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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京城)을 말한다: 신문 연재물로 본 일제시기의 ‘경성’④] 견아착잡한 금일의 경성이 삼십년후에는 일대이상원_염복규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BoardLang.text_date 2022.01.05 BoardLang.text_hits 21,870
웹진 '역사랑' 2022년 1월(통권 25호)

[경성(京城)을 말한다: 신문 연재물로 본 일제시기의 ‘경성’] 

 

견아착잡한 금일의 경성이 삼십년후에는 일대이상원


<犬牙錯雜한 今日의 京城이 三十年後에는 一大理想園>, <<매일신보>>, 1926.4.12.~5.5.


 

염복규(서울시립대학교)


* 지난 연재 보기


 

1.

1926년 상반기 <<매일신보>>에는 공교롭게도 ‘30년 후의 경성’을 이야기하는 기사가 두 개 연재되었다. <三十年後의 大京城>(<<매일신보>>, 1926.1.10.~21.)과 <犬牙錯雜한 今日의 京城이 三十年後에는 一大理想園>(<<매일신보>>, 1926.4.12.~5.5)가 그것이다. 각각 12회, 21회로 짧지 않은 편이다. 30년은 보통 한 세대를 의미한다. 연재물의 제목은 한 세대가 지나면 경성은 이렇게 바뀔 것이라는 뜻일 텐데, 왜 하필 비슷한 취지의 연재물이 같은 해에 잇달아 실린 것일까?

내용을 보면 <30년후의 대경성>은 상대적으로 일반적인 내용인데 반해 <견아착잡한 금일의 경성이 30년후에는 일대 이상원>의 경우 연재의 전반부는 도시계획 조사 자료와 도시계획안이고 후반부는 <30년후의 대경성>과 비슷한 일반적인 내용이다. 이번에는 두 연재물 중 <견아착잡한 금일의 경성이 30년 후에는 일대 이상원>을 살펴보려고 한다. 먼저 각 기사의 부제와 내용을 간략하게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가독성을 위해 뜻을 해치지 않은 범위에서 한글로 고쳤다.)





[caption id="attachment_9370" align="aligncenter" width="1067"]* 원본 중간의 넘버링이 잘못되어 8회가 두 번 나온다. 그리하여 원본에서 연재는 20회로 끝나지만 실제로는 21회 연재이다. 여기에서는 임의로 8회, 8회-1로 하겠다.[/caption]

부제만 읽어보아도 대략 어떤 내용인지 알 수 있다. 서론 격인 1회에서는 조선의 도시는 경성 등 몇곳이 있으나 ‘개 이빨처럼 어지러운’(“犬牙錯雜”) 자연발생적 도시에 불과하다. 그런데 “금번 경성부 도시계획이 확정된 것은 실로 조선에서는 初始”라고 했다. 그리고 이 도시계획에서는 1. 구역 2. 지역․지구 3. 교통 및 운수 4. 구획정리 5. 위생보안 6. 건축 및 사회시설 7. 도시계획 재원 8. 부영 사업 9. 관계 법규 등을 다루었다고 했다. 연재물이 게재된 1926년 4월 현재 종합적인 경성 도시계획이 입안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후 연재에서 그 내용을 다룰 것임을 예고한다. 따라서 이 연재물의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1920년대 초 이른바 ‘경성 도시계획’이라는 화두가 제기된 배경, 그리고 그 전개 과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경성 도시계획’이라는 말이 처음 언론지상에 등장한 것은 1921년 2월이다. (<京城 都市計劃에 對하여>, <<매일신보>>, 1921.2.23.) 이 기사를 보면 “경성부청 내 모씨”의 언급을 빌어 외곽으로 확장을 전제한 도시계획의 대요를 이야기한다. 보통 경성 도시계획 논의의 주요 계기가 된 것으로 1919년 8월 새로운 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과 함께 정무총감 미즈노 렌타로(水野鍊太郎)가 부임한 것을 든다. 미즈노는 이미 일본에서 내무대신을 지낸 거물로서 1919년 일본 <도시계획법> 제정에서 역할을 했으며 내무성 관료의 내부 조직인 도시계획조사회를 이끈 인물이다. 정확하게는 알 수 없으나 그의 부임이 총독부나 경성부의 ‘도시계획파’ 토목 관료의 ‘열의’를 불러일으킨 것은 어느 정도 사실인 듯 하다. 그리고 민간의 움직임을 불러일으킨 점도 있다.

위 기사가 나간 지 석달쯤 뒤 경성부는 도시계획 조사를 위한 조사계를 신설했다. 그리고 1925년 8월 조사계는 임시도시계획계로 개편되었다. 조사에서 계획안 입안으로 가는 흐름이 읽힌다. 한편 1921년 8월에는 민간의 경성도시계획연구회라는 단체가 조직되었다. 경성도시계획연구회는 반관반민 단체이며 조선인과 일본인 유력자가 함께 참여한 단체이지만 일본인 ‘민간인’ 참여자가 주목된다. 창립 직전인 1921년 7월 민간인 발기인 대표 다카야마 다카유키(高山孝行), 다나카 한시로(田中半四郞), 사토 토라지로(佐藤虎次郞) 등 3명이 총독부를 방문하고 사업 계획을 설명했다. 3명 중 다카야마와 사토는 여러 사업에 관여한 인물이나 그 중 중요한 부분이 부동산 임대업이었다. 그리고 다나카의 경우 1910년대 田中組를 창업한 경성의 유력 토목업자였다. 몇년 뒤 사료에는 연구회의 지도부로 와타나베 테이이치로(渡邊定一郞)가 활동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도 대토목업자로서 경성상업회의소의 ‘토목파’를 대표하여 네 차례나 회두를 지낸 인물이었다. 이상과 같이 1920년대 초 경성 도시계획 논의의 출발점에서 식민지권력측의 토목 관료군과 민간 토목업계의 일종의 ‘성장연합’(growth-coalition)의 기동이라는 그림을 그려볼 수도 있겠다. (이런 점은 선행 연구에서 거의 주목하지 않은 바이며 앞으로 새로운 추구가 필요하다.)

 

2.

다시 연재물로 돌아오면 1회는 수년간의 도시계획 논의가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음을 보여준다. 실제 1926년에는 <<경성도시계획구역설정서>>라는 책자가 간행되었다. 이 책자의 서문을 보면 다루겠다고 한 항목이 1회 기사의 내용과 동일하다. 이런 점에서 <견아착잡한 금일의 경성이 30년후에는 일대 이상원>은 <<경성도시계획구역설정서>>의 내용을 보다 대중적으로 해설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각 회차의 내용은 위의 표와 같으므로 특기할 만한 부분을 살펴보자.

2회~4회의 내용은 경성 및 인접지역의 인구 증가 추세와 인구 밀도이다. 1925년 국세조사 인구를 기준으로 ‘30년 후’, 즉 1955년의 예상 인구를 추산했다. 이에 따르면 당시 행정구역상 경성부 내는 336,349명에서 474,409명으로 증가를 예상했다. (큰 의미는 없지만 1925년 당시 경성부 행정구역과 비슷한 종로구, 중구, 용산구의 실제 1955년 인구를 더하면 557,425명이다.) 그런데 33만여명에서 47만여명으로 인구가 증가하는 동안 조선인은 25만여명에서 33만여명으로 일본인은 8만5천여명에서 13여명으로 증가한다고 추산했다. 이 추세대로라면 30년간 경성 전체 인구에서 조선인의 비중이 3% 정도 낮아진 반면 일본인은 그만큼 증가한다. 도시화 추세에 따라 중심부의 지가가 상승하면서 조선인이 지속적으로 외곽화하기 때문이다. 3회에서는 “결국 경성의 조선인은 감소는 될지언정 증가는 계산으로 보아 불능할 것인 즉 인접면이 경성부에 편입하면 조선인의 발전할 곳은 이 지역”이라고 언급한다. 그렇다면 ‘조선인의 발전할 곳’은 어디인가? 바로 직업 구성 등 여러 측면에서 이제 경성부와 다름없게 된 인접 면리로서 고양군 연희면, 은평면, 한강면, 한지면, 시흥군 북면 등을 지목했다. 이것은 경성부 확장에 대한 최초의 구상안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경성도시계획설정서>>에는 이것을 표현한 그림이 실려있다.

[caption id="attachment_9371" align="aligncenter" width="567"]그림 1. <<경성도시계획구역설정서>>에 실린 경성부 편입 예상 지역[/caption]

그런데 이 그림에서 눈에 띄는 것은 경성부를 중심으로 원을 그린 점이다. 이는 교통 문제와 관련이 있다. 당시 도시계획‘구역’의 설정(대개 행정구역 확장)은 도시계획의 중심점을 정하고 이를 기준으로 도보 60분 거리를 제시했다. 대중교통의 절대량이 부족한, 그리하여 ‘도보’가 이동의 중심인 사정을 반영한다고 여겨진다. (물론 8회-1 기사를 보면 주택지의 교외 분산을 전제로 전차노선의 증설을 이야기한다.) 5회 기사에서는 경성 도시계획의 중심점으로 경성부 신청사(현재 서울도서관)를 설정하고 도보 60분 거리를 3,060間으로 보았다. 1간이 대략 1.8m이므로 5.5km 정도에 해당한다. (사료에 나오지는 않으나 경험적으로 보면 상당한 속보로 걸어야 한다.) 위 그림의 원이 바로 그것이다.

이어서 8회까지 기사에서는 편입 예상 면리까지 포함한 도로망의 초안을 제시하고 있다. 이는 <<경성도시계획설정서>>의 ‘대경성도시계획노선초안’과 일치하는데 노폭 별로 24간(1선, 광화문통; 현재 세종대로), 18간(1선; 남대문-경성역 구간), 15간(2선), 12간(37선), 10간(21선), 8간(34선), 6간(38선), 4간(123선), 3간(105선)의 9종류 도로 합계 360선, 총연장 204,465간(약 370km)의 방대한 규모였다. 이후 1937년 경성시가지계획의 개시에 이르기까지 일부 수정과 추가가 있었지만 이때의 도로망 초안은 이후에도 경성 도시계획 도로망의 기본적인 대강을 이루게 되며, 일부는 현재 서울 시가지 도로망의 ‘기원’이 된다고도 할 수 있다.

[caption id="attachment_9372" align="aligncenter" width="567"]그림 2. <<경성도시계획구역설정서>>에 실린 ‘경성도시계획노선초안도’[/caption]

9회~11회 기사는 용도지역제 구상이다. 인접 면리를 포함하여 전체 구역이 약 3배로 확장되니만큼 모든 용도지역이 확장되는데, 가장 눈에 띄는 점은 공업지역이 25만평에서 300만평으로 ‘대확장’되는 것이다. 새로운 공업지역의 후보지에 대해서는 “영등포 방면”이라고 했다. 이는 당연한 것일텐데, 약간 애매한 부분은 과거 영등포를 포함했던 시흥군 북면 일대는 편입 예상 지역인 반면 정작 당시 이미 공장지대로 발달하고 있던 영등포면은 편입 여부가 불투명한 점이다. 영등포는 그로부터 10년 뒤 실제 경성부 행정구역을 확장할 때 읍회 일각의 편입 반대 등으로 다소 논란이 있었던 지역이기도 이다. 1926년에도 다른 면과 달리 영등포 ‘지정면’은 경성부가 자의적으로 편입 예상을 하기 곤란한 점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1회까지가 <<경성도시계획구역설정서>>의 순서에 따른 도시계획 내용의 해설이라면 12회부터는 여기에서 벗어나는 보다 일반적인 ‘30년 후의 변화’에 대한 여러 예상이다. 그러나 경찰 제도의 개혁과 순사의 판임관화(12회)와 같이 도시계획과 별 상관없는 이야기도 있지만 도시계획에 따라 부설될 간선도로를 횡단하는 이면의 소도로 계획(13회)과 같은 이야기도 있다. 14회의 주제는 공원이다. 앞서 용도지역제 구상에서 도시계획을 완료하면 경성부 공원은 50만평에서 100만평으로 2배 확장된다. 여기에서 눈에 띄는 점은 종묘의 공원화 구상이다. <<경성도시계획구역설정서>>의 그림을 보면 도시계획 완료후 종묘가 ‘특별지역’(관공서 부지, 궁궐 등 이왕직 소관 부지)에서 분리되어 공원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종묘의 공원화 계획은 당시 총독부 경성토목출장소가 추진하던 이른바 ‘종묘관통선’ 부설과 연동되어 있다. 경성시구개수 제6호선인 종묘관통선은 광화문 네거리에서 출발하여 현재 대학로에 이르는 노선이다. 중간에 창덕궁과 종묘 사이를 ‘관통’해야 하는 구간이 있다. 경성토목출장소는 1920년대 초부터 이 노선 부설을 시도했으나 순종을 비롯한 구왕실측의 반발, 여론을 의식한 총독부 수뇌부의 주저 등 때문에 공사의 진척을 보지 못했다. 그러다가 순종이 사망한 후 공사를 본격적으로 추진할 수 있었다. 우연의 일치이겠지만 14회 기사는 순종이 사망한지(1926.4.25.) 4일 후에 게재되었다.

종묘의 공원화는 종묘관통선을 부설하여 궁궐과 종묘가 공간적으로 분리되는 것을 전제로 한 구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기사에서는 “그런즉 장차 신설할 공원은 종묘이다. 종묘로 말하면 현금 불경의 염려가 있어 임의 출입을 금하는 터이나 그 실로 말하면 衆人이 그 안에 들어가서 拜觀을 자주할수록 숭경하는 심도가 더할 터”라고 했다. ‘배관을 자주할수록 숭경하는 심도가 더할’ 것이라는 말은 핑계에 불과하겠지만 여하튼 공원화의 뜻은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구왕조의 상징성이 큰 종묘를 공원화하는 것은 식민지권력으로서는 부담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수년간의 공사를 거쳐 종묘관통선은 준공했지만, 종묘는 결국 8.15 때까지도 공원으로 개방되지 못했다.

[caption id="attachment_9373" align="aligncenter" width="567"]그림 3. <<경성도시계획구역설정서>>의 ‘경성도시계획지역예정도’에서 종묘가 궁궐에서 분리되어 공원으로 설정되어 있는 모습과 ‘종묘관통선’ 부설 예정도(<<매일신보>>, 1927.1.10.)[/caption]

15회 기사는 도로 청소 문제이다. 부제에서 볼 수 있듯이 인공강우 수준으로 철저하게 도로에 살수를 하고 ‘기름걸레’를 부착한 차량으로 청소를 한다는 그야말로 당시 수준에서는 ‘공상적인’ 내용이다. 이 시기 시가지 도로의 상당한 부분은 비포장이었으므로 도로 살수는 중요한 문제였다. 사료를 찾아보면 1910년대부터 경성 뿐 아니라 지방도시에서도 도로 살수를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살수 수레’, ‘살수 인부’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대개 작업의 기본적인 방식은 인력을 동원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기사에서는 “휘발유로 발동하는 강력 가솔린 펌프로 아직 인마가 왕래하지 않는 이른 아침”에 살수를 할 것이라고 언급한다. 1926년 현재 살수 자동차가 조선에 도입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아마 도입되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1930년대에는 실제 도입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제말기 국책선전영화의 ‘수작’으로 꼽히는 <<수업료>>(1940)를 공동 연출한 방한준의 감독 데뷔작이 1935년 영화 <<살수차>>이다. 현재 영화의 필름이 남아있지 않아 볼 수는 없지만 주인공의 직업이 살수차 ‘운전수’로 설정되어 있다.

16회 기사는 소방 문제이다. 내용의 요지는 점차 의용소방조직인 소방조를 축소하고 경성 같은 대도시의 소방은 “상비소방서가 전담”하도록 개선하겠다는 것이다. 한국의 근대 소방은 기본적으로 개항장의 자치조직인 일본인 소방조로 출발했다. 경성에도 경성소방조와 용산소방조가 조직되었다. 그런데 소방조는 일본 본토에서는 정당정치의 활성화와 더불어 선거운동에 동원되는 등 여러 가지 말썽이 있었던 듯하다. 조선의 경우도 본토만큼은 아니지만 소방조가 소방조두의 사조직화하여 물의를 빚는 일이 적지 않았다. 따라서 총독부의 기본적인 방침은 차츰 소방을 경찰조직의 일부로 흡수하고 의용소방조를 그 통제 아래 두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조선에서 최초의 상설소방서인 경성소방서가 경기도 경찰부 산하에 설치된 것이 1925년 4월이다. 이후 오랫 동안 예산문제로 소방서는 증설되지 못하다가 1944, 45년 용산소방서와 성동소방서가 각각 증설되었다.

[caption id="attachment_9374" align="aligncenter" width="567"]그림 4. 일제하 태평로의 경성소방서 청사(<<조선소방>>, 1937년 11월호)와 그 후신인 1960년대 서울중부소방서, 8층의 망루로 유명한 이 건물은 1970년대 태평로 확장 공사로 철거되었다.[/caption]

17회~19회 기사에서는 각각 상수도 증설, 풍기 숙정을 위한 유곽·권번의 교외 이전, 우편 비행의 신설 등 체신 개선 문제를 다루고 있다. 마지막 20회는 결론이다. 특별한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아니며 이런 컨셉의 논설에서 흔히 언급하는 조선인은 경제사상을 좀 더 가져야 하며 그래야 발전이 있다는 내용이다. 요컨대 ‘민도 향상’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재미있는 점은 조선인에 대비되는 존재로 ‘지나인’을 든 것이다. “(경성의) “지나인의 경제계는 거익 윤택하게 된다. 그 원인은 그네들이 타인의 평은 여하하든지 지극한 절약과 堅勇한 활동을 시종 여일히 지속”하기 때문이다. 이에 조선인도 정신을 차리고 “30년후 경성의 황금무대에 대한 작전계획을” 세워야 한다고 맺고 있다.

 

3.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견아착잡한 금일의 경성이 30년후에는 일대 이상원> 연재물은 같은 해 간행된 <<경성도시계획구역설정서>>의 내용을 해설하고 약간의 추가적인 내용을 덧붙히고 있다. 그런데 사실 <<경성도시계획구역설정서>>는 서지적 맥락이 애매한 사료이다. 12회 기사의 “경성부에서 발표한 30년후의 대경성 구역과 지역 설정은 昨紙(11회 기사까지를 의미)까지 대개를 기술”했다는 표현으로 보아 그 저본인 <<경성도시계획구역설정서>>의 간행 주체는 경성부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실제 책자에는 전혀 판권 관련 사항이 표시되어 있지 않다. 그리고 이 책자는 현재 국회도서관과 연세대 학술정보원 두 곳에만 소장되어 있다. 두 소장본 모두 8.15 이후 수집본으로 추정된다. 즉 1926년에 간행되었지만 당대에 정식으로 도서관에 납본되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이런 점으로 보아 <<경성도시계획구역설정서>>는 그 때까지의 도시계획 조사를 정리하여 비공식적으로 간행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를 보완하여 2년 뒤 정식으로 간행한 것이 오래 전부터 최초의 경성도시계획안으로 잘 알려진 <<경성도시계획조사서>>(1928)가 아닌가 한다. 그보다 더 중요한 점은 비록 <<경성도시계획구역설정서>>에 담긴 조사의 실무를 경성부가 담당했다고 하더라도 경성부의 범위를 넘어서는 도시계획을 경성부가 독단적으로 입안할 수는 없으며 또 책자의 인구 증가 추세 추산 등 전문적인 내용을 경성부 관리가 작성했으리라고 믿기 어려운 점이다. 과연 1920년대 초 경성부의 도시계획 조사와 일단락, 도시계획의 초안 작성 등은 누구의 손에 의해 어떤 과정을 거쳐서 이루어졌을까? 여전히 남아있는 의문은 적지 않다.

참고문헌

京城府, 1926, <<京城都市計劃區域設定書>>
京城府, 1928, <<京城都市計劃調査書>>
김상욱, 2021, <<한국 근대 소방관의 탄생>>, 민속원
김상은, 2017, <일제하 도시청소행정의 전개와 변화>, 서울시립대학교 석사학위논문
염복규, 2010, <식민지권력의 도시 개발과 전통적 상징공간의 훼손을 둘러싼 갈등의 양상 및 의미>, <<동방학지>> 152
염복규, 2012, <일제하 경성지역 소방기구의 변화과정과 활동양상>, <<서울학연구>> 49
염복규, 2016, <<서울의 기원 경성의 탄생>> 이데아