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과거제도 속으로 #4 문과에서는 어떤 과목을 시험 보는가?
그러나 경학에 능한 것만으로는 문과에 급제하기 어려웠다. 문과는 문한(文翰)과 교육을 담당할 문반 관료를 선발하는 시험으로 사실은 문장에 보다 높은 비중을 두었다. 즉, 문과에 급제하기 위해서는 경학은 물론 역사, 제도와 문물, 문장 등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토대로 정해진 형식에 맞추어 글을 지을 수 있는 자질을 갖추어야만 했다. 조선시대 관직 가운데에는 문관만 담당할 수 있는 관직들이 있었다. 국왕문서와 외교문서의 작성을 담당하는 예문관과 승문원, 학술 자문과 서적의 편찬·출판을 담당하는 홍문관·교서관·규장각, 세자와 유생의 교육을 담당하는 세자시강원과 성균관, 실록을 편찬하는 춘추관의 관원은 모두 문관으로 충원되었다. 승정원의 경우도 사초(史草)를 작성하는 주서(注書)는 문관만이 담당할 수 있었다. 이런 관직은 학술과 문장(文章)에 관련된 업무를 수행하는 자리로 폭넓은 학술적 경륜과 문장력을 기본자질로 요구하였다. 문과는 바로 이런 업무를 수행할 전문가를 선발하는 시험이었다. 문과의 시험 과목은 문관의 역할에 맞추어 학술과 문장을 폭넓게 평가할 수 있는 과목으로 채워져 있었다. 태조는 즉위 교서에서 초장은 강경(講經), 중장은 표(表)·장(章)·고부(古賦), 종장은 책문(策問)으로 시험한다고 선포하였다. 이것이 조선시대 문과 시험 과목의 근간을 이루었다. 그 후 몇 차례의 조정을 거친 후 식년시의 시험과목은 초장의 의의(疑義)·논(論)과 강경(講經), 중장의 부(賦)와 표(表), 종장의 책문(策問)을 중심으로 정리되었다.
강경과 의의(疑義)는 모두 경학에 대한 이해 수준을 평가하는 시험이었다. 강경은 본문의 현토(懸吐)를 겸한 암송, 글자와 문장의 뜻을 해석하는 구두시험으로, 사서삼경에서 각각 한 장(章)을 뽑아 암송하고 해석하게 하였다. 이 시험에 통과하기 위해서는 말 그대로 사서삼경을 달달 외우고 그 뜻까지 다 해석할 수 있어야 했다. 만약 잠시라도 머뭇거리면 바로 ‘불통(不通)’을 받아 고배를 마셔야 했다. 이에 비해 의의는 사서와 오경에서 몇 구절을 뽑아 그 의미를 논술하게 하는 시험으로, 사서의(四書疑)와 오경의(五經義) 시험이 있었다. 사서의는 사서에 대한 종합적인 이해를 평가하는 시험으로 사서 가운데 서로 관련이 있는 구절들을 함께 제시하고 의문점을 논파하게 하였다. 오경의는 오경 중 한 책에서 몇 구절을 내고 그 뜻을 묻는 시험이었다. 강경이 본문의 암송에 비중을 둔 시험인 데 비하여 의의는 내용의 이해에 비중을 둔 시험이었다. 오경의는 뒤에 폐지되었다. 사서의(四書疑) 문제는 대개 다음과 같은 형식으로 출제되었다. 아래 문제는 명종 12년(1557) 식년시 한성시 초시에 출제된 문제로 응시자 중 한 사람이었던 이이의 『율곡전서』에 수록되어 있다. “『대학』에 이르기를 ‘그 뜻을 성실히 한다’ 하였고, 『중용』에 이르기를 ‘성실한 자는 하늘의 도요, 성실히 하려는 자는 사람의 도이다’ 하였다. 그 이른바 성실[誠]이라는 것의 천심(淺深)을 말할 수 있는가?『맹자』에 이르기를 ‘몸을 돌이켜보아 성실하다’ 하였으나,『논어』에서는 홀로 성실을 말하지 않았다. 이는 무슨 까닭인가? 이른바 ‘충신(忠信)’은 또한 무슨 뜻인가? 학자가 용공(用功)함에 어디서 시작하여 어디에서 마쳐야 하는가? 그 설명을 듣고자 한다.”[大學曰 誠其意 中庸曰 誠者 天之道 誠之者 人之道 其所謂誠者 有淺深之可言歟 孟子曰反身而誠 論語獨不言誠 何歟 所謂忠信 抑何意歟 學者用功 何始何終 願聞其說](번역문, 이래종,「疑義의 形式과 그 特性」『대동한문학』39, 대동한문학회에서 인용) 이 문제는 ‘성(誠)’에 대해 묻는 것으로 사서에서 ‘성(誠)’에 대해 언급한 것을 제시하고, ‘성(誠)’에 깊고 얕음의 차이가 있는지, 『논어』에서는 왜 ‘성’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는지, ‘성’과 ‘충신(忠信)’은 어떻게 다른지, 그리고 공부는 어디에서 시작하여 어디에서 끝나는지 하는 네 가지 문제를 제기하고 논설하도록 하였다. 사서에 각각 나타난 성(誠)에 대한 이해를 토대로 이를 종합하여 그 의미를 논변하도록 한 것이다. 문제를 받아 든 응시자는 서론, 본론, 결론을 갖춘 형식으로 답안을 작성하는데, 본론에서 문제가 제기한 내용들에 대해 조목조목 의문을 논파하고, 이를 종합한 결론을 내리도록 되어 있었다. 논ㆍ표ㆍ부는 모두 경서나 역사서, 문집 등에서 구절을 따서 문제를 출제하였다. 그러나 과목마다 정해진 문체가 있어서 문장의 형식을 달리하였다. 정해진 형식에서 어긋나면 ‘위격(違格)’이라 하여 불합격으로 처리하였다. 논(論)은 주어진 주제에 대해 논평하는 글로, 산문이다. 표(表)는 황제에게 올리는 글로 사륙변려문이라는 독특한 형식으로 작성되었는데, 이는 외교문서나 국왕문서의 작성 능력을 평가하기 위한 것이었다. 부(賦)는 운문 형식에 대한 숙련도와 문학적인 표현력을 평가하였다. 전체적으로 보면 정해진 형식 속에서 적절하게 관련 고사나 글귀를 인용하며 논리는 명료하고 문장은 우아하게 구사하는 것을 높이 평가하였다. 논·표·부는 역사서에서 출제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문제들이 출제되었다. 바람을 돌려 벼를 일으키다[反風起禾] - 부(賦) 이상과 같은 문제를 받아들면 무슨 생각이 먼저 떠올랐을까? 일단 문제로 제시된 구절의 뜻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평소 역사서나 문학서 등을 통해 중국의 고사를 숙지하고 있어야 한다. 위에서 예시한 ‘바람을 돌려 벼를 일으키다[反風起禾]’라는 구절은『서경(書經)』,『사기(史記)』 등에서 취한 것으로 주나라 성왕(成王)과 주공(周公)에 관련된 고사다. 주공이 죽은 후 크게 가물어 흉년이 들었는데, 성왕이 뒤늦게 주공의 은덕을 깨우치자 하늘이 바람을 돌려 벼를 일으켰다는 내용이다. 응시자들은 문제로 출제된 구절 뿐 아니라 전후의 맥락을 통해 그 문제의 내용을 파악해야 했다.
이를 토대로 이 문제를 출제한 의도가 무엇인지, 어떤 방향에서 글을 지어야 할지 결정해야 한다. 그리고, 고사와 관련된 자구(字句)들을 적절하게 인용하며 문장을 완성해야 한다. 정해진 문장 형식에 맞추어야 하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역사서를 비롯한 온갖 서적에서 출제되는 문제의 뜻을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가령 영조는 ‘영렬천(靈冽泉)’이라는 문제를 낸 적이 있었는데, 응시자 대부분은 영렬천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알지 못했다. 영조는 경희궁 태령전의 영렬천을 염두에 두고 출제하였으나 응시자들은 이를 대보단이나 창경궁 통명전의 열천(冽泉)으로 파악하였다. 이런 경우에는 출제 의도에 맞는 글을 지을 수 없었다. 응시자들이 문제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에 대비하여 문제에 대한 설명인 해제(解題)를 함께 제시하기도 하였다. 영조 11년 ‘나라를 세우다[肇開鴻業]’라는 문제를 출제하였는데, 누가 보아도 그 의도를 파악하기는 쉽지 않았던 듯하다. 그래서 ‘용비어천가’라는 해제를 함께 제시하였다. 이 글귀가 『용비어천가』에서 나왔다는 것을 알려 줌으로써 답안을 작성할 방향을 제시한 것이다. 책문은 경학과 역사, 시무(時務) 등에 대한 질문을 통해 주로 국가 운영에 대한 식견을 물었다. 다른 시험과 달리 장문의 문장으로 조목조목 질문을 던지는 방식으로 출제되었다. 따라서 문제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일개 유생에 불과한 응시자들이 치도(治道)에 대하여 창의적이고 논리적인 답안을 작성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가령 명종 13년(1558) 별시 초시에는 ‘천도(天道)’에 대해 묻는 책문이 출제되었다. 이 책문은 ‘천도는 알기도 어렵고 말하기도 어렵다[天道難知亦難言也]’는 구절로 시작하는 476자의 장문이었다. 그 가운데 ‘해와 달이 하늘에 걸려서 한 번은 낮이 되고 한 번은 밤이 되는데, 더디고 빠른 것은 누가 그렇게 한 것인가?[日月麗乎天 一晝一夜 有遲有速者 孰使之然歟]’를 시작으로 천문·기상·재이와 관련된 20여개의 질문을 던져 유생들이 조목조목 대답하도록 유도하였다. 이 문제는 천도(天道)와 재이(災異), 인사(人事)의 관계를 묻는 것이었다. 이 시험에서는 율곡 이이(李珥)가 장원을 하였는데, 그의 답안은 ‘하늘의 일은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다[上天之載 無聲無臭]’로 시작하는 2,484자의 장문이었다. 그는 ‘만화(萬化)의 근본은 오직 음양뿐입니다’이라는 말로 첫 번째 물음에 답한 뒤 조목조목 제기한 문제들을 논변하고, 만물의 조화는 국왕의 신독(愼獨)에 달려 있다는 말로 글을 마무리하였다. 이 글은 흔히 ‘천도책(天道策)’으로 일컬어진다. 책문은 장문에 걸친 질문과 이에 대한 응답을 통하여 응시자의 식견을 종합적으로 평가하는 시험이었다. 이 때문에 조선전기에는 여러 과목 중에서도 책문이 제일 중시되었다. 그러나 답안을 장문으로 작성해야 한다는 특성 때문에 시험 시간이 짧은 알성시나 정시에서는 출제가 어려웠다. 그리하여 조선후기에는 책문의 비중이 현격하게 줄어들었다. 식년시를 제외한 나머지 시험은 식년시 과목 중에서 일부 과목을 제외한 형태였다. 증광시에는 강경, 별시에는 의의와 강경이 제외되었다. 정시·알성시에는 의의·강경과 논을 제외한 나머지 과목으로 한 문제를 출제하였는데, 주로 부나 표를 출제하였다. 이외에도 잠(箴)·명(銘)·송(頌) 등 여러 과목이 출제되기는 하였지만 출제 빈도로 보면 부·표·책문이 문과의 핵심 과목이었다. 그렇다면 이런 문제들이 출제되었을 때 유생들은 모두 답안을 작성할 수 있었을까? 그렇지는 못했다. 평소에 익히지 않은 글귀가 출제되거나 생각해 보지 못한 문제들이 출제된다면 답안을 작성하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또 제한된 시간 안에 문장의 형식과 내용을 제대로 갖추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실제 응시자 중에 어느 정도가 답안을 제출하느냐 하는 것은 문제의 난이도에 따라 달랐다. 가령 정조 18년 정시 때에는 응시자 17,914명 중 11,402명, 64%가 답안을 제출하였다. 그러나 정조 23년(1799) 알성시 때에는 응시자 57,393명 중 12,593명, 22%만이 답안을 제출하였다. 전체적으로 보면 19세기 전반까지는 응시자의 50%이상이 답안을 제출한 사례는 잘 보이지 않는다. 오늘날 시험장에서 그러하듯 조선시대 유생들도 문제가 출제되는 순간 쾌재를 부르기도 하였고, 긴 시간의 노력이 허사로 돌아갔다고 느끼며 좌절하기도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