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발표회 참관후기]
고승 비문의 건립과 신라 사회
박선경(고대사분과)
□ 일시 : 2015년 4월 25일(토)
□ 장소 : 대우학술재단 제1세미나실
□ 주최 : 한국역사연구회 고대사분과 고대문자자료 연구반
□ 발표
○ 사회 : 정동준(한성대학교)
1. 총론
발표 : 이용현(국립대구박물관) 2. 「형원사 수철화상비」의 판독과 찬자・서자에 대한 검토
발표 : 최경선(연세대학교) 3. 보림사 보조선사탑비의 본 헌안왕의 선종 정책 발표: 박미선(대림대학교) 4. 신라 고승비문의 구성과 건립의 프로세스 발표: 이용현(국립대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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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하대 고승비문은 지역사회에서 영향력 있는 선사를 주인공으로 찬술되었다. 비문이 전하는 선사들은 신라왕실과 직·간접적으로 관계를 맺고 이러한 관계를 바탕으로 비가 세워졌다. 왕실이 보여준 선사에 대한 관심은 곧 지방사회에 대한 관심을 나타내는 것이라 하겠다. 특히 선사비 건립에는 중앙권력, 지역세력 그리고 사원세력과 같은 여러 이해관계가 복합적으로 얽혀있다. 따라서 여러 측면에서 조망되어 선사비가 담고 있는 신라하대 사회상에 대한 보다 섬세한 이해가 필요하였다. 이러한 의미에서 “고승비문의 건립과 신라사회”라는 주제로 진행된 문자자료연구반 발표는 선승비문의 이러한 점을 더욱 부각시킨 발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발표는 총 세분 선생님이 준비하였으며 고승비문을 통한 신라사회의 일면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문자반 반장님이신 이용현 선생님의 총론으로 발표가 시작되었다. 총론에서 고승비문이 가지는 사료적 가치를 강조되었는데 비문은 문자문화의 완숙기의 산물로 선승의 일대기가 집약된 열전과도 같다고 하였다. 비문이 왕경이 아닌 지방에 세워진 것은 다원화된 사회모습이 반영된 것이라 하였으며 이로써 신라하대 지방사회를 조망하는 데 고승비문이 차지하는 사료적 위상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제1발표는 최경선 선생님의 「「瑩原寺秀澈和尙碑」의 판독과 撰者·書者에 대한 검토-신라 말 唐의 官制 수용과 정치운영과 관련하여-」였다. 선생님은 판독을 위해 세 번 답사를 하였다고 하는데, 각고의 노력 끝에 새로운 판독을 제시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찬자와 서자에 주목한 것이 이 연구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데, 찬자와 서자의 관직명 분석을 통하여 9~10세기 신라왕실에서 당제를 수용하여 변용한 형태의 관직명을 사용하고 있음을 시사하였다. 특히 서자의 관직명 ‘朝論郞檢校右衛將軍司宮臺監▢▢院使等同正員▢▢’에서 사궁대는 측천무후 시기의 내시성을 가리키는데 신라 사신에게 이러한 관직을 제수하는 것에 깊은 의문을 제기하며 이는 당이 아니라 신라에서 임명한 것이라 하였으며, 왕의 측근인 환관에게 ‘검교우위장군’이라는 관직을 겸하게 한 것은 측근의 권력을 강화시켜 준 것이라 하였다. 이는 신라 왕실이 당의 관제를 수용하여 측근의 권력을 강화함으로써 왕권을 유지하고자 한 것이라는 견해를 밝혔다.
제2발표는 박미선 선생님의 「寶林寺普照禪師塔碑로 본 憲安王의 禪宗 정책」이었다. 보림사 보조선사 체징과 헌안왕의 관계를 헌안왕의 입장을 중심에 두고 이들의 관계를 해석하였다. ‘왜 체징(보조선사)였는가?‘ 그리고 ‘왜 가지산사였는가’를 중심으로 헌안왕의 선종정책의 특징을 살펴보았다. 먼저 헌안왕이 체징을 택한 이유는 그가 세력기반이 약하다는 점과 남종선의 초조인 도의의 법맥을 이었다는 점, 그리고 짧게나마 당을 다녀온 경험이 작용된 것이라 하였다. 그리고 가지산사를 선택한 것은 당시의 선종사원들이 지리산 일대에 위치한 것에 반해 가지산사는 서남해안에 위치하고 있어 장보고 사후 혼란을 맞은 이 지역을 다스리는데 구심점 역할을 기대하였을 것이라 이해하였다. 이는 헌안왕이 충분한 의도를 가지고 서남해지역의 선종정책을 기획한 것이라 하였다. 헌안왕의 뒤를 이은 경문왕 역시 선종정책을 계승하고자 하였으나 헌안왕이 보여준 적극적 태도는 찾을 수 없었으며 결국 선종과의 새로운 관계를 모색하는 데는 실패하여 그 자리를 지방 세력에게 내어주게 되었다고 하였다.
제3발표는 이용현 선생님의 「고승비문의 구성과 건립의 프로세스」였다. 9세기 초에서 10세기 초에 세워진 선승 비문 10견의 서식을 비교·정리하여 그 경향성을 찾고자 한 연구이다. 비문의 구성요소를 크게 제액, 撰書刻子, 선승의 일대기, 입적 후 비 건립으로 나누어 각 항목별로 검토하여 정례화되어 있는 비문의 구성을 설명하였다. 이를 통해 마멸이나 결락이 심한 비문을 재구성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기대된다. 이처럼 비문은 일정한 서식아래 구성되었으며 이러한 규칙성은 넓게 보아 비문이 행정문서의 범주에서 운용되었을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논스톱으로 달려온 세 분의 발표가 끝나고 이어서 곽승훈 선생님의 사회로 토론이 진행되었다. 토론은 지정토론의 방식으로 이루어졌으나, 토론자 선생님 간의 자유 토론으로 발표장은 이내 달구어졌다. 제1발표의 토론은 정동락 선생님이 맡았다. 선생님은 이 연구가 가지는 의미를 새로운 판독으로 내용을 보완하여 신라 말의 정치운영과 연결시켰다는 점에 두고 새로운 판독이 제시되었으니 그에 맞는 새로운 해석을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그리고 찬자와 서자에 주목한 연구이기는 하지만 여기에 한 사람이 더 등장하는 것을 간과하지 않았다. 찬자와 서자가 기록된 부분에는 세 사림이 나오는데, 찬자와 서자 사이에 기록된 ‘문하제자 비구 음광’의 역할에 대한 질문이었다. 발표자는 음광의 역할을 자료를 모으는 사람으로 이해하였는데 정 선생님은 이를 集字子로 이해할 수 있음을 지적하였다. 이에 발표자는 집자의 경우 김생이나 당 태종과 같은 서체의 주인공을 밝히는 것이 중요한 문제인데 명필가의 이름이 없는 것으로 보아 집자로 생각하기는 어려우며, 그렇다고 하더러도 ‘集’자를 쓰지 않은 것에서 집자자로 보기는 어렵다고 답변하였다. 한편 이용현 선생님은 비 건립과정에서 문하제자 승려의 역할은 보통 각자와 서자의 역할을 맡고 있었기에 아마도 이러한 역할을 벗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며, 자료를 모으는 담당자를 새긴 것은 비문 서식상의 법칙성에 크게 벗어나는 것이라고 하였다. 계속해서 영원사 수철화상비와 안봉사 편운화상의 부도가 실상사에 있는데, 선승들의 부도와 탑비가 이처럼 실상사에 모여 있게 된 배경을 함께 생각해 볼 문제로 제기되었는데 이에 정치권력과의 관계에서도 생각해 볼 수 있겠지만 실상사측의 입장도 고려해 봄이 좋지 않을까하는 라정숙 선생님의 의견이 더해졌다.
이어서 라정숙 선생님의 제2발표에 대한 토론이 진행되었다. ‘宗姓’이라는 표현, 그리고 종성인데 왕실봉지의 사찰에 주석하지 못한 이유, 왕실 초청을 처음에 거절한 이유에 대한 질문이 있었다. 이에 발표자는 종성은 김씨임을 강조하고 왕실과의 관계를 부각하고자 하는 의도였으며 봉지의 사찰에 주석하지 못한 것은 이미 낭혜가 먼저 교화를 펴고 있었다는 점을 꼽았다. 그리고 왕경 초청 거절에는 하안거와 같은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었을 것이라 하였다. 정동락 선생님은 여기에서 선사가 왕실초청을 거절하는 사례가 다른 비문에서도 보이는데 이는 선승들이 가치가 상승되는 효과를 기대한 것이라 하였다. 체징의 도당 유학이 3년 만에 그친 것을 들러싼 이해가 나뉘었는데, 구법에 목적을 두기보다는 자신의 가치를 올리기 위한 항목으로써 이해하는 견해와 비문 그대로 받아들여 스승에게 배운 것과 차이가 없어 돌아온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견해가 있었다.
제3발표의 지정토론은 곽승훈 선생님께서 맡아주셨다. 우선 본문의 구성 요소 가운데 도입부는 형이상학적 내용으로 전개되는 것이 일반적이라 하였는데 사실 도입부는 찬술자의 사상적 이해와 유학자로서의 역량이 함축된 부분임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음기를 다루지 않은 점에 대한 아쉬움이 플로어에서 제기되었다.
곽승훈 선생님은 신라하대 고승비문을 볼 때 유의할 점을 소개해 주었다. 고승탑비의 건립요소로 주인공 선승의 활동과 시기, 왕명, 찬술자, 건립연대, 고승과 사찰로 이루어지며 비문 찬술에 앞서 주인공 선사의 제자들이 행장을 작성하여 찬술자에게 제공해주게 된다. 특히 찬술자는 유불도 사상에 대한 이해를 문장에 드러내어 그들의 문한관으로서 역량을 응축한 것이 비문임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신라하대 지역사회를 조명하는 선사비문은 많은 역할을 하는데 선사들이 지역사회에 대한 생각을 읽을 수 있는가하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정동락 선생님은 비문이 전하는 선승은 당대를 대표하는 우수한 승려들로 선승의 영향력은 그 지역을 포괄하였고 그 때문에 중앙권력에서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지방사회 거점에 선종사원이 위치한 것이 사회를 발전시키는데 크게 기여하였을 것임을 역설하였다. 이번 토론에서 비문이 선사들의 사상을 모두 담아내고 있지 못한 점이 지적되었다. 선사들은 당대의 지식인으로서 그들의 문제의식과 시대적 과제에 대한 고찰이 필요할 것이다.
고승비문은 개인을 찬양하는 글로 엄정한 사료 비판이 요구되지만 사료가 극히 제한된 고대사 연구에서 단비 같은 존재로 다양한 연구 분야에서 인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단편적 사실을 신라사회에 그대로 투영하는 일도 쉽지 않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이번의 연구회 발표는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는 한 시도라고 생각된다. 고승비문이 내포하고 있는 신라사회의 여러 모습을 구현하고 그것이 축적된다면 신라사회에 대한 다각도의 깊이 있는 이해가 이루어 질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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