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여름수련회 참관기 김충현(중세2분과) 지난 7월 7~8일 한국역사연구회의 여름 수련회를 다녀왔다. 본래 한역연의 회원은 아니지만 우연한 기회로 여름 수련회에 동행 할 수 있었다. 처음 연락을 받고 동선을 보니 평소 관심은 있었으나 발걸음이 잘 떼어지지 않았던 곳이라 내심 기대를 하게 되었다. 공부가 짧은 필자로서는 여러 선생님들께 배운다는 생각으로 참여하였다. 이번 여름 수련회에서는 담양지역의 원림(園林)들과 정자, 서원을 중심으로 돌아보는 여정이었다. 특히 소쇄원(瀟灑園)과 명옥헌정원(鳴玉軒庭園)은 우리의 원림이 가진 아름다움과 멋을 경험할 수 있었다. 몇 해 전에 중국의 상해와 소주에 있는 예원(豫園)과 졸정원(拙政園)을 둘러본 적이 있었는데, 규모 부분에서는 중국의 것이 더 크고 화려했지만 자연과 수수하게 어우러짐은 우리의 원림문화가 한 수 위이지 않을까 싶다. 특히 소쇄원에서 물길을 인위적으로 막지 않고 자연스럽게 흐를 수 있도록 배려한 오곡문(五曲門)은 조선 원림문화의 격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오곡문과 뒤편 산을 바라보며 차경(借景)이라는 표현에 대한 의미를 다시금 떠올릴 수 있었다.
재미있었던 것은 소쇄원과 명옥헌이 경영자에 의해 다른 개성을 가졌다는 점이었다. 소쇄원은 입구에 빽빽이 심어져있는 대나무숲을 지나 내부로 들어서니 마치 다른 세상으로 들어온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는 아마도 소쇄원의 경영자였던 양산보(梁山甫)의 심정이 투영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은사인 조광조가 유배된 후 세상에 뜻을 두지 않고 은둔생활을 했던 양산보의 삶을 상기하면 그러한 소쇄원의 구조를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명옥헌은 소쇄원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소쇄원이 계곡을 중심에 두고 조성되었고 외부와 격리된 느낌이라면 명옥헌은 건물 앞에 연못이 있고 트여있는 느낌이었다. 이러한 구조와 느낌의 차이는양산보와 오희도(吳希道)가 세상에 대해 가졌던 의식이나 생각의 차이에서 오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특히 명옥헌은 꽃이 피는 시기를 맞춰 다시 찾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편 조선시대 호남지역 유림의 네트워크가 정자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는 고영진 선생님의 설명이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학구당(學求堂)이 가지는 특수성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조선시대 교육기관으로 중앙의 성균관, 지방의 향교, 서원, 서당 등에 대해서는 흔히 들을 수 있었는데 학구당은 다른 지역에서 찾아볼 수 없는 형태라고 한다.
환벽당(環碧堂)과 식영정(息影亭) 등을 둘러보고 담양지역에서 유명한 메타세콰이아 가로수길을 들려 잠시 쉬어갈 수 있었다. 일제강점기 담양군수가 조성했다는 메타세콰이아 나무들이 길게 늘어선 모양이 제법 운치가 있었다. 날도 좋고 분위기도 좋아서인지 많은 가족들과 연인들이 산책도 하고 사진을 찍기도 했다. 가로수길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석당간(石幢竿)과 오층석탑이 있었다. 다른 사지(寺址)나 고찰에서 당간지주만 남아있는 경우는 여럿 보았지만 당간지주와 당간이 오롯이 남아있는 경우는 처음 보아서 신기했다. 그리고 길 건너에 위치한 오층석탑 역시 옥신(屋身)과 옥개석(屋蓋石) 사이 굄돌이 다른 탑의 양식과 조금 다른 형태였다. 탑 주변에는 발굴을 하는 모양이었는데 당간이나 탑, 남아있는 터를 보면 규모가 꽤 컸던 절이었던듯 싶다. 주위에 기와편이 여럿 보였다. 저녁 식사는 국밥이었다. 부산의 돼지국밥과 비슷하면서도 조금 달랐는데 전라도 음식이어 그런지, 필자가 평소 좀 싱겁게 먹어서 그런지 국물은 좀 짰다. 하지만 장맛비가 멈추고 더운 날씨에 땀을 많이 흘렸더니 좀 짠 음식에 가벼운 소주 반주가 반갑게 느껴졌다. 숙소는 고영진 선생님께서 준비해주신 고택이었다. 어두워진 다음에 도착해서 전체적인 모습을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너른 마루에 들어온 불빛으로 대청 앞 마당이 밝았다. 쉬는 시간에 잠시 대문 밖에 나왔는데 불빛이 거의 없는 시골이어서 그런지 산등성이 건너편 광주의 위치를 도시의 불빛으로 가늠할 수 있었다. 이튿날 일정은 미암 유희춘(眉巖 柳希春)기념관과 광주의 국립5·18민주묘지, 기대승(奇大升) 선생을 모신 월봉서원, 김인후(金麟厚) 선생의 필암서원을 거쳐 다시 서울로 돌아오는 코스였다. 둘째날 일정 중 국립5·18민주묘지가 가장 기억에 남았다. 민주묘지에서 정식 참배를 하고 비석 뒤에 새겨진 문구 하나하나 들여다보니 새삼 가신 분들에 대한 고마움과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종종 사진이 있는 묘가 있었는데 지금의 필자 나이보다 훨씬 어린 학생이거나 시민이었다. 그 어린 나이에 행동으로 나설수 있었던 용기에 다시금 고개가 숙여졌다. 그리고 사건은 벌어졌는데 아직도 누구의 명령으로 일어났는지 30여년이 지난 지금에도 밝힐 수 없다는 현실이, 벌을 받아야 하는 사람이 잘 살고 있음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림 4> 국립5.18민주묘지 분향 Ⓒ박종진 이틀 동안 10여 곳을 둘러보아야하는 일정이 조금 부담스러웠지만 여러 선생님들의 설명을 곁들여 들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처음 출발지에서 많이 쑥스러웠지만 편안하게 대해주신 여러 선생님들께 감사하다는 말씀을 전하고 싶다.
무더운 날씨에 건강 조심하시고 다음에 또 기회가 된다면 뵙도록 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