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학위논문을 말한다 朝鮮後期 慶尙道 財政運營 硏究 (2015.8 충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문광균(중세 2분과) 경제사는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물적 토대와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인간의 경제활동, 나아가 국가의 재정운영을 분석하는 학문 분야다. 다른 분야 역시 그러하겠지만 경제사는 많은 데이터자료를 입력하고, 이를 통계화하여 분석하는 지난한 과정의 연속이다. 그리고 지배계층, 인물, 가문 등을 연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일반 대중의 관심을 덜 받는 분야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제사는 사회를 지탱하는 하부구조이고, 그 시대의 성격을 도출하는데 유효하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석사과정부터 ‘勞多功少’인 경제사에 흥미를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조선은 세계사적으로 그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오랜 기간 동안 왕조를 존속시켰다. 여기에는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본 논문에서는 조선왕조가 장기간 유지될 수 있었던 요인을 ‘재분배경제체제’적인 입장에서 살펴보고자 했다. 조선왕조는 민에게서 징수한 재원을 일정한 기구나 장소에 집중시키고, 이를 재조직하고 재분배하면서 왕조체제를 유지시켰다. 그리고 수해나 가뭄 등 자연재해에 대비하여 부세로 징수한 재원 중 일부를 적절한 거점에 저장하고 이를 통해 민의 항산을 보장하려고 하였다. 이렇게 조선정부는 중앙집권적 재정운영을 추구하면서도 동시에 독자적인 지방의 재정운영권도 보장해주는 중층적인 재정구조 속에서 왕조를 존속시켜 갔다. 본 논문은 조선후기 경상도를 대상으로 실시된 재정정책의 추이를 살펴보고, 이와 함께 재원 재분배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분석하고자 하였다. 조선시대 경상도는 8도 중 가장 많은 재원을 생산하고 있는 지역으로 국가재정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그런데 경상도는 지리적, 경제적 배경으로 인하여 다른 도와 구별되는(예를 들면 상납과 하납구조를 가지고 있었다던가, 대일외교비용이 많았다던가, 서울까지 재원의 물류 거리가 멀었다던가 등) 독특한 재정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본 논문은 이러한 경상도의 재정적 특징에 주목하고, 조선후기 정부의 재정정책과 그에 따른 재원조달 방식의 변화양상을 통시적 관점에서 살펴보았다. 본문 2장에서는 17세기 경상도 부세제도와 재원조달 방식의 정비 과정을 고찰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정부는 부세 불균형을 해소하고, 국가재정 운영의 정상화를 위하여 전결수 파악에 집중해야만 하였다. 이를 위해 선조 36년 癸卯量田과 인조 12년(1634) 甲戌量田을 실시하여 전결수를 확보하고, 부세제도를 정비하였다. 17세기 전반 각종 부세제도가 정비되고 있는 사이 경상도에는 임진왜란으로 붕괴된 상ㆍ하납체계가 새롭게 형성되었다. 상납체계와 하납체계는 모두 광해군대 궁궐 영건사업과 己酉約條를 계기로 복구되었다. 이때 도내 67읍 중 하납지역 19읍을 제외한 48읍은 전세를 호조로 상납했는데, 이 중 남해안에 위치한 16읍은 전과 달리 해로를 통해 수송하기 시작하였다. 정부는 세곡운송의 편의성과 효율성을 위하여 진주 場巖倉과 양산 甘同倉을 설치하고, 세곡의 보관과 운송을 주관하게 하였다. [그림1] 양산군지도 중 감동창 ⓒ『地乘』(규장각) 이로써 충주 가흥창, 진주 장암창, 양산 감동창은 재원조달의 거점기구로 성장해갔다. 장암창과 감동창은 비록 漕倉은 아니었으나 18세기 중반까지 조창의 역할을 대행하였다. 그리고 동래부에는 公木庫와 釜山倉이 설치되어 하납재원이 수납되었다. 17세기 전반 상ㆍ하납체계의 재편으로 경상도의 재원조달은 매우 복잡해졌다. 도내에서 수취한 재원을 중앙으로 상납해야 하지만, 동래부로도 하납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는 재원을 조달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운송비를 증가시킬 수 있는 요인이었다. 운송비의 증가가 민의 부담으로 전가된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상ㆍ하납체계는 정비될 필요가 있었다. 이를 위해 정부는 숙종 4년(1678) 「영남대동사목」을 반포하고, 영남대동법을 실시하였다. [그림2] 영남대동사목 ⓒ국립중앙도서관 이를 통해 상납과 하납 재원을 相互代納하여 운송비의 절감을 유도하는 한편 재원 운반에 소요되는 駄價와 船價를 규정하고, 전세와 대동세에 포함시켰다. 즉, 경상도의 상ㆍ하납체계는 영남대동법을 통해 정비되었다. 3장에서는 17세기 후반~18세기 중엽 경상도 재원조달 방식의 변화 양상을 재정 부문별로 조망하고자 하였다. 먼저 전세 부문에서는 18세기 중반 두 차례에 걸쳐 경상도 북부지역인 嶺底 12읍에 田稅 作錢制가 실시되었다. 이와 함께 전세로 하납되던 왜공은 점차 증가하는 추세였다. 대동법이 실시된 이후 왜공의 추가비용은 도내 비축되어 있는 大同儲置米로 충당하였다. 대동세 역시 전세와 마찬가지로 동전으로 상납되는 경향을 보였다. 대동세는 군현에 따라 米, 木, 布 등으로 수취하였는데, 이 중 전세 작전제와 맞물려 동전으로 상납하기 시작한 것은 무명, 즉 大同木이었다. 綿荒과 錢荒에 따라 대동목의 조달방식이 수시로 변경되다가 영조 11년(1735)부터 대동목의 절반을 동전으로 납부하는 ‘錢木參半制’가 채택되었다. 한편 18세기 전반에는 선혜청의 예산 편성 방식의 변화로 저치미의 배분 비율이 점차 줄어들었다. 그 결과 대동법 시행 초기 대동세의 약 60%를 차지하던 저치미는 18세기 중반 40% 이하로 떨어졌고, 경상도가 보유하던 저치미의 수량은 현격히 감소하였다. 같은 시기 경상도의 환곡은 중앙과 타도로 많이 유출되었다. 그 대표적인 환곡은 監營別會穀과 賑恤穀이었다. 감영별회곡은 본래 감사의 주관 아래 감영의 수용이나 도내 군사들의 급료로 지급하는 재원이었으나 戊申亂 직후 句管處가 비변사로 이관하였다. 별회곡이 비변사 구관곡이 된 이후 그 耗穀은 중앙군문에 정기적으로 상납되는가 하면, 다른 환곡을 조성하는 원곡으로 지출되었다. 그 결과 17세기 후반 70만석을 상회하던 별회곡은 18세기 후반 30만석 수준으로 떨어졌다. 한편 경상도는 함경도, 강원도, 전라도, 제주 등과 海路 접근성이 용이하기 때문에 일찍부터 이들 지역에 진휼곡을 수송해주었다. 그러나 진휼곡의 잦은 이전은 경상도에 많은 피해를 초래하였다. 진휼곡의 판출과정에서 발생하는 도민의 불만과 소요, 水軍의 兵船으로 진휼곡을 운반하는데서 나타나는 수군방어체계의 약화, 타도까지의 원거리 운송, 경상도 곡물 비축량의 감소 등이 그것이었다. 4장에서는 경상도의 재원이 거점 창고를 중심으로 재분배되는 과정과 도내 부족한 재원을 확보하는 실상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17세기 전반 경상도의 상납체계가 형성된 이후 도내 재원 중 세곡은 대부분 京江船人을 통해 조달되었다. 그러나 대동법과 균역법의 실시로 선혜청과 균역청이 등장하고, 이 기관들을 통해 재정체계의 일원화가 일정정도 이루어지자, 정부는 국가주도의 조운체계를 공고히 하고자 하였다. 그 결과 18세기 중반 진주 駕山倉, 창원 馬山倉, 밀양 三浪倉 등 3조창을 설치하고, 국가 주도의 조운제를 전격 실시하였다. [그림3] 밀양 삼랑진 후조창 유지 비석군 ⓒ 문화재청 이는 17세기 이래 꾸준히 논란의 대상이었던 私船賃運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고자 한 정부의 의지였다. 이로써 경상도 연해읍의 전세와 대동미 등 상납재원은 3조창이라는 거점 창고를 통해 본격적으로 상납되었다. 3조창 중심의 상납체계는 19세기 후반까지 유지되었다. [그림4] 경상도 3조창과 속읍 ⓒ문광균 상납체계가 재편되는 사이 하납체계는 보완되고 있었다. 하납재원은 호조나 선혜청과 같은 중앙기관이 아닌 동래부로 납부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상납에 비해 정부의 통제력이 강하게 미치지 못하였다. 그 결과 공작미의 欠縮, 手標米 남발, 運監의 폐해 등과 같은 문제가 발생하였다. 정부는 수차례에 걸쳐 節目과 事目을 반포하여 하납과정에서 발생하는 제반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하였다. 18세기 중반 상납물류가 3조창 중심으로 재편되는 것과 짝을 이루어 진휼곡 운송체계도 정비되었다. 영조 8년(1732) 정부는 함경도와 강원도로 진휼곡을 원활하게 이전하기 위하여 연일에 浦項倉을 설치하였다. 포항창이 국왕을 비롯한 관료들로부터 긍정적인 평가를 받자 정부는 18세기 중반에는 김해 명지도에 蒜山倉을 설치하였다. 산산창의 환곡은 포항창의 곡물이 부족할 경우 보충하고, 전라도와 충청도에 기근이 발생하였을 때 기민을 구제하고자 만든 전형적인 진휼창고였다. 그리고 이어 사천에 濟民倉을 설치하였다. 제민창 역시 타도에 기근이 발생하여 대대적으로 진휼곡이 필요할 경우를 대비하여 만든 진휼창고였다. 사천에 제민창을 만든 직후 정부는 사천 제민창을 右濟民倉, 연일 포항창을 左濟民倉으로 삼았다. 이로써 경상도의 진휼곡 운송체계는 정비되었고, 포항창, 제민창, 산산창 등 ‘진휼 3창’을 중심으로 진휼정책이 추진되었다. [그림5] 경상도 '진휼3창'과 속읍 ⓒ 문광균 18세기 후반부터는 경상도의 곡물을 보전해주기 위한 대책들이 마련되었다. 그 대표적인 방법으로 추진된 정책이 給代였다. 먼저 별회곡의 경우 耗條 부족분을 충당하기 위하여 운영하였던 監營債를 전격 폐지하고, 정조 5년(1782) 放債穀을 창설하였다. 대동저치미의 경우 순조 6년(1806) 別置米를 설치하여 급대재원으로 사용하였다. 이와 같이 17세기 후반 이래 정부가 추진한 재정정책으로 줄어든 경상도의 곡물은 방채곡과 별치미 등 환곡으로 보충되었다. 재원조달 방식은 재정정책, 부세제도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는 만큼 시기에 따라 변화하고 있었다. 여기에는 경제 상황, 외교관계, 그리고 민원과 같은 요인이 작용하고 있었다. 특히 경상도에는 대일외교비용을 전담해야 하는 재정적 구조로 인하여 상ㆍ하납체계가 형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17세기 이래 추진된 일련의 정책 과정에서 정부는 상ㆍ하납체계를 최대한 이용하고, 거점 창고를 설치하여 운송비를 절감하고자 하였다. 이는 경상도에서 생산되는 재원을 효율적으로 배분하기 위함이었다. 그 결과 정부는 필요한 재원을 안정적으로 조달받을 수 있었고, 민은 물류비의 부담에서 다소 벗어날 수 있었다. 본 논문을 통해 확인된 조선후기 정부의 정책 방향은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다. 첫째, 정부는 재정정책을 추진하면서 동시에 재원 조달방식을 지속적으로 개선해 나갔다는 점이다. 조선후기 정부가 실시한 주요 재정정책으로는 양전사업, 대동법, 균역법 등이 있었다. 이러한 일련의 정책은 이념적으로 ‘均稅’를 추구하여 민의 항산을 보장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민의 항산을 보장하는 일이 궁극적으로 왕조를 유지하는 길이었기 때문이었다. 둘째, 정부는 道 단위로 원활하게 재원을 재분배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조선시대 각 도는 지리적, 경제적 배경으로 인하여 각기 고유한 재정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정부의 재정정책은 각 도의 특성을 고려하여 시행되었고, 재원의 재분배도 도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18세기 중반 이후 『良役實摠』, 『賦役實摠』, 『軍國摠目』 등 ‘道摠’을 파악하기 위한 財政書가 집중적으로 간행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이러한 재정상의 변화로 지방에서 산출되는 재원은 감사의 주관 아래 도 단위에서 재분배되었다. 경상감영 역시 이러한 도 차원의 재정업무를 위해 『嶺營總錄』, 『嶺營事例』, 『嶺南監營事例』 등을 간행하였고, 지속적으로 수정 보완해갔다. [그림6] 嶺南監營事例 ⓒ 규장각 셋째, 정부는 18세기 후반 이후 신규 환곡의 창설과 운영을 통해 재정 위기를 극복하고자 했던 점이다. 18세기 중반 균역법을 기점으로 주요 부세는 대부분 田結稅化되었다. 그러나 庚子量田 이후 결총은 점차 감소 추세를 보였고, 그 영향으로 전결세의 수입도 줄어들었다. 19세기 전반 정부는 결총을 늘리고자 양전을 추진했지만 대내외적인 요인으로 인하여 무산되고 말았다. 정부는 긴축재정이라 할 수 있는 ‘節用’을 내세우면서 재정지출을 최소화하고자 했지만, 이 또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이와 같이 재정의 수지구조가 악화되는 상황에서 정부는 새로운 수입원으로 환곡에 주목하였던 것이다. 그 결과 경상도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정규세인 대동저치미와 지방재정의 부족한 재원을 모두 환곡으로 충당해 나갔다. 본 논문을 통해 확인한 결과를 위와 같이 정리하였지만, 여러 가지 면에서 미흡한 부분이 많다. 통시적 관점에서 개항기 이후 재정정책과 재원 조달방식에 대해서는 다루지 못한 점, 공시적 관점에서 도 재정과 일반 군현재정 간의 상관관계를 분석하지 못한 점, 17세기 이래 꾸준히 재분배정책이 시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경상도를 기점으로 임술민란이 발생한 점 등이 그러한 부분이다. 이러한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진행한 작업보다 훨씬 많은 노력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