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슬 - 끝나지 않은 세월 2』, 그리고 제주 여행
이승호(고대사분과)
지난 2월 말 3월 초에 걸쳐 약 1주일 가량 제주도로 ‘휴가’를 다녀왔다. 딱히 목적이 있어 간 것은 아니었다. 대선의 후유증도 있었고, 인수위가 요즘 어떻다느니, 곧 새로운 대통령이 취임한다느니 하는 얘기들로 넘쳐났던 도시에서 잠시라도 피해있고 싶었던 것 같다. 때문에 온전히 ‘휴가’였고, 일종의 도피성 ‘여행’이었다.
[그림1] 제주 월정리 해안 근처 ‘고래가 될 카페’ 앞 벤치 여기 ‘고래가 될 카페’에서는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 반대 집회 관련 모금과 후원 음반 판매를 하고 있다 ⓒ이승호
제주는 당시 서울이 너무 추웠기에 남쪽의 섬은 도시 보다 따뜻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 속에 결정된 여행지였다. 남쪽 섬의 기온은 기대만큼 포근했다. 그러나 나의 얼굴을 직격으로 때리는 제주도 칼바람은 이곳이 마냥 ‘따뜻한 남도’가 아니라는 사실을 절실히 느끼도록 해주었다. 거기다가 그리 능숙하지 않은 운전 실력으로 제주도 여러 곳을 돌아다니려니 피로감도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따뜻한 남쪽 섬에서의 휴가”는 시작부터 엉클어지고 있었다.
[그림2] 제주 4.3 평화 기념관 앞에서 ⓒ이승호
'답사'가 아닌 순전히 '여행'에 목적을 둔 일정이었지만, 제주도에서 여행은 곧 답사와 같다는 사실을 떠올리는 데에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경치 좋은 산과 오름, 폭포와 해안 주변에는 어김없이 옛 4.3의 가슴 아픈 기억이 자리하고 있었다. 거기다 난 여행 첫날의 일정에 가장 먼저 ‘제주 4.3 평화 기념관’을 계획하고 있었다. 애초부터 ‘낭만 여행’이라는 것은 불가능했던 것일지 모른다.
[그림3] 4.3 백비(白碑) (제주 4.3 평화 기념관 1관) 4.3의 기억은 아직까지 그 이름조차 얻지 못한 백비와 같은 역사다 ⓒ이승호
제주 4.3 평화 기념관을 돌아보며 느꼈던 감정의 소용돌이는 낯설지 않았다. 대학에 들어와 선배들과 함께 처음 광주 망월동 묘역과 금남로 일대를 답사하며 경험한 분노, 그 쓰라림과 비슷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분노의 한 켠에는 망각 속에 살았던 나 자신에 대한 질책 또한 있었으리라. 그렇게 시작된 4박 5일간의 제주 일정은 아름다운 경치와 맛있는 음식, 그리고 4.3에 대한 기억의 연속이었다.
[그림4] 영화『지슬 - 끝나지 않은 세월 2』메인 포스터 ⓒ영화 홈페이지
그렇게 제주를 다녀온 뒤 한 달이 지나도 쉽사리 가시지 않는 여행의 여운을 달랠 목적으로 영화『지슬 - 끝나지 않은 세월 2』이 내걸린 극장가를 찾았다. 입소문도 입소문이지만, 영화의 메인 포스터가 전해주는 강렬함에 매료되어 절로 발길이 걸어졌던 것이다.
[그림5] 산기슭으로 피신한 마을 사람들의 대책 회의. 어디로 숨어야 할 것인가? ⓒ영화 홈페이지
영화는 무거운 흑백 영상에 담긴 토벌대의 잔상을 첫 장면으로 잠시 비추더니, 곧 바로 산기슭 비좁은 구덩이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마을 주민들에게 시선을 준다. 정겹고 익살스러운 마을 주민들의 대화에 관객들의 얼굴에 절로 미소가 오른다. 아마도 안도의 한숨을 동반한 미소일 것이다. 영화가 2시간 가까운 시간 동안 쉬지 않고 우리의 가슴을 옥죄며 분노케 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안도감. 분노하고 슬퍼할 준비를 마치고 자못 비장한 마음에 영화관을 찾은 나 또한 일순 긴장감을 내려놓고 티격태격 다투는 마을 사람들의 대화에 따뜻한 시선을 보낼 수 있었다.
[그림6] 큰 넓궤 속 주민들 ⓒ영화 홈페이지
‘해안선 5km 밖 모든 사람을 폭도로 간주하고 잡아들인다’는 흉흉한 소문에 마을사람들은 저 뒤 산 너머에 있는 ‘큰 넓궤(큰 동굴)’에 들어가 2~3일 숨어있기로 결정한다. 그렇게 찾아간 큰넓궤, 그곳에서 주민들은 추위를 피해 불을 피우고, 잠을 청하고, 또 서로 지슬(감자)을 나누어 먹으며 함께 그 시간을 견딘다.
[그림7] 영화 속 지슬(감자)은 감정의 매개체이자 인간애의 상징이다 ⓒ영화 홈페이지
소문은 현실이 되었다. 토벌대가 마을에 들이닥치면서 학살이 시작된다. 불편한 다리 때문에 아들과 함께 피신하지 못한 어머니는 “빨갱이가 뭐간디(뭐길래)”라는 마지막 말을 남긴 채 토벌대의 칼에 숨을 거둔다. 급히 떠나느라 먹을 것을 제대로 챙기지 못한 아들과 며느리에게 줄 지슬(감자)을 가슴에 품은 채. 마을은 토벌대에 의해 모조리 불타버린다. 아들이 어머니를 모시러 다시 마을로 내려왔을 때, 그를 맞이한 것은 불탄 집과 어머니, 그리고 어머니 품속에 따뜻하게 익은 감자였다.
[그림8] 낙성동 4.3성터 (제주시 조천읍 선흘리 낙성동) 1948년 12월 20일 선흘리 소개작전으로 마을이 전소되고 토벌대에 의해 수많은 인명이 희생되었다. 1949년 봄 당국은 폐허가 된 마을들에 대한 재건을 명령하였고, 주민들은 길이 약 500m 사각형 모양의 성(전략촌 성) 건설에 강제 동원되었다. 그리고 완공 이후 주민들은 다시 이곳에 수용되어 토벌대의 감시와 핍박을 받으며 고난의 세월을 버티어야 했다. ⓒ이승호
몰다리(말다리) 상표의 달리기가 멈추고 토벌군이 넓궤(동굴)를 조여 올 때까지도 주민들은 큰 걱정 없이 며칠 지나면 곧 다시 마을로 내려갈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놓지 않는다. 하지만 동굴을 발견한 토벌대가 총을 쏘며 동굴 안으로 진입하려 하자 동굴 안 주민들은 절망 속에 저항을 시작한다. 저항의 방법은 단순했다. 총과 칼로 무장한 토벌대를 동굴에서 내쫓기 위해 주민들은 그저 고추를 태워 연기를 피울 뿐이다. 눈물, 콧물 범벅이 되고 수도 없이 기침을 하면서도 주민들은 그저 살기 위해 불을 피웠다. 영화는 이들이 왜 빨갱이로 내몰렸는지, 무고한 주민들이 왜 죽어가야만 했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는 끝내 말을 아낀다. 즉 영화는 당시 제주의 어떤 정치적 상황도 설명하려 하지 않고, 다만 토벌대의 광기와 주민들의 살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을 담담히 그려내고 있다. 아들과 며느리에게 줄 감자를 품에 안은 채 죽음을 맞는 어머니의 마지막 말. “빨갱이가 뭐간디(뭐길래)”. 어머니가 내뱉은 이 마지막 말이 바로 영화가 그리고자 했던 당시의 제주 사람들의 모습이 아닐까. 후반부로 갈수록 영화의 내용은 지난 제주 여행의 여운과 겹쳐졌다.
[그림9] ‘백조일손지지(百祖一孫之地)’ 묘역 ⓒ이승호
조상이 다른 일백서른두 할아버지의 자식들이 한날, 한시, 한곳에 죽어 뼈가 엉기어 하나가 되었으니 한 자손이라는 뜻으로 명명된 ‘백조일손지지(百祖一孫之地)’. 1956년 5월 18일, 6년 가까이 흙탕물 속에 묻혀 억눌리고 뒤엉킨 시신들을 발견했을 당시 제주 사람들의 심정 또한 같았을 것이다. 도대체 빨갱이가 뭐길래 이 많은 사람들을 학살하여야 했나. 얼마 전 그곳에서 복받친 감정이 영화 후반부로 갈수록 되살아나면서 결국 영화가 끝날 때까지 쓰라린 가슴을 다독여야만 했다.
60여년이 지난 오늘날 대한민국에서도 이와 같은 답답함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에 더욱 서러운 것이다. 도대체 그들이 말하는 빨갱이가 뭐길래. 소위 ‘일베’를 위시로 한 몇몇 이들의 무차별적 ‘인터넷 폭력’을 보다 보면 당시 수많은 사람들을 빨갱이로 낙인찍어 백색테러를 자행했던 서북청년단의 모습이 떠오른다. 소름끼치는 일이다. 지금도 테러의 명분으로서 여전히 유효한 빨갱이 타작. 그러니 서럽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다시 영화로 돌아와 마지막으로 감독(오멸)의 인터뷰 내용을 여기에 담고 싶다. 감독은 영화가 제주에서 흥행하고 있다는 소식에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반가운 일이지만 기분 좋다고는 말 못한다. 동네 할아버지들이 영화를 보러 오신다. 다행히 (4·3에서) 살아남은 분들이 보러 온다는 건 영화적 즐거움 때문이 아니다. 그분들은 말씀도 없이 가만히 지켜만 보신다. 단순한 영화 관람이 아니라 엄숙한 시간과의 만남이다. 그분들이 극장에 오시는데 관객 많이 든다고 기분이 좋겠나. 마음이 아프고 울컥하는 심정이다. 영화로 전 국민이 4·3을 이해하고, 정부가 나서서 제스처를 취하고, 미군정이 사과해도 기쁜 일은 아니다. 그 역사가 기쁨이 될 수는 없다.”(2013년 3월 12일자 인터넷 경향신문)
*현재도 상영 중에 있는 영화이기에 영화의 구체적 줄거리에 대해서는 최대한 언급을 자제하고자 하였습니다.**이 글은 영화의 공식 스틸컷을 저작권법에 맞게 인용하였습니다.*
※ 영화 스틸컷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