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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京城)을 말한다: 신문 연재물로 본 일제시기의 ‘경성’⑪] 서울풍경, 경성 신명승 순방_염복규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BoardLang.text_date 2022.08.07 BoardLang.text_hits 21,46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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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역사랑' 2022년 8월(통권 32호) [경성(京城)을 말한다: 신문 연재물로 본 일제시기의 ‘경성’] 서울풍경, 경성 신명승 순방<서울풍경>, <<동아일보>>, 1935.6.25.~7.27. 염복규(서울시립대학교) 여러 차례 언급했지만, 1936년 경성부 행정구역 확장과 도시계획의 개시를 앞두고 <<조선일보>>는 이 문제에 직간접적 관심을 보이는 연재물을 여러 차례 게재한데 반해 <<동아일보>>에서는 이런 류의 기사를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이 무렵 <<동아일보>>에도 경성을 소재로 한 연재물이 게재되었다. 그렇다면 <<동아일보>> 연재물의 관심을 무엇이었을까? 다시 말해서 <<동아일보>>는 1930년대 중반 ‘대경성’으로 ‘도약’을 앞둔 경성의 모습을 어떻게 재현했을까? 1935, 36년 <<동아일보>>에 연재된 <서울풍경>과 <경성 신명승 순방>에서 이 점을 알아보자. 먼저 <서울풍경>이다. 이 연재물만을 집중 분석한 선행 연구가 있으므로(성효진, <1930년대 중반 경성의 초상: 1935년 동아일보에 연재된 서울풍경 연구>, <<미술사와 시각문화>> 26, 2020.) 여기에서는 몇몇 포인트만 소개하기로 한다. 1935년 6~7월 15회 연재한 연재물 1회의 부제는 <東을 바라봄>이다. 동아일보사 옥상에서 동쪽을 바라본 풍경이다. <<동아일보>>는 이미 1926년 12월에도 신사옥 이전을 기념하여 <옥상에서 바라본 경성의 팔방>이라는 연재물을 게재한 바 있었다. 광화문 네거리 한복판에 위치한 사옥의 장소적 특징을 살리고 존재감을 드러내고자 함을 알 수 있다. [caption id="attachment_9726" align="aligncenter" width="413"]그림 1. <서울風景 其一 東을 바라봄>, <<동아일보>>, 1935.6.25.[/caption] 고층 건물과 함께 한옥이 드문 드문 보이는 풍경을 담은 삽화에 “서울은 鮮美한 風光, 明朗한 하늘로 畵人의 귀염을 받는 곳, 스켓치뿍을 들고 거리로 나서며 우선 東을 바라보고 한 장”이라는 간략한 설명이 붙어 있다. 그림이 주이며 설명은 덧붙히는 메모 정도이다. 그럼으로 이 연재에서는 삽화가 중요함을 알 수 있다. 그린 이는 李馬銅이다. 이마동(1905~1981)은 충남 아산 출신으로 휘문고보에서 춘곡 고희동에게 그림 지도를 받았다. 이후 프랑스 유학을 거쳐 1927~32년 도쿄미술학교 서양화과에서 수학했다. 조선으로 돌아와서는 동아일보사 미술기자, 보성중학교 미술교사로 근무했으며, 1962~71년 홍익대학교 미대 교수, 학장 등을 지냈다. 주로 사실적 자연주의에 충실한 풍경화를 즐겨 그렸다고 한다. 4회까지는 이어서 남, 서, 북을 바라봄이다. 비슷한 풍의 스케치인데 3회 <西를 바라봄>에서는 “올망졸망한 청산의 머리 우에 한여름의 강한 광선이 거침없이 복사할 때, 멀리 측후소의 백탑이 뚜렷하다”고 했다. 동아일보사에서 멀리 서쪽으로 보이는 측후소란 1932년 건립된 경성측후소를 말한다. 흰 외관에 원통형 메스를 포함한 기하학적 모더니즘 건축의 특징을 보인다고 한다. 당시 경성 시가지에서 흔히 보이는 1910~20년대 건물과도 꽤 달라보이는 건물인 셈이다. 오랫 동안 서울기상관측소였으며, 현재는 국립기상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caption id="attachment_9727" align="aligncenter" width="526"]그림 2. <서울風景 其三 西를 바라봄>, <<동아일보>>, 1935.6.28., 종로구 송월동의 국립기상박물관(1932년 경성측우소로 건립)[/caption] 4회 <北을 바라봄>에서 흥미로운 것은 동아일보사에서 북쪽을 바라볼 때 당연히 가장 뚜렷한 요소인 총독부 청사는 보이지 않고, 북악산만 부각된다는 점이다. 물론 원경의 산을 강조하는 것은 풍경화가 이마동이 그린 연재물 삽화의 전반적 특징이기는 하지만 바로 앞의 한옥 지붕이 돌출한데 반해 총독부 청사가 완전히 ‘사라져버린’ 것이 범상하게 보이지는 않는다. [caption id="attachment_9728" align="aligncenter" width="408"]그림 3. <서울風景 其四 北을 바라봄>, <<동아일보>>, 1935.6.29.[/caption] 다음으로 5~15회는 모두 경성의 특정 장소를 그린 삽화이다. 동아일보사 옥상에서 사방을 바라본 뒤 거리로 나선 셈이다. 그 중에서도 13회까지는 ‘凉山’과 ‘耿岸’ 두 필자의 설명이 붙어 있다. ‘양산’과 ‘경안’은 당시 동아일보사의 학예기자였던 신남철과 서항석이다. 저명한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신남철(1903~)은 후일 중앙고보 교유를 거쳐 8.15 이후 월북, 김일성대학 철학강좌장 등을 지내다가 1950년대 후반 숙청되었다. 그에 반해 표현주의와 고전주의 연극을 추구했던 연출가 서항석(1900~85)은 극예술연구회의 핵심 인물이었으며, 8.15 이후 국립극장장을 지내는 등 남한 연극계의 원로로 활동했다. 두 사람은 성향이 꽤 다른 셈이었으나, 당대 최고의 학력 엘리트(각각 경성제대 철학과, 도쿄제대 독문과)로서 중앙고보 동문이기도 했으며 학예기자로서 동아일보사의 문화 프로그램을 같이 운영하기도 했다. 연재물 삽화의 설명에서도 특별한 차이가 보이지는 않는다. 5회 이하 기사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5회(1935.7.2.), 종로 네거리, 신남철 전반적으로 5~8회는 전형적인 북촌이며, 9~11회는 도성 서남쪽, 다시 12~15회는 동서 외곽이다. 아무튼 ‘서울풍경’이라고 하지만 남촌은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다. 보신각과 동일은행 건물의 (부)조화를 말하는 5회는 이 시기 서울 중심가의 변화를 바라보는 전형적인 시선이라고 할 수 있다. 다소 어지러운 도시 공원의 모습을 보이는 탑동공원 묘사(6회)에서는 “그러나 그러나 이곳은 우리의 잊지 못할 곳”이라는 언급을 빼놓지 않는다. 아마도 3.1운동을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 이 점도 조선어 언론에서는 어김없이 등장하는 대목이다. 그런가 하면 가장 희망적인 어조를 보이는 것은 8회 안국동 네거리이다. 중등학교가 밀집하여 ‘학생의 거리’인 이 곳은 다른 기사에서도 많이 볼 수 있지만 늘 조선어 언론이 가장 즐겨찾는 경성의 ‘희망의 장소’이다. [caption id="attachment_9729" align="aligncenter" width="527"]그림 4. 5, 6, 8회의 종로 네거리(좌상), 탑동공원(우상), 안국동 네거리(하단)[/caption] 보신각은 종로의 옛기억을 환기시키는 현존한 유일의 기념물이다. 이 건물이 비록 보잘것 없다 한들 뉘라서 어찌 그 애상의 종을 되돌아보지 안흐랴! 구부정한 처마의 선이 동일은행의 육중한 직선과 부디칠때 지난날의 서울과 지금의 서울이 맛부등켜 안고 몸부림하는 듯 하다. (5회) 보라! 우리의 이 유서 깊은 탑동공원을 오붓한듯, 아담한듯, 가끔 우리의 발길이 돌아서는 이 곳은 서울의 ‘별천지’를 그려내고 있다. 점쟁이, 관상쟁이, 천량만량꾼들이 긴긴 여름날에도 해 기우는줄 모르고 권태에 찌들은 푸념을 두고 하고 있는 곳이다. (중략) 그러나 그러나 이곳은 우리의 잊지 못할 곳이다. (6회) 이 근방은 학생, 더욱 중등 남녀학생들의 독천장이다. 오전 7시로부터 시작되는 그들의 “럿쉬아워”는 이 안국동 네거리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식전 일즉이 이 곳으로 나와서 씩씩하게 배움의 집으로 발길을 급히 하는 것들을 바라보라. 그것은 한 기쁨이다. 고달필 현실의 핏줄기는 그들의 이 바쁜 거름에 의하야 맑거질 것이니 하면 다시 없는 기쁨이다. 이 안국동으로 거닐며 우리는 언제나 그들의 귀여운 모양을 보고 그들의 빛나는 앞길을 비는 것이다. (8회) 이 시기 경성의 도시개발상과 그에 따른 변화를 느낄 수 있는 것은 7회이다. 7회 <동관 네거리>는 “저-기 어마어마한 돈화문”이라는 데에서 종로3가 네거리임을 알 수 있다. 이 곳은 분명 북촌에 속하지만 이 네거리 자체가 1910년대 돈화문앞에서 대화정(중구 필동)에 이르는 ‘돈화문통’이라는 도로를 신설하면서 만들어진 것이다. 이 도로는 도성 남북의 연결을 가장 우선 과제로 한 초기 시구개수사업으로 부설한 대표적인 신도로이다. 그리하여 이 도로는 경성의 남북을 연결하며, 나아가 남촌의 일본세가 북촌으로 진출하는 통로인 것이다. 반대로 여기에서 청계천만 건너면 당시 최고의 금융가인 황금정 3정목이 지척이다. 그래서인지 “십자로에 가로는 전차 세로는 뻐스, 제법 교통도 빈번한 편”으로 “종로 네거리와는 딴 냄새”가 나는 것인가? 서울이 변하여 대경성이 되고 대경성이 나눠져 남촌 북촌이 된 오늘 북촌의 번화처로는 종로 네거리가 첫찌오 거기 따르려는 것이 동관 네거리이다. 십자로에 가로는 전차 세로는 뻐스, 제법 교통도 빈번한 편이다. 그러나 여기는 종로 네거리와는 딴 냄새가 있다. 북향하야 바라보면 좌편으로는 명월관을 앞세우고 돈의동 일대의 색주가굴이 유위한 청년의 고혈을 기다리고 있고 우편으로는 단성사가 신장을 말숙이 하고 나앉어 외국영화封切館은 나 뿐이오 하면서 값싼 모더니즘, 아메리카니즘의 수입 선전에 저 혼자 바쁘다. 말하자면 여기가 북촌의 환락경이다. 저기 섯는 망대야, 너는 서울을 화재에서 구할 뿐 아니라 이 언저리에서 심연에 빠진 자들을 또한 감시해 주어야 하겠다. 아차 내가 발앞을 보고 잔소리하기에 저-기 어마어마한 돈화문이 그 옛날일을 잊은듯이 입을 닫친채 말 없이 섯는 그 심정을 모른체 했구나. (7회) [caption id="attachment_9730" align="aligncenter" width="528"]그림 5. 7회 동관 네거리, 1924년 경성상가지도의 종로3가 네거리에서 남쪽 을지로3가(황금정 3정목) 방면, ○안은 각각 기사에 등장하는 ‘요리옥 명월관’과 ‘단성사’[/caption] 이미 언급했지만, 이 연재물이 그리는 ‘서울풍경’의 거개는 경성에서 조선인 중심지인 북촌이다. 물론 장소에 따라 약간씩 묘사의 논조가 다르기도 하지만 ‘조선인의 경성’을 그려내려는 경향은 분명하다. 그리고 이것은 어떤 무의식이 작동한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확장되는 대경성’을 ‘외면’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다음으로 1936년 3월 31일부터 하루 앞으로 다가온 경성 행정구역 확장에 즈음하여 연재한 <경성 신명승 순방>을 살펴보자. 연재물은 이렇게 시작한다. 듣기에도 귀가 아플만치 떠들어대던 소위 대경성도 내일(4월 1일)이면 실현되게 되었다. 이 덕에 2군 1읍에 붙어지내던 땅덩어리도 이 날부터 경성부의 구역으로 남에게 불려질 판이다. 그러타고 별 새로운 맛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시골뚜기가 서울뛰기 행세를 하게 되었으니 자랑이라면 자랑거리가 뭘까? 항렬이 고쳐진 동명의 점고는 대강한 바 있거니와 새로 되는 경성의 명승지 몇곳을 더듬어 보기로 하자. (1회, 1936.3.31.) 경쟁지라고 할 수 있는 <<조선일보>>가 이미 2년 반 전에 “대경성 후보지 순례”(1933년 9월)를 하고, 같은 해에도 벽두부터 연이어 “대경성 도시계획 검토”(1936년 1월 6회 연재), “대경성 출산전야 공론”(1936년 2월 6회 연재)를 하고 새롭게 경성에 편입된 지역의 현안을 훑어보는데(<우리 동리의 긴급 동의>, 1936년 4월) 반해 “명승지 몇곳을 더듬어 보”는 이 연재물은 한편 학술적이고 문화적이지만, 다른 한편 ‘한가한’ 느낌을 준다. 각 회차 별로 다루고 있는 ‘명승지’와 그에 얽힌 중요한 사건 혹은 주요 인물은 다음과 같다. 1회(1936.3.31.), 세검정, 이강․전협과 대동단 사건 [caption id="attachment_9731" align="aligncenter" width="333"]그림 6. ‘경성 신명승 순방’의 장소를 google지도에 표시[/caption] 다섯 곳은 대체로 확장된 행정구역의 가장 바깥쪽에 걸쳐 있다. 4회의 양화진에서 김옥균과 갑신정변의 이야기를 다룬 것은 예외로 하더라도 2, 3, 5회의 노량진육신묘, 정조가 화성 능행시 머물렀던 한강변의 행궁 용양봉저정, 조선시대 친경례를 행하던 선농제와 적전은 말 그대로 ‘역사유적’의 소개이다. [caption id="attachment_9732" align="aligncenter" width="503"]그림 7. 위에서부터 2, 3, 5회 노량진 사육신묘, 동작구 본동 용양봉저정, 동대문구 제기동 선농단터의 1936년과 현재의 모습[/caption] 그런데 1회의 세검정에서 대동단 사건을 다룬 것이 의외라면 의외이다. 옛기록을 뒤져보면 이 정자는 이즉이 燕山主란 임금이 한창 정사를 문란히 하고 음학을 일삼을 때에 이 곳에 水閣을 짓고 매일 같이 歌姬와 美酒로 세월을 보내었다는데 그 후 光海主 14년에 癸亥 3월 12일 밤에 이귀, 김류, 신경신 등이 능양군을 추대하고 반정의 대업을 계획을 할 때에 仁祖 이하 거의한 장졸이 이 곳에서 대오를 지어가지고 창의문을 부시고 입성하였었다. 하여 그 때부터 반정 성공을 기념하기 위하여 칼을 씨섯다고 세검정이라고 일커르게 된 것이다. (중략) 이 정자에 얽히여잇는 최근의 비화 한토막-. 화살 같이 흐르는 세월은 벌써 18년 전 옛얘기를 만들어주었다. 기미년 3월 사건이 일어나자 대동단이라는 비밀결사가 전협이라는 사람의 활동으로 한말 정객 동농 김가진씨를 총재로 하야 조직되어 (중략) 김가진씨는 이종욱과 같이 변장을 하고 상해로 탈출하였고 전협은 서울에 있으며 부호거상으로 가장하고 왕족 한 분을 모시어가지고 해외로 나가려고 하였으니 이것이 그 때에 한참 세상의 이목을 끌든 소위 세검정 사건이다. (1회) 주지하듯이 대동단 사건은 해프닝에 가까운 측면이 있지만 또한 명백한 반일 활동인 것은 틀림 없다. 그렇다면 굳이 세검정의 유래를 설명하면서 이 사건을 등장시킨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기사 말미의 표현처럼 “대동단의 총재 김가진과 단장 전협은 벌써 고인이 되고 말았”기 때문에 이제는 이 사건도 “최근의 비화”, 즉 ‘역사’가 되었다는 뜻일까? 어떻게 보더라도 <경성 신명승 순방>은 경성의 행정구역 대확장이라는 ‘사건’을 근교의 ‘명승지’ 몇 곳 추가 정도로 보는 듯 하다. 그에 대한 평가는 차치하고 1930년대 중반 대도시 경성의 향방에 대한 동아일보의 태도는 조선일보에 비해 매우 ‘한가해’ 보이는 것은 틀림 없다. 참고문헌 김태희, <서항석 연구>, 고려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3. 성효진, <1930년대 중반 경성의 초상: 1935년 동아일보에 연재된 서울풍경 연구>, <<미술사와 시각문화>> 26, 2020. 염복규, <<서울의 기원 경성의 탄생>>, 이데아, 2016. 정종현, <신남철과 ‘대학’ 제도의 안과 밖>, <<한국어문학연구>> 54, 2010.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https://www.heritage.g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