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서] 2009년 개정교육과정 졸속 추진에 대한 정부가 은밀히 추진하던 ‘미래형 교육과정’이 ‘2009년 개정교육과정’이라는 이름으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 ‘글로벌 창의 인재 육성’을 목표로 내건 이번 교육과정은, 누가 어디에서 어떻게 만든 것인지도 알 수 없게, 불과 1년 남짓한 기간 동안 급작스럽게 만들어지고 있다. 절차적 정당성이 민주주의의 최소요건임을 생각하면 이번 교육과정은 그 태생부터가 비민주적인 한계를 안고 있다. 더욱 심각한 것은 그 내용이다. 2009년 개정교육과정은 교과교육에 대한 이해 없이 기존 교육과정을 자의적으로 재편성했다는 점에서, 개선이 아니라 개악으로 귀결될 가능성이 크다. 역사교육과 관련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이에 우리는 ‘미래 없는’ 미래형 교육과정의 문제를 아래와 같이 지적하며, 밀어붙이기식 교육과정 개정 작업을 중단할 것을 요구하는 바이다. 첫째, 정부는 졸속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교육과정 개정작업을 즉각 중단하라! 현행 7차 교육과정을 보완한 2007년 개정교육과정은 2003년부터 논의를 진행하여 오랜 기간 동안 각계의 의견을 수렴, 조율하며 합의를 도출해 만들어졌다. 그렇게 4년에 가까운 기간 동안 많은 예산과 노력을 기울여 만들어 놓은 교육과정을 한 번 제대로 시행조차 하지 않고 다시 바꾸겠다는 것은 낭비와 혼란을 자초하는 일이며, ‘교육은 백년지대계’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상식이 결여된 조치가 아닐 수 없다. 역사 과목 개정과 관련해서도 역사교육계나 역사학계와 진지한 대화 한 번 없었고, 어떠한 자문도 구하지 않았다. 한국사연구회 등 역사 5단체는 이미 지난 9월25일 ‘역사교육 위기 대응책 마련을 위한 역사단체 공동 기자회견 및 공동토론회’를 개최하여, 검정교과서 정신을 훼손하는 집필기준안과 교육현장을 혼란에 빠뜨릴 미래형 교육과정의 문제점을 지적한 바 있다. 그러나 교육당국은 이에 대해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고 있다. 작년 한국근현대사 교과서 파동 때처럼 정부는 역사학ㆍ역사교육계의 상식적인 요구조차 외면하려는가? 이런 식의 졸속적인 교육과정 개정은 소모적인 혼란과 광범위한 저항을 불러올 뿐이다. 이제라도 정부는 무모한 교육과정 개정작업을 중단하고, 역사학ㆍ역사교육계와 진지한 대화를 통해 신중하게 의견 수렴 절차를 거쳐 공개적이고 투명하게 교육과정 논의를 진행할 것을 강력 촉구한다. 둘째, 정부는 냉엄한 국제정세와 국권상실 100년의 역사적 의미를 상기하라! 내년 2010년은 우리가 일제에게 주권을 강제로 빼앗긴 지 100년이 되는 해이다. 일본의 정권교체와 하토야마 총리의 방한, 한중일 정상회담과 공동선언 등으로 과거사 해결에 대한 기대감도 어느 때보다 높아졌다. ‘동아시아 공동체’ 구상까지 나오고 있는 형편이다. 하지만 주변 상황은 그리 만만치 않다. 과거 채택과정에서 0.05~0.5%를 밑돌던 일본 새역모 교과서가 올해 1.68%로 크게 늘어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고, 건국 60주년을 맞아 대국을 향한 중국의 야심이 노골화되고 있는 점을 생각하면 상황을 낙관하는 것은 너무 순진한 일이다. 이럴 때일수록 균형 잡힌 역사인식의 확립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지난 10월 7일 오카다 일본 외상은 한중일 공동의 역사교과서가 필요하다고 언급했고, 이튿날 이에 대해 청와대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는 보도가 있었다. 그러나 정작 2009년 교육과정이 현실화될 경우 2007년 개정교육과정에서 새롭게 등장한 ‘동아시아사’는 사산될 가능성이 크다. ‘동아시아사’에 대한 중국, 일본 정부와 지식인 사회의 관심을 생각한다면 이는 매우 우려스럽고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만약 2009년 개정교육과정이 동아시아의 평화로운 미래를 지향하는 시대적 책무와 사회적 과제를 도외시한다면 이는 돌이킬 수 없는 과오가 될 것이다. 셋째, 정부는 ‘역사교육 강화’의 2007년 개정교육과정의 정신을 존중하라! 2007년 개정교육과정의 핵심 중 하나는 ‘역사교육 강화’였다. 일본의 잇따른 역사 교과서 왜곡에 더해 중국의 동북공정 소식이 알려지면서, 이에 대응할 올바른 역사인식의 확립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전국민적 공감대가 교육과정 개정을 이끌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초등 5학년 사회에서는 온전히 우리나라 역사를 배우고, 중학교에서는 사회 속에 들어가 있던 세계사를 떼내어 국사와 함께 ‘역사’ 과목으로 독립시키며, 고등학교 1학년에서는 근현대사 중심으로 한국사와 세계사를 통합시킨 ‘역사’를 예전보다 한 시간 더 배울 수 있도록 하였다. 여기에 선택과목으로 ‘한국문화사’, ‘세계역사의 이해’와 함께 ‘동아시아사’를 신설했던 것이다. 그런데 2009년 개정교육과정은 이런 2007년 개정교육과정의 취지와 역사성을 무시해버렸다. 개정 시안에 따르면 중ㆍ고등학교에서 모두 역사를 사회과 안에 도덕과 함께 끼워 넣음으로써 역사과의 독립성이 훼손될 가능성이 커졌다. 또 3개였던 고등학교 역사 선택과목을 2개로 줄였을 뿐 아니라, 고등학교 1학년 역사마저 선택으로 운영하도록 하고 있다. 이럴 경우 2007년 개정교육과정이 의도했던 계열성(중학교에서 전근대사 중심의 한국사와 세계사, 고등학교 1학년에서 근현대사 중심의 통합역사, 2, 3학년에서 한국문화사, 동아시아사, 세계역사의 이해 중 선택)이 모두 무너져버릴 뿐 아니라, 자칫 고등학교에서 역사를 한 번도 배우지 않고 졸업하는 학생이 나올 가능성마저 생긴 셈이다. 이는 역사교육을 현행 7차 교육과정보다도 더 위축시키는 퇴행이 아닐 수 없다. 역사의식 없는 ‘글로벌 인재’가 과연 어떤 의미가 있단 말인가? 과목 수를 줄여서 학생들의 부담을 줄인다는 명목으로 실제로는 학생들의 선택권만 줄여버렸으니, 2009년 개정교육과정은 결국 입시주요과목인 국, 영, 수를 위해 다른 과목을 희생시키겠다는 취지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이런 여러 사정에 비추어 볼 때, 지금과 같은 일방적인 교육과정 개정 추진은 즉각 중단되어야 한다. 정부는 2009년 개정교육과정 밀어붙이기를 중단하고, 역사교육계 및 역사학계의 의견을 광범위하게 수렴하여 역사교육 강화라는 큰 틀을 유지하면서 교육과정을 신중히 수정, 보완하는 과정을 거쳐야 할 것이다. 이는 단순히 특정과목을 지키려는 ‘집단이기주의’가 아니라 사회적 요구이며 시대적 소명이기 때문이다. 만약 졸속적으로 2009년 개정교육과정을 강행함으로써역사교육 강화의 기조가 무너진다면, 교육적 혼란뿐 아니라 전국민적 저항을 불러올 수 있음을 엄중히 경고한다. 우리 역사학계, 역사교육계 관련단체들은 역사교육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는 국민들과 함께 교육과정 개정작업을 지켜보면서, 우리의 요구가 수용되지 않을 경우 역사(교육)학계를 시작으로 범국민 서명 운동을 벌이는 등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역사교육 후퇴에 맞서나갈 것이다. - 정부는 졸속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교육과정 개정작업을 즉각 중단하라! - 정부는 냉엄한 국제정세와 국권상실 100년의 역사적 의미를 상기하라! - 정부는 ‘역사교육 강화’의 2007년 개정교육과정의 정신을 존중하라! 2009. 10. 13 경제사학회, 대구사학회, 동양사학회, 민족문제연구소, 백산학회, 부경역사연구소, 부산경남사학회, 아시아평화와 역사교육연대, 역사교육연구소, 역사교육연구회, 역사교육학회, 역사문제연구소, 역사실학회, 역사학연구소, 역사학회, 일본사학회, 조선시대사학회, 전국역사교사모임, 전북사학회, 한국고고사학회, 한국고대사학회, 한국구석기학회, 한국근현대사학회, 한국미국사학회, 한국미술사학회, 한국민족운동사학회, 한국사연구회, 한국사학사학회, 한국서양사학회, 한국서양중세사학회, 한국역사교육학회, 한국역사연구회, 한일관계사학회, 한국중세사학회, 호남사학회, 호서사학회 (총 35개 단체. 가나다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