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텔레비전 등 각종 매체를 통해 다양하게 접하는 역사 이야기를 별 의심 없이 과거의 진짜 사실로 믿는 경향이 있다. 청소년 시절 학교에서 배운 역사 교과서의 내용에 대해서는 더욱 강한 신뢰를 보낸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역사 드라마나 영화를 볼 때 그 소소한 내용을 작가의 문학적 상상력이 만들어낸 허구라기보다 역사적 사실로 치부하는 이가 꽤 많다. 한국 역사를 전공하다보니, 사극의 어떤 내용이 사실임을 확인받으려는 질문을 사석에서 종종 받기에 하는 얘기다.
그렇지만 우리가 역사적 사실로 굳게 믿는 것들은 ‘사실’이라기보다 역사가의 주관이 일정 부분 개입된 ‘해석’ 또는 ‘평가’에 가까운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이순신과는 떼려야 뗄 수 없을 만큼 친숙한 ‘성웅 이순신’이라는 표현에서, 이순신이라는 이름은 사실이고 ‘성웅’(성스러운 영웅)이라는 단어는 평가의 결과이다. 과거의 어떤 일을 생생히 전한다는 원사료일지라도, 그것이 과거의 특정 상황을 있었던 그대로 보여주지는 않는다. 텍스트로 바뀌는 순간 그것은 이미 일정한 프리즘을 거쳐 가공된 기록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가공된 기록, 역사
이는 비단 한 국가의 역사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한 개인이 살아온 삶의 여정, 곧 개인의 역사를 기록하고 기억하는 방법도 매한가지다. 나는 지금 스스로의 과거를 어떻게 반추하고 있을까? 청소년 때 겪은 경험을 20~30년이 지난 지금 얼마나 사실 그대로 기억하며, 얼마나 객관적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는가? 골목길에서 불량배 두 명에게 잡혀 몇 대 맞고 풀려난 우울한 경험이 있다고 치자. 세월이 흘러 부모가 되어서는 불량배들과 4 대 1로 싸워 이겼다는 무용담으로 조작해 자식에게 전달한 적은 없는가?
과거의 경험에 대한 인간의 기억은 이렇듯 불완전하며, 심지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편집’해 기억한다. 이런 기억 장치가 없다면, 인간은 엄청난 정신적 상처에 눌려 미쳐버릴 수도 있다. 큰 치욕이나 억울함을 당했는데 그것을 현실에서 해소할 능력을 갖추지 못했을 때 우리 가슴에는 아픈 상처가 쌓인다. 그것을 방치해서는 제대로 삶을 영위할 수 없다. 그래서 상처를 나름대로 치유하기 위해 기억의 전환을 시도하거나, 하다못해 한강에 가서 화풀이라도 하는 것이다. 개인의 기억조차 이럴진대, 수백만∼수천만 명이 집단을 이뤄 역사라는 이름으로 기억하는 것을 ‘100% 사실’로 믿는다면 순진하다기보다는 어리석다고 해야 할 것이다.
조선 후기 사회는 유교적 중화문명을 계승해야 한다는 이념적 가치와 그 중화의 땅을 짓밟은 오랑캐 청나라가 지배하는 현실 사이의 괴리가 컸다. 이 때문에 이같은 역사 기억의 전환 작업이 다양하게 이루어졌다.
한 예로, 1650년대 조선이 전개한 ‘나선(羅禪)정벌’의 실상을 보자. 나선정벌은 17세기 중반 북만주로 남하하는 러시아(나선) 때문에 시작됐다. 당시 조선군은 러시아를 저지하려던 청나라의 출병 요구에 따라 송화강과 흑룡강 유역으로 두 차례 출정했다. 교과서에서는 대개 조선군이 러시아 지휘관 스테파노프를 전사시키고 승리했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이는 한편으론 사실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교묘하게 조작된 기억의 산물이다.
개선장군이 탄식한 이유
앞서 1637년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청나라와 항전 끝에 청태종 앞에 무릎을 꿇었던 ‘삼전도의 항복’은 조선왕조의 정체성에 심각한 타격을 준 사건이었다. 본질은 단순히 적에게 항복했다는 수치심만이 아니었다. 당시 조선은 명나라를 하-은-주-한-당-송의 중화문명을 잇는 인류문명의 담지자이자 보편적 중화문명국으로 여겼다. 그뿐만 아니라, 명나라 황제를 ‘군부’로 섬기던 조선에 삼전도의 항복은 왕조의 존재 이유를 포기한 치명적 사건이었다. ‘신자’(臣子)로서 위기에 처한 군부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치기는커녕, 자신의 ‘군부’를 죽이려는 원수 앞에 스스로 나아가 이마를 땅에 찧으며 항복한 것이다. 이는 유교 이념의 핵심 양대인 ‘충’(忠)과 ‘효’(孝)를 동시에 범한 극악한 선택이었기 때문이다. 이 후유증을 덮기 위해 전개한 것이 바로 ‘북벌운동’이었다. 실제 북벌을 하겠다는 것이 아니었다. 국내에서 ‘북벌’을 논해야 그나마 국가의 체면과 정권의 정당성이라도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랑캐 청나라에 당한 수치를 씻자는 취지의 북벌운동이 절정을 이루던 효종 때(1649~59), 조선은 다시 청나라의 명령으로 어쩔 수 없이 청과 러시아의 전투에 ‘끌려’ 나갔다. 북벌 대상인 청나라를 상대로 싸우기는커녕 오히려 ‘오랑캐’ 청나라 장수의 지휘를 받아 전투에 임한 조선군은 심각한 정신적 공황을 겪었다. 1658년 2차 원정군 사령관 신유가 전투에서 승리하고 개선하면서도 마음이 천근만근이었던 이유는 바로 이런 문제 때문이었다.
신유는 개선하면서 이런 시를 읊어 자신의 착잡한 심경을 토로했다. 개선장군다운 자부심은 어디에도 볼 수 없다. 시 1~2행에서 신유는 그 어렵다는 국외 원정을 성공적으로 마치고도 탄식이 터져나오게 된 처지를 하소연한다. 그 이유가 3행과 4행에 명쾌하게 드러난다. 3행에서 신유는 이번 출정이 심하 원정과는 다르다고 인식했다. 심하 원정이란, 1619년 명나라가 후금 원정을 단행하면서 조선에 파병을 요구하자, 강홍립(姜弘立)이 이끄는 조선군 1만2천여 명이 마지못해 참전한 사건을 이른다. 이때 조선군은 요동에서 명군에 합류해 그 지휘를 받았는데, 후금의 기습공격으로 거의 전 부대가 궤멸됐다. 조선군도 60% 넘게 전사했고, 강홍립을 비롯한 4천여 명이 적에게 투항했다.
신유가 시름에 잠긴 이유는 분명해진다. 나선정벌은 명나라(중화)를 돕는 출정이 아니라 청나라(오랑캐)를 돕는 출정이었기 때문이다. 신유의 이런 고민은 그가 마지막 4행에서 스스로 김공을 부러워한다고 고백하면서 절정을 이룬다. 여기서 김공은 심하의 전역에서 전사한 김응하를 지칭하는데, 김응하는 강홍립과는 달리 마지막까지 후금군과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한 인물이다. 그런데 신유는 바로 그 김응하와 자신을 극단적으로 비교하며 자괴감에 빠진 것이다. 이는 곧 청나라를 도운 이번 출정(나선정벌)에서 승리하고 개선하는 것이 오히려 명을 도운 출정(심하 원정)에서 패해 죽는 것보다 못하다는 자기 고민을 강하게 드러낸 셈이다. 결국 청나라를 치기는커녕 오랑캐의 요구에 응해 마지못해 출정했다는 부정적 심리 상태를 극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또 신유가 병으로 죽었을 때 조문객들 중 어느 누구도 그를 추모하거나 기록한 ‘만사’(輓詞)나 ‘행장’(行狀)에 그의 나선정벌 전공을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대신 이루지 못한 북벌의 꿈을 개탄하는 내용이 채워졌다. 대개 공적을 부풀리기 마련인 ‘만사’에서 실제 있었던 공적조차 함구한 것이다. 나선정벌 얘기를 꺼내지 않는 것이 망자에 대한 예의라는 분위기가 당시에 절대적이었음을 시사해준다.
18세기 ‘북벌 성과’로 둔갑
그러나 18세기에 접어들면서 나선정벌에 대한 우울한 기억은 국가 차원에서 장쾌한 승리로 조작됐다. 나선정벌이 북벌운동의 실패를 단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지만, 오히려 국왕 숙종이 앞장서 이를 북벌운동의 가시적 성과로 둔갑시킨 것이다. 방법은 간단했다. 조선인에게 나선정벌 경험이 우울했던 이유는 청나라의 존재 때문이었으므로, 나선정벌의 역사를 기록할 때 청나라의 존재를 지워버린 것이다. 즉 나선정벌은 애초부터 조선이 스스로의 필요에 따라, 스스로 군사를 일으켜, 북쪽 오랑캐를 쳐부순 승리로 뒤바뀌었다. 말 그대로 ‘북벌의 승리’로 조작된 것이다. 청나라도 제대로 막지 못한 러시아를 조선이 격퇴시켰으니, 조선이 청나라보다 강함을 입증한 것이라는 ‘자기만족’과 함께 말이다.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나선정벌은 이런 기억 조작의 결과이다.
역사의 기억은 하나일 수 없다. 하나이어서도 안 된다. 특히 국가가 기록을 독점한 ‘역사의 기억’은 나선정벌에서 보듯 신뢰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지난해 유신의 망령처럼 ‘역사 교과서 국정화’ 움직임이 되살아났다. 국민의 기억까지 국가가 일방적으로 통제하고, 머릿속에 독점적으로 특정 기억을 주입시키려는 것이다. 심각한 시대착오이자 폭력이다.
계승범 서강대 교수·사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