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기사

나의 학위논문: 고구려 관제 연구(高句麗 官制 硏究)_이규호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BoardLang.text_date 2022.02.05 BoardLang.text_hits 12,316
웹진 '역사랑' 2022년 2월(통권 26호)

[나의 학위논문] 

 

고구려 관제 연구(高句麗 官制 硏究)


동국대학교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21.08.)


 

이규호(고대사분과)


 

왜 이런 주제를 택했을까

늘 궁금했다. 우리 기억 속의 고구려는 광활한 영토를 차지하며 당대의 강력한 주변세력들과 자웅을 겨룬 나라로 기억되어 있지만, 정작 고구려가 그 안에 담고 있던 사람들을 어떻게 대했는지는 잘 알려지지 않은 것 같았다. 단순히 넓은 땅을 차지한 것이 영광인가, 그것만이 상징적인 의미로 남아야하는가. 이러한 의문들이 아직 충분히 알려지지 않았다고 생각하였다. 필자가 학위논문으로서 ‘高句麗 官制 硏究’라는 주제를 잡은 것은 여기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고구려사의 시기구분은 크게 셋으로 나뉘는데, 각각의 자료 환경에 따라 연구의 깊이나 폭에 차이가 있다. 이는 시기별로 관련기록의 양이 불균형 상태인 고구려사의 태생적 한계이기도 하다. 따라서 어떤 부분은 여러 연구자들에 의해 다양한 연구가 진행되어 있는 반면에, 어떤 부분은 관련 기록이 적어 상대적으로 논의가 진전되지 못한 상태였다. 고구려 관제라는 분야가 대표적으로 그에 해당한다.

종래의 관제 연구는 그 자체로 독립적인 영역이었다기보다는 각 시기별 정치체제나 권력형태 등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개별 연구자들의 시각을 보강하기 위한 방법으로 연구된 경향이 있었다. 그러다보니 고구려 각 시기별 관제의 구조나 개별 관명의 성격 등은 논의된 바 있지만, 전후 시기와 유기적으로 설명되지 못한 한계가 있었다. 즉, 각 시기 관제의 모습을 담은 ‘사진’은 찍었지만, 달라진 모습들의 원인이나 과정을 설명하는 데는 미진한 부분이 있었다. 본고에서는 그 부족한 부분을 메꾸고 그 과정에서 새롭게 해석될 수 있는 사실들에 대해 살피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고구려 관제의 발달과정

일반적으로 고구려 초기는 건국~3세기 중엽까지를 의미한다(논문에서는 구체적으로 관제의 운영이 확인되는 1세기 太祖王代를 시점으로 잡았다). 여기서는 당대의 핵심세력인 5部 가운데 왕실인 桂婁部가 구심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원동력을 찾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먼저 당대 고구려 관제의 구조와 운영양상을 파악하여, 활동범주와 승진계통이 각각 둘로 구분되었다고 보았다. 전자는 하부단위인 部와 상부단위인 國(고구려)으로, 후자는 군사와 행정(재정을 포함한)으로 구성된 重層的 구조였다고 이해하였다.

그러고 보니, 部라는 동일 단위를 근거로 하는 계루부가 어떻게 다른 部를 장악할 수 있었는지 궁금하였고 외래 관명이었던 主簿와 丞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들은 漢郡縣의 직명이었고, 漢四郡 중 하나였던 현도군은 고구려의 성장에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많은 군현의 관직명 가운데 저 둘을 수용한 배경에는 별도의 목적이 있었을 것이라 추측하였다. 그에 따라 주부는 당시 고구려 전반의 경제적 문제(조세의 수취, 전리품의 분배)를 책임질 목적으로 수용되었음을 지적하였고, 승은 지배세력인 大加의 자치력을 견제하기 위해 수용되었다고 보았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諸加들과 분담하였던 권력은 점차 고구려왕에게 집중되었고, 그는 5부의 제가를 초월하는 존재로 바뀌어갔다. 이에 따라 종래 그가 지녔던 계루부 내의 사적기반을 관리할 존재가 필요하게 되었고, 그 목적으로 설치된 것이 中畏大夫(中裏大夫)였다. 당시 고구려에는 왕과 대가의 사적기반을 관리하는 자들로서 그들이 自置했다는 사자, 조의, 선인이 있었다. 중외대부는 왕과의 개인적 관계(혈연, 측근)에 있는 자들만이 발탁되어 왕의 사자, 조의, 선인을 관리하였는데, 여기에는 대가에 의해 자치되지 않았던 4부의 독립적인 사자, 조의, 선인도 포함되어 계루부 왕실의 영향력 하에 점차 수렴되었을 것으로 생각했다.

초기 관제의 운영으로 인하여 독자적 기반을 유지하던 諸加는 수도를 중심으로 집주하게 되었다. 이들은 방위명 5부라는 행정 구획에 편제되어 중앙귀족으로 그 성격을 달리하게 됨으로서 그에 대응하는 관명들이 새롭게 등장하게 되었다. 고구려 관제의 특징으로서 이해되는 兄과 使者가 본격적으로 등장, 발전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이 무렵 처음 등장한 兄은 전후 자료를 살피면 皁衣와 계승관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형과 사자를 중심으로 고구려 관제가 발달해간 배경에는 제가를 비롯한 왕 이하의 지배층이 왕의 사자, 조의가 되어간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3세기 말, 4세기 후반(율령반포), 5세기 초반(평양천도)은 변화의 기점이 되었다. 이러한 현상들은 영토 확장에 따른 지배세력의 증가와 통치조직의 정비로 인한 것이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관명 그 자체는 더 이상 특정 직무를 내포하지 않고 소지자의 서열을 나타내는 기능에만 한정되고, 관직의 점진적 설치에 따라 직무가 분리되었다. 이 과정에서 당시 중국계 유이민이나 낙랑‧대방 지역민은 중원왕조의 행정체계를 고구려가 수용하는데 있어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고구려왕은 기존의 고구려 지배층에 비해 상대적으로 세력기반이 약한 이들을 별도로 관리하면서 자신의 지지세력으로 만들고자 하였는데, 그것이 중외대부를 확대 개편한 중리도독과 그의 府였다.

국가팽창을 일단락 한 고구려는 6세기 중엽 이후 한 번 더 변화를 겪는다. 당시 사료들에는 대대로를 중심으로 상위 5관을 소지한 자들이 국정운영의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였음을 전한다. 이 무렵 새로 등장한 위두대형은 상위 5관의 하한이면서 신분적으로나 관부조직상으로나 長에 취임할 자격을 가졌다. 또한 제1위로 기록된 대대로는 본래 3년을 임기로 하는 관직이며 1위관인 복수의 대로 소지자 가운데 국인의 동의를 얻어 선출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대대로의 부상에 따라 고구려왕은 다시 본인의 권력기반을 유지․확대하기 위한 장치로서 기존의 중리조직을 개편하였다. 막리지는 그 수장으로서 대대로와 내외의 권력을 나누었다. 이들은 기존의 관제조직과 구분되는 승진과정을 갖고 있었고, 왕의 가까이서 왕실사무를 담당했다는 점에서 왕과의 개인적 관계를 쌓아나갈 수 있었다.

 

소회

시간이 지나 다시 이 원고를 작성하면서 논문을 보니 그 때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 구멍이 난 부분들이 다시 보이는 듯하다. 학위논문은 대학원 생활의 마침표이기도 하지만 연구자로서 새로운 길을 열어나가는 출발선인 것 같이 느껴진다. 학위논문에서 해결하지 못했던 부분들은 향후에 꼭 보완해보겠다 다짐한다.

근래에 출판되는 연구들을 보면 비단 고구려 뿐만 아니라 백제, 신라에서도 관심을 갖고 계시는 선생님들이 노력하고 계심을 알 수 있다. 언젠가는 한국 고대 관제에 대한 전반적인 정리와 전망이 필요한 시점도 올 것으로 예상해 본다. 그 안에서 고구려 관제는 어떠한 의미를 갖고 있는가, 향후 고민을 이어나가야 할 최우선 과제가 아닐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