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진(중세2분과) 5. 홍역(紅疫), 선물[牛]에 실려 온 고통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의 나라, 조선에서 농사짓는 백성들의 간절한 꿈 중에는 소 한 마리를 갖는 것이 포함되었다. 15~19세기에 이르는 500년 동안 농민들은 한 번도 이러한 꿈을 버린 적이 없으며, 버려야 할 이유도 없었다. 그만큼 농사짓는 이에게 소는 절실한 것이었다. 농민들의 오랜 꿈은 소의 사육이 늘어나면서 서서히 충족될 수 있었다. 15세기 초 전국에서 3만여 마리로 추산되는 소의 사육두수는 20세기 초 170여 만 마리로 늘어났기 때문이었다. 소를 갖게 된 농민들은 외양간을 집안에 짓고 정성스레 소를 돌보기 시작했고, 농사꾼에게 소란 가족이었다. 사람과 함께 가족의 일원이 된 소는 사람들에게 커다란 축복과 함께 약간의 고통도 가져왔다. 그 중 홍역, 천연두는 소를 숙주로 살아가던 병원균으로서, 소의 사육이 급속히 늘어난 조선시대에 사람들에게 큰 고통이 되었다. [그림1] 홍역 바이러스의 모습과 감염에 따른 증상 (좌 :홍역 바이러스의 전자현미경 사진, 위키백과. 우: 16세기 아즈텍의 홍역 환자, 위키백과) 그렇다면 조선시대에 홍역은 어느 정도 발생하였고, 이에 대한 인식은 어떻게, 왜 바뀌게 되었을까? 거의 모든 사람들이 살아가는 동안 한 번은 겪게 되는 것이 홍역의 특성이지만, 사람들이 살아가는 생태환경의 특성에 따라 발생의 빈도와 강도에 상당한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외부와 교류가 상대적으로 적은 산골이나 농촌의 경우 홍역의 유행 간격은 길어지고, 병증은 더욱 심하게 발생할 수 있다. 이와 달리 바이러스가 토착할 수 있는 도시지역은 매년 혹은 격년으로 발생하지만 병세는 가볍게 나타나기도 한다. 먼저 연대기인 ‘실록’과 ‘일기’에 나타난 홍역(紅疫)에 대한 기록의 빈도를 살펴보자. ‘홍역(紅疫)’은 기록의 빈도가 적기 때문에 홍역을 나타내는 다른 용어인 ‘창(瘡)’으로 검색하여 20년을 단위로 그 증감추이를 나타낸 것이 다음 [그림 2]이다. [그림2] 조선시대 홍역(紅疫) 기록 추이(검색어 : 瘡) [그림 2] 를 통해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홍역은 거의 항상적으로 발생하였지만, 전국적 차원에서 발생빈도가 높아지는 시기가 발견된다. 이를 통해 홍역 발생에 어느 정도의 주기성이 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실록’의 자료에서 홍역의 발생이 도드라지게 많아 보이는 시기는 1581~1600, 1601~1620, 1661~1680, 1781~1800에 해당하는 기간이라고 할 수 있다. ‘일기’의 통계에서는 그 주기가 더 빈번한 것으로 보이는 데, 1661~1680, 1701~1720, 1721~1740, 1741~1760, 1781~1800, 1801~1821에 해당하는 시기가 홍역에 대한 기록이 두드러져 보인다. ‘실록’에서 홍역에 대한 논의가 두드러진 시기는 ‘일기’에서도 겹치지만, ‘실록’에서는 두드러지지 않았던 시기에도 ‘일기’에서는 홍역에 대한 상당한 논의가 이루어진 기록을 살필 수 있다. 홍역의 발생 추이는 연대기의 구체적인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현종 9년(1668)에 8도에 홍역이 크게 유행하여 죽은 자가 매우 많았고, 숙종 33년(1707)에 평안도에서 1만 수천 명이 죽었고, 서울과 다른 지방 역시 비슷한 수준이었다고 할 정도로 수 만 명이 홍역으로 인해 사망하는 큰 인명 피해가 발생하였다. 이듬해에는 하삼도에서 발생한 홍역이 크게 유행하면서 1만 명 이상이 사망하였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1) 영조 5년(1729)에도 홍역이 크게 일어나 1만 명 가량이, 이듬해에는 함흥에서만 홍역으로 죽은 자가 500여 명이나 되었다. 2) 연대기에서 확인되는 이러한 홍역의 대유행은 후대 개인들의 기록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성호 이익(李瀷, 1681~1763)은 그의 책에서 마진(麻疹)이라는 병이 옛날에도 있었으나 두루 퍼져서 크게 극성을 부린 것은 라고 하면서 다양한 질병의 예후와 처방을 수집하고, 그 효과를 설명하였다. 그렇다면 이전부터 일상적이었지만 그리 치명적이지 않았던 홍역이 17세기 후반에 이르러 전국에 걸쳐 엄청난 숫자의 인명을 앗아가는 전염병으로 전환된 이유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에는 치밀한 연구를 통해 매우 엄정하고 해명해야 할 문제이기에 매우 조심스럽지만, 생태환경의 변화를 고려해야 한다는 점은 분명하게 지적할 수 있다. 홍역은 신석기 시대 이래 사람과 소를 숙주로 살아가던 홍역바이러스[measles virus]는 사람과 소의 군집이 증가하고, 이동과 교류의 증가로 접촉이 많아지면서 상호 전파되고, 변이가 나타날 가능성을 높이게 된다. 4) 이 가운데 일부는 독성을 높여 치사율을 높이고, 병의 전파가 더 잘 되는 방향으로 변이가 이루어질 가능성을 갖게 된다. 15~16세기 이래 인구가 증가하고, 소의 사육 개체수가 증가하였으며, 병자호란을 전후하여 우역이 발생한 이래 몽골 지역에서 많은 수의 소가 도입된 바 있다. 여기에 청이 중원을 장악하기 위한 전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진행된 대규모 군사 활동으로 광범위한 지역에 고립적으로 분포하던 다양한 미생물들이 넓은 지역으로 확산될 수 있었다. 5) 그 결과 17세기 후반에는 우역, 천연두, 홍역, 성홍열 등 다양한 미생물이 이전보다 그 숫자가 크게 확대된 인구를 가진 촌락에서 빠른 속도로 늘어나는 소를 매개로 번성하며 변이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이전과 확연히 구분되는 전국적이며, 치사율이 높은 홍역이 발병할 수 있었다. 미시생태의 변화를 감지한 조선은 국초부터 불교적 제의를 통한 질병 관리에서 벗어나 체계적인 의학 연구를 통한 처방으로 전환하였다. 문종 즉위년(1450)에 국왕은 혹은 홍역(紅疫)을 만나서는 중들을 모아서 여러 날 동안을 기도했는데도, …… 라고 하였다. 이는 질병에 대한 불교적 구제를 지양하고, 의학적 처방을 통한 질병의 구호가 국가 정책의 핵심이 될 것임을 선언한 것이었다. 세종대에 이미 『향약집성방』과 『의방유취』가 편찬 되었고, 지방제도를 개편하며 전국 330여개의 군현에 수령과 함께 의생을 상주시키면서 국가가 백성의 건강을 말단 행정조직을 통해 관리하겠다는 분명한 의지가 표명된 바 있었기에 이러한 견해가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17세기 후반에 홍역의 대유행에 대응하여 국가에서는 홍역 등 전염병의 발병에 대응하여 이를 치료할 수 있는 의학적 처방을 마련하여 해당 지역에 의원을 보내 백성을 구제하게 했다.7) 이러한 대책은 홍역이 발생하자마자 곧바로 이루어졌고, 따라서 영조 5년(1729)년에 함흥 일대에 홍역이 발생하여 500여 명이 사망했다는 보고를 접하자 숙종 33년과 마찬가지로 중앙에서 의원을 파견하고, 약을 보내 구제토록 하였던 것이다. 8) 따라서 영조 51년(1775) 서울에 홍역(紅疫)이 유행하게 되자 그 비방으로 수많은 인명을 구제한 바 있는 이헌길(李獻吉)의 예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의학에 관심을 가진 이들은 전염병에 대응할 수 있는 처방에 관심을 기울이며, 이를 수집하고 시험하면서 자신만의 독특한 처방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였다. 1)『肅宗實錄』 卷45, 肅宗 33年 4月 戊申; 『肅宗實錄』 卷45, 肅宗 33年 11月 乙卯; 『肅宗實錄』 卷46, 肅宗 34年 2月 甲午; 『肅宗實錄』 卷46, 肅宗 34年 3月 庚戌. 2) 『英祖實錄』 卷24, 英祖 5年 10月 壬寅. 3) 『星湖僿說』 卷10, 人事門, 麻疹. 4) 장회익(『물질, 생명, 인간-그 통합적 이해의 가능성』, 돌베개, 2009, 109~138쪽)은 이를 ‘자체촉매적국소질서’로서의 특성을 갖는 생명체의 기본적 속성이라고 설명한다. 5) 횡대의 대형으로 넓은 지역을 몰이 사냥하듯이 행군하는 청 팔기군의 행군 방식은 특히 미생물과의 접촉을 늘리고, 생물학적 거래를 통한 확산을 촉진할 수 있었다. 6) 『文宗實錄』 卷1, 文宗卽位年 3月 乙巳. 7) 『肅宗實錄』 卷46, 肅宗 34年 2月 甲午. 8) 『英祖實錄』 卷24, 英祖 5年 10月 壬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