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환인·집안답사기②] 고구려 유적지 답사기 권순홍(고대사분과) 전야의 여운을 온몸으로 지닌 채, 아침 7시 반에 호텔을 나섰다. 오녀산성은 지금 중국인들에게도 인기 있는 관광지 중 하나이다. 휴가철인 만큼 오녀산성을 오르는 것은 이른 시간이 유리하리라 판단했건만, 예상보다 이 곳 사람들은 부지런했다. 7시 45분. 합달하를 건너자마자 등장한 오녀산성 주차장에는 이미 여러 대의 버스가 주차되어 있었다. 원래는 이곳에서 박물관을 관람한 후 셔틀버스를 타고 약 10분가량 오녀산의 중턱까지 이동한 후 도보로 정상에 오르는 것이 일반의 경우이지만, 우리는 사람이 몰려 있는 박물관을 뒤로 미루고 오녀산에 먼저 오르기로 했다. 8시 5분. 가이드의 꽌시(關係)덕에 우리는 새치기하듯 대기줄을 무시하고 셔틀버스를 탈 수 있었다. 점점 가까워오는 오녀산의 모습은 역시나였다. 정상부가 깎아지른 듯한 절벽을 이루고 그 위에는 평지를 갖는 일명 butte지형은 고금을 막론하고 신성성을 내뿜는 듯하다. [사진1] 오녀산성 ⓒ권순홍 셔틀버스는 절벽 바로 아래까지 우리를 데려다 주었고, 이제 정상을 잇는 막막한 계단을 오를 차례이다. 전야의 여운이 제정신을 감추어준 덕에 쉬지 않고 오를 수 있었다. 8시 40분. 일행 모두가 오녀산 서쪽으로 정상에 도달했다. 이미 신석기 시대부터 사람들은 이곳에 흔적을 남겼는데, 우리의 관심과 마찬가지로 중국관계당국의 관심 역시 고구려 건국기(제Ⅲ기)의 흔적인 듯하다. 안내하고 있는 대부분의 유적들이 고구려와의 관련성을 갖고 있었다. 오수전과 대천오십전 등이 출토되어 편년의 기준으로서 매우 중요한 1호 대형건물지를 지나 서쪽 끝에 이르니 환인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하늘이 도운 탓에 날이 좋아서 다행이었다. 다시 정상의 남쪽 끝에 다다르니 환인시내보다 더 가까이에서 수몰된 고려묘자촌의 위치를 가늠할 수 있었다. 특기할만한 것은 동쪽의 북전자향이 산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북전자향은 고구려 초기 도성으로 비정되기도 하는 나합성이 위치한 곳이므로, 오녀산성에서 이 곳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동쪽의 아주 가파른 계단을 타고 절벽 아래까지 내려오니 곳곳에서 성벽을 발견할 수 있었고, 동문과 초소유적 그리고 남문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서문은 절벽 위, 산의 정상부에 위치한 반면, 동문과 남문은 절벽 아래 산의 중턱에 자리한 점은 산성의 정문이 동문 혹은 남문일 가능성을 품은 것은 아닌지. [사진2] 오녀산성 정상에서 바라본 전경 ⓒ권순홍 [사진3] 오녀산성 동문 터 ⓒ권순홍 [사진4] 오녀산성 동벽 ⓒ권순홍 다시 셔틀버스에 탑승하니 10시 20분. 10분 후 예의 박물관에 도착했다. 원칙적으로 사진촬영은 허락되지 않았으나 그런 사실을 관람이 끝나갈 때쯤 인지한 것 또한 하늘이 도운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비단 오녀산성 관련 유물뿐만 아니라, 환인과 그 주변의 고구려 관련 유적 유물들이 꽤 많이 전시되어 있지만, 역시 도록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것으로 환인과의 짧은 만남은 마무리되었다. 점심 식사 후 12시. 우리는 집안을 만나러 나섰다. 환인에서 집안으로 가는 길은 시대마다 차이가 있었던 것 같다. 고구려 당시에는 환인에서 신개하와 마선하를 따라 집안에 이르는 길이 활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길은 조선시대에 제작된 지도를 통해서도 확인 할 수 있다. 아래의 맨 왼쪽 지도는 신충일이 1596년 건주 누르하치성을 다녀와서 쓴 『건주기정도기』의 일부이다. 여기서 皇城으로 표시된 곳이 지금의 국내성이고, 그 왼쪽으로 加也之川이 통구하, 仇郞哈川이 마선하, 蔓遮川이 신개하를 가리킨다. 이를 통해 16세기까지의 교통로가 마선하와 신개하를 따라 이어짐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19세기말에는 환인에서 혼강을 따라 압록강과의 합류지점까지 남하했다가 다시 압록강을 따라 북상하는 길이 활용되었던 것 같다. 아래의 가운데 지도는 일본 참모본부에서 1894년 제작한 지도이다. 이 지도를 통해서 환인과 집안을 연결하는 길이 동가강(혼강)을 따라 남하하다가 압록강변에서 다시 북상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반면에 오늘날 환인과 집안을 잇는 주요교통로는 환인에서 동북쪽의 통화를 거쳐 다시 집안으로 남하하는 길이다. 이동수단과 지역사회의 변화에 따라 도로상황이 많이 달라졌겠지만, 이 세 가지의 길 중에서 오늘날 활용되는 길이 가장 멀리 돌아가는 길이라는 점은 아이러니하다. [사진5] 『건주기정도기』(1596) 일부/ 『만주전도』(1894) 일부/ 각 시기별 교통로 ⓒ권순홍 편집(연행록전집/박준형(고대사분과)소장/구글지도) 오후 3시 25분. 집안분지의 동북쪽 고개를 넘어 집안시내로 입성했다. 차는 왼쪽으로 집안 시내를 스치듯 지나 계속 서쪽으로 달려 3시 40분. 마선향에 위치한 서대묘 앞에 멈춰 섰다. 산의 남쪽 기슭에 어마어마한 양의 돌들이 쌓여 있다. 아래쪽에는 계단식 적석총의 흔적이 일부 남아 있지만, 많이 무너져 흘러내려 마치 쌍분 같은 모습이다. 감히 올라보니 상당수의 기와편을 비롯하여 매끈매끈하고 동글동글한 강돌과 모나고 거친 산돌이 뒤섞여 있다. 강돌과 산돌의 섞임은 이후 다른 고분에서는 잘 찾아보기 힘든 양태였다. 오후 4시 10분. 이번에는 서대묘에서 약간 동쪽, 거의 비슷한 입지에 자리한 마선626호분에 이르렀다. 서대묘와 눈에 띄게 다른 점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모나고 거친 산돌로만 이루어졌다는 것, 다른 하나는 기와편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마선626호분과 서대묘의 조성 시기는 달리 볼 수 있지 않을까. 마선626호분에서 다시 마을로 내려와 보니 곳곳에 고분들이 숨어 있다. 마을 전체가 고분군이었는데, 나중에 확인해보니 바로 이곳이 최근 1~2세기경의 고구려 유적이 발견된 建疆村이었다. [사진6] 서대묘 ⓒ권순홍 [사진7] 서대묘에서 바라 본 건강촌 ⓒ권순홍 [사진8] 마선 626호 ⓒ권순홍 [사진9] 마선626호와 건강촌 ⓒ권순홍 [사진10] 건강촌내 고분 ⓒ권순홍 오후 4시 45분. 건강촌을 통과하여 동쪽으로 마선하에 다다를 때쯤, 집 앞에 나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시던 할아버지 두 분이 우리를 경계 섞인 시선으로 살피기 시작했다. 우리가 구다리 옆을 통해 강변으로 내려가자 경계의 시선은 눈총과도 같아졌다. 아마 집안고구려비 발견지점을 살피는 외국인들이 마음에 안 드셨던 모양이다. 집안고구려비는 빨래판으로도 사용되었다더니, 실제 근처에서 아낙 여럿이 빨래 방망이를 두드리고 있어 가히 알 만 했다. 우리는 쓰레기더미 같은 집안고구려비 발견지점을 확인한 후 발길을 돌렸는데, 두 할아버지의 눈총은 우리가 구 다리를 건너 시야에서 벗어날 때까지 여전했다. [사진11] 집안고구려비 발견지점. 건너편에 빨래하는 아낙들이 보인다 ⓒ권순홍 [사진12] 집안고구려비 발견지점에서 본 구다리. 다리 위 할아버지 두 분이 보인다 ⓒ권순홍 오후 5시 15분. 오늘의 마지막 일정이라는 게 하늘도 아쉬우셨는지, 우리가 칠성산871호를 찾는 걸 쉽게 도와주지 않으셨다. 몇 번의 유턴과 후진 후에야 칠성산871호를 만날 수 있었다. 칠성산 동남쪽기슭에 자리한 이 고분은 규모도 마선626호와 비슷하고, 모나고 거친 산돌이 쌓여 있다는 점에서는 같았지만, 기와편이 다수 보인다는 점과 기단석이 꽤 남았다는 점에서는 달랐다. [사진13] 칠성산871호 ⓒ권순홍 오후 5시 30분. 칠성산을 내려와 저녁식사를 하러 집안 시내의 식당에 들어서니, 갑자기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천둥이 울고 번개가 번쩍여 내일 답사가 걱정이었지만, 우리의 답사대장은 내일 걱정은 내일로 미루어 두고 여독을 푸는데 전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