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2월 16, 17일의 이틀에 걸쳐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중회의실에서 한국역사연구회와 브리티시 컬럼비아 대학교(UBC)와의 공동 개최 워크숍이 이루어졌다. 워크숍은 ‘조선시대 조공책봉 체제의 의미와 전망’이라는 주제 아래 일곱 분의 선생님께서 각자마다의 조선시대 외교와 관련한 다각적인 시각을 발표해주셨고, 발표마다의 활발한 청중의 토론과 심도있는 종합토론으로 성황리에 마무리하였다. 필자는 고려시대 전공자임에도 불구하고, 이 워크숍이 크게 유의미하였던 이유는 조선시대의 조공책봉 체제, 즉 중국과의 외교관계가 고려시대의 그것과 떨어져서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각 주제발표마다의 상세한 논증과정에서 필자에게 다소 생소한 부분이 많아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많았으나 국제관계라는 측면에서 거시적 안목을 기르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첫째날(12/16). 제1발표는 「冊과 詔命-고려시대 국왕 책봉문서」라는 주제로 정동훈 선생님께서 발표하셨다. 발표자는 작제적 질서를 반영하는 冊과 관료제적 질서를 반영하는 詔命의 문서가 고려국왕에게 책봉문서로 수여된 양상을 분석하여 그것이 冊에서 詔命으로 바뀌는 의미에 대하여 고찰하였다. 요컨대 책봉문서에 적용된 위계질서를 본다면 고려전기에는 작제적 질서만이 적용되어 외국으로서, 중국 왕조와는 별개의 체계를 가지고 운용될 수 있었다. 반면 원대를 거쳐 명대에 이르러 고려국왕에게 관료제적 위계질서가 적용되고 그에 따라 문서식이나 朝服, 印章과 같은 요소에서 양국 외교에서 동일한 원칙이 적용되어 고려 국내 문물제도 역시 명의 그것과 통합되는 과정을 거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제2발표는 이규철 선생님께서 「15세기 조선의 대외정벌과 대명의식」이라는 주제로 발표하셨다. 발표자는 대외정벌이 조선의 대외의식이 직접적으로 반영되어 추진되었던 정책이라는 점에서 세종, 세조, 성종에 걸친 조선의 대외정벌 정책과 그 속에 내포된 대명의식의 변화상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특히 명에 대한 사대의식을 활용한 측면에서, 15세기 조선에서 사대는 국왕권의 강화와 유지에 필요한 수단 중 하나였다. 조선 초기 국왕들은 이러한 사대의 가치를 효과적으로 활용하여 어느 시기보다 강한 국왕권을 확립하는데 성공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사대에 대한 정치적 활용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한계가 나타나기 시작하여 성종대에는 오히려 국왕의 권한마저 제한할 수 있는 방식으로 작용하기 시작하였다. 제3발표는 「병자호란 이해의 새로운 시각과 전망: 胡亂期 斥和論의 성격과 그에 대한 맥락적 이해」라는 주제로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의 허태구 선생님께서 발표하셨다. 발표자는 兩次의 胡亂 전후로 제기된 척화론은 전쟁의 승리를 자신하거나 明의 지원이나 問責을 의식하여 제기된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며 事大主義나 淸에 대한 우리 민족의 투쟁이라는 이분법적 시각을 탈피해 당대인의 두 가지 인식론적 측면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음을 역설하였다. 즉 특정 국가로서의 明에 대한 인식과 보편 문명인 中華를 상징하는 明에 대한 인식에 대한 측면인데, 이는 최근 自主ㆍ事大의 이분법을 탈피하여 재해석한 최종석 선생님의 논의를 참고하여 설명하고자 하였다. 발표자는 조선인들의 中華 인식이 심화된 결과, 당대인의 對明 인식에 앞선 ‘두 개의 對明 인식’이 존재함을 척화론과 對明義理論이 제기되는 맥락을 통해 試論的으로 입증하고자 하였다. 둘째날(12/17). 제1발표는 최종석 선생님께서 「15세기 조선-명 관계의 이해에서 고려할 몇 가지 지점들」이라는 주제로 발표해주셨다. 발표자는 ‘원간섭기’를 분기점으로 고려 국내에서도 제후국 체제가 운영된 것과 국왕의 국내적 위상이 군주에서 ‘군주이면서 신하(제후)’로 전환된 사실을 주목하였고, 변환된 책봉-조공 관계가 지속되었으나 세력적인 측면에서 변화가 있었음을 특기하였다. 명대에 들어서 지배 권역이 대폭 증대되었을 뿐만 아니라 군신 관계가 피책봉국 경내까지 관절된 원대를 계승한 중화질서는 천자(황제)의 지배가 중원에 한정되지 않고 피책봉국 경내에까지 실현되는 방식으로 거듭해나갔는데 이는 예제를 매개로 해서였다. 또한 발표자는 조선 초기의 각종 제도가 ‘원간섭기’에 비해 제후국의 명분에 보다 걸맞은 방향으로 개편ㆍ정비되어 간 사실에 주목하였는데 이러한 제후국 위상의 국내적 관철은 외압과 사실상 무관하였다는 점에 주목하였다. 곧 조선 내에서의 제후국 명분의 견지는 명에 의한 외향적 행위가 아니라 내적 동인을 토대로 한 움직임이었던 것이며, 궤적으로는 중화(문명)를 보편적인 것으로 여기는 세계관 속에서 이상적 중화 문명을 구현하고자 하는 일환으로 이루어졌다고 보았다. 한편, 고려적인 ‘外王內制’ 체제는 단지 황제국 제도들을 대거 사용한 데서 조선초기와 상이한 것이 아니라 심성적 기반에서 이질적이었다. 즉 성리학의 수용, 확대된 세계(천하) 인식, 중화(문명)의 내면화 등의 새로운 움직임으로 이질적인 인식은 점차 생성되었던 것이다. 제2발표는 「16세기 조선의 對明貿易 연구」라는 주제로 구도영 선생님께서 발표하였다. 발표자는 조선의 대명무역 성격은 명과 다른 조공국들이 맺었던 무역관계와 확연히 구별할 수 있음을 확인하였다. 명의 조공체제를 지탱해준 주요한 부분은 무역관계였다고 볼 수 있는데, 이는 조공에 대한 법조항의 상당수가 무역 관련 내용이었다는 점 등에서 알 수 있다. 그런데 조선은 예외적으로 이 조항에서 빠져있으며, 조선은 그 조정에서 국가 수요물품을 제외한 명과의 무역 모든 영역을 통제하여 여타 동아시아 국가들과 차별화하였다. 한편, 16세기 조선은 사회경제적 환경의 변화와 대명 사무역의 본격적인 확대 속에서 기존의 사무역 정책을 재검토해야 할 시기에 직면하였는데, 이러한 가운데 발생한 門禁 죄는 조선 조성이 예의지국의 모습을 지키기 위해 정책적으로 사무역을 더욱 통제한 것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 되었다. 예의지국으로서의 국가위상이 명에게 각종 우대조치를 얻어내고 명과의 외교적 난제를 해결하는 데에 전략적인 활용방법이 되기도 하였으므로 조선의 입장에서는 예의지국 담론을 저해한다고 판단되는 사무역을 적극적으로 확대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제3발표는 홍선이 선생님께서 「조청관계와 세폐ㆍ방물: ‘유목적’질서와 중국적 질서의 공존」이라는 주제로 발표하였다. 발표자는 조선이 청에 바치는 조공품은 이전 시기와는 달리 중국적 질서인 ‘조공-책봉체제’를 매개하는 조공품인 방물과 ‘유목적’ 질서에서 기원한 세폐로 이원화되었으며, 서로 다른 기원을 가진 세폐와 방물은 조청관계에서도 여전히 뚜렷이 대비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을 살펴보았다. 이는 조청관계의 복합성, 즉 조청관계가 ‘전승국-패전국 관계’의 성격과 조명관계를 대체하는 ‘조공-책봉관계’의 성격을 동시에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조청관계는 ‘전승국-패전국 관계’와 ‘조공-책봉관계’의 성격을 복합적으로 가지게 되면서 지속적이고 일방적인 경제적 수탈의 조건으로 가능하였음을 확인하였다. 제4발표는 「조선후기 연행사의 외교활동과 ‘인신무외교’의 재고찰」이라는 주제로 김창수 선생님께서 발표하였다. 발표자는 조청관계에서 조선 사신들의 ‘외교’ 활동을 구체적으로 검토하여 중국전통의 외교 관념인 ‘人臣無外交’의 질적변화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조선 연행사의 외교활동을 세 시기로 구분하여 분석하였는데, 1644년~1670년대까지는 청의 역관 및 하급관료들에게 전적으로 휘둘리는 모습, 1670년대~1720년대까지는 조선 사신들이 다양한 교섭 통로와 공문서 획득을 통해 하급 이서배들의 농단을 줄여나가고자 한 노력을 확인하였다. 영조ㆍ정조 연간에는 조선을 방문한 사신들을 교섭통로로 활용하는 양상을 보이는데 원활한 교섭을 위해 청 사신을 접대하던 역관 및 의관들을 사행에 포함시키기도 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처럼 북경에 간 조선의 사신들은 조선왕조의 국익을 관철시키거나 옹호하기 위해서 다양한 외교활동을 벌였는데, 이를 통해 규정적이고 의례적으로만 바라보고자 하는 조공책봉에 대한 다양한 시선의 단초를 제공하였다. 이처럼 이틀간에 걸쳐 진행된 학술회의는 고려시대에서부터 근원하는 조선-명 관계에 대한 여러 시선부터, 세부적으로 국왕책봉문서의 변화의미, 정벌과 척화론 등의 인식론적 측면, 조청간의 무역, 세폐ㆍ방물의 양상, 연행 사신의 외교활동 등의 실제적인 외교상에 대한 접근 등 동아시아 국제관계에 대한 여러 선생님들의 고민을 공유할 수 있는 뜻 깊은 장이었다. 필자에게 있어서도 ‘조선시대 조공책봉 체제’를 넘어 동아시아 국제관계를 바라보는 다각적인 접근방식을 통해 그 의미와 전망에 대한 외연을 확장하게 되는 귀중한 시간을 제공해주었다. 앞으로 이 분야에 대한 더욱 다양한 논의들이 기대되는 바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