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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비평] 대중 미디어 속 ‘태종 이방원’ 돌아보기_임동현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BoardLang.text_date 2022.09.05 BoardLang.text_hits 13,879
웹진 '역사랑' 2022년 9월(통권 33호)

[미디어 비평] 

 

대중 미디어 속 ‘태종 이방원’ 돌아보기


 

임동현(근대사분과)


 

2021년 12월에 시작한 KBS 사극 <태종 이방원>이 지난 5월에 막을 내렸다. <태종 이방원>을 기획한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사람들은 태종 이방원을 또 다루는 사실을 지적하며 지겨워했다. 하지만 방송이 시작되자 <태종 이방원>은 호평을 받으며 성공리에 방송을 마쳤다. ‘태종 이방원’은 ‘또방원’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사극 속 등장인물로 자주 다뤄졌다. 태종 이방원이 등장한 드라마는 1967년 <이성계>부터 2021년 <태종 이방원>까지 총 19편이나 된다.

[caption id="attachment_9779" align="aligncenter" width="1130"]드라마 <태종이방원> 속의 이방원( 출처: KBS 공식홈페이지)[/caption]

‘태종 이방원’이 등장하는 드라마가 이렇게 많은 이유는 ‘태종 이방원’이 대중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사의 수많은 인물 중에서 ‘태종 이방원’이 이토록 사랑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대중들이 ‘태종 이방원’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이방원을 중심인물로 다룬 대표적인 사극 <용의 눈물>, <정도전>, <육룡이 나르샤> 세 편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완성형의 정치인, ‘태종 이방원’

드라마 <용의 눈물>은 1996년 11월부터 1998년 5월까지 약 3년간 방송되었다. <용의 눈물>은 조선건국기 왕권 확립 과정에서 4명의 임금들이 감내야했던 인간적 번뇌와 권모술수와 욕망 속에서 개인이 겪는 비극 등을 통해 역사의 이면에 숨은 행적을 반추하겠다는 기획 의도로 제작되었다.

[caption id="attachment_9776" align="aligncenter" width="1131"]드라마 <용의눈물> 속의 이방원( 출처: 유튜브 채널 'KBS Drama Classic')[/caption]

<용의 눈물> 속 이방원(유동근 분)은 완성형의 정치인으로 묘사된다. 극 중에서 이방원은 권력투쟁을 벌이면서도 선을 넘지 않았고, 대의를 위해서는 악업도 스스로 감내하는 지도자로 묘사되었다. 태종 이방원은 욕망에 충실한 인물이었지만 그 욕망은 공적인 가치를 위한 것으로 묘사되었다. 결코 탐욕스러운 인물로 묘사되지는 않았다. 이러한 모습은 마지막회의 기우제 장면에서 명확히 나타난다.

이방원은 기우제를 지내면서 형제를 죽인 일, 아버지 이성계에게 반역한 일, 공신과 외척을 숙청한 일 등을 “씻을 길 없는 많은 죄”로 인정한다. 하지만 그것이 “나라를 지키고” “왕실의 걸림돌을 치우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말한다. 모든 죄는 자신에게 있으니 자신에게 죄를 묻고 비를 내려달라고 기원한다. “이 몸이 뿌리고 흘린 피를 헛되이 하게 하지 마시옵소서. 수 없이 죽어간 저들의 원성과 절규를 헛되이 하게 하지 마시옵소서”라며 그들의 희생이 나라를 위한 것이었음을 항변한다. 결국 하늘에서 비가 내리고 태종은 세종에게 성군이 되라고 당부하며 세종의 품에서 사망한다.

기우제 장면은 <용의 눈물> 속 이방원의 성격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여말선초, 국망의 상황에서 새로운 국가 건설이라는 시대적 과제를 위하여 스스로 모든 악업을 떠안았으며 그 죄를 당당히 맞이하는 정치 지도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특히 그가 세종에게 성군이 되라고 하는 말은 태종의 모든 악업이 결국은 세종을 위한 것이었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한국사 최고의 성군으로 평가받는 세종의 존재가 거꾸로 태종의 정치적 행동을 정당화해주는 극적 장치로 활용된 것이다.

<용의 눈물>이 제시한 강력하고 이상적인 정치가의 모습으로서 ‘태종 이방원’은 국민들로부터 최고 시청률 49%라는 형태로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당대에도 <용의 눈물>에 대한 비판적인 목소리가 있었다. 「용들의 눈물인가 핏물인가」(한겨레, 1998.05.30.) 기사에서는 드라마 <용의 눈물>이 ‘피의 독재자’를 긍정적으로 조명하고 있고 그 결과 ‘민주적 지도자’ 상이 실종되었다고 비판했다. 기사에서 한영우 서울대 교수는 태종이 국가 체제를 확립하는 등 역사적인 업적이 크지만 그 수단과 방법이 정도를 벗어난 것도 사실이라며 공영방송의 역사 드라마가 세종, 성종 등 문치의 태평성대를 외면하고 피의 시대 등 자극적인 소재를 고르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했다. 최성균 민음사 기획의원은 최근 일어나고 있는 박정희 정권 재평가 바람과 태종 미화가 무관하지 않다며 강력한 권위주의적 지도자에 대한 미화보다 민주적 지도자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용의 눈물>은 ‘태종 이방원’에 대한 긍정적인 이미지를 대중적으로 확산시키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그렇다면 그 이후 작품에서는 ‘태종 이방원’을 어떻게 묘사했는지 차례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정치가 아닌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다.

2014년에 방영된 드라마 <정도전>은 정치에 대한 불신을 해소하고 진짜 정치가를 제시하고자 한다는 기획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여기서 말하는 진짜 정치가는 정도전이었다. 이방원(안재모 분)은 ‘정치’보다는 ‘힘’을 통한 문제 해결을 선호하는 인물로 그려져 드라마의 주제와 대척점에 서 있는 인물로 그려졌다.

[caption id="attachment_9777" align="aligncenter" width="1130"]드라마 <정도전> 속의 이방원( 출처: KBS 공식홈페이지)[/caption]

이방원은 명분이나 절차를 통해서 정당성을 확보하여 역성혁명을 달성하려는 정도전과 달리 먼저 일을 저지르고 힘으로 누르면 정당성은 따라 온다는 입장이었다. 명분 부족을 지적하는 조준에게 “명분은 만들면 되는 것 아닙니까”라고 말하는 모습이나 정몽주에게 자신은 정도전과 다르다고 하면서 자신은 문제 해결을 위해선 단칼에 잘라버린다는 협박을 하는 모습 등이 이러한 입장을 보여준다.

정치가 아닌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던 이방원은 결국 ‘칼’로 왕이 된다. 정도전과 이방석을 죽이고 “정적의 선혈이 베인 칼”을 들고 이성계의 침전으로 들어간 이방원은 이성계에게 “용상을 차지할 힘을 가진 자가 임금의 재목”이고, “용상에 앉는 자가 임금”이라고 일갈한다. 이처럼 <정도전>에서 이방원은 현실정치가 보여주는 폭력적이고 부정적인 모습을 상징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악을 방벌하겠다는 신념의 실현

2015년에 방영되었던 <육룡이 나르샤>는 전작 <뿌리 깊은 나무>의 프리퀄(Prequel)로 제작된 퓨전사극이다. <육룡이 나르샤> 속 이방원(유아인 분)은 선(善)한 자가 아니라 악을 벌하는 정의(正義)롭고자 하는 자로 묘사된다. 이방원은 선은 악까지 품어내지만 자신은 악을 방벌(放伐)할 것이기 때문에 정의로운 자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육룡이 나르샤> 속 이방원은 선한 자가 아니다. 그는 자신이 믿는 정의를 위해서는 살인마저도 불사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정의를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이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caption id="attachment_9778" align="aligncenter" width="1130"]드라마 <육룡이 나르샤> 속의 이방원( 출처: SBS 공식홈페이지)[/caption]

조선 건국과정에서 이방원의 정의는 고려의 멸망과 백성들의 ‘생생지락(生生至樂)’에 있었다. 이를 위해서 이방원은 이리 저리 뛰어다니면서 좌충우돌하며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바를 실행에 옮긴다. 아버지와 정도전을 속이기도 했고, 독단적으로 정몽주를 죽이기도 했다. 그는 자신이 옳다고 믿으면 끝까지 실행에 옮겼다. 이러한 이방원의 성격은 두문동 유생을 끌어내기 위해 두문동에 불을 지르는 장면에서 분명히 나타난다.

이방원은 두문동에 불을 지르라고 명령하며 “똥밭에 넘어졌으니 똥밭을 짚어야 일어나지 않겠냐”라고 하면서 속으로 ‘전 말입니다. 전 죽었다 깨어나도 제가 맞는 것 같거든요. 전 아마 이런 식으로 제자리를 찾겠지요.’라고 말한다. 이처럼 <육룡이 나르샤>에서 이방원은 자신의 신념만이 옳다고 믿으며 이를 끝내 행동으로 옮기는 독선적인 인물로 묘사된다.

 

민주주의 사회의 문제는 단칼에 해결되지 않는다.

<용의 눈물>과 달리 <정도전>과 <육룡이 나르샤>에서 ‘태종 이방원’은 완성형의 정치인이 아니다. <정도전>에서는 힘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권위주의적 지도자의 면모가 강했으며, <육룡이 나르샤>에서는 자신의 신념만을 고집하는 독선적인 인물로 묘사되었다. 2010년 이후 ‘태종 이방원’은 더 현실적으로 변화했으며, 분명한 단점이 있는 인물로 그려졌다. 그러나 완벽한 정치가의 모습이 아닌 불완전한 인간적인 모습은 오히려 대중들이 이방원의 행동을 이해하게 해주었다. 자신의 공로를 알아주지 않는 아버지에 대한 원망, 스승으로 묘사되는 정도전에 대한 배신감 등 이방원이 드라마 속에서 보여준 인간적인 모습은 대중들이 태종 이방원에게 공감하게 만들었다.

또한 <용의 눈물>에서부터 <정도전>, <육룡이 나르샤>까지 관통하여 공통적으로 보여준 이방원의 ‘단호한 행동력’ 역시 대중들이 이방원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주요한 요인이다. 이방원은 정치적으로 위기에 몰렸던 이성계와 정도전을 구하기 위해 누구도 하지 않았던 정몽주 암살을 실행했다. 건국 과정의 공로에도 불구하고 세자 자리에서 밀려나자 반란을 일으켜 정도전과 세자를 죽이고 권력을 차지했다. 마지막으로 외척과 공신들마저도 왕권에 위협이 된다는 이유만으로 제거하였다. 복잡하고 어지러운 정치적 현안을 이방원은 단호한 행동력으로 해결하였다. 단호한 행동력은 무력을 통한 문제 해결을 의미했다.

드라마 <정도전>과 <육룡이 나르샤>에서는 이러한 문제 해결 방식이 옳지 못한 것임을 전제하고 있다. <정도전>에서 이방원에서는 정치의 대척점에 서있는 부정적인 인물이었고, <육룡이 나르샤>에서 이방원의 행동은 선(善)하지 못한 것으로 그려지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대중들은 여전히 태종 이방원의 ‘단호한 행동력’을 좋아한다. 앞서 설명했듯이 세종의 출현이라는 결과론적인 해석도 작용하겠지만, 무엇보다 복잡한 정치 문제를 단칼에 해결하는 이방원의 파격적인 행보가 현실에 지친 우리에게 시원한 ‘사이다’가 되어 강력한 카타르시스를 주기 때문이다.

‘태종 이방원’은 각자의 정치적 입장에서 시원하게 단칼에 사회 문제를 해결해 줄 지도자로 매번 소환되고 있다. 하지만 오늘날 대한민국이 가지고 있는 사회 문제는 ‘정적의 피가 뭍은 칼’이나 ‘두문동에 지른 불’로 단칼에 해결되지 않는다.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 대화나 타협 없이 강력한 힘을 바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태도는 오히려 문제를 더 심화시킬 뿐이다. 다음에 보게 될 TV 사극 속 지도자는 단칼에 문제를 해결하는 ‘단호한 행동력’의 인물이 아니라 조금은 느리지만 묵묵히 대화와 타협의 정치를 실천하는 인물이기를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