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민(중세1분과) 개항과 식민지, 아픈 역사의 보존 - 목포 6월 30일 장마의 시작을 알리는 비가 부슬부슬 내린다. 장마철에 답사를 가본 적이 없어서, 일정대로 진행될지 또 취소되는 건 아닌지 걱정이 앞선다. 조금 일찍 집결장소인 방배동 청권사 앞에 도착하니 버스는 이미 도착해 있다. 8시 30분이 조금 넘어 서울을 출발! 목포부근의 광주와 나주는 가 보았지만, 목포는 처음이기에 어떤 모습일지 마음이 설렌다. 목포대학교의 삼천재(三遷齋)와 목포대 박물관 목포대학교에 도착하니 두시가 조금 넘었다. 컴퓨터실에서 목포대 문화역사학부의 문화컨텐츠 사업의 개요와 성과 및 개항장과 당일의 답사 코스에 대해 설명을 들었다. 목포대의 문화컨텐츠 사업, 각종 연구소 및 자료실을 둘러보는 시간을 가진 후, 목포대 교정에 있는 삼천재(三遷齋)에 들렀다. 삼천재는 삼휴정(三休亭)이라고도 하는데 목포대 부지를 이곳으로 옮길 때 무안 박씨(務安 朴氏)가 기증했다고 한다. 현대적 건축물 사이에 자리잡고 있어 금방 눈에 띄는데, 다른 풍경과 동떨어지지 않고 잘 어울린다. 안으로 들어서니 우거진 나무 사이로 아담한 본채가 있다. 마루에 앉아 책을 읽다가 차 한 잔ㆍ술 한 잔 기울이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스친다. <사진1> ▲ 목포대학교 안에 있는 三遷齋의 모습 목포대 박물관에서는 옹관묘를 전시하고 있었는데, 영산강 유역에서 1세기경부터 만들어진 것들이다. 크고 작은 옹관묘 중에 중간쯤에 구멍이 뚫린 옹관묘가 유독 눈에 들어온다. 관에 구멍을 왜 뚫었을까? 강봉룡 선생님의 설명에 의하면, “아마 영혼이 통과하는 자리였을 것”이라 한다. 흙으로 빚어 만든 옹관묘에서 묘한 낭만이 느껴진다. <사진2> ▲구멍 난 옹관의 모습 유달산 기슭의 목포부청과 방공호 목포대에서 유달산 중턱에 자리한 일제시기 목포부청 건물로 갔다. 그 뒤편으로는 일제시기 말, 전쟁에 대비해 만든 방공호가 있다. 목포부청건물을 둘러보기에 앞서 방공호로 발걸음이 먼저 간다. 출입구는 모두 3개, 출입구와 내부의 길은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있다. 입구에서 안을 들여다보니 마치 전쟁터에 서 있는 것처럼 긴장된다. 평소에는 전기가 연결되어 불을 밝힐 수 있지만, 그날은 발전기가 작동되지 않아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들어가야 했다. 가운데 입구로 들어가서 더듬거리며 또 다른 출구를 향해 걸어가 보지만 앞은 잘 보이지 않는다. 되돌아 갈 수도 없고. 카메라 플래쉬를 터트리며 겨우 오른쪽 출입구를 찾아 나왔다. <사진3> ▲방공호의 중앙출입구 현재 목포부청 건물의 1층은 목포문화원, 2층은 박화성기념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박화성기념관을 돌아보다가 당시 목포부사가 사용하던 집무실에서 창 밖을 내다본다. 목포개항장이 한눈에 보인다. 1900년 초에 지어진 이 건물을 당시 목포 사람들은 어떻게 보았을까? 건물이 주는 위화감과 일본인의 위세 때문에, 당시 조선인들은 부청 앞을 지나는 것마저도 꺼렸다고 한다. 건물을 나서면서 높은 계단 위의 부청을 바라보니 당시 조선인들의 심정이 헤아려 진다. <사진4> ▲계단아래에서 바라 본 목포부청건물 목포 개항장과 일본인 거류지(동양척식주식회사 건물, 東本願寺 목포별원 등) 목포부청에서 개항장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먼저 동양척식주식회사 건물이 보인다. 1921년에 완공되어, 1970년대에는 해군 헌병대 건물로 사용되었고, 1980년 광주민주화항쟁 당시에는 계엄사령부 목포분소가 설치되었다고 한다. 현재 이 건물은 복원해서 박물관으로 사용될 계획이라 한다. 물론 일제잔재이므로 건물을 헐어야 한다는 일부의 주장도 있었으나, 결국 보존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러한 논란 속에 과거의 아픈 경험을 어떻게 재구성하고 기억할 것인지에 대한 시각이 만들어지고 있는 셈이다. 동양척식회사건물 앞의 문화재설명 표지판에는 건물에 대한 설명과 함께 문화재 관리를 위해 폐자재ㆍ쓰레기 투기를 근절하자는 호소도 보인다. 게다가 건물정면에 덤프트럭이 떡 허니 버티고 있어, 정면으로 건물을 한눈에 보기 힘겨웠다. 문화재로 지정하는 것만이 아니라 조금 더 문화재 관리에 신경 써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사진5> ▲동양척식주식회사 건물의 모습 동양척식회사 건물의 옆길을 따라 일본식 가옥이 몇 채 남아있다. 담 너머로 가옥들을 살피면서 목포기독교회가 있었던 건물 앞에 도착했다. 일제시기 일본인들이 다니던 교회인데, 건물 위쪽에 ‘목포기독교회’라고 쓰여진 흔적이 보이고, 건물 앞에 잔뜩 쌓여 있는 어구 때문에 제대로 보기가 어렵다. 길을 돌아 다시 유달산 노적봉으로 향한다. 비온 뒤라 그런지 습하고 더워 산에 오르기가 벅차다. 유달산을 중심으로 중턱에 위치한 목포부청건물 아래로 개항장이 있고, 그 옆으로는 일본인 거주지가 있다. 유달산 산기슭을 내려가면서 일본사찰 두 채를 더 보았다. 하나는 조계종의 사찰이고 다른 하나는 현재 교회로 사용되고 있었다. 조계종의 정광정혜원으로 사용되고 있는 건물은 그리 크지 않았지만 일본특유의 팔작지붕을 금방 알아 볼 수 있었다. 절 안으로 들어가지 못해 내부의 모습은 볼 수 없었던게 아쉬움으로 남는다. 절을 둘러싸고 있는 담장에는 팔상도가 붙여져 있는데, 크레파스로 색칠한 것이 풋풋하고 귀엽다. <사진6> ▲ 현재 정광정혜원의 건물모습 <사진7> ▲ 八相圖 두 번째 毘藍降生相, “天上天下唯我獨尊”을 외치는 아기부처 다음으로 중앙교회가 사용하고 있는 東本願寺 목포별원 건물로 갔다. 이 건물도 역시 팔작지붕이다. 중앙 출입구 지붕도 둥그렇게 끝이 살짝 올라간 것이 한눈에 보아도 일본식 건물임을 알 수 있고, 내부의 목재 바닥과 천장도 그대로 남아있다. 밖으로 나와 건물을 한눈에 담아보고 싶었으나, 건물 외벽은 많이 낡았고 또 옆 건물들에 가려 옛 모습을 발견하기 어렵다. 여기서 광주민주화항쟁 당시 재야인사와 목사들이 투쟁을 결의했고, 6월항쟁을 비롯한 민주화ㆍ통일 운동의 거점이 되었다는 표지판의 설명은 일제시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이곳의 역사를 돌아보게 한다. <사진8> ▲동본원사 목포별원 건물. 일본식 지붕위에 십자가가 있다. 목포오거리, 호남은행, 묵다방 동본원사 목포별원 건물을 나와서 조금 걸으면 목포오거리가 나온다. 목포오거리는 일제시기 일본인 거주지와 조선인거주지의 경계였다고 한다. 목포오거리는 밝고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던 일본인 거류지, 그에 미치지 못했던 조선인 거주지를 이어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일제시기부터 상당히 번성했다고 한다. 여기에는 현재 신한은행이 사용하고 있는 호남은행건물과 묵다방 등이 아직까지 남아있다. 호남은행건물은 1920년 현준호가 세운 은행의 목포지점 건물이다. 붉은색 벽돌로 쌓아올렸는데, 당시에도 일본인 거류지의 건물에 결코 뒤지지 않았을거라 생각된다. 호남은행 건물을 지나 묵다방이 보인다. 지금이야 다방이라 하면 할아버지들이 주로 이용하는 곳 또는 다방아가씨들이 먼저 떠오르지만, 당시엔 작가를 비롯한 예술가들이 모이는 장소였을 것이다. 묵다방의 차를 마셔보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사정이 허락하질 않는다. 목포 뿐 아니라 서울의 종로와 명동, 인천의 중구, 강경에도 일제시기의 모습은 아직 남아있다. 이 지역들에 대한 답사는 개항과 식민지, 근대화에 대한 상을 그리는데 도움이 된다. 서울의 종로와 명동은 전근대와 근대적 건축물이 섞여있는데, 조선인의 북촌과 일본인의 남촌이 대비되는 식민지 조선의 중심지였다. 인천은 일본 은행과 영사관을 중심으로 영국ㆍ러시아 등 열강들과 중국노동자들의 흔적이 함께 있고, 강경은 그리 크지 않으나 정미소나 노동조합건물, 강경포구의 갑문이 남아있어 개항장과 인접한 지역의 변화상을 살펴볼 수 있다. 목포는 목포부청, 동양척식주식회사의 건물과 함께 일본인들이 이용하던 절, 가옥들이 비교적 많이 남아있어 개항과 식민지의 역사상을 보다 선명하게 보여주었다. 역사적 공간을 복원하려는 노력 - 나주 목포해양유물전시관 둘째 날 먼저 목포해양유물전시관으로 향했다. 신안해저유물을 발굴ㆍ보존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전시관은 신안해저유물을 비롯한 완도해양유물과 각종 해양관련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역시 바다 속에 남아있던 배의 잔해들이다. 원래 크기로 배의 뼈대를 만든 후 남아있는 부분들을 복원해놓았다. 복원된 완도선과 신안선, 그 안에서 발견된 한ㆍ중ㆍ일의 다양한 유물들은 당시 해양교류의 실상을 짐작하게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 이상으로 바다를 통한 동아시아 사람들의 교류가 활발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떠오른다. 해양유물전시관 밖에는 전근대시대부터 사용되어온 배들과 어망, 그물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비가와서 자세히 살펴보지 못한 것이 아쉽다. <사진9> ▲ 신안선의 복원모습. <사진10>▲ 완도선의 복원모습. 반남고분군 목포를 출발하여 차로 한 시간쯤 못되게 달리자 나주 반남고분군에 도착한다. 여기서부터는 나주시청에서 문화재관리를 담당하는 계장님이 얼큰한 전라도 사투리로 열심히 설명해주었다. 비가 막 그친 뒤, 초록빛으로 둥실둥실 솟아있는 반남고분군과 그 옆의 자미산을 배경으로 백제가 성립되기 이전의 영산강유역의 세력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계장님의 허락으로 올라가면 안 되는 고분에 올라 주위를 둘러보니 고분의 높이가 실감난다. 고분의 주인이 단단한 곳에서 편안하게 쉴 수 있도록 꾹꾹 밟아주면서 내려왔다. <사진11> ▲ 나주 신촌리 고분군 나주곰탕 다시 버스를 타고 나주지방의 황토, 홍어 등 특산물, 수세싸움과 완사천의 위치 등 나주지방의 역사에 대한 계장님의 다채롭고 상세한 이야기를 들으며 나주시내로 들어섰다. 점심으로 나온 ‘원조’ 나주곰탕은 늘 먹어오던 뽀얀 국물이 우러난 곰탕이 아니라 더욱 원초적인 고기 맛을 뽐내고 있다. 전라도 특유의 강한 젓갈 맛이 살아있는 김치와 먹으니 더욱 맛있다. 복원 중인 나주객사·내아와 나주향교 점심을 먹은 뒤 현재 복원중인 나주객사를 찾았다. 5년 전 학부 답사로 나주를 찾았을 때, 주택들 사이로 나주객사 건물을 보았던 것 같은데 어느 새 집들을 헐고 발굴과 복원 작업이 한창이다. 발굴이 끝나면 공연이나 잔치를 할 수 있는 마당으로 사용할지, 완전히 건물들을 복원할지 아직은 결정 하지 못했다고 한다.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망화루에 올라가 멀찍이 금성관과 나주시내를 둘러본다. 객사와 향교 사이에 나주목사 내아가 있었는데, ㄷ자형으로 아담했다. 본채 옆에서는 나주 아주머니들이 장구와 꽹과리를 두들기며 한참 연습에 열중하고 있었다. 옛 건물을 밖에서만 보지 않고, 직접 들어가 사용하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사진12> ▲복원중인 나주객사 <사진13> ▲ 나주객사 내아의 모습 나주객사뿐 아니라 나주향교도 복원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복원작업 중인데다 또 보슬비까지 내리는 통에 흙탕물 속을 걸어야 했다. 그래서 구석구석 둘러보기는 어려웠지만, 실제 문화재를 복원ㆍ보존하는 생생한 현장 이야기는 기억에 오래 남을 듯 싶다. 현재의 모습은 5년 전에 비해 많이 변화했다. 객사와 향교를 발굴하여 복원하고, 적극적으로 이용하려는 노력을 생각하면, 이후 다시 찾을 나주의 모습을 생각하면 가슴은 더욱 설레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