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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동아시아 도시이야기] 기업도시ㆍ식민지지배ㆍ성차별, 구마모토현 미나마타시

BoardLang.text_date 2018.07.11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근현대 동아시아 도시이야기]


기업도시ㆍ식민지지배ㆍ성차별


구마모토현 미나마타시



가토 게이키(히토쯔바시대학 대학원 사회학연구과 전임강사)


 

미나마타병의 원인


미나마타병(水俣病)이란 구마모토현 미나마타만 주변에서 신일본질소비료주식회사(이하, 일질. 질소)에 의해 일어난 유기수은 중독의 공해병이다. 일질이 아세트알데히드의 제조과정에서 유기수은을 바다에 방류함으로써 물고기가 오염되었고 그 생선을 먹은 사람들에게 중독 증상이 나타났다. 매우 심각한 증상으로, 오늘날까지 치료법이 없다고 알려져 있다.

 

또한 그 이후 에니이가타(新潟)에서도 아가노(阿賀野)강 유역에서 두 번째 미나마타병이 발생했다. 미나마타병 문제는 오랜 싸움을 거쳐 기업과 국가·현의 책임이 인정되었다. 하지만 오늘날까지 배상이 충분치 않아 해결했다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는 상황이다.

 

미나마타병 문제의 일인자인 의사 하라다 마사즈미는 “미나마타병의 원인 가운데 유기수은은 작은 원인이며, 질소(일질)이 흘렸다는 것은 중간 정도의 원인으로 큰 원인이라 할 수 없다. 미나마타병 사건 발생의 가장 근본적인 큰 원인은 ‘인간을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상황’ 다시 말하면 인간 소외, 인권 무시, 차별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상황의 존재이다”라고 말하고 있다(하라다 마사즈미 『미나마타가 비추는 세계』일본평론사, 1989년).

 

즉, 미나마타병의 진짜 원인으로 주민을 희생시켜도 상관없다는 인간을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는 인권 무시가 있었다는 것이다. 한 가지 사례를 들어보자. 미나마타병의 원인이 공장배수에 있다고 알려진 이후에도 일질은 폐수를 바다에 계속 내보내면서 주민을 죽여왔다. 여기에는 ‘사람을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상황’이 단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인권을 무시하는 일질의 경영철학은 어떻게 형성됐을까. 그동안의 미나마타병 연구는 일질의 차별적 경영철학의 배경으로 조선 식민지 지배와 관계성을 지적하고 있다.

 

1945년 이전에 일본의 신흥재벌 중 하나인 노구치 시타가우(野口遵)가 이끄는 일질재벌은 식민지 조선에 진출하여 수탈경영을 하고 막대한 이익을 올리고 있었다. 일질은 조선총독부의 권력을 배경으로 토지를 싼 가격에 강제적으로 인수하여 대규모 공장을 건설하고 조선인 노동자를 저임금으로 혹사시켰다.

 

또 최근 양지혜와 필자의 연구에 의해서 식민지 조선에서도 일질은 공해를 일으키고 있었다는 것이 드러나고 있다. 이처럼 조선 지배·수탈에 가담하여 조선인을 차별하는 경험을 가진 일질의 차별적 성격은 1945년 이후에도 청산되지 않고, 미나마타병을 일으키는 배경이 됐다는 것이다.

 

미나마타, 2014년 필자 찰영


 


기업도시와 젠더


미나마타병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일질이 20세기 전반 이후 미나마타에 대해서 절대적 권력을 가지고 있으며, 미나마타가 일질의 ‘기업도시’화 되었다는 점이다. 주민들은 일질에 대해서 비판적 의식을 갖기 힘들었고, 미나마타병의 희생자가 나온 뒤에도 그러한 공해를 문제로 간주하지 않았으며 일질에 대한 동경하는 마음이 없어지지 않았다. 이런 요인들이 미나마타병이 좀처럼 사회문제로 인식되지 않게 만들었으며 피해가 방치되어 확대된 요인이라는 지적들이 있다.

 

그리고 최근의 연구는 일질이 미나마타에서 지배자로 군림하게 된 배경을 젠더의 관점에서 분석하고 있다. 일본 패망 전의 미나마타에서는 일질의 공장이 설립되어 경제가 발전하면서유곽이 점점 늘어갔다고 한다. 그리고 주민들은 그러한 유곽과 성매매를 매개로 하는 지역상업에 대해 ‘동경하는 마음’을 가지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것에 대해서 일본 현대사 연구자 오이카와 에이지로(及川英二郎)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지역에 질소(일질)가 가져온 「혜택」중의 하나가 ‘여자를 사는 것(女買い)’이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그것이 질소에 대한 동경을 강화하고 질소 없이는 존립할 수 없는 지역사회에서의 기반을 형성했다고 볼 수 있다. 마치 전쟁터에서 발생하는 집단 강간이‘승리’의 상징적 의례로 여겨지는 것처럼 유곽의 존재는 ‘질소 도시’(일질이 지배하는 도시) 번영의 상징이었다. 그런 형태로 질소를 미화하는 생각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질소에 의해 희생된 삶에 대한 관심은 적어지게 되고 사태를 ‘방치해도 괜찮다’는 생각이 조성된 것이다. 일반적으로 성산업의 융성이 경제 발전의 상징으로 생각될수록 그 발전 덕분에 억압되는 사람에 대한 감도는 저하하고 비판적 관점은 사라진다. 그것은 오늘날의 원전 문제에 대해서도 들어맞는다. 즉 여기에서는 성 차별이 다른 차별에 가중되어 개인이 짊어지게 된다는 직접적 관련성보다는 성 차별이 다른 소재를 은폐하거나 그것을 증폭할 것이라는 이른바 중층적 결정(알튀세르)이라고도 할 수 있는 관련성을 읽을 수 있다.(오이카와 에이지로 “미나마타 병 사건에 배운다” 『史海』61호, 2014년, 14쪽)

 

미나마타병 문제라고 하면 젠더 문제와는 별로 관계가 없을 것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일질에의한 지역 지배라는 맥락에서 성차별의 문제는 결코 놓칠 수 없는 논점이다. 이러한 젠더의 역사적 시각은 매우 시사적이다. 먼저 일질의 조선 지배 가담의 문제를 다룬 데 대해서도 젠더의 시각에서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식민지 지배와 일질의 관계를 젠더의 관점에서 고찰하려 한다.

 

‘天国(천국)’으로서의 식민지와 유곽


일질이 조선에 건설한 흥남공장에는 미나마타에 거주했던 많은 일본 민중이 넘어갔다.“미나마타에 있다면 생계를 잃을 것이 자명한데 흥남에 가면 일도 있을 것이라고 조선을 동경하여 동생과 둘이서 바다를 건넜다”(오카모토 타츠아키·마츠자키 쯔기오(岡本達明・松崎次夫編) 『聞書미나마타 민중사5』 ‘식민지는 천국이었다’, 초풍관, 1990년 , 146쪽)라는 증언이 있듯이 미나마타에서 밑바닥 생활을 벗어나기 위해 조선에 가려고 한 사람들이 많았다. 실제로 조선에 가면 생활이 현격하게 향상됐다. 미나마타의 일질 공장에 있던 때보다도 ‘조선수당’ 등으로 봉급이 훨씬 오른다. 게다가 일본보다 조선이 물가가 쌌으며 조선에서 살면 ‘호화로운 삶’이 가능했다고 한다.

 

“이번에는 내가 노구치 시타가우이다”


 

흥남으로 건너간 미나마타의 일본인 근로자는 조선에 간 후로 이렇게 생각했다고 한다. 미나마타의 일질 공장에서는 노구치 시타가우의 “직공은 소, 말처럼 사용하라”란 말이 전해져 내려왔다고 한다. 실제 노구치가 이 말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그런 얘기가 신빙성을 가진 것으로 알려진 것이 중요하다. 미나마타에서 노동자는 밑바닥의 존재인 차별 받는 대상이었던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런 미나마타 민중이 식민지로 나간 순간, 조선인을 지배하는 쪽으로 돌아선 것이다. 그것을 나타낸 것이 “이번에는 내가 노구치 시타가우이다”라는 말이었다. 미나마타의 민중은 질소의 노동자 지배 속에서 차별의식을 내면화하였고, 이번에는 식민지 민중에 대해서 군림하는 쪽으로 돌아선 것이다.

 

미나마타에서 흥남으로 나간 민중에게 식민지는 천국과 같은 곳이었다고 한다. 그러한 민중의식을 떠받친 것으로써, 조선에서의 유곽의 존재가 있다.

 

“조선피(朝鮮ピー;매춘부)에 가면, 한 번에 1원 50전이었다.”(『聞書미나마타 민중사 5』)라는 증언으로 대표되듯이, 흥남에서 유곽 출입을 했다는 이야기는 많이 나온다. 일질 흥남공장 주변에는 유곽이 들어서 있었으며, 이는 일질의 번영을 상징하는 것으로써 일본인 쪽을 의식한 것이다. 식민지에서의 유곽 이용은 일본인 쪽에서는 지배자로서의 자기인식을 강화한 것으로 보인다. 식민지의 유곽 이용은 여성 차별과 민족 차별을 서로 강화하는 역할을 한 것이다. 그러한 가운데 질소에 의해 억압된 조선인과 여성의 상황에 대한 상상력은 마비되어 갔을 것이다.

 

조선에서의 일질과 유곽 : 지역의 지배구조와의 관계에서


그렇다면 조선에서 일질과 유곽의 관계 양상을 검토해 보자. 조선에서는 원래 국가적 관리를 받은 매춘제도인 공창제도는 존재하지 않았으나 일본의 식민지화와 함께 일본의 공창제도가 들어 왔다. 실제 해방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조선인이 일제가 여성에 관하여 이 땅에 남긴 해독(害毒) 하나로 공창제도를 들고 있다. (최정석 「해방되는 창기 5천명」 『개벽』 77호 1946년. 송연옥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국가적 관리매춘 ― 조선의 공창을 중심으로」 『조선사연구회논문집』 32,1994년).

 

식민지 지배가 여성차별을 강화한 것이다. 조선에 반입된 공창제도는 급속히 확대되어 서울 부산 등의 도시는 물론 특히 1930년대에는 일질 흥남공장 주변, 즉 흥남과 함흥지역에 유곽이 들어서게 됐다. 이는 일질공장·수력발전소 건설 종사자나 노동자에 의한 이용을 대비한 것이다.

 

실제로 일질 관련 공사에 의해서 유곽업자는 이윤을 많이 얻었다고 한다. 1934년에 함흥의 일본인 유력자는 “오늘날의 흥남, 신흥공각공사는 대부분 완료되었고 중소상공업자는 피폐해지고 있습니다.……음식점, 유곽 영업자의 고객의 대부분은 그 공사 관계자입니다.”라고 말했다. 흥남 등의 공장 건설로 ‘음식점’이나 ‘유곽’ 등이 번창했지만 그것이 공사 완료와 함께 정체되고 있다는 것이다 (「제13회 함흥 부회 회의록」(1934년)『함흥부계서류』 한국국가기록원 소장). 뒤집어 보면 그만큼 막대한 이익이 그 이전에는 나오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 일시적인 불황은 금방 해소되었다. 이 직후 대규모의 장진강 수력발전소 공사가 시작되자 유곽은 지금까지 이상으로 성황이었다고 한다. <동아일보> 1935년 9월 4일자에 따르면 장진강 수력발전소 공사가 본격화된 후, 함흥(흥남 인접 지역)의 ‘음식점’의 1934년 한해 수익은 전년의 두 배까지 증가했다고 한다. 이용 인원은 다음과 같다.

 

일본내지인  13,997명  88,721엔
조선인    2,913명  5,743엔
외국인    20명,  121엔
계      16930명  95,478엔〔원문그대로〕

 

함흥에서는 조선인이 인구의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고 있지만,‘음식점’을 이용한 것은 압도적 다수가 ‘일본 내지인’이었다. 대부분은 질소 관계자로 보인다. 많은 일본인이 지배자로서 유곽을 이용하였고, 이는 또 지배자로서의 사고방식을 강화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유곽을 경영하는 업자는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함흥의 경우는 대부분이 일본인 유력자이며 그런 사람들의 일부는 함흥의회에서 의원이 되어 지방정치에서 유력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당시 조선의 지방의회는 세금을 기준 이상 낸 사람에 한해서 선거권이 있었기 때문에(조선인이 당선을 제한하는 의도가 있었음), 의원이 된 유곽업자는 막대한 이익을 올리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30년대의 함흥에서는 ‘조흥세(助興税)’의 도입이 이루어졌다. 함흥의회에서는 일본인 유곽 관련 사업자가 이‘조흥세’에 강한 반발을 하고 있었다. 이 논의를 검토함으로써 일본인 유곽업자가 식민지 사회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를 보려 한다.

 

1930년 전후의 조선에서는 도시의 행정단체에서 ‘조흥세’의 도입이 진행됐다. 일본 본국에서는 1920년 전후부터 지방세로서 ‘유흥세(遊興税)’의 도입이 진행되었지만, 이에 유사한 것으로 조선의 지방재정의 재원으로 ‘조흥세’가 구상된 것이다. 일본의 지방청에서는 공창제도의 수입이 지방재정 기반이 되었다(후지메 유키(藤目ゆき) 『성의 역사학』 후지출판, 1998년) 고 알려져 있는데 식민지 공창제도 역시 식민지 지배의 재원으로 중요한 포지션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원래 조흥세 이전부터 다른 세금도 있었기 때문에 공창제도는 조선 지배를 위한 재정을 윤택하게 하는 존재였다).

 

그러면 조흥세란 무엇인가. 일본 본국의 유흥세가 업자에게 과세되는 데 대하여, 조흥세의 경우는 유흥객에게 부과되었다고 한다. 도입하려는 부의 설명에서는 이 때문에 업체에게 부담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는데, 사실상 업자가 부담하였고, 업체 측에서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음식점’을 경영하던 이케다 킨지로(池田金治郎、함흥부회 의원)는 의회에서 조흥세를 강력히 비판했다.

 

이에 조선인 의원(많은 세금을 낸 사람에 한해서 선거권이 있는 제한 선거로 선출된 의원이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상류층이고 또한 일본의 식민지 지배가 만든 의회에 참여하면서 일본의 지배에 접근하고 있는 인물이지만)은 비판을 하였다. 예컨대 한상주 의원은 “본 의안에 대해서 자신의 이해관계에 있는 의원은…결의권을 자퇴하길 바란다”라고 이케다(池田)의 비판을 견제하는 발언을 했다. 이에 대해서 이케다는 “(한상주 의원은) 나를 음식점을 경영하고 있는 것을 이용하여 관계자라고 하는데, 내정을 알고 있는 내가 의원의 입장에서 이사들에게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다”라고 반발하였다.(「제13회 함흥부회 회의록」)이는 정색하고 나선 발언이다. 스스로가 관계자임을 사실상 인정하고 그 위에서 자신들의 이해를 배려하라고 주장하고 있을 뿐이다.

 

이처럼 조선인 유력자와 일본인 유력자의 사이에서는 이해의 갈등이 있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경제상의 이익을 어떻게 배분하냐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함흥에서 일본인 유력자가 유곽 경영에 의해서 막대한 이익을 얻고 있었고 이에 대해서 일본의 지배에 협력하는 조선인 유력자도 비판적 의식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일본인 부회의원은 유곽 경영 이외의 상업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조흥세는 문제가 있다는 발언을 하고 있다. 즉 조흥세가 만들어지면 세금을 피하기 위하여 손님은 다른 지역 유곽으로 가게 된다. 그러면 다른 상업 또한 고객 감소는 불가피하다. 즉, 함흥에서의 상업(일본인이 중심적 역할을 차지했음)은 그 유곽의 집객력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후 조흥세가 도입됐지만 그 이상으로 막대한 이익을 거둬들이며 유곽업자는 더욱 더 번영을 얻게 되었다.

 

위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식민지 조선의 일본인 유력자에게 유곽 등에 따른 이익은 막대하였고 다른 상공업자도 윤택하게 만드는 존재였다. 그리고 유곽 등에서 이익을 얻고 있는 사람들이 지방의회에서도 유력한 포지션을 차지하였고 지방행정에 큰 영향을 주고 있었다. 그리고 함흥의 경우는 고객층으로 질소 관계자가 있었다. 질소는 막대한 이익을 일본인 유곽업자에 가져다 주고, 그 유곽업자가 내는 세금이 식민지 지배의 재원이 된 것이다.

 

「제13회 함흥 부회 회의록」(1934년)『함흥부계서류』국가기록원소장




 

결론


미나마타병을 고찰하는 데 있어 미나마타가 기업도시이었다는 것은 놓칠 수 없는 문제이다. 또 최근 연구는 그것을 성차별과 관계에서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리고 이는 일질의 조선에서 수탈경영을 고찰하는 데도 유익한 관점이다.

1945년 이전 미나마타의 기업도시의 밑바닥에 있던 미나마타의 민중들은 일질의 지역 지배 속에서 존재했다. 그런데 그런 미나마타 민중이 일질이 경영하는 조선의 공장노동자로 진출하고 거기에서는 조선인의 위에 군림하는 ‘지배자’가 되었다. 미나마타의 민중은 “식민지는 천국이었다”고 느끼고 있었지만 그 배경에는 일질의 조선 진출에 따라 발달한 유곽의 존재가 있었다. 미나마타의 민중은 조선의 유곽에 다님으로써 지배자인 자기인식을 높인 것이다. 또 일질의 조선 진출과 더불어 일본인 유곽업자는 막대한 이익을 올릴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 역시 지방의회 의원 등 조선의 지역 지배를 담당하는 역할을 완수했던 것이다.

이상과 같이 일질의 조선 진출에 따른 성산업의 융성으로 일본 민중과 일본인 유력자가 질소의 강권적인 수탈경영을 지지하는 사고방식을 강화하는 상황이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조선 식민지 지배와 성차별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이는 단지 식민지 지배가 여성차별을 강화한다는 것만이 아니라 성차별이 다시 식민지 지배를 강화하는 상호 관련성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는 식민지주의에 대한 비판적 관점을 확립하는 데 젠더 시각의 도입이 매우 중요하다는 걸 확인시켜준다.(번역 최인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