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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책/논문을 말한다
[나의 논문을 말한다] 조선후기 황해도 상정법(詳定法) 시행과 지방재정_엄기석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BoardLang.text_date 2023.07.26 BoardLang.text_hits 1,0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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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역사랑' 2023년 7월(통권 43호) [나의 논문을 말한다] 조선후기 황해도 상정법(詳定法) 시행과 지방재정동국대학교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23.02.) 엄기석(중세2분과) 돌이켜 생각해보니, 연구회와 첫 인연은 석사과정 때 중앙재정사반(현재 국가와 사회반)의 학술회의에 참가한 일이었다. 회의장 구석 진 곳에서 선생님들의 발표와 토론을 들으며 이해하지 못해 골머리를 앓던 차에 당시는 간사였던 선배가 참가 후기를 쓰라고 ‘강요’했고 꽤나 힘들게 후기를 썼던 기억이 난다. 그래도 그 글이 연(緣)이 되었는지 중앙재정사반에 들어가 좋은 선생님들, 선배님들을 만나 공부할 수 있었다. 이후 연구반 공부가 바탕이 되어 이렇게 박사까지 졸업하였다. 수년 전 후기를 쓰라고 했던 선배는 이제 위원장이 되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학위논문 소개를 쓰라고 ‘압박’하였다. ‘자의’가 크지 않았고, 않지만 이 글도 그때 그랬던 것처럼 좋은 시작으로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사실 이미 비슷한 글을 쓴 적이 있어, 다시금 부족한 논문을 소개를 하려니 민망함이 앞선다. 그래도 기회가 된 만큼 지난 글에 미처 담지 못하였던 부분을 전달하도록 하겠다. 선후배 선생님들의 제언을 구한다. 주제와 만남 그저 차가운 공기만이 기억나는 날이다. 연구반 선배가 볼일이 있어 서울에 왔는데, 약속 시간보다 일찍 도착했으니 같이 밥이나 먹자고 하였다. 마침 나도 멀지 않은 곳에 있어서 함께 순댓국을 한 그릇하고 커피를 마시며 이런저런 얘기를 하던 차였다. 나는 한참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논문 주제를 고민하던 때라서 관련한 대화를 주고받았던 것 같다.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뜬금없이 ‘황해도를 써볼까요?’라고 말하였고, 선배는 그게 좋겠다며 맞장구를 쳐주었다. 그렇게 시작되었다. 조선후기 황해도와 만남이... 황해도와 상정법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 주제를 잡고 왜 쓰는지부터 어떻게 쓸 것인지, 무엇을 위해 쓸지를 수없이 고민하였다. 그렇게 몇 년에 걸친 씨름 끝에 지난 2월 『조선후기 황해도 詳定法 시행과 지방재정』이라는 주제로 학위논문을 제출하였다. 제목에서 드러나 듯 논문의 핵심은 해서상정법(海西詳定法)이라 불린 황해도 지역의 공납제 운영이다. 제1장 서론 제2장 17세기 전반 私大同 운영과 別收米 성립 제1절 공물 代納과 私大同 전개 제3장 17세기 후반~18세기 전반 詳定法 시행과 詳定價 정비 제1절 지방재정 운영과 大同法 시행 논의 제4장 18세기 중반~19세기 전반 詳定法 개정과 民庫 운영 제1절 均役法 시행 전후 지방재정 운영 변화와 詳定法 개정 제5장 결론 내용은 상정법 시행 이전 황해도 공납제 운영 방식, 상정법 제정의 경위와 내용, 그리고 상정법 시행 이후 변화한 황해도 지방재정으로 나누었다. 대체로 상정법 시행을 변곡점으로 삼아 조선후기 황해도 지방재정 운영의 실태를 밝히고자 한 글이다. 간단하게 논문 내용을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상정법 시행 이전 16세기 황해도 공납제는 이른바 사대동(私大同)이 성행한 지역이었다. 하지만 사대동은 어디까지나 지역의 자치적인 규정이었다. 중앙 상납은 여전히 물품 형태[本色]를 유지하였으며, 방납(防納)의 폐단은 층위를 다르게 하여 지속적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문제는 공안(貢案) 개정 등을 통해 해결 가능하였는데, 황해도는 일찍부터 관련한 문제가 제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변화가 일어나지 못하였다. 그 이유는 군사ㆍ외교적인 문제 때문이었다. 17세기 초 후금, 이어지는 청의 군사적 압박과 침입으로 황해도를 비롯한 서북부 지역의 재정 운영은 비정상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 과정에서 공납제는 사실상 운영을 중지하였다. 여기에 서량(西糧)과 같은 부가세도 지속되었다. 병자호란 이후에 전시적 상황이 다소 나아지면서 양서지역 공납제 운영에 대한 복구 논의가 제기되었다. 그 결과 황해도는 기존 현물 형태의 공납제를 대신하여 별수미(別收米)를 징수하는 방식이 만들어졌다. 별수미는 공물 대신 쌀을 납부하는 것이므로 대동법과 유사하였다. 하지만 이는 원공가에 대한 대처일 뿐 대동법처럼 지방재정을 포괄하는 정책은 아니었다. 여전히 황해도 민역은 번다하였고 군사ㆍ외교 비용 부담도 계속되었다. 황해도 지역 내외로 대동법 적용 논의가 지속되어 온 것은 이러한 문제의 해결을 위함이었다. 황해도 공납제 개혁이 쉽게 시행되지 못하였던 것은 양전(量田)과 칙수(勅需)에 대한 부담이 계속해서 발목을 잡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는 지난한 논의 끝에 숙종 34년(1708) 대동법을 대신하여 군현별 세액을 다르게 하는 상정법 실시가 결정되었다. 시행 초기 황해도 상정법의 특징은 세입의 반을 중앙으로 상납하는 삼남 지역의 대동법과 다르게 상납 분량은 적고 세입의 절반에 가까운 부분이 ‘상정여미(詳定餘米)’로 편성되었다. 상정여미는 칙수 비용에 투입되었는데, 그만큼 황해도 지역의 지방재정에서 칙수가 차지하는 부담이 상당하였다. 이후 상정법은 영조 연간까지 보완 작업을 거쳤다. 시행 초기 결당 세액이 높았던 지역은 하향 평준화되어 영조 21년(1745) 도 내 상정가가 12두, 별수미 3두로 통일되었다. 황해도 지방재정 특징 중 하나인 동전의 사용도 상정법을 계기로 크게 늘었다. 상정법 시행으로 공식화된 작전(作錢)은 꾸준하게 확대되어 영조 중반 산군을 포함한 장산 이북 지역의 경우 동전으로 세금을 납부하였다. [caption id="attachment_10192" align="aligncenter" width="567"]ⓒ엄기석[/caption] 상정법의 시행이 있었지만 지방재정은 문제가 완전히 개선된 것은 아니었다. 황해도의 번잡한 잡역 문제는 결역 부담의 증가와 양전 미시행 등으로 쉽게 해결되지 못하였다. 여기에 영조 27년(1751) 시행된 균역법은 지방재정의 운영을 더욱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러한 문제 해결을 위해 영조 34년(1758) 50여 년 간 방만하게 운영되던 상정법의 운영을 정비하는 조치가 취해졌고, 그 결과 지출 범위와 액수 등을 새롭게 규정한 이른바 ‘개상정절목(改詳定節目)’이 만들어졌다. 여기에 또 하나 큰 변화가 있었는데 영조 45년(1769) 상정 재원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칙수가 더 이상 상정미에서 지급되지 않고 칙수고(勅需庫) 운영으로 전환되었다. 이는 칙사 접대 수요가 크게 줄어들었기 때문에 가능한 결과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남은 상정미가 지방재정에 쓰인 것은 아니었다. 이는 다시 중앙 재원으로 흡수되었고 지방은 여전히 부족한 재정을 다른 방법으로 채워야 했다. 이 때 황해도 지역에서 해결책으로 삼은 방법이 바로 민고(民庫)의 활용이었다. 애초에 민고는 상정 재원으로 처리하지 못하거나 부족한 액수를 채우는 보조 역할이었다. 하지만 중앙 상납분이 지속적으로 증가하면서 기존 상정 저치로 해결하던 부분이 민고 재원으로 전환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민고의 수가 크게 늘어났고 지출 범위도 다양해졌다. 19세기 초ㆍ중반에 가면 민고 재원마저 감소하는 문제가 발생하였다. 이에 대하여 중앙에서는 민고의 운영을 직접 관리ㆍ감독하고자 하였다. 특히 황해도는 19세기 중반 감영 중심의 적극적인 정비 시도가 있었는데, 이를 바탕으로 황해도 지역에서는 대규모 민란이 아닌 상대적 안정이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caption id="attachment_10193" align="aligncenter" width="567"] 해영각양구폐절목(海營各樣捄弊節目,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caption] 못다 한 이야기 역시나 아쉬움이 가득하다. 애초에 고민하였던 황해도라는 지역의 특성은 여전히 명확하지 않은 듯하다. 지방재정 문제에 있어서 칙수라는 거대한 부담이 상정법의 운영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음이 분명한데 이 부분을 구체적으로 서술하지 못한 것 같다. 심사 과정에서 나왔던 상정법의 시대별 특징도 제대로 다루지 못하였다. 상정법 외에 황해도 지방재정을 이루는 요소가 많은데 아직은 공납제라는 단면만 보았다는 점도 연구의 한계이다. 이외에 부족한 부분은 열거하라면 끝이 없을 것이다. 앞으로 하나하나 해결할 것을 기약하며, 황해도 나아가서는 조선이라는 나라에 대한 나름의 윤곽을 그려보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논문을 쓰는 과정에 있어서 연구회 중세2분과 국가와 사회반 선생님들의 가르침과 선후배들의 도움은 절대적이었다. 연구회와 인연은 3년간의 편집간사도 있었다. 당시 운영위원회 선생님들을 비롯한 여러 분과의 선생님들을 뵐 기회가 많았다. 그 때 어깨 너머 바라보았던 선생님들의 깊은 통찰력과 다양한 관점은 논문을 쓰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되었다. 진부한 말일 수 있으나 연구회가 맺어준 선생님, 선후배들과 만남이 없었더라면 내가 한 명의 연구자로 자리할 수 있었을까 싶다. 다시 한 번 이 자리를 통해 연구회 많은 분들께 감사 인사를 전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