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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노트나의 논문을 말한다
나의 학위논문 - 「해방 직후 북한 과학기술 교육체계의 형성과 성격(1945-1950) 」 BoardLang.text_date 2017.01.12 작성자 김태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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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논문을 말한다「해방 직후 북한 과학기술 교육체계의 형성과 성격(1945-1950)」(2016. 02. 서울시립대학교 국사학과 석사학위논문)김태윤(현대사분과) 석사학위 논문을 쓰기 전까지는 논문에 대하여 할 말이 ‘참으로’ 많았다. 그러나 석사논문을 가지고 여기저기에서 발표를 거친 결과 더 공부해야겠다는 결론을 가지게 되었다. 이처럼 부족한 논문이지만, 석사학위논문을 통해 현재 나는 북한사 전공자라는 아이덴티티를 얻었고, 나아가 앞으로 나의 연구의 기초가 될 문제의식을 얻을 수 있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대학원을 진학할 때 나는 미군정기 남한을 연구하기 위하여 입학하였다. 하지만 모든 석사과정생들이 그러하듯이 이미 쌓여진 연구 성과라는 1차적인 벽에 부딪혔고, ‘획기적인 새로운 사료’를 찾기 힘들다는 현실에 석사과정 내내 논문을 주제를 수차례 바꾸었다. 당시 학교 내에는 현대사 전공자를 전공하는 선배가 단 한사람밖에 없었다. 그 선배가 현대사를 한답시고 혼자 이리 헤매고 저리 헤매던 내가 보기에 안쓰러웠는지(온전히 개인적인 생각), 북한사 세미나에서 함께 공부해보자는 제안을 하였고, 그 세미나가 나의 석사학위논문, 나아가 이후의 연구주제를 결정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본격적으로 논문 이야기에 들어가 내가 연구의 시기를 해방 직후로 고수한 것은 ‘시간의 연속성’ 때문이었다. 역사학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는 때부터도 근대와 현대를 1945년 8월 15일을 기점으로 나눈다는 것이 의문이었다. 물론 ‘해방’은 당시 사람들에게 엄청난 사건이었을 것이지만, 1945년 8월 15일이 사람들의 일상과 의식, 국가행정전반에 미친 영향이 얼마나 되는지를 살펴보고 싶었다. 그리고 내가 집중한 또 다른 한 가지는 당대 ‘엘리트’였다. 엘리트 중에서도 ‘테크노크라트’에 대한 관심이 제일 컸다. 국가의 이념과 사상 등등에 찬성하지는 않지만 행정관료 내지는 기술관료로서 국가에서 일하는 당사자들의 생각이 궁금했고, 이들을 기용했던 국가의 입장이 궁금했다. 이러한 나의 두 가지 문제의식과 관심이 가장 극명하게 나타난 것(적어도 내가 들여다본 해방 직후 사료 중)이 “북한의 기술자”들이었다.
[사진1] 흥남공업대학교 교원간부 이력서 (1949년) 물론 북한에서 기술자들에게 정치적 평가를 관대하게 했다는 것과 일본인 기술자들까지도 유용(留用)했다는 사실은 어느 정도 알려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북한의 기술자들에 대해 주목한 이유는 평양공업대학(현 김책공업대학)과 흥남공업대학(현 함흥화학공업대학)의 교원들이 이력서와 자서전, 평정서 사료를 보고 나서였다. 앞서 언급했던 북한사 세미나에서 나의 여러 문제의식들을 고민 털어놓듯 이야기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한 선배에게 공업대학 이력서를 한번 보라는 조언을 들었고, 그때부터 이 공업대학교원 이력서를 분석하기 시작하였다. 이력서 사료는 교원 개개인을 분석할 수 있는 이력서, 자서전과 국가가 교원 개개인을 평가하는 평정서로 구분할 수 있다. 이 2가지 사료를 모두 검토해본 결과는 “이들이 어떻게 보면 당시의 ‘테크노크라트’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것이었다. 이력서를 검토해본 결과 분석의 대상이 된 두 대학(평양공대, 흥남공대)의 이공계 교수는 모두 87명이었고, 대부분이 일제시기 일본과 조선의 제국대학, 전문대학이상 졸업자들이었다. 이들은 졸업 이후 총독부나 각종 일본의 연구소 등등에서 일하던 중 해방을 맞이하였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북한의 간부 선발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특히 과거 일제의 기업이나 총독부에서 근무했던 교원들의 이력과 부농, 지주의 출신성분을 가진 교원들은 북한 체제에서는 선호하지 않는 인물들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북한 당국은 이들의 계급적 취약성을 문제 삼기보다는 그들의 전문성에 더욱 가치를 두는 방향을 선택했다. 이들은 과거 이력에 구애받지 않고 국가건설에 참여하는 ‘오랜인테리’로 명명되어 임용되었다. 이들의 자서전을 보면, 교원들 개개인 역시 국가의 체제에 적응하였고, 국가로부터 전문성을 인정받고자 노력하였다. [사진2] 흥남공업대학·평양공업대학 교원간부 이력서·평정서 이처럼 과학기술자들은 해방 직후 정치나 법조계의 인사들보다 국가로부터 유연한 정치적 평가를 받고 간부로 선발되었다. 1948년 계급재편시기에도 과학기술자들은 유연하게 평가받아서 재편이 거의 일어나지 않았고, 국가가 이들을 평가한 평정서를 통해서 보아도 마찬가지이다. 물론 평정서 작성자에 따라 차이가 나타나지만, 두 대학의 교원들의 평정서를 보면 빈농 성분이라고 해서 정치사상성이 뛰어나게 기록되어 있다거나 지주·부농이라고 해서 정치사상성을 재고해야 한다는 식의 서술은 크게 눈에 띄지 않는다. 이렇게 공업대학 교원들이 정치적인 면에서 유연하게 평가받은 이유는 정치나 경제 관련 과목보다 오랜 기술과 수학기간을 필요로 하는 이공계과목이 가진 특수성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북한은 위와 같이 기술간부를 양성하기 위해 대학을 세움과 동시에 신속한 공장 복구와 기술교육 인프라의 확충을 위한 각종 기술자 양성소를 건설하였다. 이 과정에서 부족한 교원들을 확보하고자 해방 직후 유용(留用)했던 일본인 기술자들 중 일부 고급 기술자들을 교원으로서 활용하도록 결정하였다. 이들은 주로 공장 기술자와 지배인들을 양성하는 기술 양성소나 전문학교 등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주목할만한 점은 이들이 좋은 대우를 받았으며, 모두 일본어로 수업을 진행했다는 사실이었다. 이처럼 일본인 기술자들은 북한의 기술교육에 종사하면서 포로신분이었던 여타 일본인들보다 안정적인 생활을 영위했다. 하지만 이들에게도 북한의 정치사상적 평가는 늘 있었고 이 때문에 일본인 기술자들은 맑스-레닌주의 서적을 읽는 증 북한의 정치사상적인 면에도 많은 관심을 보였다. 이러한 태도를 보인 것은 북한에서 좋은 대우를 받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식민자이자 패전국의 국민으로서 해방 이후에도 북한에서 살아남기 위한 노력이기도 했고, 일본인 기술자들 개인의 의지가 반영된 결과이기도 했다. 해방 직후 북한의 행정 전반에 가장 크게 영향을 준 것은 소련이었다. 북한은 소련의 교육체계를 받아들이면서 사회주의 교육의 틀을 갖추게 되었다. 교육체계의 외형은 소련의 영향을 받아 설립되었지만, 교육기관의 설립 이후 북한 과학기술 교육의 내용적 측면은 독자적인 노선을 갖추며 채워져갔다. 또한 그동안 과거 이력과 출신성분의 취약성으로 인해 “오랜 인테리”로 명명되었던 교원들도 정치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거나 당 내부 조직에 가입하는 등 스스로 정치적 각성을 이루어 냈다. 그리고 기존의 소련식 사회주의 교육제도에서 나아가 북한에 알맞은 교육제도와 교육기관을 신설하여 자체적으로 각종 인력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을 보이기도 하였다. 할 말이 없다면서도 설명이 길었지만, 골자는 기존 북한 국가 형성기 연구들의 이분법적인 경향에서 벗어나 북한의 과학기술 교육의 형성 과정에 영향을 끼친 다양한 요소를 조금이나마 밝혀보고자 한 것이었다. 북한의 과학기술 교육은 식민지 시기의 인적·물적 유산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출발하였기 때문에 이전 시기와 밀접한 연속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와 더불어 북한은 소련의 사회주의식 교육체제를 흡수하여 과학기술 교육기관과 정책을 수립하였고, 자체적으로 필요에 따라 새로운 과학기술 교육기관을 설립하고, 교육제도를 변용하였다. 해방 직후 형성되었던 북한 과학기술 교육은 이 모든 요소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다는 점을 종합적으로 이해할 때 그 본질에 더욱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즉, 이 논문은 이러한 당대를 여러 요소들을 종합적으로 살펴 북한의 과학기술교육시스템을 이해하기위한 ‘시도’였다고 할 수 있다. 다만, 해방 직후 소련과 중국에 파견된 기술 유학생, 실습생에 대한 내용을 다루지 못한 점은 아쉬운 점이다. 이후 연구는 기술인력 문제보다는 공업지대였던 평양과 흥남의 도시에 초점을 맞춰 진행할 예정이지만, 도시와 기술자를 함께 연구하는 연구를 하는 것이 개인적인 바람이다. 덧붙여 남한사에서 ‘연구적’월북을 선택하게 해주시고 자료적으로, 논문의 구성적인 면에서 도움을 주신 북한사반 선배들과 논문을 지도·심사해 주신 여러 선생님들께 감사하는 말씀을 드리며 부족한 글을 마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