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과거제도 속으로 #2
과거의 역사에서 3년에 한 번씩 과거를 치르는 방식은 명나라 초기에 처음 제도화되었다. 조선은 건국 직후 이 제도를 도입하여 500여 년 동안 빠짐없이 3년에 한 번씩 과거를 시행하였다. 이 과거는 식년시(式年試)라고 한다. 식년시란 식년, 곧 간지가 자(子)·묘(卯)·오(午)·유(酉)로 끝나는 해에 시행하는 시험이란 뜻이다. 식년시는 모두 165회가 시행되었다. 과거를 3년에 한 번씩 치른다는 것은 곧 식년시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러나 식년시 외에도 다양한 종류의 특별시험이 있었다. 이 시험은 특별한 사유가 있을 때 왕명(王命)으로 시행하였기 때문에 시험 시기가 일정하지 않았다. 특별시험은 처음에는 모두 ‘별시(別試)’로 일컬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증광시(增廣試), 별시(別試), 알성시(謁聖試), 정시(庭試), 춘당대시(春塘臺試), 외방별과(外方別科) 등으로 구분되었다. 특별시험도 조선초기부터 시행되었는데, 전체 시행 횟수는 583회로 식년시보다 훨씬 더 많았다. 과거제가 폐지되는 고종 31년(1894)까지 시행된 식년시와 특별시험을 합치면 모두 748회로 연평균 1.5회가 된다. 그렇다면 식년시와 특별시험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또 증광시, 별시, 알성시, 정시, 춘당대시, 외방별과 등의 다양한 특별시험은 서로 어떻게 다른 것일까? 아래에서는 문과를 중심으로 이 문제를 살펴보도록 하자. 식년시는 3년에 한 번씩 시행하는 시험으로 문과와 무과, 생원·진사시, 잡과를 함께 실시하였다. 온 나라의 인재를 선발한다는 취지로 전국에서 동시에 초시를 시행하고, 서울에서 회시를 실시하여 합격자를 뽑았다. 식년시 문과는 성균관의 관시(館試), 서울의 한성시(漢城試), 지역별 향시(鄕試)로 나누어 초시를 시행한 후 240명을 선발하고, 2차 시험인 회시(會試)에서 33명을 선발하였다. 전시(殿試)에서는 국왕이 합격자 33명의 등수를 정하였다. 우리가 흔히 조선시대 문과제도로 알고 있는 시험은 실은 이 식년시 문과를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특별시험은 특정한 사유가 있을 때 시행하는 시험으로, 증광시, 별시, 알성시, 정시, 춘당대시, 외방별과 등 종류가 다양하였다. 각 시험은 그 연원이 달랐을 뿐 아니라 시험 방식도 서로 달랐다. 증광시는 원래 국왕의 즉위를 기념하는 시험으로 그 방식은 식년시와 동일하였다. 문과, 무과, 생원·진사시, 잡과를 함께 시행하는 것은 물론 초시도 전국에서 시행하였고, 선발인원도 같았다. 증광(增廣)이라는 말은 당나라 태종이 학교를 늘려 생원(生員)을 더 뽑았다는 고사(故事)에서 취하였다고 하는데, 다른 특별시험에 비해서 많은 인원을 선발한다는 특징이 있었다. 대증광시의 경우 식년시보다도 선발인원이 많았다. 이에 비해 별시, 정시, 알성시, 춘당대시, 외방별과는 문과와 무과만 실시하였고, 생원·진사시와 잡과는 시행하지 않았다. 선발인원도 식년시나 증광시보다 적었다. 또 특정 지역에서 시행하는 외방별과를 제외한 나머지 시험은 모두 서울에서만 실시하였다. 즉, 별시, 정시 등은 식년시나 증광시에 비하여 규모가 작은 시험이었다. 처음 시행한 특별 문과는 태종 1년(1401)에 태종의 즉위를 기념하여 시행한 시험이었다. 이 시험은 식년시에 준하여 초시-회시-전시 세 단계로 시험을 치르고 초시(初試)도 서울과 지방에서 나누어 시행하였다. 이처럼 국왕의 즉위를 기념하여 식년시에 준하여 시행하는 시험이 증광시로 불리게 되었다. 태종은 재위 14년(1414)과 16년(1416)에도 특별시험을 실시하였다. 그런데, 두 시험의 방식은 태종 1년 때와는 달랐다. 태종 14년의 시험은 국왕의 성균관 방문을 기념하는 시험이었다. 이때에는 의례에 참석한 성균관과 사학의 유생, 관료를 대상으로 시험을 치르고 저녁에 답안을 걷었다. 하루에 모든 시험을 다 끝낸 것이다. 이처럼 국왕이 성균관을 방문하여 성인(聖人)을 알현하고 치르는 시험은 알성시로 관행화되었다. 알성시의 시험 방식은 시기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으나 점차 하루에 모든 시험과 합격자 발표까지 마무리짓는 방식이 정착되었다. 시험 일정을 국왕의 친림이라는 의식에 맞추어 진행해야 했기 때문이다.
태종 16년의 시험은 문신(文臣)을 대상으로 하는 시험인 중시(重試)와 함께 시행하였다. 초시-전시 두 단계로 나누어 실시하였는데, 초시는 서울에서만 실시하였다. 서울의 유생과 조관들을 대상으로 시험을 시행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초시와 전시 두 단계로 시행하는 시험은 뒤에 별시로 일컬어 졌다. 조선전기에는 국가에 경사가 있어 특별시험을 시행할 때는 대개 별시를 시행하였다. 특히 중시와 함께 시행하는 문과는 반드시 별시를 시행하였다. 별시는 조선전기에 식년시와 함께 가장 많이 시행된 시험이었다. 이상에서 보듯 조선전기 특별시험은 증광시, 별시, 알성시가 있었는데, 각각의 시험 방식은 서로 달랐다. 즉, 증광시는 초시-회시-전시, 별시는 초시-전시, 알성시는 전시만 치르는 시험이었다. 이처럼 시험 방식이 다른 것은 각각의 시험을 시행하는 의의가 달랐던 데서 비롯되었다. 증광시는 국왕의 즉위를 기념하는 의례로 성대하게 치렀으나 별시는 서울의 유생과 관료를 위한 시험으로 그 단계를 축소하였다. 알성시는 성균관 방문을 기념하는 시험으로 성균관 유생들을 중심으로 소규모로 치렀다. 그 후 응시자는 전국 유생으로 확대되는 변화가 있었다. 하지만 시험은 전례를 따라 그 방식을 그대로 유지하였다. 임진왜란 후에는 이에 더하여 새로운 방식의 시험이 등장하였다. 먼저 임진왜란 중에 알성시처럼 하루에 시험을 끝내는 정시(庭試)라는 시험을 도입하였다. 정시는 본래 학교에서 수학 중인 유생이나 문신을 궁궐로 불러 치르던 시험으로 정식 과거는 아니었다. 그런데, 선조는 임진왜란 중에 민심을 위무한다는 취지로 몸소 시험장에 나가 정시와 같은 방식으로 과거를 시행하였다. 이로부터 정시가 과거의 한 종류가 되었다. 또 효종대에는 국왕이 춘당대에 나가 무사들의 기예를 관람하고 문무과를 함께 실시하였다. 이 시험은 춘당대시(春塘臺試)라고 하였는데, 역시 하루 만에 시험을 마무리 지었다. 두 시험은 알성시와 마찬가지로 국왕이 친림하는 의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따라서 시험 방식도 알성시의 예를 따라 하루 만에 시험과 합격자 발표를 모두 마무리하였다는 특징이 있다. 한편 세조대 이래 국왕이 지방을 방문할 때에는 그 지역의 유생을 위한 특별시험을 시행하였다. 또 인조대부터는 평안도, 함경도, 강화도, 제주도 유생을 위하여 특별히 중신(重臣)이나 어사(御史)를 파견하여 특별시험을 시행하였다. 이를 외방별과(外方別科)라고 하였다. 이 시험도 국왕이 친림하거나 使者를 파견하는 시험으로 하루 만에 마무리되었다.
이상에서 보듯 조선시대 특별시험은 시험 종류와 시험 방식이 다양하였다. 그 차이는 각각의 시험이 시행되는 사유가 달랐던 데서 비롯되었다. 과거는 의례(儀禮)의 성격을 지니고 그 의례에 맞추어 시험 방식을 결정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험 방식을 기준으로 보면 세 단계로 치르는 증광시, 두 단계로 치르는 별시, 한 단계로 치르는 알성시·정시·춘당대시·외방별과로 대별되어 종류가 간단해 진다. 이 중 정시는 응시자가 늘어나 영조대 초반에 초시제도를 도입하였다. 그러나 국왕이 친림하는 경우는 이전과 같이 하루 만에 시험을 마무리하였다. 특별시험은 시행 사유에 따라 전례를 참작하여 시험 종류를 결정하였다. 이 중에는 관행화된 시험도 있었는데, 국왕의 즉위를 기념할 때는 항상 증광시를 시행하였고, 국왕의 성균관 방문을 기념할 때는 알성시를 시행하였으며, 중시 때는 별시, 관무재 때는 춘당대시를 시행하였다. 이외에 국가나 왕실의 경사를 기념하는 경과(慶科)는 그때그때 시험 종류를 결정하였다. 경과는 당초 국왕의 즉위를 기념하는 시험에서 비롯되었으나 그 사유가 점점 늘어났다. 국왕과 왕비의 부묘(祔廟), 왕세자의 책봉, 입학, 가례(嘉禮), 원자(元子)나 원손(元孫)의 탄생, 중국의 황제 즉위, 왕실의 상존호(上尊號), 역모의 토벌, 왕실의 건강 회복 등도 경과를 시행하는 근거가 되었다. 이에 따라 경과를 시행하는 횟수도 늘어났다. 이것은 응시자들의 증가로 과거 시행에 대한 요구가 증대한 것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조선전기의 경과는 대부분 별시를 시행하였다. 선조대 오랜 숙원이었던 종계변무(宗系辨誣)나 전례없는 국왕의 즉위 40주년을 기념할 때에만 증광시를 시행했을 뿐이다. 조선후기에는 증광시, 별시, 정시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였는데, 대개 큰 경사나 여러 경사를 합치는 경우는 증광시, 그렇지 않은 경우는 정시를 시행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증광시를 시행할 때에는 대개 국가의 경사를 온 백성과 함께 한다는 명분이 근거가 되었다. 정시를 시행할 때에는 시험에 소요되는 시일과 비용을 줄이고, 지방 유생들이 오랫동안 서울에 체류하는 부담을 줄인다는 것이 명분이 되었다. 하지만 시험의 종류나 시행 횟수가 반드시 경사의 크기나 횟수에 비례하는 것은 아니었다. 많은 경우 전례를 따르기는 하였으나 특별히 증광시를 시행하는 경우는 정치적인 의도가 개입된 경우가 많았다. 즉, 정권이 교체된 후 신진관료를 충원하려고 할 때나 역모사건을 처리한 후처럼 민심을 수습하려고 할 때는 증광시를 시행하는 경향이 있었다. 또 정치적인 필요에 따라 이런 저런 이유를 내세워 별시나 정시를 자주 시행하기도 하였는데, 특히 국왕의 권위를 강화하려고 할 때 과거를 자주 시행하는 경향이 있었다. 역대 왕 중에서 상대적으로 과거를 자주 시행한 왕으로는 영조, 고종, 광해군, 세조를 꼽을 수 있다. 과거의 시행은 그 자체가 정치적인 행위이기도 하였다. 이상에서 보듯 조선시대 문과에는 다양한 종류의 시험이 있었다. 각 시험은 방식이 다를 뿐 아니라 과목이나 출제 경향에도 차이가 있었다. 따라서 응시자는 각 시험의 특성에 맞추어 응시 전략을 세워야만 했다. 또 시기에 따라 자주 시행한 시험의 종류는 달랐다. 식년시와 알성시는 500년 동안 꾸준히 시행되었으나 조선전기에는 별시, 조선후기에는 증광시와 정시가 더 자주 시행되었다. 이러한 차이도 유생들의 응시 전략에 영향을 미쳤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