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구검기공비는 규형비(圭形碑)인 듯 하일식(고대사분과, 연세대 사학과 교수) 2014년 5월 4일. 한국역사연구회 고대사분과원들, 몇 대학 대학원생들과 함께 들린 심양 요령성박물관에는 관구검기공비(毋丘儉紀功碑)가 전시되어 있었다. 오녀산성 전시관에 있는 것이 복제품이므로, 요령성박물관에 전시된 것이 실물이 아닐까 생각된다.
이 사진을 보면 알 수 있듯이, 행이 왼쪽으로 갈수록 각 행의 첫 글자의 위치가 조금씩 위로 올라가고 있다. 종이에 글을 쓴 다음에 다듬은 돌 위에 붙이고 새긴 것이 아니라, 다듬은 돌 위에 바로 글자를 쓰고 새긴 결과이다. 오른손잡이가 바로 글을 쓰다보니, 왼쪽 행으로 갈수록 조금씩 올라간 것이 아닐까... 짐작한다. 그런데 흔히 '관구검기공비'라고 부르지만, 과거 일본인들이 그렇게 부른 것이고. 내용을 찬찬히 읽어보면 관구검의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그렇다고 해서 관구검과 무관하다고 단정하기도 어렵다. 부서져나간 곳에 이름이 있을 수도 있기 때문). 다만 이 비가 관구검의 고구려 침공 무렵에 만들어졌다는 것은 단편적인 내용을 통해서도 수긍이 가는 만큼, 명칭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하기는 애매하다. 그런데 위나라에서 고구려를 공격한 장수의 이름도 관구검이 아니라 '무(毋)구검'으로 읽는 것이 바르다는 것은 이미 학계에 알려져 있었다. 몇 년 전에 일본인 학자 다나카 도시아키(田中俊明)의 추적을 통해 확인된 내용이기도 하다. 다나카는 중국 산서성(山西省) 태원(太原)의 도교사원 박물관인 순양궁(純陽宮)에서 '무구씨조상비'(毋丘氏造像碑)를 직접 조사하여 관구검이 아니라 무구검임을 확인하였다.(2008『한국의 고고학』9) 그러나 오랜 관행으로 우리는 여전히 관구검이라고 부른다. 강감찬의 귀주대첩도 마찬가지이다. 한자로 龜州인데, 북한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현지에서도 '구주'라고 부른다고 한다. 그리고 북한 책에서는 모두 구주전투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오랜 관행으로 귀주대첩이란 이름에 익숙해 있다. 빨리 고쳐야 할 것이다. 현존 무구검기공비 비편의 크기는 세로 26.6cm, 가로 26.3cm이다. 글씨체는 예서체(隸書體)이다. 위의 비편에 새겨진 글자를 판독하면 아래와 같다.
정시 3년은 242년(동천왕 16)이다. 고구려 반(反)이란 것은 고구려가 먼저 압록강 하구에 있는 서안평(西安平)을 공격한 것을 뜻한다. (그래서) 7아문(牙門)을 독려하여 고구려를 (토벌했고), (정시) 5년에 (고구려가 다시) 견구(遣寇)하자 (정시) 6년에 군사를 돌려... 아문은 장군을 일컫는 말이다. 그 뒤로 이어지는 내용은 공격에 참여했던 군 지휘관의 명단을 열거한 것으로 보인다. 이 때 고구려 공격에 참여한 군대는 위(魏)나라 군사만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유목민족인 오환도 동원된 것으로 보인다. 오환족의 우두머리인 선우(單于)가 나오기 때문이다. 이 때 오환의 선우는 위(魏)의 지시에 따라 동원된 경우일 것이다. [魏를 巍로 판독한 경우가 많았으나 실물을 직접 보면 魏가 분명하다 - 아래 사진 참고] [사진2] 관구검기공비 "軍魏" 부분 ⓒ하일식 원래 이 비는 1906년에 소판차령(小板岔嶺)의 도로 공사 중에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당시의 집안현(輯安縣 - 오늘날의 集安이라는 표기는 1960년대 이후에 중국 정부에서 문자 간소화를 추진하면서 바꾼 글자이다) 지현(知縣) 오광국(吳光國)이 소장하였다고 알려졌다. 그러던 것이 지금 요령성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는 것이다. 몇 년 전에 요령성박물관을 방문했을 때는 전시되어 있지 않았으나 이번에 볼 수 있었다. 무구검기공비 실물을 보면서 언뜻 느낀 것이, 이 비가 규형비(圭形碑)가 아닐까 하는 점이었다. 규형비는 일반적으로 중국 후한 때부터 널리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진다. 규형비는 비석의 윗부분을 세모꼴로 만든 비석이다. 간혹 구멍을 뚫어놓는 경우도 있다. 2012년 7월에 집안에서 발견된 고구려수묘비가 규형비이다. 중국 서안(西安)의 비림에 가면 이런 비를 드물지 않게 볼 수 있다. [사진3] 鄧太尉祠碑(前秦 符堅 建元 元年 367년, 西安 碑林) ⓒ하일식 [사진4] 于孝顯碑(唐 640년, 西安 碑林) ⓒ하일식 위에서 본 듯이, 규형비의 경우에는 대개가 상단부 삼각형 안에 제액(題額 : 비석이 제목)을 새기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2012년에 발견된 고구려 수묘비도 규형비였지만 제액은 없었다. 그러면 다시 무구검기공비로 돌아가 보자. 비의 오른쪽 상단부는 이렇게 생겼다. 우연히 이런 모양으로 쪼개져 나갔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글자가 새겨진 부분의 측면보다는 표면이 거칠어 보이기 때문이다.
글자가 새겨진 상단이 가지런한데, 그 위에는 많은 여백이 있지만 글자를 새기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현존 비편의 오른쪽 상단이 깨져나간 곳이라기보다는 원래 거칠게 다듬은 부분일 가능성이 크다는 점. 왼쪽 상단의 깨진 부분과 비교하면 대조적이다. 또 현존 비편이 총 7행인데, 4행부터 고구려 공격에 참여한 군 지휘관의 명단이 열거되는 것으로 보아, 비문 전체가 많은 내용을 포함하지는 않으리라 짐작된다. 따라서 오른쪽 상단의 삼각형의 한 변을 위로 연장시켰을 때, 대략 총 10행 안팎의 분량이 아닐까 추정된다. 아래 그림은 비석 상단부의 세모꼴 공간의 각도를 추정하고, 그에 맞추어서 글자의 간격을 배열해본 것이다. 삼각형의 모양을 더 넓게 잡으면 공간도 더 넓어진다. 그러나 앞서 본 중국 규형비의 세모꼴 공간을 감안하여 대략 이 정도가 아닐까... 추정한다면. 무구검기공비는 약 9행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겠다. 상단부 삼각형 공간을 좀 더 넓게 잡으면 10행 정도로도 추정이 가능할 듯하다. 어쨌든 이번 답사에서 무구검기공비를 보고, 이 비가 규형비였을 가능성을 생각하게 된 것이 작은 성과라면 성과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