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논문 - 「1882년 조약․장정의 체결과 속국(屬國)․반주지국(半主之國) 조선의 국제법적 지위」

BoardLang.text_date 2017.02.07 작성자 유바다

나의 논문을 말한다


1882년 조약·장정의 체결과 속국(屬國)·반주지국(半主之國) 조선의 국제법적 지위


(『역사와 현실』 99, 2016.3)

유바다(근대사분과)


1882년 淸은 조선과 미국의 조약 체결을 주선하는 동시에 조선과는 장정을 체결하였다. 前者는 조선의 自主를 인정하는 것이었고 後者는 조선의 屬邦 지위를 규정한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이 中國의 屬邦이나 內治와 外交는 自主로 한다”는 언설이 이때 등장하기도 하였다. 이를 두고 기존 연구에서는 “사대질서의 자기모순의 발로”라고 하였다. 즉 淸의 행위가 모순적이었다는 것이다. 최근 들어 각광받은 “屬國自主論” 또한 이 질서가 모순적이고 이원적이었으며 애매한 것이었다고 평가하였다. 自主적으로 서구 열강과 조약을 체결하지만 淸의 屬國인 조선의 지위는 그 자체적으로 모순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져 왔다.

그러나 “모순적”이라는 표현은 실상 아무것도 설명해 주지 못한다. 단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모순적”이라는 애매한 표현을 붙였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는 풀어야 할 “문제”로 부각된다. 19세기 후반 “屬國自主” 조선의 지위가 그동안은 이해할 수 없는 모순적인 것이었다면 이제는 이해할 수 있는 새로운 설명 틀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를 풀기 위해 淸이 1864년 同文館을 통하여 휘튼(Henry Wheaton)의 국제법 서적 Elements of International Law를 漢文으로 번역한 『萬國公法』부터 살펴보았다. 검토 결과 놀라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국제법 질서에서도 宗主權(Suzerainty) 하 封建的인 관계(Feudal relation)를 가지고 있었던 進貢國(Tributary State)의 존재가 있었다. 이는 중화 질서 하 朝貢國과 상통하는 것이었다. 『萬國公法』에서 진공국은 “봉건적 관계의 영향을 받지 않는 한” 自主之國(Sovereign States)이나 그렇지 않다면 屬國(Dependent State)·半主之國(Semi-sovereign State)이 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조선은 진공국으로서 自主를 누릴 수 있었고 屬國의 지위도 겸비할 수 있었다. “屬國自主” 조선의 지위는 모순이 아닐 수도 있었던 것이다.

마침 淸이 조선에 列國立約을 勸導하기 직전인 1878년 서구 세계에서 베를린 조약이 체결되면서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宗主權(suzerainty) 하에 屬한 自治的(autonomous)인 進貢(tributary) 公國 불가리아가 탄생하였다. 국제법 질서에서 自治․進貢․屬國 불가리아의 존재는 무리 없이 이해될 수 있었다. 필자는 바로 이 지점에서 淸이 불가리아의 사례를 조선에 적용하여 立約을 권도하면서도 屬國으로 묶을 수 있는 단서를 찾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를 입증하기 위해서는 증거가 필요했다. 『淸季中日韓關係史料』, 『李鴻章全集』 등 淸 측 자료를 검토하였으나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필자의 가정은 난관에 봉착했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곳에서 증거를 찾을 수 있었다. 臺灣 中央硏究院 近代史硏究所 檔案館에서 공개한 『外交檔案』에 駐日淸國公使 何如章이 1878년 12월 7일 總理衙門에 보고한 베를린 조약의 한문 번역본이 실려 있었던 것이다. “베를린 조약[柏林條約]이 불가리아[博魯哦利亞]를 오스만 투르크 황제[土帝]의 통할(統轄)에 속(屬)한 자주후국(自主侯國)으로 규정하였다”는 제목의 하여장의 보고서는 『外交檔案』 중 「朝鮮檔」이 아닌 「條約」에 수록되어 있었다. 주지하듯이 『淸季中日韓關係史料』는 『外交檔案』의 「朝鮮檔」을 공간한 것이다. 따라서 「條約」에 실린 하여장의 보고서는 『淸季中日韓關係史料』에 수록될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淸季中日韓關係史料』를 중심으로 淸의 열국입약권도책을 다룬 기존 연구는 1878년 서구 세계에서 체결된 베를린 조약을 시야에 넣을 수 없었다. 그러나 檔案館의 『外交檔案』을 샅샅이 뒤진 결과 베를린 조약을 한문으로 번역한 하여장의 보고서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 보고서에는 베를린 조약 제1관 한문 번역문이 수록되어 있었다.

 

그림1

[그림1] 베를린 조약 漢文 번역 제1관(臺灣 中央硏究院 近代史硏究所 檔案館, 『外交檔案』, 總理各國事務衙門-條約-柏林條約及各國商約-出使日本何大臣抄送柏林條約規定博魯哦利亞為自主侯國屬土帝統轄, 「柏林條約」(01-21-048-01-001))

 

제1관 불가리아[博魯哦利亞]를 自主之國으로 삼아 오스만 투르크 황제[土帝]가 統轄하는 附庸侯爵에           屬하게 한다.

自主·屬國의 존재가 국제법 질서 하의 조약에서 확인된 순간이다. 그렇다면 조선이 自主적으로 서구 열강과 조약을 체결한다 하더라도 淸의 屬國 지위는 그대로 유지될 수 있었다. 더욱이 영국, 독일, 오스만 투르크 등은 베를린 조약 체결을 통하여 불가리아에 주권을 부여하는 동시에 오스만 투르크의 종주권 하에 두어 러시아의 불가리아 침략을 저지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防俄策을 고심하던 淸의 이홍장 입장에서는 베를린 조약을 조선 정책에 적극적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홍장은 베를린 조약 입수 직후인 1879년 조선에 대한 열국입약권도를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1882년 임오군란 직후 조선과 장정을 체결하여 屬邦 지위를 규정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淸의 행위는 전혀 모순적이지 않았고 국제법적으로도 이해될 수 있는 것이었다.

장정 체결 직후 이홍장은 조선을 다음과 같이 국제법적인 屬國·半主之國으로 규정하였다.

 

그림2[그림2] 이홍장의 屬國·半主之國 언급(『淸季中日韓關係史料』 第三卷, 編號624, 1032쪽)


생각건대 泰西 通例에 모든 屬國의 政治는 自主로 할 수 없습니다. 고로 남들과 조약을 체결할 때 그 統轄之國이 政事를 主政합니다. 즉 半主之國은 가히 立約할 수 있습니다. 또한 단지 능히 통상만 議辦할 수 있을 뿐 修好는 할 수 없습니다. …… 이러한 無事한 때를 틈 타 大臣을 파견하고 주재하도록 하여 …… 조선을 保護하면 곧 우리의 국경을 굳힐 수 있으니 또한 泰西 屬國의 예와 相符합니다.

이는 『萬國公法』에서 규정한 屬國·半主之國의 사례와 정확히 일치한다. 『萬國公法』에 대한 기존 연구는 『萬國公法』 第1卷 第2章에 수록된 自主之國(Sovereign State), 半主之國(Semi-sovereign State), 進貢國(Tributary State), 藩屬(Vassal State) 까지는 읽어냈지만 屬國·半主之國(Dependent or Semi-sovereign State)은 포착하지 못했다. 다름이 아니라 屬國·半主之國은 『萬國公法』의 앞부분인 第1卷 第2章이 아닌 뒷부분인 第3卷 第1章, 第2章에 수록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림3

[그림3] 屬國․半主之國의 通使權 규정(『萬國公法』, 竪川三之橋(東都):老皀館, 慶応元(1865))


그림4


[그림4] 『萬國公法』 영문 원본의 屬國․半主之國(Henry Wheaton, 1855, Elements of International Law, Sixth Edition by William Beach Lawrence, Boston: Little Brown and Company, Advertisement to the first Edition, p.274)


屬國(dependent states)․半主之國(semi-sovereign states)의 通使(the rights of legation)는 반드시 所屬, 所倚하는 大國에 의존해야 한다. …… 屬國(dependent states)과 半主之國(semi-sovereign states)의 立約權에는 限制하는 바가 있다.

이를 통해 이홍장은 조선에 제한적이나마 주권을 부여하여 서구 열강과 조약을 체결하도록 하는 한편 淸의 종주권 하 속국으로 묶어두려 하였다. 그렇다면 조선의 지위는 『萬國公法』에서 규정한 屬國․半主之國으로 수렴된다. 즉 淸은 조선의 屬國‧自主를 표방하였지만 실제로는 屬國․半主之國을 추구하고 있었다. 이제 조선의 지위는 “모순적”인 것이 아니라 국제법적인 屬國․半主之國으로 명확히 규정될 수 있었다. 屬國․半主之國은 제한적이나마 주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주권을 완전히 몰수당한 植民地(Colony)와는 구별된다.

필자는 바로 이러한 점을 착안하여 지난 2015년 9월 근대사분과 분과총회에서 이 내용을 발표하고 2016년 3월 『역사와 현실』 99호에 게재할 수 있었다. 분과총회 발표 과정에서 토론자 선생님께서 지적하신 半主之國의 “半”이 가지고 있는 취약성을 고민하면서 이 연구를 토대로 2016년 12월 박사학위논문 『19세기 후반 조선의 국제법적 지위에 관한 연구』를 작성할 수 있었다. 박사학위논문의 내용에 대해서는 추후 기회가 있으면 자세히 설명하고자 한다.

※ 한국역사연구회는 소속 연구자들의 학술연구 활성화를 위해 2007년부터 매년 심사를 통해 ‘최우수 논문’ 및 ‘신진연구자 우수논문’에 대한 수상을 해오고 있다. 위에 소개된 논문은 편집위원회의 엄밀한 심사를 거쳐 ‘신진연구자 우수논문'으로 선정되었으며 수상은 2016년 한국역사연구회 정기총회에서 진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