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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京城)을 말한다: 신문 연재물로 본 일제시기의 ‘경성’⑩] 자라나는 명일의 경성 대도시계획과 그 이상_염복규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BoardLang.text_date 2022.07.06 BoardLang.text_hits 21,853
웹진 '역사랑' 2022년 7월(통권 31호)

[경성(京城)을 말한다: 신문 연재물로 본 일제시기의 ‘경성’] 

 

자라나는 명일의 경성 대도시계획과 그 이상


<자라나는 明日의 京城 大都市計劃과 그 理想>, <<매일신보>>, 1934.3.24.~4.19.


 

염복규(서울시립대학교)


* 지난 연재 보기


1.

조선에서 도시계획법령 제정을 둘러싼 논의가 처음 등장하는 것은 1920년대 초이다. 여기에는 1919년 일본 도시계획법 제정 당시 내무대신이었던 미즈노 렌타로(水野鍊太郞)가 3.1운동 이후 총독부 정무총감으로 부임한 것이 영향을 미쳤다고 하나 분명한 근거는 없다. 그러나 토목행정으로 범위를 좁혀보면 이 무렵 기술직 관료(기사)로서 처음으로 하라 시즈로(原靜雄)가 총독부 토목부장으로 부임한 것에 주목해볼 수 있다. 하라는 언론 인터뷰 등에서 조선에서 도시계획 실시와 법령 제정의 필요성을 줄곧 언급했다. 그러나 하라의 주장은 총독부 내에서 소수파였다. 이후 도시계획법령 제정을 둘러싼 움직임은 완전히 중단되지는 않았지만 실현에 이르지 못한 채 10여년간 답보를 면하지 못했다.

이런 상태는 1930년대 초 조선공업화 정책 등이 추진되고 구체적으로는 이른바 북선(北鮮)루트의 종단 기착항으로 나진이라는 ‘신도시’를 건설할 필요성이 생기면서 바뀌었다. 그리하여 총독부는 1932~33년 도시계획법령 초안을 완성했다. 일본 내각 법제국의 심의까지 마무리되어 제령안이 확정되는 것은 이듬해 5월이다. <<매일신보>>에 <자라나는 명일의 경성 대도시계획과 그 이상>이라는 기사가 20회 연재된 것은 <조선시가지계획령>이라는 이름의 조선 최초의 도시계획법령의 제정을 목전에 둔 1934년 3~4월이었다.

 

2.

연재물의 취지는 지난회에서 살펴본 <대경성 후보지 순례>와 비슷하다. 다만 구체적인 통계 정보 등을 더 상세하게 담고 있다. 또 용도지역제나 재원 문제 등 도시계획의 실무적 추진에 필요한 내용을 많이 담고 있다. 이런 내용은 근거 없는 것이라기보다 대개 경성부나 총독부 토목과 등에서 흘러나온 정보를 취합한 것으로 보인다. 모두의 1, 2회에서는 이제 현실로 다가온 경성 도시계획에 따라 외곽 지역이 도시계획 구역에 포함되어야 하는 근거를 이야기한다.

이미 가득차 넘처가는 경성의 인구가 시외를 범한지 오래 되엇다. 현재 사대문 밧글 나가보아라. 이름만이 부외이지 이를 만약 서울이 아니라면 뺨이라도 칠듯한 형세를 가지고 경성을 눈흘기면서 잡아느리는 듯이 느러나고 잇다. 불과 2, 3년 이내로 시구개정에 의해 경성과 한살림을 하게 될 사대문밧은 지금 엇더한 상태에 잇스며 또한 장래에는 엇지될 것인가. 도시계획안에 의해 그것을 드려다 보기로 하자. (1934.3.24., 1회)


경성부의 도시계획안을 보면 현재의 경성부를 약 그 4배로 확장하는 동시에 장래 인구 200만을 포용할 수 잇는 대도시를 건설하려는 것이다. 경성의 압잡이가 되고 대경성의 생명이 될 교외로 경성에 편입될 예정지구는 어느 곳인가. 경성을 둘러싸고 잇는 고양군은 물론이오 시흥군의 일부와 멀리 김포군에까지 뻗치어서 실로 3군 1읍 8개면에 68개리에 긍하여 총면적 4,930만평으로 확대시키자는 것이다. (중략) 편입예정지역 내의 인구의 증가율은 경성을 중심에 두고 그 거리에 따라서 격증을 보이고 잇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시내의 증가율은 겨우 1.2%로 내지에 비하면 이름없는 한 농촌의 증가율과 비등하니 이것으로서도 경성은 이미 가득찬 것을 알 수가 잇는 것이다. (1934.3.25., 2회)


이미 경성부 외곽은 이름만 부외이지 경성부나 다름없는 혹은 그 이상의 인구 증가를 보이고 있다. 그리하여 경성은 도시계획과 더불어 고양군, 시흥군, 김포군 일부까지 행정구역을 확장할 것이다. 이 기사에서는 1개읍, 8개면 68개리를 경성부 편입 대상 지역이라고 언급한다. 고양군 용강면, 연희면, 은평면, 한지면, 숭인면, 둑도면, 시흥군 영등포읍, 북면, 김포군 양동면 등이 그 것이다. 그리하여 행정구역을 확장하면 경성부는 4배 가량 커진다는 것인데, 실제 1936년 행정구역 확장을 보면 둑도면(뚝섬)은 빠지게 되며 은평면, 양동면이 아주 적은 부분만 편입되었다. 그리하여 실제 확장 면적은 3.5배에 약간 못미친다. 이 기사의 내용은 확장의 최대치를 말해준다고 하겠다. 3회의 내용은 용도지역제이다.

도시계획은 상업, 공업, 주택의 지역을 따로히 지정하여 그 토지의 이용을 적당케 함으로써 주민생활의 안정과 능률의 증진을 돕고 교통시설을 완비시키어 현재와 같이 년년 다수의 전염병이 발생하여 고율의 사망자를 내이는 비위생지역에 일대 개선을 가하는 동시에 건축물의 통일, 방화, 방수설비, 상하수도의 시설과 제반 사업 등을 완비시켜 관아공관, 사회시설에 이르기까지 그 위치를 안배하여 각기 그 기능을 발휘함에 잇서서 거리낌이 업게 하자는 것이다. 그리하여 부민의 편익과 생활의 향상을 기하여 현재와 같이 초잡한 도시의 재현을 업시하려는 것이다. (중략) 경성부의 지세는 도시의 중앙에 남산이 드러안고 동에 낙산, 북에 북악, 서에 금화산 등의 대산맥이 잇서 이 산맥이 스스로 구역을 정하고 남으로 한강이 가로막혀 홍수 범람의 협위를 밧는다. 그럼으로 지세상으로 아래와 같이 그 지역이 작정되지 아니할 수가 업게 되엇다. *상업지역 = 현재 경성부의 중앙저지 *주택지역 = 부내 구릉고지 *공업지역 = 한강에 면한 서남부로 마포, 토정리, 여의도, 노량진리, 영등포 *경공업지역 = 청량리 부근에서 남방일대 (1934.3.27., 3회)


용도지역제의 일반적 취지와 더불어 실질적인 지역제 구상이 대체로 구체화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내용은 1939년 실제로 발표된 경성시가지계획 지역제 지정과 거의 다르지 않다. 중심 상업지역은 경성의 중앙, 현재의 도심부이며, 공업지역은 서남부의 영등포, 마포 일대이다. 별도의 경공업지역은 동부 내지는 동북부의 청량리 일대이며, 주거지역은 그 외 지역이다. 위 기사에도 나오듯이 지역제는 도시계획상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며, 그 내용도 결정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 경성시가지계획은 도로망 부설, 토지구획정리 등 ‘건설’ 사업 위주로 시작되었고, 지역제는 몇 년이 지난 1939년에 와서야 발표되었다. 경성시가지계획이 완전한 신도시 계획이 아니었다는 사정과 더불어 일단 재정이 투입되는 건설 위주로 시작된 점은 별도로 따져볼 필요가 있을 듯 하다.

[caption id="attachment_9682" align="aligncenter" width="527"]그림 1. 경성도시계획 지역 및 지구 예정도 (1934.3.29., 5회차 기사에 실려있다.)[/caption]

4, 5회는 도시계획의 재원 문제로서 수익자부담금, 토지증가세, 각종 특별세, 국유지의 매각 등 여러 가지를 언급하고 있으나 핵심은 수익자부담금, 토지증가세에 담겨있는 “도시계획사업에 의해 도시가 번영됨에 따라 자연히 이러나는” “시가지와 그 부근 토지의 지가 등귀”, 즉 “지주의 불로소득”에 대한 회수이다. (1934.3.29., 5회) 경성부의 경우 1920년대 시구개수 과정에서 수익자부담금 제도를 창설하려고 시도한 바 있었다. 그리고 이 문제는 과세 대상이 주로 ‘조선인’ 토지소유자가 됨에 따라 부협의회에서 ‘민족적 갈등’의 원인이 되었고, 결국 좌초하고 말았다. 이것이 시가지계획 실시 과정에서는 비로소 실현되었던 것이다.

 

3.

6회부터는 현재 부외인 편입 대상 지역 각각에 대한 리뷰이다. 먼저 6~8회는 숭인면을 중심으로 한 이른바 ‘동대문 밖’ 지역이다. 이 지역이 경성으로 이촌향도한 서민층의 주된 정착지가 되기 시작한 것은 이미 1920년대 초부터이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살펴본 여러 기사에서도 반복하여 언급하고 있다. 다만 이 연재물에는 재미있는 표현이 등장한다.

동대문에서 청량리에 이르는 사이에 살고 잇는 주민은 그 대부분이 전차승무원, 각 공장 직공, 노동자 등 적은 수입에 억매여서 집세가 싼 곳을 차저다니는 월급쟁이들이다. 경성의 땅갑은 부러가는 인구와 한가지로 작고 올러만 가니 돈냥이나 가진 사람들이 아니고는 견뎌나갈 수가 없다. 그럼으로 문밖으로 주택지를 구하여 집세 싸고 공기 좋은 곳을 향하여 압흘 다로면서 몰려나간다. 그럼으로 이 곳 주민들은 아츰밥만 먹으면 시내로 일을 하러 드러왓다가 오후 4, 5시가 지나야 비로소 잠자리를 찾아 돌아가게 된다. 이 소위 高陽밥 먹고 楊州 구실한다는 것이니 호구의 느러가는 것이나 생활양식이나 그 어느 것 할 것 없이 도시가 아니라면 뺨이라도 따릴듯한 기세를 가지고 잇다. (1934.3.30., 6회)


전형적인 교외 서민 주거지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위 인용문에서 강조하고 있듯이 현재 동대문 밖의 거주자는 독자적인 생활권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 아니며 대부분 경성부 내에 생활 근거를 가진 사람이다. 이미 동대문 밖은 ‘경성의 베드타운’인 것이다. 이를 “고양밥 먹고 양주 가 구실”한다고 표현했는데, “이쪽의 보수를 받고 아무 상관없는 저쪽의 일을 해 주는 경우를 비유”하는 말이라고 한다. (고려대한국어대사전)

다음 9~11회는 영등포이다. 영등포 일대가 경성 외곽의 대표적인 공업지역이라는 점, 그래서 경성 행정구역을 확장한다고 할 때 핵심이 되는 지역이라는 점도 전혀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다. 다만 이 연재물에는 수년 후 많은 이야기가 나오는 경인 연결의 ‘미래 구상’이 등장하는 점이 이채롭다.

경인 간에 전차가 부설되어 교통을 원조하게 되리라는 것도 쓸데 없는 공상은 아니다. 그럼으로 10년이나 20년 뒤에 이 이상이 실현되면 경성과 인천은 도시로 연락을 하게 되어 마치 현재 동경과 횡빈과 같이 되고 한강은 동경의 중앙을 흐르는 隅田川 같이 경성의 중앙을 뚤코 흐르게 될 것이다. 그럼으로 이 점에 잇서서 우리가 영등포를 생각할 때에는 또한 경성과 인천을 장래 접근시킴에 잇서서 매파격의 중요한 위치를 가지고 잇슴을 이즐 수 없는 것이다. (1934.4.6., 10회)


경인선 철도의 ‘전철화’ 구상은 1939년 개시되는 경인시가지계획에도 등장한다. 경인 연결의 핵심적인 사안이다. 물론 그 ‘이상’은 ‘10년이나 20년 뒤’가 아닌 1970년대에 와서 실현되었다. 그러나 1930년대 이래 한국현대사의 여러 곡절이 없었다면 더 빨리 실현되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이 무렵이면 경인선의 ‘전철화’는 공론장에 오른 사안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영등포의 편입은 영등포 한 지역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영등포을 경성에 편입하는 것은 한강 남쪽의 확장의 첫 걸음인 것이다. 그리하여 비로소 그 때까지 ‘서울의 경계’였던 한강은 도쿄의 스미다강(隅田川)처럼 서울을 반으로 가로지르는 강이 될 것이었다. 그리고 종국에는 경성과 인천은 연결될 것이며, 그 중간의 매개(매파)가 바로 영등포인 것이다. 또 영등포의 한 특징은 주로 지역의 거주자가 경성으로 출퇴근을 하는 다른 외곽 지역과 달리 “경성부민으로도 매일 일터를 쪼차 영등포로 왕래하는 자가 수천을 헤이”는 생산 단지라는 점도 지적하고 있다. (1934.4.7., 11회)

이어서 연재물은 마포(12~14회), 연희면 일대(15, 16회), 왕십리 일대(17회), 신당리, 한강리 일대(18, 19회)를 다루고 있다. 그 동안 신문, 잡지 기사 등에서 묘사해온 지역의 이미지와 크게 다른 내용은 아니다. 신당리, 한강리 일대에 당시 표나게 개발되고 있는 문화주택지의 묘사가 두드러진다.

신당리산의 빈민부락을 세운 부유지 등 수백만평의 토지가 이미 경성부의 수중에서 떠러저 나아가 무슨 주택지이니 무슨 주택지이니 하여 이미 화양식 문화주택이 이곳 저곳에 즐비하게 느러서 자라나는 초가집을 나려다 보며 비웃는 듯 하다. (1934.4.17., 18회)


한강리에 접급한 이태원리의 공동묘지도 불원한 압날에 경성부의 손으로 수만흔 고총을 이전하는 동시에 주택지로 화하게 될 것이니 이리하여 수년 전부터 현안으로 내려오는 남산주유도로가 완성이 되어 교통이 편해지면 또한 이 일대에도 주택이 느러안게 될 것이니 압흐로 맑게 흐르는 한강을 껴안고 남으로 남산을 등저 그야말로 배산임수의 이상적 주택지가 될 것이다. (1934.4.18., 19회)




[caption id="attachment_9683" align="aligncenter" width="540"]그림 2. 신당리 문화주택지의 전경 (1934.4.17., 18회)[/caption]

신당리, 한강리 일대 등 이른바 남산 남록 일대는 배산임수의 구릉지로서 일본인의 취향에 잘맞는 주택지였다. 그리하여 1930년대 초에는 이 일대를 중심으로 많은 ‘문화주택지’가 개발되어 경성 인근의 대표적인 ‘부자 동네’가 되었다. 아래의 인용에서 볼 수 있듯이 이태원은 당시 공동묘지였는데, ‘불원한 압날’이라는 언급처럼 경성시가지계획이 시작되면서 역시 문화주택지로 개발되어 무덤을 이전하게 된다. 그런데 이 일대는 주택지로서 자연적 입지 조건이 훌륭한 반면 교통 여건이 좋지 않았다. 그리하여 1920년대부터 주로 일본인 유산층을 중심으로 삼각지에서 남산 남록을 돌아 신당리를 연결하는 이른바 ‘남산주유도로’의 부설 요구가 있었다. 이 또한 도시 개발의 우선순위를 두고 경성부(협의)회 등에서 ‘민족적 갈등’의 불씨가 되었던 사안이다. 이 도로도 수년 후 경성시가지계획이 시작되면서 최우선적으로 부설되었다.

[caption id="attachment_9684" align="aligncenter" width="547"]그림 3. 1936~38년 3개년 사업으로 부설된 ‘남산주유도로’의 계획도와 현재의 노선, 대략 현재 지하철 6호선 삼각지역-약수역 구간과 일치한다.[/caption]

 

4.

마지막으로 연재물의 여러 군데에 등장하는 전차구역제 폐지, 복선화 문제를 짚어보고자 한다.

수년전부터 전차의 구역을 철폐하라, 전차임금을 통일하라, 그리고 복선을 부설하라고 맹렬한 운동을 햇다. 그러나 전기회사는 구역철폐는 커녕 복선 부설은 수지가 맞지 않아 할 수가 없다고 배를 내밀든 것이 불과 4년이 채 못되어 자진해서 방금 복선이 부설공사중에 잇다. (1934.3.31., 7회, 청량리)


그럼으로 마포선 전차는 아침 관청, 회사의 출근시간이나 학교의 상학시간에 지나기까지는 전차마다 만원이오 오후의 퇴사시간이나 하학시간이 되면 또한 아침과 같은 현상을 매일 거듭하고 잇다. 이곳 역시 전차가 단선인 위에 경성으로부터 두 구역이기 때문에 성장하는 서부일대를 위하여 적지 아니한 저해를 주고 잇다. 이곳 주민들도 수년전부터 전차구역 철폐운동을 이르키고 잇스나 아직 아모런 효과를 엇지 못하고 잇다. (1934.4.8., 12회, 마포)


위 인용에서 볼 수 있듯이 당시 경성 외곽 지역 주민의 전차에 대한 불만은 외곽선의 경우 전차요금을 더 받는 점, 그리고 단선으로 수송력이 부족한 점의 두 가지였다. 처음 경성 전차의 요금은 일정한 간격으로 구역을 나누어 1구역에 3전씩 받는 체계였다. 그러다가 1919년부터 동대문과 남대문을 경계로 시내선과 교외선을 구분하여 시내선은 5전을 받고 교외선으로 환승할 때 5전의 요금을 추가하는 체계로 개정했다. 그런데 1921년 용산선의 구역제가 폐지되었다. 이유는 용산은 행정구역상 경성부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용산을 근거로 한 일본인 유력자의 강력한 요청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행정구역상 경성부외인 청량리, 왕십리, 마포의 구역는 존속되었기 때문에 이 지역 주민은 1920년대 초부터 전차구역제 폐지의 주민운동을 전개했다. 이와 더불어 수송력을 높히기 위해 복선화를 요구하기도 했는데 전차의 운영주체인 경성전기는 채산이 불확실하다는 점을 들어 이를 계속 거부했다.

주민운동은 1932~33년에도 크게 전개되었다. 대개 지역 유력자를 중심으로 동부교외발전기성회, 마포선구역통일복선부설기성회 등을 조직하고 동회를 중심으로 대표자를 선출하여 주민대회를 개최했다. 예컨대 1932년 11월 청량리의 동부주민대회는 경성제대 예과 강당(현재 청량리역 건너편 미주상가 뒷쪽)에서 개최했는데 청중이 1천여명에 달할 정도로 대규모였다. 그만큼 경성으로 출퇴근하는 인구가 많고 전차 교통에 대한 지역 공통의 이해관계가 분명한 특징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바로 이런 ‘지역의 이해관계’에 기반한 운동의 특징 때문에 여기에는 일본인과 한국인이 같이 참여했다. 청량리, 왕십리, 마포에서 전차구역제 폐지를 내건 조직의 임원으로 참여한 사람은 현재 조사된 바로 모두 36명인데, 이 중 일본인이 13명, 한국인이 21명이었다. 또 1932년 말 왕십리 주민대회에서 주민의 요구를 듣지 않고 경성전기에 끌려가는 경기도지사를 한국어로 “멍텅구리”라고 표현했다가 경찰의 주의를 받은 사람은 일본인 우라모토(浦本冠)라는 자였다.

위 인용에도 보이듯이 경성전기는 외곽 지역의 인구 증가세로 보아 어느 정도 채산이 맞는다는 판단을 하여 1934년에는 전차 복선화 공사를 시작했다. 그러나 구역제 폐지는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 구역제는 경성부 행정구역이 확장된 후인 1936년 8월에 가서야 비로소 폐지되었다. 이 또한 경성전기가 경성부 부영버스까지 인수하여 구역제를 폐지해도, 다시 말해서 전차 요금을 인하해도 전차-버스 연계 체계로 손실을 보충할 수 있다는 계산을 마친 다음이었다.

[caption id="attachment_9685" align="aligncenter" width="540"]그림 4. 청량리선의 복선화 공사 (1934.3.31., 7회)[/caption]

전차구역제 폐지 문제를 둘러싼 주민운동이 한일 공동으로 전개되고 있는 점, 그리고 이 사안을 관변 언론인 <<매일신보>>에서 여러 차례 긍정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점,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통 사업을 독점하고 있는 경성전기가 이를 수용하지 않는 점 등은 식민지도시에서 ‘공공의 이해’를 둘러싼 갈등의 구도가 간단치 않음을 보여준다. 이런 문제까지 포함하여 행정구역의 확장과 확장한 외곽 지역의 개발은 식민지도시에서 또 다른 복합적인 갈등을 낳을 것이었다.

연재물의 마지막 결론부에는 앞에서 나온 이야기를 반복하면서 이런 여러 도시문제는 경성부가 (일본 본토에서와 같이) 진정한 지방자치체가 되면 완전하게 해결될 수 있을 것임을 암시한다. 1934년, 일개 식민지도시에 불과한 경성의 현실에서 끊임없이 유예될 수 밖에 없는 이야기이겠지만 또한 총독부 기관지에서 “부민의 공정한 투표”, “시민의 참된 대표자인 시장”이 언급되는 것은 여러 모로 생각해 보아야 할 거리를 던져준다.

경성에는 부민의 공정한 투표에 의하여 이야말로 시민의 참된 대표자인 시장이 나서게 될 것이며 청량리, 마포의 복선문제이니, 임금통일문제이니 하는 것도 꿈같이 해결되고 전차의 바퀴소리는 인천까지 연장되어 인천과의 거리를 단축함으로 경인의 주민은 이웃사촌격으로 서로 손을 잡고 살어나가게 될 것이니 '모-타-싸이렌'이 우렁차게 서울의 공기를 흔들어 날마다 정오를 보하야 주는 그것이야말로 대경성의 행진을 재촉하는 것이 아니면 아니될 것이다. (1934.4.19., 20회)


 

참고문헌

김제정, <일제 식민지기 경성부 교외 지역의 전차 문제와 지역 운동>, <<서울학연구>> 29, 2007.
손정목, <<일제강점기도시사회상연구>>, 일지사, 1996.
염복규, <<서울의 기원 경성의 탄생>>, 이데아, 2016.
염복규, <식민지 도시계획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도시연구>> 17,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