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다시 개경으로 11월 19일 개성에서 맞는 첫 아침이다. 아침 식사는 현대아산공단 식당에서 한다. 새벽공기를 맞으며 식당으로 내려 갈 때 출근하는 북측 노동자들과 마주친다. 현재 이곳 개성공단에는 6000명 정도의 노동자가 일하는데, 그 중 5500명 정도가 북측 노동자라고 한다. 아침 식사 후 숙소에서 바라보는 진봉산 자락이 부드럽다. 진봉산 자락은 남북으로 길게 이어져 있는데, 정상은 북쪽 끝이다. 문득 용수산에서 진봉산을 지나 진봉산 남록에 있는 흥왕사 터까지 종주산행을 하였으면 좋겠다는 허황된 꿈을 꾸어 본다. 개성답사의 꿈이 이렇게 이루어지고 있듯이 그 꿈도 이루어지리라. 이른 아침 개성공단 숙소에서 본 진봉산 어제 보았던 진봉산 아래 마을이 더 정답게 다가온다. 그 아래 난 길을 따라 이른 아침부터 사람들이 지난다. 서울로 돌아올 때 현대공단 사무실에 그려진 그림을 보니 지금 마을이 있는 곳에 KBS 촬영장이 들어설 예정이란다. 애꿎은 그곳 주민들이 어디론가 쫓겨날 것이다. 9시 10분 버스는 다시 어제의 길을 따라 서쪽으로 향한다. 봉동을 지난다. 어제보다는 익숙하다. 봉동을 통과할 즈음 그곳에 차를 세우고 송악산을 카메라에 담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다시 고속도로 밑을 지나고 철길을 건너고 다리를 건너 나성 안으로 들어선다. 자남산 여관에서 북측 학자들을 태운 버스는 큰 길로 나와 동쪽으로 조금 가서 북쪽으로 향한다. 오늘 첫 답사지인 성균관으로 가는 것이다. 길옆으로 비교적 큰 물길이 나있다. 앞에서 말했던 일제시기에 새로 만든 바로 그 물길이다. (2) 개성역사박물관으로 쓰이는 고려 성균관 성균관은 나성 동북쪽 산기슭에 있다. 주소에는 선죽동으로 되어 있다. 이곳에는 본래 문종 때 대명궁이라는 별궁이 있었는데, 순천관 숭문관으로 이름이 바뀌어오다가 1367년 성균관으로 중영되면서 오늘에 이르렀는데, 지금은 개성역사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 주차장에 차가 서자 어제 토론회에 참석했던 김경순 관장과 리옥란 실장이 맞는다. 몇 년 전 역사스페셜에서 왕건상을 설명했던 왕성수 관장은 얼마 전에 작고하셨다 한다. 박물관 입구에서 간단한 설명을 듣고 성균관 문 앞으로 가니 두 마리의 돌곰이 반갑게 맞는다. 다른 곳에서는 보지 못했던 놈이다. 문을 통과해 들어가니 앞 쪽으로 명륜당이 보이고 그 앞마당에는 사진에서 보았던 커다란 은행나무와 느티나무가 이곳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개성성균관. 정면 건물이 명륜당이고, 좌우 건물이 동재와 서재이다. 그림을 파는 좌판을 지나 명륜당에 오른다. 본래 강학장소였던 명륜당 서쪽 벽에는 개성유물지도가 붙어 있다. 명륜당 마루를 신발을 신은 채로 넘어 대성전으로 향한다. 공자의 신위를 모셨던 대성전은 성균관의 제일 북쪽에 있으며, 그 앞 뜰 좌우에는 우리나라와 중국의 훌륭한 유학자들의 신위를 모셨던 동무와 서무가 있고, 대성전 서북쪽에는 계성사가 있다. 이 4개의 건물이 현재는 모두 박물관 전시공간으로 쓰이고 있으며, 대성전 앞에는 사진으로 많이 보아왔던 두 마리의 돌용이 머리만 내 놓고 땅속에 묻혀 있다. 동쪽 것은 만월대, 서쪽 것은 수창궁에 있던 것이라 한다. 대성전 앞 계단과 두 마리의 돌용. 뒤쪽 건물이 서무이고, 그 북쪽으로 보이는 건물이 계성사이다. (3) 박물관 안팎의 유물 이번 개성역사박물관에서는 예정에 없던 왕건릉 뒤편에서 발견되었다는 ‘왕건상’을 볼 수 있었다. 이번에 특별히 전시된 왕건상은 대성전 서북쪽 조그만 건물인 계성사에 적조사 철불 옆에 앉아서 손님을 맞고 있었다. 이것은 몇 년 전 역사스페셜에 출현했던 유물인데, 이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연구해 왔던 노명호 선생의 노력으로 실물을 보게 된 것이다. 노선생의 설명에 따르면 이것은 조선 세종 때 왕건릉 뒤쪽에 묻힌 것이라 한다. 고려 태조릉 뒤에서 발견되었다는 왕건상 상체 왕건상에 대한 노명호 선생의 긴 설명과 조사가 이어지는 동안 전시실을 한번 다시 둘러보고 서쪽 쪽문으로 나와서 그곳에 모아놓은 여러 불교 문화재들을 감상한다. 그곳에는 개국사 석등을 비롯하여, 불일사탑, 흥국사탑, 현화사탑, 현화사비, 개성유수영 문루 등이 자기 집을 잃고 서있다. 서쪽 담 밖 비탈에도 흥왕리탑과 석조불상 2기가 성균관 안을 내려다보고 있다. 성균관 서북쪽으로 보이는 돌산이 송악산 자락인데, 주능선 쪽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성벽이 보인다. 바로 고려말 조선초에 쌓은 내성이다. 송악산에서 시작된 내성의 동쪽 성벽은 성균관 서쪽을 지나 자남산을 거쳐 남대문까지 이어진다. 성균관 정문에서 리옥란 실장과 기념 사진을 한 장 찍고 돌아선다. 성균관 바로 오른쪽으로 작은 길이 나있는데, 그 길은 나성의 동북쪽 문인 탄현문으로 나 있다. 성균관에서 본 개성 내성 성벽 성균관을 출발한 차는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 내려온다. 길 옆 흐르는 물가에서 빨래하는 모습이 보인다. 차는 남대문을 앞에 두고 좌회전하여 남쪽으로 향하다 이내 동쪽으로 간다. (4) 평양에서 직영하는 식당, 봉동관 오늘 점심 식사는 평양직영식당인 봉동관에서 한다. 이렇게 점심을 먹기 위해 다시 봉동쪽으로 이동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개성의 산, 들, 길, 사람들을 더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봉동관은 봉동읍 동쪽 끝에 있는 검문소를 막 나가서 오른쪽 길로 조금 들어간 곳에 있었다. 이곳은 개성공단지역에 속한다. 봉동관의 구조와 분위기는 중국을 여행할 때 만나는 중국의 식당과 비슷하다. 들어서면 술 같은 물건을 파는 진열대가 있는 것이 그 대표적이다. 봉동관은 남측에서 개성공단에 오는 손님들을 위해서 설치한 곳으로 보이는데, 이곳에 근무하는 접대원들은 평양에서 특별히 선발되어 파견된 사람들이다. 이들의 진면목은 저녁에 볼 수 있었다. 개성 공단에 있는 봉동관 내부(2006. 3. 18) 점심 식사 후 밖으로 나오자 음식점 바로 앞까지 공단공사가 진행 중인 것을 볼 수 있었다. 주변의 땅을 완전히 파헤쳐 놓았으며, 당시도 포크레인 1대가 움직이고 있었다. 동남쪽으로 덕물산이 보이고, 그 아래 우리 숙소도 보인다. 또 북쪽으로는 봉동의 학교도 보였다. (5) 드디어 만월대로 오후 일정은 만월대, 바로 고려 궁궐터로 간다. 차는 남대문 북쪽으로 난 시멘트 포장길로 들어선다. 바로 고려 때 남대가이다. 고려시기 시전이 늘어서있던 길 양 옆으로 기와집이 늘어서 있다. 소위 한옥마을이다. 그 길 동쪽에는 북에서 남으로 배천이 흐르고, 그곳에 민속여관이 있지만 이번에 우리는 그곳을 들르지 않는다. 아쉽지만 차안에서만 본다. 순식간에 차는 길의 북쪽 끝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돌린다. 이곳은 송악산에서 내려오는 2개의 물줄기가 합쳐지는 곳이기도 한데, 아마 이 근처에 개경 황성의 정문이자 동쪽문인 광화문이 있었을 것이다. 차는 서쪽으로 난 물길(광명천) 남쪽으로 난 작은 길을 따라 서쪽으로 조금 가다 선다. 차에서 내려 다리를 건너니 이곳이 바로 고려 궁성에서 제일 규모가 큰 신봉문 터이다. 우리가 건넌 다리 밑의 내는 바로 신봉문 앞을 흐르던 금천(광명천)인 셈이다. 지금은 밭으로 변했지만 버스가 선 곳 남쪽이 구정, 곧 격구장이 있었던 곳이고 그 앞으로 궁성 남쪽 성벽이 지나갈 것이지만 확인이 되지는 않는다. 길 서쪽으로 이어진 곳이 오공산 자락의 언덕인데, 서쪽으로 송악동이라는 팻말이 서있고, 그 뒤로 마을이 있다. 마을 뒤쪽 능선에 성문 일부가 보이는데, 바로 눌리문이다. 눌리문은 고려 현종 때의 나성과 조선초에 완성된 내성이 겹치는 성벽에 있는 성문이다. 본래 나성은 토성이지만 조선초에 완성된 내성은 돌로 쌓았다. 따라서 나성과 내성의 성벽이 겹치는 나성의 성벽은 돌로 쌓았다. 현재 눌리문은 누각은 없고 돌로 만든 무지개모양의 홍예문만 남아 있다. 만월대 서쪽 동네 송악동. 능선에 보이는 문이 눌리문이다.(정학수선생 사진) (6) 신봉문, 창합문을 지나, 회경전으로 광명천에 놓인 다리를 건너자 드디어 신봉문터에 선다. 신봉문 2층누각인 신봉루에서 팔관회 등 국가행사를 치렀던 고려 왕들의 모습을 상상해 볼 틈도 없이 사진 찍기 바쁘다. 이곳에서는 사진촬영에 제한이 많기 때문에 재주껏 찍어야 한다. 시간도 많지 않고 여러 사람이 움직이다 보니 그럴듯한 사진을 얻기 어렵다. 미친년 널뛰듯이 이리 뛰고 저리 뛰어 보지만 돌아와서 보면 남는 것은 후회다. 못보고 지나친 곳, 안 찍은 곳, 못 찍은 곳, 잘못 찍은 것... 다행히 같이 간 정학수 선생이 내가 찍지 못한 사진을 많이 찍어 놓아서 서로 보완이 되었다. 광명천 앞에서 본 만월대. 다리 건너의 주춧돌이 신봉문터이다. (장학수선생 사진) 창합문에서 회경전으로 올라가는 4개의 돌계단 창합문을 지나, 회경전으로 올라가는 4개의 돌계단을 만난다. 사진으로만 보던 돌계단이다. 돌계단 축대의 오른쪽을 한번 살펴보고 돌계단을 오른다. 과연 33계단인지 확인해 보다가, 중간에 사진을 찍으면서 계단 세는 것은 잊고 만다. 드디어 다 올라왔다. 송악산의 자태가 한 눈에 들어온다. 아름답다. 코끝이 찡해온다. 봉동에서 볼 때와도 다르고 자남산 여관에서 볼 때와도 다르다. 그리 높지는 않지만 정말 아름답다. 당장 오르고 싶다. 그 산에 안기도 싶다. 역시 꿈이다. 그렇다 이 꿈도 언젠가는 이루어질 것이다. 바로 이곳이 만월대다. 만월대라는 명칭은 고려 궁궐이 불타 없어진 이후 고려 궁궐터를 가리켰던 이름이다. 언제부터 이곳을 만월대라 불렸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조선시기 이후일 것이다. 우리가 답사한 지역은 고려의 궁궐터 중 회경전이 있었던 동쪽의 중심건물터인데, 흔히 이곳을 만월대라 부른다. 만월대 중심건물터는 좌우에 축대를 쌓아서 서쪽의 건물터와는 높이에서 차이가 있었고, 영역 자체가 구분된 듯하였다. 회경전의 전문인 회경전문터에서 북쪽을 보니 회경전터와 그 뒤의 장화전과 원덕전터는 약간 높이에 차이가 나지만 크게 차이 나지는 않는다. 완만한 경사이다. 아름다운 송악산을 배경으로 회경전과 장화전, 원덕전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을까 잠시 상상해 보지만, 지금 만월대터에서 우리를 반기는 것은 마른 가을 풀과 주춧돌뿐이다. 예전 사진에서 본 염소도 없다. 답사를 같이 한 일행 중에는 이곳에 궁궐건물을 복원했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는 이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정말 아니 될 일이다. 복원이 제대로 될 리도 없거니와 복원을 시도하는 것 자체가 그나마 남은 고려 궁궐 유적을 훼손하는 일이요 또 이곳에 와서 고려 궁궐의 모습을 상상할 자유마저 박탈하는 일이다. 만월대 전경 (7) 만월대 주변 회경전문 근처에서 북측 안내원의 설명이 이어지지만 그것에 아랑곳 하지 않고 일단 궁궐터 끝단까지 올라간다. 동쪽 끝에 군인이 서있다. 군인이 서있는 바로 뒤의 둔덕이 아마 고려 궁성의 북쪽 성벽일 것이다. 그 뒤로 소나무가 심어져 있는데 그 모습이 제법이다. 송악산은 전체가 회색빛 크고 작은 바위로 둘러 싸여 있고 나무는 많지 않다. 그런데 이곳에는 그럴듯한 소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다. 송악산이라는 이름을 가진 체면을 차리려는 속셈인가 보다. 만월대 북쪽. 궁성의 성벽으로 생각된다. 북쪽 끝에서 남쪽과 동서쪽을 바라보고 사진을 찍는다. 남쪽으로는 고려 궁궐터가 펼쳐져 있는데, 만월대는 오래간만에 자신에게 많은 관심을 가진 뜻있는 손님을 맞고 있다. 그 앞쪽으로 멀리 용수산이 보이고, 그 왼쪽으로 진봉산, 자남산이 중첩되어 보인다. 또 오른쪽(서쪽)으로는 오공산 자락이 송악산까지 이어진다. 만월대에서 본 오공산 만월대에서 본 자남산과 진봉산 우리가 서있는 중심 건물터 서쪽 축대 아래는 회경전 외의 다른 궁궐건물들이 들어차 있었던 소위 서북 건물지이지만 이번에는 가지 못한다. 그곳엔 밭도 있고 나무도 있고 집도 한 두채 보인다. 그곳엔 송악산에서 흘러 신봉문 앞으로 흐르는 광명수도 있을 것이고, 그 서쪽엔 궁성벽과 황성벽도 있을 것이지만 이곳에선 확인할 수 없다. 다만 서쪽의 건물터 왼쪽에 나무에 가린 돌 구조물이 조금 보이는데, 그것이 바로 고려 첨성대 기단부분이다. 그 너머로 길이 나있다. 만월대 입구에서 서쪽으로 난 길과 이어진 듯하며 그 길이 난 곳이 도찰문이라고도 하는 나성의 서북문인 통덕문 자리일 것이다. 그 길은 평양 가는 길로 이어지리라. 만월대 서북지역. 이곳에도 많은 전각들이 있었다. 뒤쪽 가운데가 나성의 서북문인 통덕문 자리로 보인다. 길 건너 서쪽 언덕에 비각이 하나 보이는데, 그것은 고려 인종 때 이자겸이 난을 일으켰을 때 목숨을 바쳐 임금을 구했던 홍관의 비각이다. 그 위로 보이는 능선으로 나성이 지나갈 것이다. 만월대 동쪽은 그 경계가 더 분명하지 않다. 특히 큰 나무를 심어놓아서 동쪽 축대 아래쪽은 눈여겨보지도 못했다. 다만 북쪽으로는 약간의 평지가 보이고, 그 아래로 비교적 큰 건물 몇 채가 보일 뿐이다. 만월대 동쪽에는 동궁이 있었고 그 근처로 송악산에서 내려오는 물길(북천)이 내려와 광명천과 합하여 광화문 수구로 나가게 되었다지만 역시 확인할 수 없다. 만월대에서 고려 개경의 궁성, 황성, 나성의 윤곽을 그려 보지만 북쪽 송악산, 서쪽 오공산, 남쪽의 용수산 자락을 제외하고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나성의 서쪽 성벽은 송악산과 오공산 자락 능선을 따라 이어졌을 것이다. (8) 떨어지지 않는 발길 만월대에서 좀 더 머물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그 작은 꿈을 이루지 못한 채 돌아서야 한다. 몇 걸음 가다가 뒤돌아보고 사진 찍기를 계속한다. 회경전 전문에서 송악산 아래 궁궐터를 다시 한번 바라보고 계단을 내려선다. 다시 코끝이 찡하고 눈물이 핑 돈다. 언제 다시 와서 궁궐 주춧돌을 밟으면서 송악산을 바라볼 수 있을까? 계단을 내려오는데 여러 사람들이 모여서 사진을 찍고 있다. 나도 합류한다. 돌계단을 내려와 창합문터에서 회경전 돌계단을 찍고, 또 그 아래로 뒷걸음치면서 사진을 찍는다. 가능한 최후까지 버틴다. 차에 타고 생각해보니, 돌계단 서쪽은 보지도 못했다. 그것도 아쉬움으로 남는다. 다시 남대가를 따라 내려가면서 왼쪽에 보이는 민속여관과 그 옆의 배천을 감상한다. (9) 남대문에서 남대가를 보다 남대가 끝에는 남대문이 있다. 이제 남대문을 볼 차례이다. 남대문은 그 동안 사진으로 많이 보았고 또 어제와 오늘 이곳을 몇 번 지나면서 보아서 낯이 익다. 흔히 남대문을 개성의 대표유적으로 꼽는다. 그런데 남대문이 마치 고려시기의 유적인 것으로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더구나 우리의 교과서에서 조차 남대문이 고려시기의 유적인 듯 소개하고 있지만 남대문은 조선초에 완성된 개성 내성의 남문이다. 따라서 남대문은 조선초에 처음 만들어진 유적이다. 남대문은 규모는 우리가 흔히 보는 서울의 남대문과 비교해 보면 그 규모가 훨씬 작다. 왜 그럴까 생각해 본다. 남대문은 내성이 완성되는 1393년 이전에 만들어졌을 것이다. 이때는 아직 수도가 개성일 때이다. 그렇지만 조선 태조는 이미 수도를 옮길 생각을 가지고 준비 중이었다. 만일 조선초 이곳 개성을 계속 수도로 삼을 생각이었으면 남대문을 이 정도의 규모로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조선 초기에 완성된 내성의 성문, 남대문 남대문 동쪽 계단을 통해 문루에 오른다. 남대문에는 고려 후기 충목왕 때 만든 연복사 종이 있다. 이 종은 본래 남대가에서 남서쪽으로 조금 떨어진 연복사에 있었는데, 조선중기 연복사가 불에 타 없어지면서 근처의 남대문에 옮겨 달았던 것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동합금으로 주조한 높이 3.3미터, 무게 약 14톤에 달하는 연복사 종은 우리나라 5대 종의 하나로 일컬어지는데, 모양과 무늬 등이 특이하다. 모두 연복사 종을 보기에 바쁘다. 그렇지만 우리에게는 또 볼 것이 있다. 바로 남대문에서 사방을 보는 것이다. 조선전기 개성유람을 왔던 선비들도 모두 이곳에서 개성을 조망했다지 않던가? 북쪽 남대가 뒤에는 송악산이, 서쪽으로는 야매산이 건물 사이의 길 틈으로 보인다. 반면 남쪽과 동쪽으로는 산은 보이지 않고 길 양 옆으로 회색 건물들만 보인다. 또 동북쪽의 낮은 언덕은 말할 것도 없이 자남산이다. 이곳에서 개성 거리를 카메라에 담고 싶지만 허용되지 않는다. 정학수 선생이 조용히 다가와 자기가 찍었다고 살짝 말한다. 기쁨도 잠시 곧 북측 안내자들의 제지를 받았고 그로 인해 한동안 싸늘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다행히 남대문에서 남대가를 찍은 그 사진은 지워지지 않고 살아남았다. 이 사진이 이번 답사 사진 중 이곳을 찍은 유일한 사진일 것이다. 남대문에서 본 북쪽 거리. 고려시기엔 이곳에 시전이 있었고, 이를 남대가라고 하였다. (정학수선생 사진) 오늘은 개성시에서 4시까지 밖에 머물 수 없다고 한다. 4시 조금 지나 남대문을 내려와 남대문 전경 사진을 찍고 버스에 올라 서둘러 개성시를 빠져 나간다. 저녁을 먹을 때까지 1시간 이상 시간이 남아 개성공단 식당에 모여 개경반이 중심이 되어 개경의 역사와 구조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했다. 저녁 식사는 다시 봉동관이다. 음식 중 붉은색의 털게가 인상적이다. 저녁 식사 후 흥겨운 여흥이 이어진다. 남북참가자들과 봉동관 식구들이 한데 어울려 노래도 하고 춤도 춘다. 공단 술집에서 개경반 중심으로 간단히 뒤풀이를 하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이 여간 추운 게 아니다. 겉옷의 모자를 뒤집어쓴다. 이렇게 이틀이 지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