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한국역사연구회 학술상 신진학자 우수논문 신라 적석목곽묘의 조영 양상과 권력구조의 변동(『역사와 현실』 106, 2017. 12) 옥재원(고대사분과) 과거의 일이라지만, 역사에서 치열하게 경쟁하는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오갔던 권력의 역사적 성격을 뒤쫓는 연구는 꽤 피곤한 일이다. 현재에도 여전히 경쟁이 맹렬하고 불의가 정의를 휘두르는 사회에 살고 있어서 불안하며, 맹렬한 가운데서 이뤄지는 사람 선택의 결정도 공정을 빗겨가는 경우가 잦아서 불편해 그런가 싶다. 그러니 특정한 때를 가릴 것 없이 사람이 쌓은 시간에 대해 의심이 끊이지 않는다. 대부분의 의심은 잠깐의 딴짓에 그치지만, 간혹 한편의 의심이 꼬리를 물다가 하나의 서사를 만들기도 한다. 한두 편을 꼭 집기 어려울 정도의 여러 글을 통해, 고대사회에서 분묘의 규모와 부장 수준은 피장자의 권력에 상응한다는 판단을 만나서, 한동안 곧이곧대로 귀담았다. 그러다가 물고 늘어질 만한 의심거리가 생겨났는데, 그 발단은 경주 대릉원 일대에 조영된 대형 적석목곽묘들의 크기에 있었다. 시대를 가릴 것 없이 역사 연구자라면 누구나 사료와 자료를 넉넉하게 쥐고 그것들을 꼼꼼하게 기우면서 과거의 실상에 다가서고 싶을 것이다. 고대사 전공자의 형편이야 나쁘기 짝이 없어서, 빈약한 문헌 사료를 따지는 통에도 발굴하고 유물 다루던 경험을 쫓아 고고 자료를 거듭 살폈다. 특히 분묘 구조와 긴밀한 묘제와 부장 양상을 수반한 장제를 중심으로 자료를 파악하고 자료에 대한 해석을 익혀나갔다. 그러던 중에 다수 고고학 연구자들이 상호 논의를 통해 가닥을 견줘가던 적석목곽묘 조영 시기의 상대연대를 기준 삼아 여러 가지 물질적 사실을 나열해보게 되었다. 비교적 안정된 시간의 순서가 ‘ 황남대총 남분 → 황남대총 북분 → 금관총 – 서봉총 → 천마총 – 금령총 → 호우총’이다. 이 순서를 두고 보아서, 시간이 지날수록 외형의 규격(지름×높이, 단위: m)이 대략 황남대총 남분: 80×22.9, 황남대총 북분은 80×22.2, 금관총은 (45.4)×(12.1), 서봉총은 (36.3)×(9.7), 천마총은 60×12.7, 금령총은 (18)×(4.5), 호우총은 16×4로, 점차 작아지는 변화가 눈에 띄었다. 이를 기본으로 사실 여럿을 추가하면서, 이를 분석한 자료와 해석한 연구 성과 몇몇을 아울러 의심을 확장해보았다. 우선 목곽부의 구조에서, 황남대총 남분은 삼중의 목곽에 부곽이 설치되어 있으나 나머지 모두는 이중에 부곽이 없어, 시간에 따라 간략해지는 구조가 주목되었다. 공정도 살폈다. 대형 분묘의 경우 매장주체부 주변에 봉분을 성토할 때, 노동 및 작업 효율을 높이고 책임을 분담하기 위해서 구획을 나누어 작업하는 방식이 채택되기도 한다. 파악된 구획의 수는 황남대총 남분보다 황남대총 북분, 그리고 이보다 천마총이 적다. 이로부터도 일정한 경향을 읽었다. 덧붙여 장제를 살폈다. 장제를 대표하는 사람의 행위가 장의 물품의 제작과 부장이다. 먼저 이 행위를 대표하는 유물의 출토 수량을 종합해 보았다. 합계 수량이 황남대총 북분을 정점으로 시간이 흐를수록 줄어들었다. 물론 대강의 흐름을 거스르는 천마총 사례가 있다. 처음에는 천마총의 수량이 고심거리였지만, 다른 사실과 종합해 살펴본 이후로는 천마총의 사례를 역사적으로 특수하게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얻었다. 이 가능성은 금관을 중요한 단서로 삼아 얻은 것이다. 현재까지 발견 혹은 출토된 신라 금관은 교동‧황남대총 북분‧금관총‧서봉총‧천마총‧금령총의 6점이다. 이 6점의 금관에 대해, 주성분인 금에 은과 극소량의 구리‧철이 합금된 비율을 기준으로 순도가 분석되었다. 순도는 교동 발견 금관이 89.2wt%(21.4K), 황남대총 북분 출토 금관이 86.2wt%(20.7K), 금관총 출토 금관이 85.4wt%(20.5K), 서봉총 출토 금관이 80.3wt%(19.3K), 천마총 출토 금관이 83.5wt%(20.0K), 금령총 출토 금관이 82.8wt%(19.9K)로 판명되었다. 이러한 결과는 시기를 따라 합금된 금의 순도가 점점 낮아져 가는 경향을 입증하고 있다. 현재까지 발견 출토된 신라 금관 금관에 부착된 경옥제곡옥의 사용 양상도 특이했다. 원료의 산지는 일본으로 한정되는데, 한반도 내에서 곡옥의 분포‧유통의 중심지는 경주지역이다. 신라 중앙은 주변 지역으로 영향력을 확대해나가며 그 지배층에게 경옥제곡옥을 위세품으로 분배하였다. 이것이 금관에 부착된 수량을 헤아려보니, 황남대총 북분의 금관에는 77개, 금관총의 금관에는 67개, 서봉총의 금관에는 38개, 천마총의 금관에는 58개가 부착되어 있으며, 금령총의 금관에는 한 점도 부착되지 않았다. 이 수량을 통해 또 하나의 경향을 덧붙이게 되었다. 결국 핵심 지배층이 안장된 대형 적석목곽묘를 중심으로 그 규모와 구조, 부장 수준과 수량에서 시간의 흐름에 따라 발생하는 일련의 변동은 예사롭지 않았다. 특히 마립간시기 동안 국왕을 정점으로 혈연계승원리와 지배질서가 정립되고, 이들이 6세기에 들어 골품제와 관등제로 제도화되는 과정에 관심을 쏟는 입장에서 볼 때, 그 현상은 결코 간단하지 않은 의심덩어리였다. 물론 이러한 현상에 관한 해석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기존의 해석들은 대략 물질적 현상과 변동을 묘제와 장제가 쇠퇴하는 과정으로 판단하는 편이었다. 이에 대해 개인적으로는 그 현상을 마립간의 집권력 상승과 연동되는 발전으로 보았다. 즉 마립간이 핵심 지배층의 권력을 흡수하여 정치적 권한을 크게 강화하는 과정에서 권력구조상 최상위의 김씨집단을 대상으로 묘제‧장제를 조정‧규제하는 개혁을 시도한 결과, 대형 적석목곽묘에서 일련의 변동이 일어난 것으로 본 것이다. 이러한 판단을 기반으로 삼아 <역사와 현실>에 글을 게재하였다. 일천한 능력에 넘치는 평가를 한국역사연구회로부터 받았다. 다시 한 번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여전히 의심하며 이미 지나가버린 생각을 연장할 수 있는 증거들을 쫓고 있다. 항상 발굴 현장에서 땀으로 역사를 일구고 있는 고고학 연구자들에게 진 빚이 크며, 추적 과정에서 관심을 보태준 동료 연구자들에게도 신세를 졌다. 정의롭게 살면서, 정직하게 보답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