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학위논문『후기의병의 사회적 성격에 관한 연구』(2018. 2.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박사학위논문) 김헌주(근대사분과) 연구의 시작은 석사과정 때 『하재일기』란 사료를 강독하면서부터였다.『하재일기』는 경기도 양근군 분원마을 공인들의 일상을 분원마을의 동임이었던 지규식이 기록한 자료이다. 이 자료의 국역 편찬에 직접적으로 관여한 박은숙 선생님을 비롯한 고려대 대학원 선배들과 함께 사료를 강독했다. 그러나 이런저런 사정으로 강독 모임은 중단되었고, 나 역시 석사논문 작성을 이유로 강독모임에서 빠졌다. 박사과정에 입학한 후 박은숙 선생님께서 새롭게 탈초·번역된 『하재일기』 내용에 의병과 지역주민의 관계에 관한 내용이 있는데 매우 흥미롭다는 조언을 해주셨다. 흥미가 생긴 나는 『하재일기』 중 의병과 관련한 내용들을 집중적으로 분석했다. 사료를 읽으면서 ‘의병이 일으킨 파장’이 마을 공동체의 ‘일상’을 흔들어놓았고 분원마을 주민들은 의병과 관군, 일본군 모두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기존의 민족운동사적 서사에 포착되지 않는 역사상을 정립할 수 있다는 확신을 얻었고 이 내용을 「마을주민의 시선에서 본 의병운동」이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발표했다. 이 글을 시작으로 ‘의병과 사회의 관계’라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연구를 진행하였다. 이후 연구를 진행하면서 선행연구들에서 포착하지 못했던 논점들에 눈이 갔다. 예컨대 ‘假義’ 문제를 들 수 있다. ‘假義’는 당대 화적들이 의병을 거짓으로 칭하는 것을 얘기하는 것인데 선행연구에서는 ‘화적의병’으로 정리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1907년 이후 전민족적 항쟁이 벌어지고 화적 역시 의병의 대의에 동참해서 싸웠다는 논지이다. 그러나 당대 기록을 면밀히 살펴본 바 일제측과 의병장, 당대 신문에서 모두 의병과 ‘假義’를 구별하고 있었음을 발견했다. 화적들은 생존투쟁을 위해 의병을 가칭하고 있었던 것이다. 예컨대 의병부대를 표시하는 도장과 군표를 위조해서 주민들에게 식량을 거두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이 생존만을 위해 의병을 가칭한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활빈(活貧)’의 기치 아래 모였던 대한제국기 최대 화적 조직인 활빈당의 후예들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 중 일부는 活貧과 義를 등치시키면서 활동하기도 하였다. 의병지도부의 가치와는 다른 방식의 전유(appropriation)가 있었던 것이다. 이 내용을 정리하여 「1907년 의병봉기와 화적집단의 활동」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했다. 이런 문제의식을 종합하여 박사논문의 얼개를 잡았다. 주지하듯 그간 연구자들은 의병이 발발한 요인, 의병부대의 전투 활동, 사상적 지향 등에 대해서 활발한 연구를 진행했다. 그리고 일제의 대한제국 침탈이 극에 달하는 1907년에 이르면 일부 계층에 한정되던 의병활동이 전민족적인 저항으로 확대된다는 역사상을 구성하게 된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역사상에 대해서 몇 가지 의문을 가졌다. 첫째, 저항에 참여한 주체들의 지향성은 과연 동일한가. 둘째, 의병은 당대 사회에서 무조건적인 지지를 얻었는가. 셋째, 문명개화 노선에서 애국을 주장했던 당대 언론은 義理論을 기치로 내건 의병의 애국론을 어떻게 인식했는가.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박사논문은 다음과 같이 구성되었다. 우선 후기의병에 참여한 각 주체들의 참여목적과 지향을 검토하였다. 크게 유생층, 군인층, 평민층으로 참여층을 분류하고 각 주체별 지향의 중층적 성격을 밝혔다. 먼저 유생층은 忠義論에 입각해서 봉기했다. 군인층의 경우 독립과 排日에서는 유생층과 상당 부분 유사한 지점이 있었지만, 그 실행방법과 지향에서 근대적 실력양성의 목적이 내포된 측면이 있었음을 규명했다. 아울러 평민층 중 화적의 경우는 의병부대 내부에서 활동하거나 혹은 배제된 상태에서 의병 가칭이라는 형태로 義를 전유하면서 의병의 주변부에 있었던 맥락을 살폈다. 요컨대 후기의병에 투신한 각 주체들의 동상이몽을 그려내고자 했다. 다음으로 의병부대가 지역주민들과 어떠한 관계를 맺어나가고 있는가에 대해 분석했다. 의병부대에서는 필요한 군수물자를 지역주민들에게서 징발하거나 상납세전을 탈취하는 방식을 택했는데, 의병들은 지역주민의 재산과 상납세전을 요구하는 것은 명분론적으로 합당하다는 뜻에서 물자조달 행위를 스스로 義金으로 규정했다. 아울러 의병을 막기 위해 설치된 자위단과 의병이 상호 대립 관계 속에서 지역주민의 지지를 얻기 위해 경쟁하는 맥락도 그려냈다. 이런 상황에서 지역주민은 각자가 가지고 있는 기반에 따라 양자를 취사선택하는 방식의 능동적 대응을 했고, 지역에 따라 의병과 일본군에 대해 모두 거부하고 자율성을 지키고자 노력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를 통해 의병운동이 지역사회와 관계 맺는 과정을 이해하고자 했다. 언론의 의병보도 양상이 변해가는 과정도 추적했다. 『대한매일신보』와 『황성신문』 등 당대의 주요언론은 의병의 義에 대하여 각기 다른 시각으로 보도했는데, 『대한매일신보』는 의병에 호의적인 義兵論을 주창했고 『황성신문』은 暴徒論을 통해 의병에 비판적인 보도를 양산했다.한편 두 언론은 의병 및 군경과는 다른 지역주민들을 지칭하는 ‘良民’이라는 개념을 공유했는데, 良民論은 의병과 일본군경, 친일협력세력 모두를 비판하는 양비론으로 귀결되었다 그러나 이미 와해의 길을 걷고 있던 의병부대의 현실상 양비론은 결코 중립적인 논리가 될 수 없었고, 결국 의병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형성에 일조하고 말았다. 이러한 분석은 언론 담론이 어떻게 사회운동을 주변화시키는지에 대한 단초를 제공해줄 것이다. 마지막으로 일본 군경의 무력진압과 지역주민의 외면에 의해 의병이 사회적으로 고립되어 가는 과정을 분석했다. 일제는 의병투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다양한 대응책을 마련했는데, 강온양면책을 병용하는 와중에서 지속적으로 군사력과 경찰력을 증강하였다. 이 무력진압의 최종단계가 바로 ‘남한대토벌작전’이었다. 이 진압작전으로 인해 의병은 결정적 타격을 입었고, 의병부대 군수물자 조달의 방식과 절차 역시 무력화되었다. 결국 지역주민들의 정서도 점점 의병을 외면하게 되는 상황으로 변화하였고 결국 의병은 고립된다는 내용으로 논문을 마무리했다. 마지막으로 필자가 이 논문을 통해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를 얘기하고자 한다. 상술한 바와 같이 이 논문의 핵심은 ‘사회운동과 사회의 관계’이다. 기존 연구에서는 운동 발생원인의 사회적 조건에 대해서는 많은 분석이 이루어졌지만 운동의 진행과정에서 운동주체와 사회가 맺는 관계에 대해서는 많이 주목하지 않았다. 필자는 이러한 지점을 돌파하고 싶었다. 분원마을 주민들의 의병에 대한 인식, 폭도론과 양민론으로 대표되는 언론의 의병 보도, 지역주민의 의병에 대한 지지철회와 의병운동의 고립 등을 분석한 것은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자신감보다는 부끄러움과 아쉬움이 많은 글임에도 드러냄을 통해서 성장할 수 있다는 믿음에 따라 연구회 회원들께 소개한다. 후속연구를 통해 더 보완하고 또 성장할 것을 약속하며 글을 맺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