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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책을 말한다] 세상에서 가장 짧은 한국사_김재원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BoardLang.text_date 2022.10.11 BoardLang.text_hits 13,535
웹진 '역사랑' 2022년 9월(통권 33호)

[나의 책을 말한다] 

 

세상에서 가장 짧은 한국사


(2022, 빅피시)


 

김재원(현대사분과)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을 주셨습니까?’

단언컨대 최근 받은 연락 중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연락을 받았다. 한국역사연구회 미디어출판 위원장의 연락이다. 분과발표나 토론도 아니고, 내 책을 소개하라니. 마치 양손에 마이크를 쥐여주고 청테이프로 칭칭 휘어 감은 다음 교단에 올라 연구자들 앞에서 고해성사를 보라고 내모는 기분이었다.
누군가에게 자랑할만한 연구성과도 아니고, 그렇다고 나만의 독창적인 시각이 있는 책도 아니다. 한마디로 누군가(아마 이 글을 읽는 대부분)에겐 ‘별거 아닌’ 책이라는 말이다. 책 내용에는 큰 관심도 없을 것이며, 읽어보지도, 앞으로 읽을 계획도 없는 사람들 앞에서 ‘제 책은 이만큼 부족합니다. 그래도 욕만 하지 말아주세요’라고 읍소하는 기분이랄까?
비슷한 감정이 들었던 적이 있다. 아니 어쩌면 책을 쓰는 모든 시간이었다. 정작 직접 들어본 적은 없는 ‘메아리’가 온 정신을 휘감았다. ‘네가 뭔데 통사 책을 써?’, ‘그 시간에 박사논문이나 마무리해’ ‘어떻게 역사로 장사를 해?’ ‘대중서는 대가들이나 쓰는 거야’ 따위의 메아리다. 메아리가 머릿속을 지배한 몇 개월을 지나 출간을 기다리는 과정에서는 악몽도 꿨다.
그런데 사실, 위에서 이야기한 모든 번뇌와 고민, 두려움과 망설임이 사실 ‘공공역사’로의 길을 가로막는 시작이자 끝이다. (역사) 연구자 집단 특유의 보수성과 (강요되는) 겸양, 시대를 거스르는 혹은 특정 시대에서 멈춰버린 ‘반(反)자본주의적’(그러면서도 본인 스스로는 가장 자본주의적인) 시선 따위의 것들 말이다. 기분 나빠할 필요 없다. 나를 향한 반성이다.
나름 반성의 시간을 끝내고, 나에게 끊임없이 질문하기 시작했다. ‘난 왜 이 책을 썼는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이었다. 대답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먹고 살기 위해서’. 그리고는 나를 바라보며 돈 많이 벌어서 맛있는 거 사달라며 졸라대는 5살 난 딸을 바라봤다. 그렇게 조금은 덤덤해졌다.

 

그래서 책을 왜 썼냐 묻는다면

이 글을 부탁한 미디어출판 위원장은 여기서 책도 홍보할 수 있다며 글을 청탁했지만, 어차피 이 웹진을 보는 사람 중 내 책을 사거나, 진지하게 읽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건 나도 알고, 바로 ‘당신’도 알고 있다. 사실 그건 당연하다. 이 책은 연구자를 위한 책도, 역사에 조예가 깊은 ‘덕후’들을 위한 책도 아니기 때문이다. 읽어봐야 시간 낭비다.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책에도 책마다 각자의 기능과 역할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말이다. ‘그걸 누가 몰라’라고 말하겠지만, 사실 꽤 오랜 시간 역사학계는 그걸 인정하는 척하면서 애써 외면해왔다. 아니, 관심을 가질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고 하면 스스로 인정하기가 조금 수월할까? 논문 쓰기도 버거운 시간이었으니 말이다.
한국역사연구회의 창립취지문을 보면 흥미로운 구절이 있다. “한국사의 공동연구와 그 성과의 대중화를 위해 연구자들의 역량을 더욱 결집”한다는 표현이다. 역사문제연구소의 소개문에도 비슷한 표현이 존재한다, “우리 역사의 여러 문제들을 공동연구하고 그 성과를 일반에 보급”한다는 말이다.
멋지지 아니한가. 연구자 집단에서 본인들의 존재 이유를 학문의 대중화(혹은 보급)하겠다니 말이다. 30년도 전에 쓴 글이라서 의미가 퇴색되었을까? 큰 맥락에서 각 연구집단의 지향성이 달라지지 않았다면 그간(적어도 최근 20년은) 연구자들은 반쪽으로만 존재했다고 봐도 된다. 당신이 인정하지 않아도, 사실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결과가 그렇다. 연구성과의 대중화를 위해 연구자들은 딱히 “결집”했던 적도 없거니와 당연하게도 일반에 “보급”되지도 않았다. (물론 학회 차원에서 학술지라는 이름으로 훌륭한 논문은 계속 쌓아 왔겠지만, 여기서 그걸 논하자는 건 아니다)
하지만 비슷한 문제의식으로 연구자 개개인이 직접 공공역사의 현장에 뛰어들었던 적은 있다. 아니, 많다. 지역에서 활동하는 연구자도 여럿 있고, 박물관과 기념관에서 대중과 직접 만나고 있는 연구자도 있다. 일일이 나열하지 않더라도, 대중과 소통하며 학계의 연구를 ‘유통’시켰던 연구자도 있었다. 이 책은 바로 그런 다양한 노력의 연장이다. 이 책의 의미는 딱 그뿐이다.
그런데 거기에 하나 더, 이전과는 다른 무엇인가가 있다면 그건 ‘돈’이다. 그렇다. 이 책은 돈을 벌기 위해 쓴 책이다. 제대로 팔아보려고 쓴 책이란 말이다. 그러다 보니 마케팅에 신경을 많이 썼고, 홍보를 위해 스스로를 적극적으로 팔았다. 왜 자꾸 “돈”, “돈” 거리냐고? 돈은 욕심 이전에 생존이기 때문이다.
입 아프게 이야기해봐야 무엇하겠냐만, 역사학은 망해가고 있다. 학문의 수준이 떨어져서 망하거나, 공부하겠다는 사람이 없어서 망한 것이 아니다. 단순하게 ‘굶어 죽어’가고 있다. ‘교수 자리’ 하나만을 위해 달려가던 수백, 수천의 연구자들에게 대학은 바로 그 ‘자리’를 줄여가고 있다. 현실이 이러함에도 여전히 연구자 대부분은 ‘그놈의 교수 자리’에 오르지 못하면 마치 패배자가 된 것 마냥 ‘삶의 의욕’을 잃는다. 마치 교수가 되기 위해서‘만’ 공부한 것처럼.
이 책과 나의 활동은 교수 자리에 집착하지 않아도 충분히 먹고 살 수 있음을 증명하기 위함이다. 다른 것도 아닌 당신이 공부한 바로 그 역사로 말이다. 대중적인 집필 활동과 (친)자본주의적 활동이 각자의 연구 활동에 더 큰 자양분이 될 수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서다. 등재지에 논문 한 편 더 실어서 논문 편수 늘리기 위해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시간에 더 가치있는 일을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글을 썼다.
‘네가 말하는 가치가 뭔데?’라고 묻는다면 그건 ‘역사학의 유통’이다. 그러니까 역사학을 적극적으로 판매하자는 거다, ‘어찌 감히 역사를 팔아?’라고 생각할 필요는 전혀 없다. 여전히 ‘공공역사’(창립취지문에 의하면 학문의 대중화)라는 것을 학계(혹은 연구자)의 중요한 화두로 생각한다면 말이다. “대중화”와 “보급”이라는 말을 “유통”으로 바꿨을 뿐이다. 나에겐 그것이 역사학이 살아남을 유일한 방법이라는 강한 믿음이 있다.

 

할 수 있는 일이 많이 남아 있음에

이 책, 그러니까 연구서도 아니고, 전문서적도 아닌, ‘별거 아닌’ 대중서 한 권을 연구자들이 모여 있는 공간에서 소개하라고 부탁을 한 건 나름의 의도가 있었을 거다. 그 의도가 만약 공공역사를 바라보는, 혹은 실천하려는 연구자 집단의 ‘변화’(그것이 어떤 방향에서건)에 대한 욕구라고 한다면 앞으로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많을 것 같다.
사실 죽어가는 학계와는 다르게 밖은 ‘역사학 열풍’이다. 노골적으로 인문학(역사학)은 상품화되어 가고 있고, 정말 잘 팔리고 있다. TV 속에는 역사학으로 예능을 만들고, 그 방송을 발판 삼아 지식소매상들은 인지도를 쌓고 자신의 브랜드를 만들어 나간다. 그렇게 유튜브로 진출하고, 구독자를 늘려나간다. 그 구독자를 바탕으로 출판을 한다.
역사가 시중에서 팔려나가는 전형적인 구조다. 출판사 입장에서도 “땡큐”가 아닌가. 2~3천 부만 팔려도 ‘대박’ 소리를 듣던 역사 쪽 출판시장에서는 이보다 더 큰 기회는 없다. 그렇게 출판사는 지식소매상은 ‘저자’라는 타이틀을 안고 전문가로 포장된다. 그렇게 만들어진 ‘전문가’는 다시 본인의 책을 가지고 다시 방송국을 찾아간다.
완벽한 시스템이 아닌가. 이제 이 완벽한 시스템에 역사학계가 흠집을 낼 차례다. 남들보다 역사학을 더 공부했다는 어쭙잖은 ‘전문성’ 때문이 아니다. 이미 완벽히 구조화된 ‘유통구조’에 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못 낄 건 또 뭐야?’라고 물어본다면 단순하게 답할 수 있다. TV 속 예능은, 유튜브 시청자들은 당신과 같은 역사연구자를 ‘굳이’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끊임없이 이 구조에 흠집을 내고, 틈을 만들어야 한다.
이 책과 나의 활동은 그 틈을 만드는 일이다. 연구자 중 누군가는 지식의 새로운 유통을 주도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모든 연구자가 본연의 필드를 벗어나 지식을 판매하는 ‘노오력’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는 절대 아니다. 교수가 되고 싶거든, 그 길을 가면 된다. 난 그저 새로운 가능성을 열고 싶은 것뿐이다. 그리고 그 가능성을 키워 새로운 생태계를 열고 싶다. 연구의 생산 주체가 유통과정에서 돈을 버는 건강한 생태계랄까?
이제는 이런 하나 마나 한 이야기 말고 정말 ‘할 수 있는 일’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다. 그리고 함께 이야기할 많은 연구자가 있었으면 한다. 나에게 이 글을 부탁한 누군가도 바로 그 ‘이야기’를 기대하고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바로 그 기대감이 이 글을 쓰는 유일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