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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BoardLang.text_date 2023.12.06 BoardLang.text_hits 570
어느 혁명가 집안의 형제들 : 오기만·오기영·오기옥
 
 
 
‘명가(名家)’에 대한 단상
 
종종 명가라는 말을 접할 때가 있다. 명가란 명망이나 문벌이 좋은 집안을 일컫는 용어이다. 전통사회에서라면 학덕 높은 선비와 출사한 관료를 많이 배출한 집안이 명가일 것이다. 출세가 그 기본조건이라면 오늘날에도 명가들은 차고 넘칠지도 모르겠다. 법조 엘리트를 계속 배출해 내는 법조 명가, 2세·3세로 이어지는 재벌가, 지역구와 권력을 이어가는 정치인 집안 등. 하지만 그 실상은 명가라기보다는 부와 권력을 세습하는 기득권 집단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명가란 단지 세속적 성공을 이룬 집안에 어울릴만한 말이 아니다. 그 이름은 공동체에 대한 헌신과 희생의 삶을 살아간 이들에게 주어져야 마땅하다. 이를테면, 재산과 목숨을 독립 운동에 쏟아 부었던 우당 이회영의 6형제, ‘사방 백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가훈에 따라 헐벗은 자들을 구휼하고, 독립운동에 막대한 경제적 지원은 물론 목숨까지 바친 최부잣집 장손 최준과 그의 동생 최완 형제 등의 집안은 ‘명가’라는 이름이 합당한 경우이다.
 
격동의 시대였던 만큼 근대 한국에서 명가의 기본 조건은 ‘고난’과 ‘절제’와 ‘투쟁’이었다 해도 그리 틀리진 않을 듯하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한국 사회에는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명가들이 존재한다. 오기만(吳基萬, 1905∼1937)·오기영(吳基永, 1909∼?)·오기옥(吳基鈺, 1919∼1950?) 형제의 집안도 그 중의 하나이다. 이들 형제는 황해도 배천(白川)군에서 잡화상을 운영하던 오세형(吳世炯, 1884∼?)과 윤인의(尹仁義, 1880∼?)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 집안의 고난과 투쟁 그리고 자긍의 원점에는 3·1운동이 자리한다. 형제의 아버지 오세형은 배천의 만세 시위를 준비한 주모자의 하나였다. 잡화와 학용품을 파는 그의 가게는 동네에서 가장 큰 사랑방이었다. 그곳에서 마을 사람들은 숨죽여 태극기를 그렸고, 어린 형제들은 종이 태극기를 깃대에 풀질해 붙였다. 3월 30일 배천 장날, 드디어 만세 소리가 터졌다. 시위에 나선 많은 이들이 붙잡혔다. 대부분 태형을 맞고 풀려났지만, 오세형은 해주 감옥에 이송되었다.
 
3·1운동의 열기가 수그러들던 12월 무렵, 이 집안의 둘째 아들인 열 한 살의 오기영은 동급생 네 명과 함께 장날 시위를 모방한 만세 시위를 일으켰다. 학교에서 태극기를 만들어 장터로 뛰어 나간 소년들에게 장꾼들이 동조해 만세를 불렀다. 곧바로 헌병 분견대에 붙잡혀간 아이들은 교사 김덕원을 엮어 넣으려는 보조원의 고문에 못견뎌 거짓 자백하고 말았다. 김덕원 교사는 8개월의 징역을 살아야 했고, 소년 오기영은 그 굴복의 부끄러움을 내내 곱씹게 된다.
 
부끄러움에 휩싸인 또 다른 소년이 있었다. 열 다섯 살의 오기만은 네 살이나 어린 동생만도 못한 자신을 책망했다. 이에 친구들과 만세 시위를 계획하던 중 발각되어 오기만을 비롯해 삼십여 명의 소년들이 해주 감옥으로 이송되었다. 훗날 조선과 중국을 종횡무진 누빈 혁명가 오기만의 첫 투옥이었다. 오세형과 두 아들이 해주 감옥과 연안의 헌병 분견대에서 고초를 겪는 와중에, 윤인의는 “장차 또 감옥에 가야 할 운명을 걸머진” 막내 아들 오기옥을 낳았다.
 
형제뿐만이 아니었다. 형제의 매부인 사회주의 활동가 강기보(康基寶, 1905∼1935)도 고려공산청년회에서 활동하다 검거되어 감옥에서 얻은 폐병으로 죽었다. 강기보의 아내인 형제의 막내 누이 오탐열도, 또한 당질인 오장석도 감옥에서 해방을 맞았다. 그들의 사상은 조금씩 달랐지만, 사슬에 묶여 고통 받는 식민지 민중의 해방을 위해 싸우다가 죽거나 옥에 갇혀 고통 받았다. 이제부터 이 혁명가 집안의 형제가 걸어갔던 고난과 투쟁의 삶을 함께 들여다보자.
 
 
노예의 삶을 거부한 혁명아 오기만
 
해주 감옥에서 고초를 겪고 나온 소년 오기만은 1920년 서울의 배재고등보통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3·1운동 때 경험한 장터 만세 시위와 제2의 만세 거사를 모의하다 발각되어 체험한 감옥 생활은 소년을 정치적으로 각성시켰다. 식민지 현실에 눈을 뜬 오기만은 지배자의 규율을 강요하는 학교 교육에 대해 점점 적개심을 갖게 되었다. 형을 뒤따라 서울로 유학 와서 함께 하숙하던 동생 오기영에게 오기만은 중국으로 망명하겠다며 그 까닭을 이렇게 설명했다.
 
사나이가 한 번 세상에 났다가 큰맘을 먹어봐야 하지 않겠느냐. 그런데 조선 안에서는 큰맘을 먹어야 소용이 없고 큰맘을 기를 수도 없어! 늘 하는 말이지만 조선 안의 교육은 결국 일본놈의 심부름꾼을 만드는 것밖에 없어! 중국 넓은 천지로 가서 일본식이 아닌 교육을 받고, 거기 있는 우리 망명객들의 지도를 받고 그럭해서 나는 장차 독립운동에 몸을 바칠 생각이다. 내가 가서 먼저 길을 닦아 놓으테니 너도 나이 좀 더 먹거든 오도록 하라구.
 
‘조선 안의 교육은 결국 일본놈의 심부름꾼을 만드는 것’이라며 ‘큰맘을 기를 수’ 있는 식민지 밖의 넓은 천지로 떠나겠다고 선언한 이 소년은 겨우 열 일곱 살이었다. 남다른 기상이 느껴진다. 님 웨일즈의 《아리랑의 노래》로 널리 알려진 김산(장지락)은 열 다섯의 나이에 혁명가의 길에 나섰고, 태항산의 ‘마지막 분대장’으로 유명한 연변의 저명한 작가 김학철도 열 일곱 나이에 보성고보를 박차고 중국으로 건너가 조선민족혁명당에 가입해서 활동을 시작했다.
 
이 시기에는 식민지의 현실이 조숙한 소년들에게 더 큰 세상을 꿈꾸도록 여러 자극을 주었던 듯하다. 오기만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유학 온 친구인 이남식의 여행증에 자신의 사진을 붙이고, 하숙비 밥값 등 칠십 원의 돈을 들고 중국으로 떠났다. 1922년 4월 무렵이었다. 이후 그는 2년여 동안 면학을 목적으로 중국의 북경, 남경, 상해 등을 전전했다. 그는 북경사범대학 부속 하기(夏期)학교 및 남경 동명학원 영어과 등에 입학했으나 모두 중도에 그만두었다.
 
학교 공부는 그만두었지만 대신 그는 좌익문헌을 탐독하는 한편 “그 지역의 민족주의자, 공산주의자 등과 교우를 한 결과 조선의 독립 및 공산화를 갈망”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집안의 가세가 기울자 고향으로 돌아온 오기만은 부친을 도와 황무지를 개간하여 과수원을 만드는 일을 했다. 경찰은 3·1운동 때 시위를 모의했고 중국에서 생활하다 돌아온 오기만을 감시하고 괴롭혔다. 때때로 이유 없이 유치장에 가두고 술 취한 고등계 주임이 몽둥이질을 했다.
 
그럴수록 마음 속 울분과 혁명에 대한 의지는 커 갔다. 그는 신간회 배천(白川)지회 설립 준비위원회의 일원으로 설립대회 당일에 배포할 ‘삐라’를 준비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연백경찰서에 검속되어 고초를 겪고 해주 지방법원에 송국되어 50원 벌금형에 처해졌다. 감옥에서 나온 오기만은 다시금 중국 망명을 결심한다. 신문기자가 된 동생 오기영이 안동현까지 배웅했다. 말없이 배갈을 나눠 마신 형제는 봉천행과 부산행을 타고 각자에게 놓인 길을 향했다.
 
두 번째의 중국 망명 이후 오기만이 걸어간 투쟁의 행로를 경찰 조서를 통해 확인해 보자.
 
 
위 사람은 올해 5월 6일 상해 총영사관 경찰부로부터 신병 이송을 받아 취조한 바, 소화 4년(1929년) 1월 중순부터 소화 6년(1931년) 6월 중순경까지 상해에서 동지 김형선, 정태희, 김단야, 오대근, 김구, 선우혁, 이동녕, 안창호, 구연흠, 최창식, 조봉암, 조용암, 한위건, 이한림, 곽헌, 이민달, 황훈, 여운형, 홍남표, 좌혁상, 김명시 등의 공산주의자 또는 민족주의자와 연락했다. 중국공산당 강소성 법남구 한인지부 상해청년동맹, 유일독립당 상해촉성회, 유호한국독립운동자동맹, 국제공산당 원동부 등에 관계했다. 조선 내에서는 소화 6년(1931년) 6월 하순 입국한 후 동년 7월 15일 경성부 남대문에서 당시 김단야의 명에 따라 조선 내의 적색노동조합을 조직하고자 경성에 들어와 있던 동지 김형선과 수차례 회합하여 협의를 거듭한 결과, 소화 7년(1932년) 1월 상순 진남포로 넘어가 일명 김찬인 전극평(全克平) 및 한국형, 심인택 등과 연락하여 적색노동조합 진남포부두위원회를 결성하는 활동을 지속하던 중, 동지의 다수가 검거되자 신변의 위험을 느껴 평양에서 잠복하고 정세를 관망하다가 소화 8년(1933년) 7월 16일 동지 김형선이 체포되었다는 신문기사를 보고 달아나, 신의주를 빠져나와 철도로 봉천 산해관을 경유하여 상해로 와서 동지 오대근을 통하여 조선 내의 활동상황을 중국공산당 본부에 보고한 사실이 명확한 것으로써, 6월 28일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관할 경성지방법원검사에 송치한 것이다.
 
동생과 헤어진 오기만은 대륙을 가로질러 동아시아 혁명가들의 집합소였던 상해로 향했다. 그는 중국공산당 산하의 한인 반제조직인 ‘상해한인청년동맹’의 집행위원장이 되었다. 1929년 10월 26일에 결성된 ‘유호(留滬)한국독립운동자동맹’에도 참여했다. 이러한 활동 중 오기만은 1931년 6월 초순 경 국제공산당 원동부원인 김단야로부터 김형선과 협력하여 조선 내 적색노동조합을 만들라는 지시를 받았다.
 
오기만은 노동조합 인터네셔널의 기관지 <프로핀테른> 200부를 휴대하고 1931년 7월 15일 경성에서 김형선과 만나 국내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진남포에서 부두노동자 생활을 하며 김찬 등과 함께 노조와 적색독서회를 조직했고, 평양 면옥노동자 총파업에 관계하는 등 각종 노동 운동의 배후에 있었다. 하지만 ‘소’라고 불리던 국내 조직의 책임자 김형선이 체포된다. 오기만은 가까스로 상해로 탈출했지만, 중국공산당 본부에 조선에서의 활동 상황을 정리한 보고서를 네 차례에 걸쳐 제출하고 활동 지시를 기다리던 중 체포되고 말았다.
 
상해에서 경성으로 압송된 오기만은 5년 형을 선고받고 공소를 포기해 기결수가 되었다. 혹독한 고문과 서대문형무소의 열악한 환경은 불과 일년여만에 축구선수였으며 근육노동으로 단련된 오기만을 폐결핵의 중환자로 만들었다. 죽어서야 나온다는 서대문형무소의 병감인 ‘오방(五房)’에 입감되었던 오기만은 회생 불가능한 몸이 되어서야 병보석으로 풀려나왔다. 동생 부부의 헌신적인 간호도, 병자의 변덕과 짜증을 묵묵히 받아낸 늙은 부모의 보살핌도 그를 살려내지는 못했다.
 
삶에 대한 강한 애착과 죽음의 절망 사이에서 오는 격정을 거친 뒤, 담담히 죽음을 맞으면서 자신의 운명을 애닲아 하는 어머니에게 남긴 오기만의 마지막 몇 마디 말은 가슴을 저리게 한다.
 
“내가 어머니헌테 몹쓸 녀석이었소. 허지만 어머니 한분만 이런 꼴을 보는 게 아니예요. 조선 사람 중에 이런 사람이 많아요!”
 
 
‘민족의 비원(悲願)’인 ‘자유조국을 위하여’
 
동생 오기영의 삶을 살펴보자. 오기영은 형의 뒤를 따라 배재고보에 입학했다. 그는 이미 열 한 살 나이에 만세 시위를 벌였고 혹독한 고문의 쓰라림을 맛본 조숙한 소년이었다. 민족의 현실에 일찍 눈 뜬 소년 오기영의 당시 심경이 담긴 시를 함께 읽어 보자.
 
정처 없이 날아오는/꽃 잃은 나비야!/작은 꽃송이나마/너의 눈에 아니 보이더냐//가는 곳도 모르게/날아가는 나비야!/작은 꽃송이나마/너의 눈에 아니 보이더냐//악마 같은 비바람/네가 찾는 그 꽃에!/사정없이 침노해/너의 눈에 아니 보였다//
 
열 다섯 살에 쓴, 활자화된 그의 첫 번 째 글인 <꽃 잃은 나비>라는 시이다. 화자는 ‘악마 같은 비바람’에 사라진 꽃을 찾아 ‘가는 곳도 모르게’ ‘정처없이’ 헤매고 있는 나비를 가여워 하고 있다. 소년은 그 자신과 민족의 현실을 나비에 빗댄 듯하다. 소년 시절부터 그는 민족의 슬픈 현실에 마음 아파했다. 오기영도 배재고보 3학년 때 가세가 기울자 학업을 중단하고, 중국서 돌아온 형과 함께 부친의 과수원 일을 도우며 마을에 소년회를 조직하여 활동했다.
 
비록 학교는 그만두었지만 배움까지 손 놓은 건 아니었다. “세계가 대학”이라는 마음으로 노동했고, 책을 읽었으며 사람으로부터 배웠다. 스스로 사유하고 문제의 대안을 만들려 고민했다. 1926년 11월 열 여덟의 오기영은 동아일보 배천지국의 수습사원이 되었다. 신문사에서 주최한 “우리의 급무는 산업이냐? 교육이냐?라는 주제로 열린 현상토론회에서 수상했으며, 배천청년회의 위원과 회장으로도 활동했다. 1928년 3월 17일에는 동아일보 평양지국의 기자로 입사했다.
스무 살의 햇병아리에 학력도 변변치 않았지만 곧 그는 빼어난 취재 역량과 글쓰기 능력을 입증하며 민완의 사회부 기자로 자리 잡는다. 이 시기 오기영은 <세간에 주목 끄튼 용천 쟁의 진상>(7회), <평양 고무쟁의 진상>(7회) 등 노동자·농민이 싸우던 쟁의의 현장을, <황해도수리조합은 당연히 해산하라>(3회)와 같이 식민지 모순이 중첩한 실제 현장을 심층 취재한 르포를 선보였다. 이러한 탐사보도와 더불어 깊은 사유에서 우러난 통찰력 있는 칼럼도 선보였다.
 
오기영은 식민지의 현실을 보여주는 각종 통계 조사와 연구를 공부하여 활용했다. 그렇지만 책상위 숫자만으로 식민지의 고통을 모두 드러낼 수는 없었다. 그는 늘 현장에 가서 민중들의 육성을 들었고 독자에게 그들의 말을 직접 들려주었다. 을밀대에서 시위를 벌인 ‘체공녀’ 강주룡의 인터뷰 기사는 그 사례다. 강주룡의 육성으로 그녀의 삶의 이력을 비롯, 평원고무공장 파업의 원인과 과정, 그녀가 을밀대의 ‘체공녀’가 된 까닭과 결연한 주장을 직접 전달했다.
 
오기영은 민족을 깊이 사랑했지만, 그의 민족애는 쇼비니즘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와 관련하여 <평양 폭동 사건 회고>는 각별히 강조할만한 글이다. 중국 지린성 만보산에서 일어난 조선인과 중국인 사이의 유혈사태가 과장 왜곡되어 전달되었고, 이를 빙자하여 평양 부민들이 중국인들을 학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오기영은 “검열관의 가위를 될 수 있는 데까지 피하면서” 평양 부민들의 화교 공격의 과정과 참혹상을 생생하게 전달했다. 기사를 따라가 보자.
 
1931년 7월 5일 밤, 중국인 요정 동승루에 어린아이 10명이 돌을 던지며 사건이 시작되었다. 곧이어 어른들도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 여기에 중국인이 조선인을 살해했다는 유언비어가 기름을 부었다. 2, 3백여명씩 떼를 지은 1만 여 명의 군중이 평양부의 중국인 학살에 나섰다. 경무국 발표로 사망자 119명, 중상 163명, 생사불명 63명의 중국인 화교들이 살상당했다. 오기영은 이 사태를 평양의 군중들이 “반항없는 약자에게 용감하였던 것”이라고 요약한다.
 
오기영의 조선 민족에 대한 사랑은 맹목이 아니라 보편과 이성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는 “유아와 부녀의 박살난 시신이 시중에 산재한” 야만과 광란의 평양의 밤을 동포들에게 펼쳐 보이며 통곡하는 심정으로 자성을 촉구했다. 이런 그의 정치적 이념을 무엇이라고 불러야할까? 오기영은 1929년 10월에 평양에서 수양동우회에 입단했다. 알다시피 안창호 노선을 따르는 이 모임은 ‘신조선건설’을 지향한 동우회로 개편되었다. 1937년 6월 11일 동우회 사건 때 오기영도 체포되었다.
 
 
1937년 7월 10일 기소유예로 풀려났지만, 사건의 여파로 그는 동아일보에서 강제 퇴사당한다. 안창호가 서대문형무소에서 병보석으로 출소하여 경성제대 병원에서 투병하는 5개월 동안 오기영은 그의 곁을 지키며 간호했다. 안창호가 운명하자 조각가 이국전(李國銓)과 함께 도산의 데드마스크를 떴지만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압수당하고, 검사국의 취조를 받기도 했다. 민심의 동요가 두려워 가족만이 허용된 안창호 장례식이었지만, 오기영은 일본 경찰에 강하게 항의해 고당 조만식과 더불어 도산의 영면을 배웅할 수 있었다.
 
식민지 말기에는 동생 오기옥이 결혼식을 치른 지 일주일 만에 치안유지법으로 감옥에 갇혔다. 어릴 때부터 오기영의 집에서 자랐고 경성제대 법문학부까지 졸업시킨 자식 같은 동생이었다. 친일파에게 머리 숙이고, 신념을 버리고 전향한다면 어쩌면 풀려날 수도 있었을지 모른다. 그렇지만 오기영은 결혼한 지 일주일 만에 남편을 빼앗긴 자신의 제수씨에게 자신이 구명운동에 나서더라도 동생은 결코 자기 신념을 배반하지 않을 거라며 이렇게 덧붙인다.
 
“신의를 버린 뒤에 사는 목숨은 설사 몇 백년 산다 하더라도 썩어빠진 목숨입니다. 물론 가엾은 아주머니를 생각하거나 늙으신 어머니를 생각하거나, 옛날과 달라 감옥살이도 어렵다는 판국에 약질인 아우를 생각하면 나도 가슴이 아픕니다마는 한 일년 뒤에는 이것도 다 지나간 얘깃거리밖에 안될 겁니다.”
 
오기영의 예상처럼 몇 달 뒤 해방을 맞이했다. 감옥에 있던 오기옥과 막내 여동생 오탐열, 그리고 사촌형의 아들인 오장석이 풀려나왔다. 그렇지만, 해방 이후의 상황은 식민지 시기의 고난을 ‘지나간 얘깃거리’ 삼아 지낼 수 있는 평안한 나날이 아니었다. 미·소의 분할 점령과 분단의 고착으로 이 가족의 수난은 계속되었다. 오기영은 경성전기주식회사에 입사해 해방 조선의 산업에 기여하고자 했다. 그는 경성전기의 인사과장, 총무부장, 업무부장으로 일했다.
 
하지만 오기영은 뼛속깊이 문필가였다. 해방기의 혼란을 겪으며 그는 당시의 국제정세와 국내 정치, 사회상과 생활상을 담은 정치평론과 칼럼을 각종 지면에 발표하였다. 《민족의 비원》, 《자유조국을 위하여》, 《사슬이 풀린 뒤》, 《삼면불》 등 해방 공간에서 출간한 그의 네 권의 단행본에는 점점 고착되어 가는 분단과 암울한 민족 현실에 대한 통찰과 이를 타개하기 위한 우국지정이 담겨 있다. 하지만 한반도는 결국 분단되었고, 1949년 6월 그는 월북했다.
 
다시 쓰여질 ‘사슬이 풀린 뒤’를 꿈꾸며
 
오기영이 어떤 생각으로 월북했는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진 않다. 다만 1949년 6월이라는 월북의 시점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이 무렵은 법조 프락치 사건, 국회 프락치 사건이 연달아 터지고, ‘국민보도연맹’이 조직된 시기이다. 한국판 ‘레드 퍼지’가 확산되었고, 좌익에 참여했던 이들뿐만 아니라 좌우합작 및 중도파 노선을 견지했던 사람들까지도 전향을 요구받았다. 좌우합작과 중도파적 노선을 추구했던 오기영은 이런 상황에 절망했고, 위협을 느낀 듯하다.
 
오기영은 양심과 상식, 상호 존중을 통해 여러 정치 세력들이 어우러져 통일된 민족국가를 세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동우회와 흥사단원으로 안창호의 정치 노선을 따랐던 민족주의자로 사상적으로는 우파였다. 그렇지만, 그는 공산주의자인 형과 매부의 혁명 정신을 이해했고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그의 경험 속에서 민족과 인민에 대한 사랑이 있는 민족주의자(우익)와 사회주의자(좌익)는 결코 적대적이지 않았다. 좌우합작은 그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노선이었다.
 
하지만 미국과 소련이라는 세계 최강의 외세와 연결된 좌/우의 극단적 정파에 의해 한반도는 점점 적대와 분단의 상황으로 치달았다. 극심한 이데올로기의 대립 속에서 우익은 좌익을 ‘극렬분자’ ‘빨갱이’라 저주했고, 좌익은 우익에게 ‘반동분자’라는 증오의 라벨을 붙였다. 서로 혐오와 절멸의 언어를 주고받으면서도 극좌와 극우는 좌우합작을 추구한 중도파들을 ‘기회주의자’로 몰아세우는 데에는 합심했다. 급기야 오기영을 공산주의자라고 떠드는 이들도 생겼다.
 
1948년 8월 20일 ‘네 번째의 8·15를 지내고 닷새 뒤’에 쓴 《사슬이 풀린 뒤》의 서문에서 오기영의 당시 심정을 엿볼 수 있다. “전날에 내 형을, 내 매부를 죽게 하였고, 내 아버지를, 나를, 내 아우를, 내 조카를 매달고 치고, 물먹이고 하던 그 사람들에게 여전히 그러한 권리가 있는 세상”, 다시 친일 경찰들이 득세하는 그런 세상을 그는 용납하기 어려웠다. 그는 “뒷날에 정말 해방이 오거든 또 한번 《사슬이 풀린 뒤》를 써야 할 까닭이 있다”고 적고 있다.
 
1949년 6월 무렵 오기영이 서 있던 자리는 점점 위태로워졌다. 또한 형과 매부가 “그들이 공산주의자였다는 사실만으로써 그들의 혁명가적 가치는 무시되게쯤” 된 “슬픈 세상”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다. 결국 북한으로 간 그는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의 중앙위원으로 활동했다.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은 이전의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이 단정 수립 이후 확대 재편된 조직이었다. 어쩌면 월북과 중앙위원 활동은 임박한 전쟁을 막으려는 안간힘이었는지도 모른다.
 
월북 즈음에 쓴 <미소 양국 인민에 보내는 공개장 제1부: 미 인민에 보내는 글월>에서 오기영의 그런 심정을 느낄 수 있다. 그는 한반도를 두고 벌인 일본과 러시아 간 과거의 전쟁과 현재의 상황을 대비시키며 만약 “조선에서 전화가 일어나면 그것은 수시간 이내에 전 지구상에 전화를 확대시킬 가능성이 있으며 미소 양국 인민을 포함한 인류 전체의 사멸을 초래할 무서운 전쟁이 벌어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것은 미소 인민 뿐 아니라 이 땅의 정치가와 민중들에게도 보내는 호소였다.
 
오기영이 쓴 해방기의 문장을 읽으며, 또 그의 월북을 보면서 많은 생각이 떠오른다. 극좌와 극우가 헤게모니를 장악하면서 서로에 대한 증오와 절멸의 언어들이 난무했던 해방기를 지나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남북한은 이념적 다양성이 사라진 경직된 사회로 바뀌었다. 권력자에 대한 개인숭배, 불합리한 정치에 대한 합리적·이성적 비판까지도 반국가 범죄와 이적 행위로 처단되었다. 냉전의 이분법적 진영 논리에 의해 이성에 토대한 세계인식과 사유는 제약받았다.
 
요즘 퇴임을 앞둔 메르켈 독일 총리에 대한 저널리즘의 찬사가 한창이다. 동독 출신으로 통일 독일의 총리가 된 그녀의 업적은 개인의 뛰어난 역량도 있지만, 서로를 절멸의 대상으로 여겼던 적대에서 벗어나 이성에 토대한 대화와 존중의 정치·사회적 문화를 회복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우리는 여전히 ‘분단의 사슬’에 얽매여 살고 있다. 이념은 다르지만 상호 존중과 대화적 소통이 가능한 ‘자유조국을 위하여’, 우리는 스스로의 힘으로 이 사슬을 풀어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