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기사

[나의 논문을 말한다] 개화기 언론의 세계관과 국제정세 인식_정종원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BoardLang.text_date 2023.06.29 BoardLang.text_hits 1,120
웹진 '역사랑' 2023년 6월(통권 42호)

[나의 논문을 말한다] 

 

개화기 언론의 세계관과 국제정세 인식


한양대학교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22.08.)


 

정종원(근대사분과)


 

1.

한국사에서 개화기(1876~1910)는 어떠한 시대였는가? 그것은 보는 각도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서양의 근대사상이 들어와서 가치관과 사상이 변화하는 시대였고, 온갖 신문물이 들어와 사람들의 일상생활이 바뀌어가는 시기였고, 전근대사회가 근대사회로 전환되는 시간이었다.

그러나 나는 개화기의 본질적 성격은 ‘위기의 시대’로 명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서구 열강이 19세기 중반에 동아시아로 진출하면서 동아시아의 국제질서는 요동쳤고, 새로운 국제질서에서 한국의 지위와 운명은 불투명해졌다. 이 틈을 타고 주변국인 중국과 일본, 서양열강인 러시아 등이 한국의 운명에 개입했다. 한국은 흔들리는 국제질서 속에서 자주독립을 위해 노력했지만 결국 일본에 의해 1910년에 국가가 멸망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개화기 한국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혼란스러운 국제정치 상황에서 자주권을 어떻게 지키는가에 있었다. 이를 위해 한국인들은 국제정세를 제대로 인식하려고 노력했고, 그러한 인식 위에서 외세의 압박을 넘어서기 위한 개혁론을 구상했다. 즉 개화기는 한국이 급변하는 국제정세 속에서 생존이 불확실해진 위기의 시대이자, 위기를 돌파하기 위한 개혁의 시대였다. 위기의 본질이 국제정세에서 온 것이었기 때문에, 위기극복을 위한 개혁의 방향도 국제정세에 대한 판단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런데 국제정세에 대한 판단은 백지상태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세계관, 곧 세계에 대한 인식틀을 통해 외부세계의 정보를 인식한 결과 만들어지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개화기에는 세계관과 국제정세 인식 그리고 개혁론이 매우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2.

사실 처음부터 개화기 사상에서 세계관과 국제정세 인식 및 개혁론이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니다. 그것은 우연한 계기에서 시작되었다. 『제국신문』을 보면서, 러일전쟁 이전에 러시아에 대해 강한 적대감을 보이고, 일본에 대해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을 읽어낼 수 있었다. 그때 가지게 된 궁금증은 ‘러일전쟁 이후 한국을 결국 집어삼킨 것은 결국 일본이었는데, 왜 일본과 러시아에 대해 이렇게 상반된 시각을 가지고 있을까?’하는 것이었다. 기존에는 인종론이나 아시아연대론을 그 이유로 들었지만, 『제국신문』은 서양의 백인종 국가들인 영국과 미국을 매우 우호적으로 보고 있었기 때문에 기존의 설명으로는 의문점을 모두 풀어낼 수 없었다.

그러다가 러시아의 혁명운동을 다룬 『제국신문』의 한 논설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제국신문』은 러시아가 열강 중에서 가장 개명되지 못한 국가이며, 열강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대학교육을 계속하는 도중에 근대정치사상이 침투하므로, 결국 혁명을 피하지 못할 것이라고 예측했다.(『제국신문』 1902년 6월 16일자 논설)

이 논설을 읽고나서 『제국신문』의 정치사상과 한국에 대한 개혁론이 무엇이었는지 다시 검토했다. 『제국신문』은 전제군주정을 걸주(桀紂)와 같은 정치라 비판하고, 입헌군주정을 긍정적으로 묘사하고 있었다. 또한, 한국도 입헌군주정으로 가야만 국제사회에서 생존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이러한 『제국신문』의 입장에서, 러시아는 전제군주정이면서도 세계적인 열강이었으므로 『제국신문』의 주장에 대한 반대 사례였다. 그렇기에 『제국신문』은 러시아에서 일어나는 혁명운동을 끊임없이 보도하면서, 러시아가 정치적으로 불안정하고 결국 언젠가 전제군주정을 유지할 수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즉, 이 사례에서 보듯이 개화기 언론은 자신의 정치관과 개혁론에 따라 국제정세를 해석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세계관과 개혁론 그리고 국제정세 인식이 결합되는 양상을 보이는 것은 개화기에 한정된 것은 아니다. 현재 우리사회에서 미중대결에 대한 인식과 그에 대한 외교적 대응을 둘러싸고 진보와 보수의 시각 차이는 뚜렷한 편이다. 자신이 가진 정치적 지향에 따라 국제정세를 다르게 인식하고 대응하는 것은 현재에도 존재하고 있다.

기존의 개화기 사상사 연구에서는 언론별 사상의 차이를 별로 강조하지 않는 편이었고, 언론별 사상의 차이를 살핀 연구의 경우에도 대체로는 유교에 대한 태도에 주안점을 두었다. 이는 개화기 한국사회가 아직 유교사회였기 때문에, 유교에 대한 태도가 전체적인 방향성을 결정하는데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술한 바와 같이, 개화기의 핵심적인 문제는 국제정세의 위기였고, 따라서 개혁론과 같은 핵심적인 방향성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국제정세에 대한 인식에 있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국제정세 인식은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관 및 개혁론과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존재였다. 즉, 세계관과 개혁론에 따라 국제정세를 인식하고, 거꾸로 국제정세에 대한 인식을 통해 다시 자신의 세계관과 개혁론을 강화하는 관계가 형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3.

이처럼 현대의 우리가 겪고 있는 국제정세 인식의 편향성이라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개화기 언론을 바라보면서 다양한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여기에서는 가장 핵심적인 두 가지 부분의 차이를 언급하고자 한다. 바로 국제정치관과 문명관이다.

오늘날 우리가 국제정치를 보는 관점은 크게 두 가지라고 할 수 있다. 바로 현실주의와 이상주의이다. 현실주의는 국제정치는 결국 국가들이 벌이는 힘의 정치이고, 국제법이나 정의는 힘의 정치를 가리는 가면에 불과하다는 관점이다. 그러므로 현실주의는 세력균형, 국방력 강화, 동맹 등 힘을 중심으로 한 조치를 통해 전쟁을 막고 평화를 수립하려고 한다. 반면 이상주의는 국제정치는 국제법이나 국제기구를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으며, 힘의 정치가 일부 있더라도, 이를 국제법과 국제기구를 통해 제어할 수 있다고 보는 관점이다. 그러므로 이상주의는 국제재판소의 활성화 혹은 침략국가에 대한 국제사회의 집단안보를 통해 전쟁에 대응하려고 한다.

그런데 국제정치를 바라보는 이러한 두 관점은 이미 19세기에도 등장하고 있었다. 그 용어는 오늘날과 똑같지 않지만, 19세기에 현실주의는 힘의 질서를 중심으로 국제정치를 바라보고 있었다. 반면 19세기의 이상주의는 국제법과 국제기구를 통해 전쟁을 억제하려고 했다.

그리고 19세기의 국제정치를 다룬 두 사상은 모두 19세기 말 한국에 유입되어 있었다. 『독립신문』과 『제국신문』에는 이상주의적 경향이 강하게 나타났는데, 이 두 신문은 국제사회가 국제법을 중심으로 움직이며, 침략국가를 여러 국가들이 뭉쳐서 집단적으로 응징한다고 보았다. 이는 지금의 이상주의와 매우 흡사한 것이었다. 다만, 이 당시에는 국가들을 문명국과 비문명국으로 나누는 경향이 뚜렷했으므로, 두 신문은 문명국에는 국제법이 적용되지만, 비문명국에는 국제법이 적용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이는 모든 국가에 국제법이 적용되는 지금과는 상당히 달랐던 당시의 국제법 질서를 반영한 것이었다. 한편, 두 신문의 이상주의적 경향이 완전히 같은 정도였던 것은 아니다. 『독립신문』은 이상주의적 경향이 강하게 나타나면서도, 현실적인 힘의 정치를 어느 정도 고려하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제국신문』은 이상주의적 경향을 매우 강하게 드러냈다. 이처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두 신문 모두 이상주의적 경향이 강했다.

반면 『황성신문』은 달랐다. 『황성신문』은 현실주의적 경향이 강하게 나타났는데, 『황성신문』은 19세기 말의 국제사회를 중국 고대의 전국시대(戰國時代)보다 더 폭력성이 강해진 시대라고 보았다. 그러므로 국제법이나 침략국가에 대한 국제사회의 집단적 응징 같은 것은 믿지 않았다. 『황성신문』은 열강이 말하는 국제법은 인의(仁義)를 가짜로 칭하는 것이라 하여 부정적으로 인식했다.

이러한 신문들 사이의 국제정치에 대한 관점의 차이는 개혁론의 차이와 국제정세에 대한 인식 차이로 나타났다. 『독립신문』과 『제국신문』은 국제법과 집단안보의 보호를 받기 위해서는 한국이 문명국으로 인정받아야 한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문명국으로 인정받기 위한 서양식 사법제도 도입과 서양식 의회제도 도입 등을 매우 중요한 개혁과제로 생각했다. 반면 『황성신문』은 서양 국가들에게 문명국으로 인정받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서양식 제도의 무조건적인 도입보다는 동서양 제도에서 장점을 절충하자고 주장했다. 국제정세에 대해서도 『독립신문』과 『제국신문』이 서양의 국제질서를 주도하는 영국과 미국에 우호적인 인식을 보였지만, 『황성신문』은 영국과 미국 모두 도둑의 마음을 가진 국가들로 인식하여 다른 열강과 마찬가지로 경계하는 태도를 보였다.

 

4.

개화기 언론에 나타난 또 다른 핵심적 차이는 문명관이었다. 『독립신문』과 『제국신문』은 서구 문명이 세계전체로 확장되고, 승리할 것이라 보았다. 즉, 서구중심의 일원론적 문명관이었다. 그러므로 한국의 독립을 위해서는 서양의 문명화를 모방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보았다. 이처럼 일원론적 문명관을 가진 두 신문은 문명의 정도에 따라 국가들을 서열화시키는 인식을 보였다. 이들의 문명관에서 영국과 미국은 최고단계의 문명국이었고, 일본과 러시아는 그다음 단계였고, 한국은 반(半) 개화국이었다. 이처럼 일원론적인 서구중심의 문명관은 이른바 ‘문명의 수준’에 따른 서열을 나누고, 그 서열의 최상위에 서양 국가들을 배치함으로써 서양 국가들에 대한 우호적인 감정을 갖게 하였다.

특히, 두 신문은 서구문명을 옳은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면서, 서구문명을 무조건적으로 모방하는 문명화를 주장하게 되었다. 『독립신문』은 동서양의 장점을 절충하자는 말이 그럴듯해 보이지만, 이것은 장점을 판단할 수 있어야 가능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즉, 문명의 후진국인 한국은 장단점을 판별할 수 있는 판단능력이 없으니 서구 문명국을 무조건적으로 모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제국신문』도 서구 문명국의 제도를 무조건 모방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했다.

반면 『황성신문』은 서양과 동양의 문명을 모두 긍정하는 다원론적 문명관을 가지고 있었다. 『황성신문』은 특히 동양의 문명으로서 유교문명을 강하게 긍정했고, 이는 유교국가의 역사를 가진 한국사와 조선왕조에 대한 긍정적 자기인식으로 연결되었다. 『황성신문』은 『독립신문』처럼 문명에 따라 국가들을 서열화하지 않았고, 다만 서양 열강이 문명적으로 발달했다는 것은 인정했다. 그러나 서양 열강에 대해 그들의 탐욕을 의심했고, 특히 1900년의 의화단 사건에서 서양 군대가 벌인 학살을 보면서 서양 열강이 말하는 ‘문명’에 대해 의심하는 태도를 보였다.

이처럼 『황성신문』은 서구문명을 유일한 문명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동서양 문명을 모두 긍정하였기 때문에, 동서양 문명을 절충하여 두 문명의 장점은 살리고 단점은 버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독립신문』이 부정하였던 한국의 판단능력을 신뢰한 것이고, 한국이 스스로 판단하여 장단점을 가려내어 동서양을 절충시키자는 것이었다. 문명관의 차이가 서양 열강에 대한 인식, 한국에 대한 자기긍정의 여부 그리고 문명화의 방향 차이까지 연결되었던 것이다.

 

5.

이상으로 박사학위논문의 핵심 내용을 간략히 소개했다. 이 글을 쓰기 위해 박사학위논문을 쓰던 과정을 되짚어 보니 마음이 먹먹했다. 필자는 재주가 부족해서 학교와 학계의 많은 분들로부터 배우면서 한 걸음씩 박사학위 논문을 향해 나아가 겨우 끝을 맺을 수 있었다. 이 자리를 빌려 필자에게 가르침을 준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

그러나 아직도 필자의 논문에는 부족한 점이 많고, 학문에 있어서도 가야할 길이 멀다. 앞으로 더욱 많이 공부하고, 학계의 제현들로부터 조언을 아낌없이 받아들여 부족함을 메꾸도록 노력하고자 한다. 부디 부족한 필자에게 조언을 아끼지 말아 달라고 부탁드리며 이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