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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京城)을 말한다: 신문 연재물로 본 일제시기의 ‘경성’⑫] 우리동리의 긴급동의_염복규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BoardLang.text_date 2022.10.11 BoardLang.text_hits 14,38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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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역사랑' 2022년 9월(통권 33호) [경성(京城)을 말한다: 신문 연재물로 본 일제시기의 ‘경성’] 우리동리의 긴급동의<우리동리의 긴급동의>, <<조선일보>>, 1936.4.1.~5.6. 염복규(서울시립대학교) 1936년 4월 1일부로 경성부의 행정구역이 공식 확장되었다. 새롭게 경성부로 편입된 인근 지역은 1개읍, 8개면, 73개리로서 고양군 숭인면, 연희면, 용강면, 은평면, 한지면, 시흥군 영등포읍, 동면, 북면의 전부 혹은 일부였다. <<조선일보>>는 발 빠르게 이 날에 맞추어 새롭게 경성부가 된 읍․면 지역, 원래 경성부 행정구역을 아울러 각 동리를 탐방하고 현안을 제기하는 기사를 한달여에 걸쳐 23회 장기 연재했다. 여러 차례 언급했지만 행정구역의 확장과 뒤이어 시작될 도시 개발에 대한 관심을 엿볼 수 있다. 먼저 각 기사의 소제목과 대상 지역을 일별하면 아래와 같다. 1회(1936.4.1.) 大同一府가 된 이상 電區장벽은 초기형, 전화와 뻐스구역을 철폐하라, 驛區지하도도 焦眉急 (영등포) [caption id="attachment_9861" align="aligncenter" width="556"]그림 1. 경성부 행정구역 확장 최종안 (<<조선일보>>, 1936.1.16.)[/caption] 23회의 연재에서 새롭게 편입된 지역, 요컨대 ‘신경성’이 11회이며, ‘구경성’이 12회이다. 그 때까지의 <<조선일보>> 연재물에 비해 구경성, 즉 경성의 원도심부의 문제점을 더 조명한 연재물이라는 점이 특징이다. 그런 만큼 경성의 신편입구역의 비중은 적은 셈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등포와 청량리 일대는 두 회에 걸쳐 다루었다. 그만큼 중요하게 취급한 지역임을 알 수 있다. 먼저 새롭게 편입한 지역에서 제기된 문제를 정리해보자. 영등포 – 간선도로 공사, 영등포역 지하도 굴착, 전차구역 통일, 전화구역 통일, 수해 방지, 방화시설 확충, 보통학교 증설, 병원 증설 한눈에 알 수 있듯이 도로․교량 공사, 상하수도 설비, 방화시설 확충, 보통학교 증설, 전차구역 통일 등이 공통된 요구사항이다. 그 중 상수도 설비와 방화시설 확충은 대개 같은 요구라고 해도 무방하다. 당시 상수도는 어떤 점에서는 식수의 의미보다 방화수의 의미가 더 강했다. 1, 2회에서 탐방한 영등포에서도 이런 요구사항은 빠짐없이 제기되었다. 영등포읍은 행정구역 확장 결정 때에도 다른 면과 달리 논란이 많았던 지역이다. 경성부는 1935년 봄부터 편입 예상 지역의 정밀 측량을 시작했다. 그리고 8월말에는 총독부에서 공식적으로 해당 읍회․면협의회에 경성부 편입 자문안을 보냈다. 이에 대한 답신안은 대체로 편입에 ‘무조건’ 찬성한다는 천편일률적인 것이었으나 영등포읍회에서는 찬반 논란이 크게 일어났다. 이전부터 공장지대로 ‘발전’하고 있는 영등포가 재정도 허약한 경성부에 편입되어봤자 실익이 없다는 회의적인 의견 때문이었다. 여기에 더해 영등포는 ‘읍’으로서 면과 달리 경성부와 동격인 자치단체이므로 다른 자치단체와 경솔하게 ‘합병’하는 것은 “자치의 정신을 몰각한 것”이라는 주장을 하는 의원도 있었다. 그러나 총독부가 이미 결정한 이상 읍회의 반대가 경성부 편입을 저지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영등포읍회는 최종적으로 선거제도의 개정(차후 경성부회 의석 중 다수를 영등포에 배정해달라는 의미), 간선도로 우선 부설, 교육기관 확충, 소방기구 확충, 위생시설 완비, 구제 시행과 영등포구역소 설치, 영등포역 지하도 개설 등의 조건을 붙혀 찬성 답신안을 작성했다. <우리동리의 긴급동의> 연재물 기사의 내용과 대략 비슷함을 알 수 있다. 기사에서 눈에 띄는 두 가지 독자적인 현안은 전화구역의 통일과 지하도 개설이다. 전화구역 문제는 다른 지역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당시 경성부외는 시외전차요금의 적용을 받아 시내전화보다 요금이 비쌌다. 그런데 이제 영등포도 경성부가 되었으므로 시내전화요금 적용을 해달라는 요구이다. 당시 전화는 공장, 회사, 상점 등에서 주로 사용했으므로 이런 요구가 특별히 현안인 것은 영등포가 그만큼 이미 상공업지대였음을 반증한다. 영등포역 지하도 문제도 처음 철도가 부설되었을 때에 비해 시가지화가 크게 진전되었기 때문에 발생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처음부터 철도는 영등포 일대를 관통하여 부설되었다. 그런데 점차 시가지화가 진전되어 철도 남북 사이의 이동량이 증가하면서 양측을 안전하게 연결하는 지하도 굴착은 영등포의 중요한 현안이 되었던 것이다. [caption id="attachment_9862" align="aligncenter" width="546"]그림 2. 철도(영등포역) 남북일대의 공장, 기타 시설들 (1936, 대경성부대관)[/caption] 다음으로 여러 지역의 공통된 현안 중 하나는 전차구역의 통일이다. 당시 경성 전차는 구역제를 채택하여 1구역은 요금 5전, 2구역은 8전(처음에는 10전)이었다. 여기에서 2구역 적용을 받는 노선은 이른바 ‘교외 3선’, 즉 청량리선, 왕십리선, 마포선이었다. 그런데 2구역 적용의 명분도 ‘부외’라는 것이었기 때문에 이제 경성부에 편입되었으니 구역을 폐지해달라는 요구가 나온 것이다. 사실 교외선 전차구역 통일 문제는 이미 수년 전부터 불거진 것이었다. 1930년대 초 교외선 연선 주민들의 불만에 부딪친 경성전기가 아예 교외선 전차를 폐지하고 이를 버스로 대체하려는 계획을 발표하자 연선 주민을 중심으로 거센 반대운동이 일어난 바 있었다. 이 연재물은 전차구역 통일 요구가 여러 각도에서 제기되었음을 보여준다. ① 이번 편입된 각 읍, 면 중 제일 많은 권솔을 넘겨 주니만큼 부민으로도 제일 많은 수효를 포응하고 있는 지대인데도 전차는 외줄(단선)을 놓고 두 구제라는 장벽을 두어온 데다가 더구나 전차 대수도 겨우 여섯 대를 가지고 운전을 해온다. 마포정까지 가려면 빨라야 30분 늦으면 40분! 50분! 지나간 날에는 시시한 시외 대접을 받아 침묵을 지켜왔다만은 이제는 형세야 되든 못되든 제 앞가림을 해야만 될 당당한 부민으로서의 납세 의무자이다。그런즉 우리의 살림살이꾼인 부당국은 이 악 제도부터 책임지고 철폐시켜주어야만 될 일이다. (4회) ② 8전이나 5전이나 우리들은 한 달에 성문 구경을 몇 번도 하지 않으니까 모르겠습니다만, 문안 학교에 다니는 자식 놈들 때문에 제일 못 견딜 지경입니다. 이 동리 청량정만 하더라도 근 5백호에 2천백여 명 살림살이에 공립보통학교라고는 하나도 없고 겨우 청량학원이란 것이 있을 뿐이니 문안 학교에 가는 아이들이 좀 많습니까, 그런데 무게로도 큰 사람 절반도 못되는 이 아이들에게 겨우 2전 할인하야 6전을 받아내니 그것만 해도 한 달에 3원 5,60전에 달합니다그려. 가난한 살림살이에 어찌 마음대로 보통학교나 보내겠습니까? (8회) ③ 왕십리로 말하면 인구로 보나 元町線에 못하지 않다. 원정선으로 말하면 수년전까지 교외선으로 되어 요금도 교외선요금을 받는 것인데 남촌인 덕택에 철폐했으나, 왕십리만은 끝끝내 괄세를 할 것이 무엇인가 탈선적 행동이다. (10회) ①은 전차구역 통일 요구의 가장 일반적인 형태라고 하겠다. 이제 부외가 아닌 부내가 되었고, 주민도 역시 경성부의 납세자가 되었으니 전차구역을 통일시켜달라는 요구이다. ②는 전차구역 통일 요구와 보통학교 증설 요구가 결합된 모습이다. 청량리 일대에 학교가 부족하여 부내의 학교를 다녀야 하는 학생이 많다는 데에서 요구를 끄집어내고 있다. 이 두 기사에서 공통적으로 짚을 수 있는 점은 전차구역 통일 문제가 가난한 서민층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당시 기준에서 ‘납세자’ 범주에 들어가는 사람은 지역 유력자급일 가능성이 높았다. 또 자녀를 보통학교에 보냈다는 점도 정말 가난한 서민층과는 거리가 있다고 하겠다. 앞서 언급한 1930년대 초 교외선 구역제 철폐 운동도 마포, 청량리, 왕십리 일대 유력자층이 적극적으로 주도했고, 그런 만큼 상당한 지속성을 보인 바 있었다. 마지막 ③은 당시 도시 문제를 둘러싼 여러 요구에서 전형적으로 보이는 민족차별 문제이다. 여기에서 언급한 ‘원정선’이란 ‘용산선’이다. 원래는 원정선도 2구역 적용을 받았으나 용산은 경성부내라는 이유로 구역제가 폐지된 바 있었다. 이는 형식논리상 정당한 것일 수도 있었으나 경성부 외곽 청량리, 왕십리, 마포의 조선인으로서는 “남촌인 덕택에 철폐”된 것으로 이해될 수 있는 문제였다. [caption id="attachment_9863" align="aligncenter" width="540"]그림 3. 1920년대 말 기준 경성의 전차노선, 빨간○이 전차구역 통일 문제가 제기된 교외 3선, 파란○은 용산선, 신용산까지 거리가 교외선보다 짧지 않다는 점을 금방 알 수 있다. 따라서 교외 3선에만 2구역 요금을 적용하는 것은 사실관계를 떠나 자연스럽게 민족차별의 문제로 연결될 수 있었던 것이다. (서울역사박물관, <<서울의 전차>>)[/caption] 다음으로 다른 지역과 구분되는 다소 독특한 문제가 제기된 지역의 사례를 살펴보자. 종래 시흥군 북면 일대는 지역적으론 경성부와 영등포읍과의 중간에 끼여 있었으나 면으로 남아 어떤 관계로도 발전도 지지부진할 뿐 아니라 시설에 있어서는 교육, 교통, 위생, 상수도(上水道) 등 현대적 도시로서의 설비가 도모지 되어있지 못하여 무엇을 먼저 설치해 달라고 요구해야 좋을지를 가늠해볼 수 없는 형편이다. (중략) 북면일대가 종래 경성부와 영등포 읍의 중간에 끼여 있으면서 발전되지 못한 큰 원인은 교통관계이다. 이 지대에는 산이 잇고 언덕이 많은 관계로 부락과 부락을 연락하는 도로시설이 불완전할 뿐더러 자동차도로 같은 것은 전연 업는 형편으로 공기가 좋고 풍치가 훌륭하여 주택지에 적당한 곳이면서도 잘 발전되지 못 하였다. 이 지방을 속히 발전시킬 지름길은 도로를 일신하게 고치고 경성과의 사이에 교통구역 등을 철폐하야 연락을 긴밀히 하여주는 것에 있을 것이다 (3회) 경남에 있는 동빙고정과 한남정의 두 곳의 선장은 경성부의 한 자원 생산처가 된다. 종래에는 이를 한지면 당국에서 관할하여 연 3천 여원씩을 거둬들였다. 이 자원이 금번 경성부로 넘어갔으나 금후에 활기 띤 자원은 전부 경성부가 갖게 된 천연적 보고인 한강의 생명선으로 배장사 하는 사람들은 서쪽 마포강 보다 앞으로는 남쪽 동빙고 포구에 모여 출하를 하게 될 터이니 이 육량세는 흑자의 원천이 될 것이다. 여태껏은 빈한한 한지면에 매였기 때문에 포구로서 선박들의 계류할 장소를 만들지 못하였지만 금후 경성부 직속이 되는 동시에는 선박의 계류처를 수축하고 또 선박 통로를 주로 하는 용인방면 행상들의 선박 편리를 위하여 종래 사공을 쓰지 말고 발동선을 사용하여 신속과 안전책을 도모해야 할 것이다. (11회) “경성부와 영등포읍과의 중간에 끼여 있”는 노량진(3회)의 문제는 “강뚝에서 소화난, 수원지 옆에 식수난, 영등포와 구경성 중간에 끼어서 문화시설은 畵中餠”이라는 제목에서도 잘 드러난다. 기사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이는 노량진 뿐 만 아니라 시흥군 북면 일대의 문제였는데 그간 경성부의 수원지가 있는 노량진은 정작 상수도 설비가 없는 상태였고, 이런 데에서 비롯된 일종의 ‘박탈감’을 엿볼 수 있다. 이른바 ‘京南 일대’(11회)의 현안 묘사는 여전히 수운이 교통의 주요한 일부를 차지하고 있는 당시 상황을 잘 보여준다. 이런 가운데 그간 “빈한한 한지면에 매였기 때문에” 정비하지 못한 포구 시설도 “경성부 직속”이 됨으로써 정비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보인다. 영등포읍과 달리 다른 면은 경성부 편입에 적극 찬성한 실질적인 속내도 엿볼 수 있다. [caption id="attachment_9864" align="aligncenter" width="542"]그림 4. 노량진 수원지 전경, 1910년 준공한 노량진 정수장은 경성부 인구 증가에 따라 세 차례(1919~22, 1929~33, 1936~45)에 걸쳐 증설되었다. 그리하여 1920년대 말 현재 1일 7,800㎡의 급수량 처리가 가능했다. (서울시 상수도사업본부, <<사진으로 보는 서울상수도백년사>>)[/caption] [caption id="attachment_9865" align="aligncenter" width="554"]그림 5. 11회 기사 속 동빙고 도선장 전경[/caption] 다음으로 12회부터 탐방한 ‘구경성’, 즉 경성 도심부의 현안은 대개 이른바 ‘혐오시설’의 이전 문제와 하천 복개 문제가 대종을 이룬다. 앞의 문제부터 한, 두 가지 사례를 살펴보자. 옥인정에 잇는 順化院입니다. 전염병 환자라고는 모조리 시내 시외를 터놓고 이곳으로 몰아오게 되니 이러한 수용처가 있어서 전염병이 일반시민에게 더 퍼져 가지 않는 것은 조흔일 이겠지만 그러타고 해서 우리 동리에 이런 설비가 놓여있는 것이 동네주민에게 해독을 아니 끼치고 있어야 하지요. 전염병 균이라는 균은 이곳에 다 모이니 어디 균이 순화원 담 속에만 들어 있습니까. 공기에 섞여 날아 나오는 균이 그 얼마이겠습니까. 사실 밖으로 나오는 균이 적다고 한다 치더라도 어디 우리들 동민의 생각에 그렇게 먹혀져야하지요. 환자를 실어가는 자동차와 환자의 가족이며 면회를 하려오고 가는 사람들의 타고 다니는 자동차가 끊일 새 없어 그리하여 이는 먼지가 또 오죽합니까. 그 먼지 속에는 전염병균이 섞여서 있거니 꼭 생각됩니다. (중략) 우리 주민들은 하루바삐 이 순화원을 외떨어진 시외로 이전해주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요구하여야겠습니다. (12회) 이 감영앞! 모화관! 악박골!하는 세 가지 지명을 우리는 들으며, 우리 자신도 모르게 웬일인지? 불쾌하고도 섬뜩한 느낌을 주는 것이다. 그것은 세상사람들이 농담거리로 붙이는 소위 ‘현저정 101번지’ 즉, 서대문형무소가 넓으나 넓은 지대를 온통 차지하다시피하고 앉아서 뭇사람의 고개를 부지중 돌리게 하기 때문이다. “모처럼 하나 생길 뻔 한 ‘현저동공립보통학교’도 이것 때문에 태산준령인 무악재 밖으로 쫓겨나가고 말았지! 재산이나 좀 있는 사람이 와서 살게 되면 이쪽에 사는 우리 세민층들의 공과부담이 줄어들겠지만 이나마 그 괴물 때문에 꺼려서 모여들지 않지…….”하는 것은 이쪽 주민들이 열이면 열이 입을 모아 한결같이 한탄하고 원망하는 소리다. (15회) 순화원은 처음에 1911년 경성부와 경성거류민단이 연합하여 설립한 전염병환자 격리병원으로서 100명의 환자를 수용할 수 있었다. 1920년에는 500명 수용 규모로 증축되었다. 위 기사에서 순화원은 전형적인 혐오시설로 묘사되고 있다. 전염병에 대한 다소 ‘비과학적인’ 공포감도 잘 보인다. 그만큼 순화원 이전에 대한 주민의 요구가 컸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당대 뿐 아니라 현재까지도 이런 문제는 제로섬 게임에 가까움을 쉽게 알 수 있다. 전염병 격리병원은 어딘가에는 분명 있어야 하는 시설이기 때문이다. [caption id="attachment_9866" align="aligncenter" width="309"]그림 6. 옥인동 순화원의 위치(경성부관내지도, 1927)[/caption] 서대문형무소 이전 요구도 비슷한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1908년 경성감옥이 처음 건립되었을 때 현저동은 말 그대로 경성부외의 궁벽한 곳이었다고 하겠으나 언제까지 그렇게 남아있지는 않았다. 따라서 이른바 ‘주민의 교양’ 문제, ‘아동 교육’ 문제 등을 명분으로 형무소 이전 요구는 지속적으로 일어났다. 위 기사에 따르면 이것도 보통학교 증설 문제와 연관된 점이 흥미롭다. 1935년 현저동보통학교가 설립되었다. 원래 학교 예정지는 현저동 3-1번지로서 예정지의 1/3 정도가 형무소에 속한 토지였다. 따라서 경성부와 형무소는 보통학교를 설립하는 대신 홍제내리 일대의 토지를 형무소에 대토할 협의를 진행했던듯 한데 이 것이 원활하게 합의되지 않으면서 결국 학교 자체가 홍제내리로 위치를 변경하여 설립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新說될 峴底公普 基址問題로 實現難>, <<동아일보>>, 1935.11.1.) 마지막으로 하천 복개 문제를 살펴보자. ① 장안의 더러운 물이라는 것은 다 모여드는 이 淸溪川 아니 濁溪川 위에 암거를 덮어주시오! 서울 시내의 물은 북악산과 인왕산과 上南山 세 곳에서 흘러내리는데 이 세 곳에서 흐르는 도랑 물줄기가 한 집 두 집씩 하수도 더러운 물이 되어 결국 모아드는데 라고는 이 청계천이 아닙니까. 정말 자기가 겪어보아야 쓰라린 것 아픈 것 안다는 듯이 이 청계천 연안에 사는 사람치고는 이 시내의 썩은 물에서 나는 코를 찌르는 무섭게 더러운 냄새에 몸서리를 안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13회) ② 義州通 1,2정목과 미근정, 합정정, 중림정, 화천정 쪽으로 훌터 나려가면서 그쪽 주민들의 불평을 들어보자! 지주통 전매국 엽흐로부터 소위 옛날 일흠으로 헌다리목 쪽으로 나려가면서 길게 뱀형상을 이루고 잇는 개울을 무더다고! 이 개울에서 대경성의 자랑거리인 경성역까지의 거리가 얼마인지 아느냐? 업드러지면 코 다을 만한 지척에 이런 불결한 수채개울을 덥지 안고 내바려둔다는 것은 큰 수치다. (16회) ①은 기사에 명기되어 있듯이 청계천 복개 요구이다. 그리고 ②는 기사에는 하천명이 명기되어 있지 않으나 만초천 복개 요구를 담고 있다. “옛날 일흠으로 헌다리목”이란 현재의 서소문공원 북쪽에 있었던 만초천 圯橋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만초천은 무악재에서 발원하여 서대문사거리, 서울역, 서부역, 청파로, 원효로를 따라 원효대교 지점에서 한강으로 흘러들어가는 물줄기이다. 일제시기에는 旭川이라고 불렸다. 두 기사에서 당시 경성의 도시 하천이 어떤 이미지였는지 잘 알 수 있다. 한 마디로 위생 악화의 주범으로 취급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어느 정도 사실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하천 관리를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청계천이나 만초천은 수인성 전염병의 진원지가 되었고, 청계천 복개는 이미 1920년대부터 경성부협의회의 단골 논란거리였다. 나아가 예산 문제 등으로 청계천 복개를 미루고 있는 경성부는 늘 남/북촌 차별, 즉 ‘민족차별’을 지렛대로 한 비판을 받고 있었다. 결국 청계천은 1930년대 후반 경성시가지계획 도로 공사가 개시되면서 일부 복개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주지하듯이 복개 공사의 진척은 매우 더뎠고 1960년대에 가서야 완공되었다. 만초천 복개도 비슷한 시점인 1967년 완공되었다. 오늘날 복개 하천의 ‘복원’이 친환경, 생태 등의 시대정신을 담고 있다면 100년 전에는 하천 ‘복개’가 안전, 위생의 시대정신을 담고 있었다고도 볼 수 있다. 그에 대한 평가에 앞서 그야말로 ‘역사적 이해’가 선행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caption id="attachment_9867" align="aligncenter" width="540"] 그림 7. 용산 미군기지에 남아있는 만초천의 흔적 (2018년 촬영) 아이러니하게 만초천 중 복개 공사가 불가능했던 용산 미군기지 내부의 하천은 지금까지 흔적을 남기고 있다. 미군기지 반환과 개방의 시대를 맞아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지점 중 하나는 그곳이 수십년간 ‘시간이 멈춘 공간’이 됨에 따라 자연스럽게 남아있게 된 ‘개발 시대 이전’ 서울의 흔적이라고 할 것이다.[/caption] 참고문헌 김제정, <일제 식민지기 경성부 교외 전차 문제와 지역 운동>, <<서울학연구>> 29, 2007. 김하나, <<근대 서울 공업지역 영등포의 도시 성격 변화와 공간 구성 특징>>,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3. 백선례, <1919.20년 식민지 조선의 콜레라 방역활동>, <<사학연구>> 101, 2011. 염복규, <<서울의 기원 경성의 탄생>>, 이데아, 2016. 이상배, <<서울의 하천>>,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2000. (연재를 마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