를 교두보 삼아 후고구려의 남진정책에 기선을 제압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 지역은 신라에게도 매우 중요한 요충지였던만큼 후백제의 대야성 함락도 쉽지 않았다. 견훤은 916년 처음 대야성의 공격에 나섰으나, 실패하였다. 그러나 견훤은 다시 920년 강주(진주)장군 윤웅(閏雄)이 왕건에게 항복하자, 남쪽에서의 실세를 만회하기 위해 대야성 공략에 나섰다. 먼저 양상(옥천)에 성을 쌓아 배후지를 견고히 하고, 1만명의 군사를 동원하여 대량(합천)을 점령하였다. 이어 구사(마산·창원일대)를 함락시키고, 진례군(김해)으로 진출해 신라를 위협하였다. 이렇게 합천 대야성 공략으로 견훤이 낙동강 서안을 차지하자, 신라는 물론 고려에게도 큰 부담이 되었다. 낙동강 북부지역의 여러 지방세력들은 후백제의 위협과 불안속에 떨어야 했고, 신라 경명왕은 왕건에게 군사를 요청할 정도로 매우 위급한 상황이었다. 때문에 고려는 신라와 우호관계를 체결하면서 낙동강 동안의 상류지역에 거점을 마련하고자 하였다. 왕건은 후백제의 신라 침공의 유리한 거점인 강주와 합천을 장악하기 위해 927년 해군장군 영창·능식 등을 보내 남으로 강주를 공격케하고, 북으로는 대야성을 함락시키고, 장군 추허조 등을 사로잡아 송악으로 압송해 목을 베었다. 고려의 대야성 점령은 친후백제계의 지방세력에게 큰 자극을 주었으며, 많은 지방세력들이 고려에 귀부하였다. 이때 친후백제계인 고사갈이성(안동인근) 성주 흥달(興達)이 귀순하기도 했다. 흥달의 귀부로 인해 곤경에 처한 견훤은 곧바로 고사갈이성의 공격을 준비하는 한편, 신라의 경주를 공격해 경애왕과 왕비를 죽이고 김부(金傅)를 왕으로 내세우고, 많은 보물과 인질을 데리고 돌아갔다. 합천 대야성 : 신라가 백제의 침공을 막기 위해 쌓은 테뫼식 토성으로, 642년 백제에게 함락된 적이 있다. 이때 백제의 침공을 막지 못한 도독(都督) 김품석(金品釋)과 부인(김춘추의 딸)이 자결하자, 신라는 충격을 받고 김춘추를 고구려에 보내어 구원을 청하기도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