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서]
一. 친일진상규명작업의 역사적 의의 1. 지난 11월 8일 민족문제연구소가, 일본제국주의의 불법적 국권침탈과 강압적 식민통치, 반인륜적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 인물들의 행적을 조사하고 정리함으로써 우리 역사에 상식과 정의의 숨결을 불어 넣겠다는 목적으로,『친일인명사전』을 발간했다. 뒤이어 11월 27일 대통령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친일진상규명위)에서도 민족정통성 확립과 정의로운 사회의 구현을 위한 공동체 윤리를 확립할 목적으로『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를 발간하였다. 이 두 작업은,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와해된 지 60년 만에 뒤늦게 이루어졌지만, 식민 지배를 경험한 민족으로서 일제의 잔재와 협력에 대한 피할 수 없는 역사적 정리의 시도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적지 않다. 2. 식민 잔재 정리의 핵심인 친일 진상규명 작업의 물꼬를 튼 이는 임종국이다. 그의 유지는 1999년 8월 ‘친일인명사전 편찬지지 전국 교수 일만 인 선언’으로 계승되었다. 친일파의 행적을 자료로 남겨 역사에 그 책임을 준엄하게 묻고 우리사회에 올바른 가치관을 세우기 위해 친일인명사전을 편찬하기로 지식인들이 뜻을 모은 것이다. 시대정신을 대표하는 지식인들의 폭넓은 지지와 동의는 친일인명사전 편찬사업의 역사적 당위성을 입증하는 것이며, 이를 범민족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2004년에는 네티즌을 중심으로 친일인명사전 편찬을 위한 국민성금운동이 전개되어 3만 여 명의 시민들이 동참하였다. 세계사적으로도, 역사적 과제를 지식인·시민사회가 자발적·헌신적으로 나서서 해결한 사례는 흔치않다. 역사학계를 중심으로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ㆍ예술 등 각 분야의 교수 학자 등 전문연구자가 참여하여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은 지식인·시민사회가 앞장서서 역사 정의 실현을 위해 노력하였음을 보여주는 좋은 징표다. 3.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가 발전하면서 2005년에는 국가적 차원에서 친일반민족행위의 진상을 규명하고자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특별법)이 제정되었다. 특별법에 따라 구성된 친일진상규명위가 4년 6개월 동안의 활동을 마치고 1,005명의 친일반민족행위 결정을 담은『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를 발간하였다. 친일진상규명위 활동은 여야 합의에 따라 만들어졌기 때문에 의견이 상충되는 부분은 제외되었고, 친일반민족행위의 기준도 ‘행위’에 초점을 맞추어 엄격하게 제한하였다. 친일진상규명위의 보고서는 국가기관의 공식보고서로서 앞으로 친일행위자 재산환수 등에 활용되기 때문에 신중을 기하여 작성될 수밖에 없었다. 친일진상규명위의 활동은 반민특위 해체 이후 56년 만에 국가 차원에서 친일반민족행위를 조사했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二. 미래를 지향하는 비판적 성찰을 위한 제언 해방 후 오늘에 이르는 동안 친일 정리라는 역사적 과제 해결이 지체되면서 친일문제는 한국사회의 구조와 구성원의 자기 인식은 물론 타자 인식에까지 깊숙이 자리한 심층의 문제로 바뀌었다. 이제 친일문제는 일제하 친일 행위에 관한 진상규명만이 아니라 친일 미청산이 가져온 한국 사회의 상흔까지도 되돌아보아야 할 숙제가 되었다. 이에 역사학계는 사회 심층에 자리한 식민지 피지배의 아픈 경험과 친일의 상흔을 한국사회의 자기 성찰과 미래 지향을 위한 역사적 경험으로 승화시키기 위해 다음을 제언한다. 1. 식민지 역사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자기반성을 하자. 일본의 과거사 왜곡과 망각에 분노하는 것을 넘어 우리 스스로도 과거를 있는 그대로 기억하고 제대로 반성할 때, 한반도와 동북아의 미래와 평화를 여는 힘이 더욱 커진다. 나치 지배의 잔재를 확실하게 청산하면서 독일에게 당당하게 과거사 정리를 요구한 프랑스가 있었기 때문에 독일 역시 과거사정리에 철저하게 나설 수밖에 없었다. 한국 스스로가 제대로 과거사 정리를 해야 비로소 일본에게 과거사 정리를 요구할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이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세운 조선총독부가 한국을 지배하던 시기에 한국인들은 자발적 혹은 타율적으로, 출세하기 위해 혹은 살기 위해 식민통치에 협력하였다. 최근 한국사회에는 일제 지배 하에서 습득한 지식과 기술을 과대하게 강조하면서 식민 지배를 긍정하는 역사인식까지 대두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주장이 무절제하게 남발되는 현실에 심각한 우려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대한민국의 발전에 기여한 인물들이 ‘친일문제’에 연루되었다는 사실은 우리 사회의 아픔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묻어둔다면, 한국인들은 일본인들에게 과거를 왜곡하거나 망각하지 말라고 요구할 수 없다. 또 우리는 한국 사회에서 민간인에게 가해졌던 국가의 폭력도 비판할 수 없다. 물론 엄혹한 식민지 지배를 받았던 상황에서 친일에 대한 도덕적 기준이 지나치게 엄중하다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명백한 친일 행적을 두고 어쩔 수 없었다거나 아니라는 부정으로만 일관하는 것은 옳지 않거니와, 그 ‘어쩔 수 없는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생명과 재산을 내던진 선열들을 모욕하는 일이기도 하다. 더구나 어느 특정 개인이 친일이라는 잘못된 선택을 통해 다른 사람의 생명, 인권, 재산에 위협을 가하였다면, 이를 엄중하게 자성해야 한다. 조선총독부의 고위 관리가 되고 일본의 전쟁 행위에 협력하는 것은 결국 일본제국주의의 폭력에 가담한 행위가 된다. 일본군국주의의 폭력은 대한민국 정통성과 그 기반인 자유민주주의에 정면으로 대립되기도 한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가해에 직접 간접적으로 책임을 지니고 있는 이들에게 과거에 대한 성찰을 요구하기 위해, 한국 사회에서 국가에 의한 불법적 폭력이 되풀이되지 않게 하기 위해, 한국인이 다른 나라 사람을 가해하지 않기 위해, 우리 스스로의 내적인 성찰이 필요하다. 오늘날 우리가 ‘친일문제’를 성찰하는 것은 다시는 그러한 폭력과 반인륜적 행위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한 다짐인 것이며, 인권과 자유, 평화라는 인류가 추구해야 할 보편적인 가치의 관점에서 우리 사회를 되돌아보는 과정인 것이다. 2. 자기성찰을 통해 역사의 상처를 치유하고 성숙한 시민사회를 만들자. 우리가 ‘친일문제’를 진지하게 성찰하는 것은 그 고통을 함께 안으면서 미래를 향해 나아가기 위한 것이다. 관련 후손들에게 ‘친일파’ 후손이라는 불명예를 씌우거나 불이익을 가하려는 연좌제의 의도가 있다면, 우리는 이를 단호히 배격한다. ‘친일행위자’들이 대한민국 건국 이후 이룩한 공로는 공대로 친일의 과오는 과대로 평가하면 된다. 우리 역사학자들은 한국 사회의 일부 지도층이 자신들의 선조와 관련된 친일의 멍에에서 벗어나 우리 사회가 더욱 성숙하고 내실 있는 방향으로 발전하는 데 기여하기를 바란다. 실제로 ‘친일파’ 후손이 스스로 재산을 반납하거나 친일행위 진상 규명을 지원하고 선조의 과오를 담담하게 수용하는 태도를 접하고 많은 이들이 존경의 뜻을 표한다. 이는 바로 한국 사회가 식민지 피지배의 경험이 낳은 상흔을 스스로 치유하고 성숙해가는 과정이다. 우리 모두 견디기 어렵더라도 그 아픔을 감내하면서 오늘과 내일을 위해 식민지 지배와 피지배의 과거사를 성찰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우리가 후손들에게 물려 줄 수 있는 의연하고 아름다운 자세이다. 미래는 국가의 부당한 억압과 폭력이 사라지고, 민주주의가 꽃을 피우며, 평화가 정착된 그리고 인권이 보장된 사회가 되어야 한다. 3. 일본은 침략과 전쟁의 과거사를 반성하고 사죄해야 한다. 우리가 일본에게 과거사에 대해 반성과 사죄를 요구하는 것은 단순한 민족 감정 때문이 아니라 동북아 나아가서 인류평화를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통과의례이기 때문이다. 하토야마 수상의 과거사에 대한 전향적인 자세는 동북아와 세계의 평화를 다지는데 희망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일본 사회의 대다수는 여전히 자신들이 피해자라는 전도된 역사인식으로 과거를 대할 뿐, 아시아의 다른 나라와 그 구성원들에게 끼친 만행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있다. 이는 일본제국이 자행했던 침략과 전쟁을 총체적으로 반성하기보다, 오늘의 일본을 낳은 일본인의 희생을 강조하는데 초점을 둔 일본 국왕 아키히토의 즉위 20년 기념 기자회견에서도 잘 드러난다. 한국인들은 일본의 과거에 대한 ‘망각’에 대해 분노한다. 우리의 주변에는 일본제국주의가 자행한 만행으로 몸과 마음에 상처받은 분들이 아직도 생존해 있다. 또 우리의 이웃과 그 가족들 중에는 일본제국주의의 폭력으로 인해 감옥과 투쟁지에서 또는 강제 동원된 노동현장과 전쟁터에서 죽어간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있다. 일본제국주의가 다양한 형태로 한국인에게 가한 폭력의 상흔은 여전히 치유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것이다. 우리 역사학자들은 진실로 21세기의 일본이 더 이상 과거사에 얽매이지 않고 그 악순환에서 벗어나기를 원한다. 나아가서 일본이 평화적인 동북아 공동체의 한 주체가 되기를 원한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일본 스스로가 결행하는 명확한 과거사 정리와 침략전쟁에 대한 반성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2009년 11월 30일 한국사연구회, 한국역사연구회, 한국근현대사연구회, 한국민족운동사학회, 역사문제연구소, 역사학연구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