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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京城)을 말한다: 신문 연재물로 본 일제시기의 ‘경성’⑤] 옥상에서 바라본 경성의 팔방_염복규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BoardLang.text_date 2022.02.05 BoardLang.text_hits 21,6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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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역사랑' 2022년 2월(통권 26호) [경성(京城)을 말한다: 신문 연재물로 본 일제시기의 ‘경성’] 옥상에서 바라본 경성의 팔방<屋上에서 바라본 京城의 八方>, <<동아일보>>, 1926.12.16.~23. 염복규(서울시립대학교) 1. 이번에는 1926년 말 <<동아일보>>에 연재된 <옥상에서 바라본 경성의 팔방>이라는 기사를 살펴보자. ‘팔방’, 즉 여덟 방향이므로 8회 연재이다. ‘옥상’이란 당시 광화문 네거리에 위치한 동아일보사, 현재 일민미술관의 옥상을 의미한다. 동아일보사 옥상에서 경성 시가지를 내려다본 풍경을 묘사한 기사이다. 뭔가를 기념하려고 연재한 것이 아닐까 짐작할 수 있다. 무엇을 기념하려고 한 것일까? 먼저 기사의 내용을 간략하게 살펴보자. 각 회차의 제목과 기사에 등장하는 장소를 대략 보면 아래와 같다. [caption id="attachment_9411" align="aligncenter" width="1089"]* 12월 26일자 기사는 원본에는 9회차로 나오지만, 8회차의 오기이다.[/caption] 2. 연재는 정북방에서 시작하여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면서 사옥 옥상에서 보이는 혹은 과거에는 보였을 것이지만 지금은 보이지 않는 장소를 거론하며(예를 들어 경복궁에 남아있는 근정전, 경회루와 철거된 사정전, 강녕전 등) 그와 관련된 내력을 이야기하는 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1926년 당시 시내 한복판에서 시가지를 조망하면 별 생각이 없어도 그렇게 보일 수 있겠지만, 대개 병합 이전까지 흔적과 병합 이후 새롭게 등장한 것을 대조하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 나가는게 보통이다. 각회차에 나오는 일제시기의 새로운 건물이나 장소는 아래와 같다. 탄탄 대도로 마주 띄우는 곳에 무시무시하게 하얀 백악관이 아니라 白石館이 검어충충한 뽀족한 산을 등지고 섰으니 이것이 정북 방향의 북악 및 총독부요 (1회) 납작납작한 지붕 위으로 적백색 선명한 일개 양옥이 바라보이니 그것이 조선의 아방궁이라는 이름을 듣는 인왕산밑 윤덕영 대감의 주택이다. …… 역시 인왕산을 등에 지고 필운대 언덕위에 앉아 우리 집과 마주 바라보는 붉은 벽돌 삼층집이 하나 있다. 翠綠에 적색이 자연과 조화도 되려니와 얌전하고 아담함이 요조숙녀의 자태와도 같으니 이 집이 배화여자고등보통학교이다. (2회) 덕수궁의 불의의 변을 피하시던 곳이라 하니 경희궁은 그 당시 상감의 파천하시던 곳이다. 지금은 일본 학생이 뛰며 날치는 경성중학교가 되었으니 그 당시 藍輿에서 새여 흘른 상감의 눈물은 한방울도 찾을 길이 없을게다. (3회) 길게 빗긴 햇발이 짧은 겨울의 황혼을 또 재촉한다. 붉은 햇머리만 앙상한 나무가지에 혼몽하게 달렸는데 라디오 방송국의 괴물 같은 쇠기둥이 얼어붙은 듯이 정동 꼭대기에 솟아있다. (4회) 남방을 바라보니 바른편으로는 남대문 밖으로 용산의 넓은 시가가 한없이 터져있고 왼편으로는 창송이 우거진 남산이 앞을 막아섰다. 지난해의 남산 꼭대기에는 국사당이 있더니 오늘의 남산 마루태기에는 백오십만원이라는 거액을 들여 굉대한 역사를 한 조선신궁이 장안을 내려다보고 있다. 바로 바른발 아래는 총독부 신청사를 축소한 듯한 경성부청 사층집이 날개를 펼치고 있고 왼발 밑에는 검어침침한 회장벽돌에 가진 기교를 다 부린 조선호텔이 있으니 불과 지척이라. 업듸면 코게 다을듯 하다. …… 조선의 생살권을 쥐고 흔드는 조선은행 식산은행이며 남부에 솟아있는 여기저기 뾰족뾰족한 층층 양옥이 모두 새주인의 물건 뿐이다. (5회) 서울에서 제일 높다는 鍾峴의 천주교당은 오늘도 은은한 저녁 종소리를 처량히 울린다. …… 남산밑 왜성대의 총독부 낡은 집은 광무10년에 통감부가 설피된 이후로 삼천리 강산을 호령하던 곳이다. (6회) 바로 눈 아래 일전에 신축한 광화문우편국이 있으니 이곳이 옛날 한국시대의 우포도청 자리다. (9회) 새롭게 등장한 것의 경우, 한 눈에도 긍정적으로 언급한 경우가 거의 없다. “翠綠에 적색이 자연과 조화도 되려니와 얌전하고 아담함이 요조숙녀의 자태와도 같”은 “생기가 팔팔한 오는 조선의 어머니들이 고히고히 길러나는 보금자리”인 배화여고보(2회) 정도가 예외적이다. 1898년 남감리교 선교사가 설립한 캐롤라이나학당의 후신인 배화는 1916년 현재의 위치(종로구 필운동 현재 배화여고․배화여대)로 이전했다. ‘배화’라는 교명도 갑신정변 이후 상하이 망명 시절 한국 최초의 남감리교 세례 신자가 된 윤치호가 지어 주었다고 한다. [caption id="attachment_9412" align="aligncenter" width="339"]그림 1. <대경성부대관>(1936)에 보이는 배화여고보(아래쪽)와 벽수산장(위쪽 世界紅卍字會), 현재 통상 ‘서촌’이라고 불리는 지역으로 동아일보사에서 서북방에 해당한다.[/caption] 그 밖에 팔방으로 보이는 것은 “조선의 아방궁”이라는 “윤덕영 대감의 저택”(벽수산장), “종현의 천주교당”(명동성당) 정도를 제외하면 거의 통치․행정시설이다. 그 상당수는 1920년대 중반 새롭게 들어선 것이다. 1916년 기공한 경복궁의 총독부 신청사는 1926년 준공하여 10월 1일 낙성식을 열었다. 비슷한 시기 원래 충무로 입구 옛 일본영사관 건물을 사용하던 경성부청도 경성일보사 자리에 새로운 청사를 짓고 이전했다. 이 연재물에 나오지는 않지만, 즉 광화문 네거리에서 보이지는 않지만 경성역, 경성운동장 등도 일제히 들어섰다. [caption id="attachment_9413" align="aligncenter" width="535"]그림 2. 왼쪽의 시내에서 올려다본 조선신궁(현재 남산 안중근의사기념관 자리)과 오른쪽의 조선신궁에서 내려다본 경성 시가지[/caption] 그 정점은 식민통치의 정신적 측면을 집약한 “백오십만원이라는 거액을 들여 굉대한 역사를 한” “장안을 내려다보고 있”는 남산 조선신궁의 준공이었다. 이와 같이 1926년 말 현재 광화문 네거리에서 사방으로 보이는 뚜렷한 풍경은 완성된 식민지 수도의 스펙터클이었다. 동아일보가 의도한 바는 아니겠지만, 1926년 말 신문사 옥상에서 내려다본 시가지 경관은 이를 뚜렷하게 보여주는 것이었다. 한편 여기에서 하나 흥미로운 사실은 눈에 보이는 각종 시설에 대한 묘사가 5회차 정남방이 단연 많은 점이다. 동아일보사 옥상에서 남쪽을 바라보는 시선은 경성부청에서 핵심 금융가인 남대문로를 거쳐 우뚝하게 보이는 조선신궁에 이르기 때문이다. [caption id="attachment_9414" align="aligncenter" width="530"]그림 3. 남대문 밖에서 바라본 경성의 금융가 남대문로[/caption] 이런 가운데 눈에 띄는 독특한 시설은 4회차 서남방에 등장하는 정동의 “라디오 방송국의 괴물 같은 쇠기둥”이다. 1926년 12월은 조선에서 최초의 방송국인 경성방송국이 준공하여 막 개국을 준비할 무렵이었다. 1920년 미국에서 세계 최초로 라디오 방송이 시작되었다. 이에 일본에서도 그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어 방송국 개국을 희망하는 움직임이 곳곳에서 나타났다. 본토의 움직에 발맞춰 총독부도 1924년경부터 방송을 위한 제도적 정비와 함께 체신국의 시험 방송을 시작했다. 비슷한 시기 민간에서는 조선일보도 시험 방송에 성공했다고 한다. 1925년에는 일본 정부의 1지역 1방송 방침에 따라 도쿄(JOAK), 오사카(JOBK), 나고야(JOCK)에 차례로 방송국이 설립되었다. 조선에서는 식산은행 두취 아루가 미츠토요(有賀光豊)를 위원장으로 방송국 설립 준비위원회가 조직되었다. 당시 식산은행 영선과장인 건축가 나카무라 마코토(中村誠)가 설계한 경성방송국이 기공한 것이 1926년 6월이었다. 7월부터는 일본어 방송과 함께 조선어 시험 방송도 시작했다. 경성방송국은 1926년 12월 5일 준공했다. 위치는 정동, 현재 조선일보 미술관과 덕수초등학교 일대이다. 덕수초등학교 교정에는 ‘첫 방송터’라는 기념 표석이 서있다. 이 연재물이 게재된 1926년 말은 개국 준비에 한창일 때였다. 경성방송국은 이듬해 2월 16일 호출부호 JODK의 첫 정식 본방송을 송출했다. 서로 다른 주파수로 일본어/조선어 방송을 하는 이른바 ‘이중방송’ 방식이었다. 이중방성은 1945년 8.15 때까지 중단되지 않고 계속되었다고 한다. 19세기 후반 한반도를 휩쓴 풍운의 장소, 정동에서 이제 가장 뚜렷하게 보이는 시설은 근대의 최첨단을 상징하는 방송국의 송신탑인 것이다. [caption id="attachment_9415" align="aligncenter" width="534"]그림 4. 동아일보사 옥상에서 바라본 경성방송국 송신탑(<<동아일보>>, 1926.12.19.)과 현재 정동 덕수초등학교 교정의 ‘첫 방송터’ 기념비[/caption] 그런데 위 인용에서 빠진 회차가 있다. 7회차 정동방이 그것이다. “조선인 시가지의 한복판을 일자로 뚜른 단단한 큰길이 동대문에 다았으니 이것이 종로”이다. 새로운 시설이 하나도 등장하지 않는 종로를 이 연재물은 어떻게 묘사하고 있을까? 경성의 중심은 종로이다. 옛날도 종로이었고 현재도 종로이며 장래도 종로이다. …… 구태여 옛말을 끄집어낸들 무엇하리. 반도의 운명을 움직이던 수십년만 하더라도 독립협회와 싸우던 보수당의 보부상 난리도 종로를 중심으로 하여 일어났으며 독립협회 을사사변 정미사변 등도 종로 한복판이 그의 무대가 아니었던가. 이것도 옛말이니 그만두고 최근 10년 이래만 두고보자. 기미년 운동의 만세소리는 어디서 일어났으며 선언을 천하에 발표하던 탑골공원도 여기 있다. 종로에 人聲이 높으며 이천만 인생이 이에 화응하고 蹄聲이 한번 떨치매 반도 강산이 이에 떨지 아니하였던가. 종로는 실로 반도 신경의 중추이다. 신경이 말라간다. 신경을 북돋아주는 원기가 쇠약했거늘 어찌 신경만이 강할 수가 있으랴. 마르다 못하야 실오리 같이 되어버렸으니 어찌 과거의 종로가 상의 소리를 다시 발할 수 있으랴. 이집 저집 게딱지 같은 데서 가는 연기가 한줄 두줄 떠오른다. 거진 끗칠 것 같이 발발 떨면서...... “경성의 중심은 종로”라고 하지만, 어디까지나 ‘과거’의 중심에 대한 회고 일색이다. “반도 신경의 중추”라고 하지만, 이어서 “신경이 말라간다. 신경을 북돋아주는 원기가 쇠약했거늘 어찌 신경만이 강할 수가 있으랴. 마르다 못하야 실오리 같이 되어버렸으니 어찌 과거의 종로가 상의 소리를 다시 발할 수 있으랴”고 한다. 다른 회차와는 다른 방식의 묘사이다. 이것은 물론 ‘사실’의 서술이기도 하다. 하지만 당시 종로에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정말 새로운 무엇이 전혀 보이지 않았을까? 7회차는 연재물의 작성자가 자신의 회고 정서를 경관에 투영하는 느낌이 크다. 물론 다른 회차에도 이런 회고의 정서는 없지 않다. 인조반정과 창의문 이야기(2회), 임진왜란과 덕수궁의 내력(4회) 등을 길게 언급하는 대목이 그것이다. 그러나 종로를 거의 완벽하게 회고의 장소에 머물게 한 것은 진취적이기보다 다소 퇴행적인 느낌을 주기도 한다. 3. 다시 앞으로 돌아가 보자. 1926년 12월의 시점에서 동아일보는 왜 이런 연재물을 게재했을까? 무엇을 ‘기념’하려고 했을까 하는 의미이다. 답부터 이야기하면 동아일보사 신사옥 완공 기념이었다. 1924년 4월 동아일보는 사고에서 창간 4주년을 맞아 윤전기를 증설하고 사옥을 신축하겠다는 등의 발전 계획을 발표했다(<제2계획 신사옥 건축>, <<동아일보>>, 1924.4.2.). 창간후 동아일보는 종로 화동의 옛 중앙학교 교사를 사옥으로 쓰고 있었다. 이듬해 신년호에는 사옥의 신축도안이 처음 공개되었다(<신축도안을 발표하면서 독자 제씨에게 고하노라>, <<동아일보>>, 1925.1.1.). 그리고 9월에 기공한 신사옥은 1926년 말 준공했다. 신사옥으로 이사를 완료하고 집무를 시작한 것이 12월 11일부터였다(<본보사옥 기공식에 임하야>, <<동아일보>>, 1925.9.28.; <동아일보 신축 이전>, <<동아일보>>, 1926.12.13.). <옥상에서 바라본 경성의 팔방>은 동아일보사 신사옥 낙성 기념 기사였던 셈이다. [caption id="attachment_9416" align="aligncenter" width="531"]그림 5. <<동아일보>>, 1925.1.1.에 공개된 사옥 신축도안[/caption] 앞의 경성방송국을 설계한 나카무라가 최종 설계한(1차 설계는 요코하마건축사무소에서 맡았다고 한다.) 동아일보 신사옥은 지하1층, 지상3층 규모로 1925년 초에 공개한 안에 비해서는 적지 않게 줄어든 듯 하다. 그렇지만 “대경성의 중심지가 예상되는 지역”에 144평의 토지를 33,000원에 매입하여 사옥을 신축한 것은 당시 조선인 언론계의 규모에서 보통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caption id="attachment_9417" align="aligncenter" width="518"]그림 6. 실제 준공한 동아일보사 신사옥(<<동아일보>>, 1927.4.30.)[/caption] 그런데 1924년은 단지 동아일보 창간 4주년을 맞는 해가 아니었다. 그 해 동아일보에서는 처음 여러 세력이 ‘연합’하여 창간한 신문의 방향성을 두고 이른바 ‘개혁운동’이 일어났다. 1년여 계속된 개혁운동은 기자를 중심으로 한 개혁파의 패배로 끝이 났다. 이를 기점으로 김성수․송진우로 대표되는 부르조아 민족주의 우파 세력이 확고하게 동아일보를 장악하게 되었다고 한다. 경영 측면에서 압도적 최대 주주로서 김성수 일가가 확고하게 동아일보의 ‘주인’이 된 것도 이때부터이다. 공교롭게도 동아일보 사옥의 신축 과정은 김성수 일가가 동아일보의 주인이 되는 것과 같은 궤도를 걸었다. 마치 이를 ‘기념’하는 것처럼 보이는 느낌도 있다. 그리고 조금 과장일 수도 있으나, 이 연재물의 어조는 단지 새로운 건물의 낙성을 기념하는 것이라기보다 ‘김성수 일가의 동아일보’로 재출발하는 하나의 선언적 의미를 담고 있다. 그리고 그 정서는 ‘앞’을 향하고 있기보다 자꾸 ‘뒤’를 돌아본다. 역사의 격랑이 한 차례 지나간, 그리하여 패배로 끝이 난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두고두고 생각해볼 필요가 있겠다. [caption id="attachment_9418" align="aligncenter" width="518"]그림 7. 2000년경의 일민미술관, 동아일보사는 광복후 1958년 오른쪽으로 두칸, 1962년 위로 두층을 증축했다. 그리고 1963년 동아방송 개국에 따라 1968년 다시 한층을 증축하여 6층이 되었다. 1990년대 후반 일민미술관(5,6층 신문박물관)으로 리모델링했다.[/caption] 참고문헌 서울역사편찬원 편, <<서울역사답사기 5 남산일대>>, 서울역사편찬원, 2021. 서재길, <JODK 경성방송국의 설립과 초기의 연예방송>, <<서울학연구>> 27, 2006. 시노하라 쇼조 외(김재홍 옮김), <<JODK 조선방송협회회상기>>, 커뮤니케이션북스, 2014. (篠原昌三 외, <<JODK·朝鮮放送協會回想記>>, 朝放會本部, 1981.) 이길훈․양승우, <서울 남대문통 상업 공간의 근대화 과정 연구>, <<서울학연구>> 65, 2016. 장신, <<조선․동아일보의 탄생>>, 역사비평사, 2020. 동아일보사, <<동아일보사사 1>>, 동아일보사, 197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