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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비평] 영화 '올빼미'(2022): 현재의 욕망에 의해 소비되는 소현세자, 소현세자를 위해 희생되는 조선의 미래_이명제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BoardLang.text_date 2023.01.18 BoardLang.text_hits 14,968
웹진 '역사랑' 2023년 1월(통권 37호)

[미디어 비평] 

 

현재의 욕망에 의해 소비되는 소현세자,
소현세자를 위해 희생되는 조선의 미래


- 영화 <올빼미(The night owl, 2022)>


 

이명제(중세2분과)


* 본 글은 영화 《올빼미》의 스포일러를 담고 있습니다.
* 함께 읽기 : [나의 논문을 말한다] 소현세자 서사의 탄생과 역사 속의 소현세자


 

[caption id="attachment_9966" align="aligncenter" width="299"]<올빼미> 공식 포스터 (출처: 네이버 영화)[/caption]

죽음으로 뿌린 씨앗, 뒤늦게 발아하다

1645년 2월 18일 소현세자가 한양으로 돌아왔다. 1637년 1월 30일 삼전도에서의 항복의례 이후 한양도 들르지 못한 채 곧장 청나라 진영에 인질로 보내졌으니 만 8년을 꼬박 채운 셈이다. 짧지 않은 시간이 흘렀지만 끝내 무사히 돌아오게 되었으니 이보다 큰 경사가 또 있을 수 없었다.

행복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4월 26일, 소현세자가 세상을 떠난 것이다. 북경에서 돌아온 지 두 달을 약간 넘겼을 뿐이었다. 슬픔만이 궁중을 뒤덮어야 마땅한 순간이었지만 정치의 비정한 속성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8년의 공백은 관계에 균열을 가져왔고, 세자의 죽음은 균열을 메울 좋은 기회로 여겨지기도 하였다. 세자의 아들인 원손 대신 아우 봉림이 새 후계자로 결정되었고, 정치에서 소외된 세자의 가족은 비극적 운명을 피해가지 못했다.

세자의 죽음을 둘러싸고 의심의 눈초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권력에서 배제된 이의 죽음은 곧 잊혀졌고, 조선은 250여 년 동안 세자의 죽음을 외면하였다.

소현세자를 다시 호출한 건 20세기 초 일본인 학자 야마구치 마사유키였다. 그는 아담 샬의 회고록 《Historica Relatio》 안에서 아담 샬과 소현세자의 만남을 발견하였고, 이를 통해 조선의 서구적 근대화 가능성을 엿보았다. 소현세자의 잠재력이 발굴되자 다시 한번 그의 죽음이 조명되었다. 조선을 개혁하려는 소현세자의 의지가 명분론자 인조의 독살로 좌절되었다는 가설이 제출되기 시작한 것이다.

소현세자에 대한 재조명은 ‘무능한 임금 인조’에 대한 반감, 그리고 역사적 상상력을 현실화시키는 미디어 매체의 발전과 함께 급물살을 타기 시작하였다. 1998년 한 역사 작가는 자신의 글 서두에서 소현세자를 ‘잊혀진 인물’이라고 평가하였지만, 2023년 현재 소현세자는 가장 뜨거운 역사적 인물 중 한 명이 되었다. 21세기에 이르러 소현세자는 부활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2022년 11월 개봉한 영화 《올빼미》 역시 이러한 흐름 위에서 소현세자의 죽음을 다루고 있다. 영화의 크레딧에서 “역사적 사실은 모티브로만 삼았을 뿐 본작의 내용은 어디까지나 창작이며 사실과 부합하는 점이 있어도 우연”일 뿐이라며 팩션을 자처했지만, 대중의 입장에서 감독에 의해 잘 꾸며진 플롯과 사실을 구분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본 글에서는 영화의 세 가지 장면을 통해 《올빼미》가 숨기고 있는 역사적 사실을 확인함과 동시에 현재의 소현세자 서사가 가지는 문제점에 대해 검토해보고자 한다.

 

만주어, 현실과 명분을 구분짓다


소현세자와 강빈이 마침내 한양에 도착하였다. 모든 사람이 소현세자의 무사 귀환을 축하하고 있었지만 정작 아버지 인조의 표정은 왠지 모르게 어두웠다. 소현세자와 함께 동행한 청나라 사신과 사신이 가지고 온 칙서 때문이었다. 칙서는 황제의 명령문서로서, 황제에게 직접 수령하지 않더라도 황제를 향한 의례를 행해야만 한다. 문제는 황제를 향한 의례가 8년 전 삼전도에서의 기억을 불러 온다는 사실에 있었다.

[caption id="attachment_9967" align="aligncenter" width="333"]칙서를 수령하는 인조 (출처 : 네이버 영화)[/caption]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청나라 사신은 소현세자에게 만주어 통역을 요구하였다. 세자는 칙서를 향해 인조가 무릎을 꿇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자신이 칙서를 낭독할 수 없다며 항변했지만 사신은 막무가내였다. 결국 세자는 사신과 나란히 서서 치욕적인 내용의 칙서를 통역하였다.

이 장면에서 주목할 점은 소현세자가 능숙하게 만주어를 구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를 통해 관객들은 청나라 중심의 국제 질서 속에 자연스레 녹아 들어간 소현세자의 모습을 확인한다. 그리고 여전히 청나라 사신을 오랑캐라 부르면서도 그 앞에 꿇어앉아 있을 수밖에 없는 인조의 모습을 통해 두 사람이 다른 길 위에 서있음을 직감한다. 만주어는 명분론자 인조와 현실주의자 소현세자의 차이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장치라고 할 수 있다.

 

소현세자, 황제의 권유를 거부하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던져보자. 과연 소현세자는 정말로 만주어를 구사할 수 있었을까? 소현세자가 청에서 인질로 생활한 것은 8년이다. 일반인도 외국에서 1~2년 생활하면 어느 정도의 회화를 구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영화의 묘사는 어색하지 않다. 소현세자의 신분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소현세자가 일국의 세자였으며, 청과 조선에는 세자의 발언을 만주어로 통역해 줄 역관들이 항시 대기 중이었다는 사실이다. 청의 황제 홍타이지가 강제하지 않는 한, 세자가 만주어를 익혀야 할 하등의 이유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혹시 홍타이지가 세자의 만주어 학습을 강요하지는 않았을까? ‘강요’까지는 아니더라도 ‘권유’한 장면은 포착된다. 세자가 심양에 도착한 지 세 달여가 지났을 무렵인 1637년 7월 말, 홍타이지가 만주어 학습을 권장하며 책 2권을 보낸 것이다. 아마도 ‘만주어 교본’ 같은 책이었으리라. 하지만 세자는 거절하였고, 청 예부에서는 곧바로 2권의 책을 회수하였다. 재미있는 사실은 소현세자를 비롯한 세자시강원에서 그 책이 만주어로 쓰였다는 것조차 몰랐다는 점이다. 즉 세자 일행은 만주어를 몽골어로 착각했고, 이러한 착각은 2년이 더 흐른 1639년 9월에도 확인된다. 다시 말해, 세자는 홍타이지의 권유를 거절하였을 뿐만 아니라 만주어와 몽골어를 구분조차 못했던 것이다.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한 가지 가정을 더해보자. 1639년 9월 이후 소현세자가 만주어를 습득했을 가능성은 없는가? 답부터 하자면 없다. 1644년 3월 26일, 청의 용골대는 세자와 은밀히 면담을 하였는데, 이 자리에 통역관 정명수를 대동하였다. 만약 세자가 만주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면 굳이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에 하급 통역관을 대동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후에 소현세자가 만주어를 익힐 기회는 없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4월 9일, 도르곤을 따라 중국을 정복하기 위한 서행(西行)에 동참하였고, 북경을 점령한 이후에는 심양과 북경을 왕복하느라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중요한 것은 소현세자의 만주어 구사의 여부가 아니다. 소현세자가 ‘만주어’로 대변되는 청의 질서를 수긍하였는가 하는 점이다. 아쉽게도 소현세자가 살아있을 당시 청을 긍정적으로 생각한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소현세자의 죽음 이후 작성된 졸기에는, “세자가 오랜 인질 생활로 청나라 사람이 하라는 대로만 하는 꼭두각시 같은 존재가 되었다”는 평가가 남아 있다. 이 기록은 소현세자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였지만, 현재는 세자가 친청적 태도를 보인 결정적 증거로 활용되고 있다.

소현세자에 대한 위의 평가는 『인조실록』에 남아 있다. 한 가지 유의해야 할 점은 『인조실록』이 인조의 다음 왕인 효종대 작성되었다는 사실이다. 효종은 소현세자의 아우 봉림대군으로, 소현세자와 함께 심양에서 인질 생활을 한 인물이다. 그런데 사실 정통성만 놓고 본다면 봉림대군은 국왕이 될 수 없었다. 소현세자에게 아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3명이나 말이다. 적장자 계승의 원칙을 중시하는 조선의 법도상 차기 왕위는 소현세자의 아들 중 장자인 원손에게 돌아가야 합당했다. 하지만 소현세자를 탐탁지 않게 여겼던 인조는 봉림대군을 후사로 선택하였고, 봉림대군은 효종이 되었다. 소현세자의 존재로 인해 정통성이 부족하였던 국왕 효종, 그의 재위 기간에 작성된 소현세자에 대한 평가를 공정한 것이라 볼 수 있을까?

 

지구의, 조선의 희망을 이야기하다




[caption id="attachment_9968" align="aligncenter" width="363"]인조와 소현세자의 독대 (출처 : 네이버 영화)[/caption]

영화 중반, 소현세자는 인조와의 독대에서 지구의를 가지고 조선의 미래를 논한다.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땅의 참 모습입니다.”
“오랑캐 놈들이 그리 가르치더냐?”
“청나라는 서양 문물을 받아들여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고 있습니다. 과거에 매달리지 마시고 미래를 보셔야 합니다.”
“너, 눈이 바뀌었구나.”


현실주의자 소현세자는 청을 통해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인조를 설득한다. 하지만 인조는 소현세자가 전하는 메시지에 관심이 없다. 자신에게 굴욕을 선사한 청으로부터 문물을 수용해야 한다는 세자의 주장이 못마땅할 뿐이다. 눈을 뜨는 순간 현실을 직시할 수 있지만, 역으로 표적이 된다. 정치란 그런 것이다.

 

아담 샬, 만남을 과장하다


위의 장면에서 지구의는 소현세자의 시야를 대변한다. 즉, 청의 세계에서 서양 문물을 받아들인 소현세자는 전지구적 시야에서 조선의 미래를 기획하기 시작한다. 여기서 지구의 이야기를 잠시 해보도록 하자. 소현세자는 어떻게 지구의를 가지고 조선에 들어온 것일까?

1644년 5월, 청은 북경을 점령한다. 이때 청군을 지휘한 것은 섭정왕 도르곤이라는 인물이다. 도르곤은 북경 점령 이후 상황을 안정시킨 후 북경 천도를 단행한다. 마침내 9월 19일 황제 순치제가 북경에 도착하였고, 10월 1일 공식적으로 북경 천도를 선언한다. 소현세자는 도르곤의 북경 점령에 동참한 이후 심양으로 돌아갔다가 순치제와 함께 북경으로 돌아온다.

북경에 도착한 지 2달 만인 11월 19일, 도르곤은 소현세자의 영구귀국을 허락한다. 바로 이튿날 소현세자는 북경을 떠나 귀국길에 오르게 된다. 다시 말해 소현세자는 9월 19일부터 11월 19일까지 두 달의 시간 동안 북경에 머물러 있던 셈이다.

소현세자가 북경에 머물러 있던 바로 그 시간, 한 명의 외국인 선교사가 새로운 중국의 주인인 청으로부터 시민권을 획득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그는 독일 출신의 예수회 선교사 아담 샬이었다. 아담 샬은 명・청 교체의 혼란한 정국 속에서 중국 선교를 이어가기 위해 도르곤에게 접근하였다. 그는 중국에서 계속 활동하기 위해서 자신의 쓸모를 증명해야만 했다. 아담 샬은 유럽식 역법으로 작성한 달력을 바치며 천문 역산의 능력을 어필하였다. 얼마 후 아담 샬은 중국의 역산 전문가들과 일식 시간의 예측을 두고 공개적인 대결을 펼쳤고, 승리하였다. 11월 25일, 아담 샬은 흠천감정에 임명되며 시민권을 획득하였다.

[caption id="attachment_9969" align="aligncenter" width="209"]아담 샬의 초상화 (출처 : 위키백과)[/caption]

청의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소현세자와 아담 샬은 북경에서 조우하였다. 두 사람의 만남은 서두에서도 언급하였던 아담 샬의 회고록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 기록에 따르면 두 사람의 만남은 화기애애했던 듯하다. 소현세자는 서양인 선교사들의 천문 역법 제작 기술에 감탄하여 ‘일관(日官)’을 대동하여 아담 샬을 방문했고, 아담 샬은 이에 화답하며 소현세자에게 여러 천주교 서적들과 천구의, 천주상 등을 전달했다. 뿐만 아니라 소현세자는 아담 샬에게 ‘친필 서한’을 보내 기독교 교리를 조선에 전파하겠다는 각오를 밝혔다. 여기서 아담 샬이 전달했다는 ‘천구의’가 바로 영화에서 묘사된 ‘지구의’이다.

매우 극적인 스토리이다. 조선의 세자와 서양의 선교사가 북경에서 조우했다는 사실 만으로도 놀라운데, 세자는 서양 문물 수용의 첨병 역할을 자임했다. 더구나 이 놀라운 만남의 전말이 아담 샬의 회고록에 남겨져 있으니 대서특필할 사건임에는 틀림없어 보인다.

그런데 이 만남에는 함정이 숨겨져 있다. 그것은 조선 측에 이 만남을 증명해 줄 어떠한 기록도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아담 샬의 기록에 남아있다면 문제없는 것 아닌가? 더군다나 거룩한 종교적 신념을 위해 움직이는 선교사의 기록이라면 신뢰해도 되지 않을까? 실상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아담 샬이 신의 목소리를 대변하기 위해 일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신념만으로 활동할 수는 없다. 자신의 성과를 홍보하여 새로운 인물들이 기꺼이 중국 선교에 일생을 헌신하도록 유도하거나 본국에서의 지속적인 후원이 이어지도록 노력해야만 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거물급 인사들에 대한 선교 성공 사례만큼 효과적인 것이 없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담 샬의 회고록에 기록된 순치제의 모습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아담 샬은 청나라의 궁정에서 신뢰를 획득하였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천문학자 아담 샬이지, 예수회 선교사 아담 샬은 아니었다. 실제로 순치제는 북경 내에 아담 샬 등의 서양인들이 생활할 수 있는 천주당을 지어주지만, 천주당 완공을 기념하며 내린 글에서 “짐이 따르고 받아들이는 것은 요순과 주공, 공자의 도일 뿐”이라고 공언하였다. 하지만 회고록 속에서 아담 샬과 순치제는 전형적인 성직자와 신도의 모습을 띠고 있다. 아담 샬은 순치제를 위해 성실하게 교리를 설명하였고, 순치제는 겸손히 무릎을 꿇고 아담 샬의 설명을 경청한 것으로 묘사되었다.

이쯤 되면 소현세자와의 일화도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여기서는 크게 세 가지 문제를 지적해보고자 한다. 우선 소현세자가 대동했다는 일관의 존재이다. 일관은 천문을 관측하여 달력을 제작하는 기술자로 조선에서는 중인 계층이 담당한다. 그런데 1644년 심양과 북경에서 천문관측 기술자가 소현세자를 보필할 필요가 있었을까? 필요도 없었을 뿐 아니라 어떤 기록에서도 일관의 존재가 확인되지 않는다. 더구나 소현세자 일행은 만성적인 재정 부족에 시달리고 있어 일행의 숫자를 줄이기에 여념이 없었다. 당장 쓸모가 없는 일관이 소현세자 곁에 있었을 가능성은 없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그렇다면 아담 샬은 완전한 허구의 내용을 회고록에 남겨놓은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아담 샬은 흠천감의 대표가 되었고, 청은 서양식 역법인 시헌력을 채택하였다. 그렇게 되자 청나라에서 제작한 달력과 조선에서 제작한 달력 사이에 오차가 발생하기 시작하였고, 조선에서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관상감 관원을 청나라 사행에 대동시켜 시헌력 제작 기술을 습득하게 하였다. 즉 실제로 조선의 일관들은 흠천감과 천주당을 방문하며 서양인 선교사들로부터 천문학 지식을 학습했던 것이다. 다만 이는 1648년 이후에 벌어진 일이었다. 다시 말해 아담 샬은 1648년 이후에 일어난 상황을 1644년 소현세자와의 만남에 끼워 넣은 것이다. 요새말로 msg를 친 것이다.

의심을 시작하자 의문스러운 대목들이 곳곳에서 눈에 띄기 시작한다. 다음은 소현세자가 전달했다는 친필 서한의 존재이다. 아담 샬의 회고록에는 소현세자의 서한이 라틴어로 번역되어 있다. 물론 이는 유럽의 독자들을 의식한 행동일 것이다. 하지만 일국의 왕위계승자가 우호적인 감정을 여과없이 드러낸 친필 서한의 존재는 그 자체로 특별하다. 비록 자신의 회고록이 아니더라도 어딘가에 남겨둔다면 종교적 활동의 결실로 소개하기에 더없이 훌륭한 증거가 될 것이다. 더구나 뒤에 살펴보겠지만 아담 샬은 소현세자를 ‘세자’가 아닌 ‘왕’으로 표현하였다. 세자도 아닌 왕이라면 그 가치가 천정부지로 치솟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어디에도 원본은커녕 사본마저 존재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아담 샬의 회고록에 기록된 소현세자의 신분 문제이다. 방금도 지적한 것과 같이 아담 샬은 소현세자를 ‘조선 왕’이라고 묘사하였다. 인조가 심양이나 북경을 방문한 적이 없기 때문에 아담 샬의 기록에서 조선 왕으로 묘사된 인물은 소현세자일 수밖에 없다. 중요한 것은 세자가 왕으로 표기되었다는 사실 그 자체에 있다. 만약 아담 샬이 정말 소현세자를 조선 왕으로 잘못 알았다면, 이는 아담 샬과 소현세자의 교유가 피상적인 수준에서 이루어졌음을 의미한다. 소현세자가 자신을 조선국왕이라고 소개했을 리는 없을 테니까 말이다. 만약 아담 샬이 소현세자가 세자인지 알면서도 왕으로 표기했다면, 이는 자신의 회고록이 과장된 기록임을 자인하는 꼴이 된다. 어느 쪽이든 회고록의 신뢰도에는 치명적일 수밖에 없다.

 

이형익, 사주를 받아 조선의 세자를 암살하다


영화가 종반으로 치달으면서 소현세자는 고통을 호소하였고, 어의 이형익은 맹인 침의 천경수를 대동한 채 치료를 실시한다. 하지만 이형익은 치료를 빌미로 독침을 사용하여 세자를 독살한다. 일개 어의가 세자에게 악감정을 가질 리는 없다. 세자의 독살을 의뢰한 것은 세자의 아버지 인조였다. 맹인 침의는 이형익의 무고를 증명하거나, 혹은 독살의 책임을 대신 뒤집어쓸 보험같은 존재였다. 모든 것이 치밀하게 계획된 완벽한 범죄였다.

[caption id="attachment_9970" align="aligncenter" width="326"]어의 이형익의 등장 (출처 : 네이버 영화)[/caption]

실제 역사 기록을 살펴보더라도 이형익은 소현세자 죽음에 일정한 책임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1645년 4월 23일 소현세자가 발병하였고, 이형익의 침을 맞고 26일 죽었기 때문이다. 또한 인조는 소현세자 죽음 이후 이형익에 대한 처벌을 요구하는 대신들의 요구를 묵살하였고, 세자의 염습에 참여한 한 인물은 소현세자의 시신이 독살된 이의 형상이었음을 증언하였다. 적어도 소현세자 독살에 대한 영화의 묘사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인다.

 

보름, 독살설의 아킬레스건을 감추다


영화를 이끌어가는 맹인 침의 천경수(류준열 분)는 우연히 내의원 근무의 기회를 얻는다. 천경수는 입궐 직전 나이 어린 동생에게 “신입은 배울 일이 많아 보름이 지나야 궐밖에 나올 수 있다”며 보름만 참고 기다리라 이야기한다. 하지만 천경수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는다. 보름이 채 지나기도 전에 소현세자는 독살되었고, 천경수 역시 이 사건에 휘말리기 때문이다.

소현세자가 실제로 한양에 도착한 뒤 사망하기까지는 약 두 달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다시 말해 보름은 영화에서 가상으로 설정한 시간이다. 하지만 영화는 이 ‘보름’이라는 시간 설정에 대해 충분히 설명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보름이라는 시간은 오로지 소현세자 독살설이 가지고 있는 아킬레스건을 숨기기 위해서만 설정된 장치였기 때문이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소현세자가 사망하는 과정을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11월 20일 북경을 떠난 소현세자는 2월 18일 한양에 도착하였다. 세 달 가까운 시간이 소요된 것이다. 보통 조선에서 사신을 파견하면 한양에서 북경까지 5~60일이 걸린다. 이와 비교하면 한 달 이상이 더 걸린 셈이다. 영화에서도 묘사된 것처럼 소현세자의 건강이 온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건강이 악화된 상태에서 한양에 도착한 소현세자는 집중적인 치료를 받는다. 어의들까지 소현세자 치료에 대거 동원되었다. 하지만 소현세자의 증세는 쉽사리 호전되지 않았다. 결국 2월 26일 이형익까지 동원되었다. 침술에 일가견이 있었던 이형익이 투입되면서 세자의 증세는 눈에 띄게 호전되기 시작한다. 3월 14일을 마지막으로 소현세자는 탕약을 먹거나 침을 맞지 않아도 될 정도로 회복하였다. 이형익의 공로가 아닐 수 없다.

4월 21일 소현세자는 갑자기 오한 증세를 보였다. 다행히 증세는 금세 사라졌고 누구도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하지만 이틀 뒤인 23일부터 다시 증세가 악화되기 시작하였고, 앞서 소현세자를 완쾌시켰던 이형익이 재차 투입되었다. 이형익은 앞서와 같은 치료를 진행하였지만 결과는 달랐다. 26일 소현세자가 세상을 떠난 것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소현세자가 이형익에 의해 독살되었다면 한 가지 의문이 남는다. 이형익은 왜 2월 말이 아니라 4월 말을 거사의 시점으로 잡은 것일까? 소현세자는 건강이 악화된 상태로 한양에 도착하였다. 청나라에서 병을 얻어온 데다가 내로라하는 어의들이 달려들어도 회복시키지 못하는 상태였다. 이형익이 투입되어 치료에 실패하더라도 의심할 사람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굳이 소현세자를 독살할 생각이었다면 2월 말을 거사의 시점으로 선택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혹시 인조가 처음에는 소현세자를 독살할 생각이 없었다가 귀국한 세자를 대면한 이후 생각이 바뀐 것은 아닐까? 가능성이 ‘0’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러한 가정에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소현세자가 이형익의 치료에 의해 3월 14일 이후로 탕약을 복용하거나 침을 맞지 않아도 될 정도로 회복되었기 때문이다. 독살이라는 형태로 소현세자를 암살하고자 한다면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소현세자의 건강 악화를 기다려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만약 소현세자가 완전히 건강을 회복해서 치료가 불필요한 상황이 지속된다면 독살 계획은 기약할 수 없는 일이 된다. 인조는 그런 불확실한 가능성에 미래를 걸었을까?

영화에서는 이러한 과정을 생략한 채 조선으로 귀국한 소현세자의 죽음을 보름으로 압축하였다. 이는 우연이 아니다. 건강 악화와 회복, 그리고 재발이라는 역사적 과정을 은폐함으로써 인조와 이형익이 무죄를 주장할 수 있는 여지를 삭제한 것이다.

 

비평을 마무리하며 : 조선의 미래는 오래 지속되었다

영화 《올빼미》는 상업영화이다. 앞서도 이야기한 것처럼 ‘팩션’을 자처하였다. 흥미로운 역사적 소재에 영화적 상상력을 가미하여 결과물을 생산하는 것이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영화 《올빼미》에는 우리네 욕망이 투여되어 있다. 병자호란이라는 치욕적인 경험을 극복하고 부국강병의 조선을 건국하여 근대화를 이룰 수 있었다는 가능성을 발견하고 싶은 현재 대한민국 국민의 욕망 말이다. 문제는 이 욕망이 소현세자 죽음 이후에도 250년 이상을 지속하였던 조선의 미래를 저당잡고 있다는 것에 있다.

소현세자의 죽음이 비극적인 일이었음에는 틀림없지만, 그와 별개로 조선의 역사는 생동감을 잃지 않았다. 우리는 흔히 소현세자를 서양 문물 수용의 상징처럼 인식하고 있지만, 소현세자의 존재와 별개로 서양 문물은 지속적으로 조선사회에 유입되었다. 1602년 마테오 리치가 제작하여 명나라 조정에 진상한 『곤여만국전도』가 조선에 전달되기까지 걸린 시간은 1년에 불과하였다. 1644년 청나라에서 시헌력을 채택한 이후 조선 조정에서 시헌력 수용의 필요성을 논의한 것은 1645년의 일이었으며, 관상감원을 청나라에 파견하기까지는 5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서양의 과학기술만 수용한 것도 아니었다. 천주교 교리를 담은 다양한 서적들이 조선에 유포되어 평생 한 차례도 관직을 역임하지 못하고 안산에 칩거하고 있던 성호 이익에게까지 전달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물론 이익은 천주교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평가하였지만 그의 제자들까지 성호 이익의 뜻을 따른 것은 아니었다. 단 한 명의 성직자도 파견되지 않은 조선 땅에서 자발적인 천주교인이 탄생한 것이다.

조선의 사상계를 주름잡았던 성리학은 흔히 폐쇄적인 학문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것은 근대라는 시대적 전환기에 조금 늦게 문호를 개방한 결과에서 비롯된 인식이다. 더구나 그 책임을 온전히 성리학에 돌리는 것은 부당하다. 많은 성리학자들이 시대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경주해왔고, 그 노력에는 청을 포함한 서양 문물 수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영화 《올빼미》에서 소현세자는 “바꾸지 못하면 조선은 죽을 것”이라며 소리쳤고, 대중은 자연스레 소현세자에게 조선의 미래를 위임하고 있다. 그리고 소현세자의 죽음을 조선의 좌절과 동일시하고 있다. ‘소현세자신드롬’이라고 불러도 어색하지 않은 상황이다. 하지만 소현세자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미래는 지속되었다. 그리고 오래 지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